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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크랜튼 (Mary Scranton)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하여 한국 여성 교육의 문을 열었습니다.

한국 여성 교육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 이화학당의 작은 씨앗, 세계적인 나무가 되다
서론: 이름 없이 살아가던 여인들의 땅
19세기 말 조선, 여성의 삶은 '안채'라는 보이지 않는 담장 안에 갇혀 있었다. 이름 대신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 불렸고, 교육은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여자가 글을 배우면 집안이 망한다"는 편견이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 한 50대의 미국인 여성이 이 땅에 도착하여 이 수백 년 된 편견의 벽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녀의 이름은 메리 스크랜튼.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이자, 오늘날 세계 최대의 여자 대학교로 성장한 이화여자대학교의 씨앗을 심은 위대한 교육가였다.
그녀는 젊은 모험가가 아니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의사 선교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을 따라 52세라는 늦은 나이에 낯선 땅 조선을 밟은 조용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억압받는 조선 여성들을 향한 깊은 연민과 그들을 교육을 통해 해방시키고자 하는 불타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녀의 사역은 단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아무도 딸을 학교에 보내려 하지 않아 1년 가까이 텅 비어 있던 교실에서, 그녀는 마침내 만난 첫 학생을 온 마음으로 품었다. 이 작은 시작이 바로 '이화학당'의 탄생이었고, 한국 여성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거대한 강물의 첫 발원이었다. 본 글은 이처럼 조용하지만 강인한 사랑으로 한국 여성 교육의 문을 연 메리 스크랜튼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녀가 늦은 나이에 어떻게 선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수많은 편견과 어려움 속에서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키워나간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을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심은 작은 씨앗이 어떻게 한국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숲이 되었는지 그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쉰 살의 새로운 시작, 조선을 향한 발걸음
메리 스크랜튼의 선교사로서의 삶은, 아들을 통해 주어진 예기치 않은 부르심에 대한 순종으로 시작되었다.
아들을 따라 나선 길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나 독실한 감리교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메리 스크랜튼은 남편과 사별한 후, 평범하고 조용한 노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삶의 방향이 바뀐 것은 외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튼이 예일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감리교 의료 선교사로 임명되면서부터였다.
미국 감리교 해외여선교회(WFMS)는 의사인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가, 아직 아무도 시작하지 않은 '여성을 위한 사역'을 개척해 줄 것을 메리 스크랜튼에게 요청했다. 52세의 나이에, 모든 익숙한 것을 뒤로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결단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이고, 1885년 6월 아들 부부와 함께 제물포 항에 도착했다.
닫힌 문 안의 여성들
서울에 도착한 그녀가 마주한 조선 여성들의 현실은 참담했다. 양반 가문의 여성들은 '내외법'에 따라 집안 깊숙한 곳에 갇혀 지냈고, 가난한 여성들은 고된 노동과 가난에 시달렸다. 남성들의 부속물처럼 여겨졌던 그들에게는 교육의 기회는 물론,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가질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스크랜튼은 이 여성들의 영혼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가 '교육'임을 확신했다.
본론 2: 이화학당의 탄생 - 단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기적
1886년, 스크랜튼은 정동에 있는 자신의 집 옆에 교실로 쓸 작은 한옥 한 채를 마련했다. 그러나 학교의 문은 열렸지만, 학생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던 학교
"계집애에게 글을 가르쳐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서양 귀신들이 아이들을 잡아다가 간을 빼먹고 눈을 파서 약으로 쓴다더라." 흉흉한 소문과 깊은 편견 속에서, 어느 부모도 자신의 딸을 낯선 서양 여인의 학교에 보내려 하지 않았다. 학교 건물은 거의 1년 가까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침내 1886년 5월, 첫 학생이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 학생은 명문가의 딸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관의 소실(첩)이었던 김씨 부인이 데려온, 자신의 딸이 아닌 남편의 또 다른 소실의 딸이었다. 김씨 부인은 아이가 장차 자신과 같은 천한 길을 걷게 될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 희망으로 스크랜튼의 학교를 찾아온 것이었다. 스크랜튼은 이 이름 없는 소녀를 온 마음으로 끌어안았다. 곧이어, 가난 때문에 딸을 단돈 1달러에 팔러 온 한 어머니로부터 두 번째 학생을 맞이했다. 이화학당의 시작은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버려지고 소외된 소녀들과 함께였다.
명성황후가 내린 이름, '이화(梨花)'
스크랜튼의 헌신적인 노력은 곧 왕실에까지 알려졌다. 1887년,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는 스크랜튼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학교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공식 교명을 하사했다. '이화(梨花)'는 당시 정동에 배꽃이 만발했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왕실이 하사한 이 이름은 기적을 일으켰다. '이화학당'이라는 공식 현판이 걸리자, 서양인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과 편견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더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딸을 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 왕실의 인정은 이 작은 여학교의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본론 3: 담장을 넘어선 사랑과 헌신
메리 스크랜튼에게 이화학당은 단순한 지식 전달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상처 입은 영혼들이 치유받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며, 새로운 꿈을 꾸는 '가정'이었다.
학생들의 어머니
스크랜튼은 학생들의 '교장 선생님'이자 '어머니'였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읽고 쓰는 법과 성경뿐만 아니라, 위생과 가사,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쳤다. 그녀는 학생 한 명 한 명을 인격적으로 대하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일깨워주었다.
그녀가 세운 학교는 단순한 지식인을 넘어, '신앙 안에서 훈련된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는 요람이었다. 이화학당 출신의 졸업생들은 이후 한국 사회의 교사, 의사, 목회자 사모,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어둠 속에 있던 한국 여성을 깨우고 민족을 이끄는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여성을 위한 사역의 개척자
그녀의 사역은 학교 담장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여성들만을 위한 예배 공동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 교회인 '볼드윈 예배당(Baldwin Chapel)'을 설립했다. 이곳은 여성들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찬송하고 기도하며, 신앙 안에서 교제할 수 있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또한 그녀는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이 세운 시병원(施病院, 여성 전문 병원)의 운영을 도우며, 의료를 통해 여성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성을 위한 사역은 여성이 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로제타 셔우드 홀과 같은 후배 여성 의료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결론: 작은 씨앗, 위대한 숲을 이루다
메리 스크랜튼은 1909년, 77세의 나이로 자신이 평생을 사랑했던 땅 한국에서 눈을 감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그녀는 24년간의 사역을 통해, 한국 여성들의 운명을 바꾸고 한국 사회의 미래를 바꾸는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았다.
그녀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오늘날 세계 최대의 여자 대학교로 우뚝 선 이화여자대학교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녀가 단 한 명의 이름 없는 소녀와 함께 시작했던 작은 학교는, 지난 130여 년간 수십만 명의 여성 인재를 배출하며 한국 사회 발전의 핵심적인 동력이 되었다. 이화의 졸업생들은 교육, 의료, 법률, 정치, 예술 등 사회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과 사회 변혁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그녀의 진짜 유산은 거대한 대학 건물이나 기관에 있지 않다. 그녀의 진짜 유산은 "여성도 교육받을 수 있다, 여성도 존엄하다, 여성도 민족과 교회의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 그 자체이다. 그녀는 조용한 사랑과 끈질긴 헌신으로, 이 땅의 딸들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를 선물했다. 52세의 나이에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한 여인의 믿음의 도전이, 한 민족 전체의 여성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