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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명나라 시대 중국에 천주교를 전파한 예수회 선교사로, 서양의 과학과 문물을 소개하며 적응주의 선교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서양의 현자, 동양의 선비가 되다: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
서론: 유학자의 옷을 입은 선교사
16세기 말 명나라의 조정, 비단 도포를 입고 유학자의 관을 쓴 한 서양인이 유창한 한문으로 중국의 사대부들과 천문과 지리, 철학을 논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중국 이름으로는 이마두(利瑪竇). 그는 십자가를 앞세워 이교도를 정복하려던 당시의 많은 선교사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중국의 문화를 파괴하거나 정복하는 대신, 그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 최고의 존중을 표하며, 스스로가 '서양에서 온 유학자(西儒)'가 되기를 자처했다.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 선교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독창적인 전략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총칼이나 교리 논쟁이 아닌, 서양의 과학과 지식이라는 '선물'을 통해 닫혀 있던 중국 지식인 사회의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라는 세계 지도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 거대한 충격을 던졌고, 그가 가져온 자명종과 프리즘은 황제의 호기심을 사로잡았다.

그의 선교 방식은 '적응주의(Accommodation)' 또는 '보완적 복음 제시'로 요약된다. 그는 기독교가 중국의 고유한 유교 전통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가 추구했던 고대의 진리를 완성하고 보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 글은 이처럼 비범한 '학자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미지의 땅 중국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과학과 지식을 매개로 한 그의 독창적인 '상향식(top-down)' 선교 전략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사역이 훗날 '전례 논쟁'이라는 거대한 논란의 씨앗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서 문명 교류사에 남긴 위대한 유산이 무엇인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예수회 학자, 미지의 땅 중국을 향하다
마테오 리치의 사역은 학문적 탁월함과 선교적 열정을 동시에 강조했던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정신을 완벽하게 구현한 것이었다.

학문과 신앙의 준비
155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리치는 로마에서 법학과 신학, 그리고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한 르네상스적 인재였다.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여, 동방 선교의 위대한 개척자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뒤를 이어 중국 선교의 꿈을 키웠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중국은, 하비에르가 문턱에서 좌절했던, 반드시 복음화해야 할 지상의 가장 위대하고 도전적인 목표였다.

1582년, 그는 마침내 중국 선교의 전초기지였던 포르투갈령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중국 본토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첫 번째 과업은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어렵다는 중국어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놀라운 언어적 재능과 끈기로, 단기간에 중국어를 읽고 쓸 뿐만 아니라, 사서삼경과 같은 유교 경전을 원전으로 탐독하고 토론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승복(僧服)에서 유복(儒服)으로
1583년, 마침내 중국 본토에 들어갈 허가를 얻은 리치는 처음에 불교 승려의 복장을 했다. 당시 그들은 종교인은 모두 승려일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는 곧 명나라 사회에서 승려가 지식인 계층인 사대부(士大夫)로부터 그리 존경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과감하게 전략을 수정했다. 그는 승복을 벗어 던지고, 당시 사회의 지배 계급이었던 유학자들의 옷, 즉 비단 도포를 입고 머리와 수염을 길렀다. 그는 자신을 서양에서 온 '덕이 높은 선비'로 소개했다. 이 전략적 변신은 대성공이었다. 그의 해박한 한문 실력과 유학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예의 바른 태도는 중국의 관리와 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들의 경계심을 허물고 지적인 친구로 받아들여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본론 2: 천상의 과학과 지상의 지도 - 마음을 여는 전략
중국 사대부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리치는, 곧바로 복음을 전하는 대신 그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의 선교는 '상향식(Top-down)' 접근, 즉 사회의 상층 엘리트 계급을 먼저 설득하면, 그 영향력이 아래로 흘러내려갈 것이라는 전략에 기초했다.

'곤여만국전도', 세계관을 뒤흔들다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이었다. 그중에서도 1602년 그가 제작한 거대한 목판본 세계 지도,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는 중국 지성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당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중화(中華)', 즉 세계의 중심이자 대부분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리치의 지도는 중국이 수많은 나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이는 중국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치는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배려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는 지도 제작 시 중국을 지도의 정중앙에 배치했다. 이 지도를 통해 리치는 자신이 단순한 이방인이 아니라, 천문과 지리에 통달한 위대한 학자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그는 또한 유클리드 기하학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소개했고, 스스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자명종, 빛을 분해하는 프리즘, 천문 관측기구 아스트롤라베 등 서양의 신기한 발명품들을 선보이며 황제와 관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천주실의』, 유학의 옷을 입은 신학
과학과 우정을 통해 중국 지식인들의 마음의 문을 연 리치는, 마침내 자신의 본래 목적인 기독교 신학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우론(交友論)』과 같은 유교적 윤리에 대한 책을 먼저 써서 유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은 뒤, 그의 주저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불교나 도교가 아닌, 중국의 가장 오래된 고대 경전인 시경과 서경에 등장하는 우주의 유일한 최고신, '상제(上帝)'와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는 기독교가 불교처럼 외부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중국인들이 잊고 있던 고대 유학의 본래적인 신앙을 회복하고 완성시키는 가르침이라고 논증했다. 즉, 복음을 '대체'가 아닌 '보완'의 개념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책은 훗날 조선의 실학자들에게까지 전해져, 한국 천주교 신앙이 자생적으로 싹트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본론 3: 북경 입성과 '전례 논쟁'의 씨앗
마테오 리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명나라의 수도, 북경(北京)에 들어가 황제를 직접 만나는 것이었다. 20년에 가까운 끈질긴 노력 끝에, 그는 마침내 1601년 만력제(萬曆帝)의 허가를 받아 북경에 정주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황제를 직접 알현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황궁의 학자이자 기술 고문으로서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조상 제사와 공자 숭배에 대한 관용
북경에서 교회를 세우고 사대부 계층의 개종자들을 얻게 되면서, 리치는 매우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다. 바로 중국인들의 삶의 근간이었던 '조상 제사'와 '공자 숭배 의식'을 기독교 신앙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였다.

리치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관용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수년간의 깊은 연구 끝에, 중국인들의 조상 제사는 죽은 조상을 신으로 숭배하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효(孝)를 표현하는 '사회적' 풍습이라고 결론 내렸다. 또한 공자를 모시는 의식 역시, 위대한 스승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시민적' 의례일 뿐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중국인 개종자들이 이러한 전통적인 의례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러한 그의 '적응주의' 정책은 기독교가 중국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관용적인 태도는 훗날 가톨릭 교회 내에서 엄청난 논쟁, 즉 **'전례 논쟁(Chinese Rites controversy)'**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그의 사후,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리치의 방식이 이교적 미신과의 타협이자 우상숭배를 용납하는 것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고, 이 논쟁은 100년 넘게 이어지다가 결국 교황청이 중국의 전례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 결정은 청나라 황제의 분노를 사, 결국 중국 내에서의 가톨릭 선교가 거의 금지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결론: 두 문명의 위대한 다리
1610년, 마테오 리치는 57세의 나이로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땅, 북경에서 눈을 감았다. 만력제는 한 외국인에게 이례적으로 북경 성내에 묘지를 하사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마테오 리치의 유산은 양면적이다. 그의 '적응주의' 선교 방식은 중국의 문을 여는 데 놀랍도록 성공적이었지만, 동시에 훗날 교회의 분열과 선교의 좌절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역사적 위대함은 결코 퇴색될 수 없다.
첫째, 그는 동서 문명 교류의 위대한 다리를 놓았다. 그는 서양에 유클리드 기하학과 천문학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공자의 사상을 유럽에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소개했다. 그는 서양이 중국을, 중국이 서양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이해하게 만든 창이었다.

둘째, 그는 '문화에 대한 존중'이라는 선교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타문화를 정복하거나 파괴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 안에서 복음의 씨앗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을 발견하고자 했던 진정한 문화 인류학자였다.

마테오 리치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었다"는 사도 바울의 정신을 가장 지적인 방식으로 실천한 선교사였다. 그는 학자들을 얻기 위해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되었고, 중국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기꺼이 중국인이 되었다. 그의 방법론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논쟁을 낳고 있지만, 다른 문명을 이해하고 존중하려 했던 그의 겸손한 자세와 지적인 열정은, 시대를 넘어 모든 문화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에게 영원한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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