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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 (Mother Teresa)
인도의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하고, 가장 낮은 자들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빈민가의 성녀, 마더 테레사: 가장 작은 자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다
서론: "작은 일을 위대한 사랑으로"
인도 콜카타(Kolkata)의 혼잡하고 악취 나는 거리, 한 사람이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그 곁을 지나칠 때, 흰색 바탕에 푸른 세 줄이 그려진 소박한 사리(Sari)를 입은 한 작은 체구의 여인이 걸음을 멈춘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그를 부축하고, 그의 더러운 몸을 닦아주며, 마지막 순간을 홀로 외롭게 맞이하지 않도록 그의 손을 잡아준다. 이 모습이야말로 20세기 인류의 양심을 뒤흔든 마더 테레사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한 폭의 그림이다.
마더 테레사는 위대한 신학자나 웅변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복잡한 교리를 설파하지 않았다. 그녀의 설교는 행동이었고, 그녀의 신학은 실천이었다. "작은 일을 위대한 사랑으로 행하라(Do small things with great love)"는 그녀의 유명한 말처럼,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일, 즉 죽어가는 이를 씻기고, 버려진 아이를 안아주고, 나병 환자의 상처를 돌보는 일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을 증거했다.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세계적인 존경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녀의 삶은 동시에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녀가 운영한 시설의 의료 수준, 막대한 후원금의 사용처, 그리고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 등은 끊임없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무엇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공개된 그녀의 편지들은, 그녀가 거의 50년 동안 하나님이 부재하는 듯한 깊은 영적 어둠 속에서 고통받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드러냈다.
본 글은 이처럼 빛과 그림자를 함께 지닌 '빈민가의 성녀' 마더 테레사의 삶과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안락한 수녀원 교사에서 빈민가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한 그녀의 '부르심 속의 부르심'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녀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의 활동과 그 이면에 담긴 신학적 동기를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둘러싼 논란과 그녀가 겪었던 영적 고뇌가 그녀의 유산을 어떻게 더 깊고 복합적인 것으로 만드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수녀원 담장을 넘어, 빈민가로 향한 부르심
마더 테레사의 사역은 안정되고 존경받던 기존의 삶을 완전히 버리는 급진적인 결단에서 시작되었다.
수녀 아녜저에서 테레사로
마더 테레사는 1910년, 당시 오스만 제국에 속했던 스코페(현재 북마케도니아의 수도)에서 알바니아계 가톨릭 신자 가정의 딸,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로 태어났다. 그녀는 18세에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하여 '테레사'라는 수도명을 받았고, 1929년 인도의 콜카타로 파견되었다.
이후 약 20년간, 그녀는 콜카타의 로레토 수녀원에서 지리학을 가르치는 교사이자 교장으로 평온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유복한 가정의 소녀들을 가르치며 존경받는 교육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녀의 삶은 높은 수녀원 담장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부르심 속의 부르심"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은 1946년 9월 10일, 연례 피정을 위해 다르질링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곳에서 "수녀원을 떠나, 빈민가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 있는 나를 섬기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강렬하게 들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그녀의 삶을 뒤흔든 '부르심 속의 부르심(a call within a call)'이었다.
이 부르심에 순종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수녀원을 떠나는 것은 교회를 떠나는 것과 같은 중대한 불순종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녀는 2년 가까이 장상들과 교황청을 끈질기게 설득해야 했다. 마침내 1948년, 교황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로레토 수녀회의 검은 수녀복을 벗고,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여성들이 입는 값싼 푸른 줄무늬의 흰색 사리로 갈아입었다. 손에 단돈 5루피만을 쥔 채, 그녀는 20년간 살아온 안락한 수녀원의 문을 열고 홀로 콜카타의 빈민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본론 2: "가장 작은 자 안의 그리스도" - 사랑의 선교회
빈민가에서의 그녀의 첫 사역은 소박했다. 그녀는 땅바닥에 글씨를 가르치는 노천 학교를 열었고, 집집을 방문하며 아픈 이들을 돌보았다. 그녀의 헌신에 감동한 옛 제자들이 하나둘씩 그녀의 사역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니르말 흐리다이: 존엄한 죽음을 위한 집
그녀의 사역의 상징이 된 '니르말 흐리다이(Nirmal Hriday)', 즉 '깨끗한 마음의 집'은 한 여인의 비참한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쥐와 벌레들에게 반쯤 몸이 파먹힌 채 죽어가고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한 테레사는,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병원은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여인은 길 위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았다.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은 테레사는 "다시는 내 도시에서 그 누구도 동물처럼 혼자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시 당국을 설득하여 힌두교 순례자들을 위해 버려졌던 한 건물을 얻었고, 그곳을 '임종의 집'으로 만들었다. 이곳은 병을 치료하는 병원이 아니었다. 이곳은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길 위에서 죽어가던 이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고, 따뜻한 사랑과 돌봄 속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돕는 곳이었다.
사랑의 선교회와 사역의 확장
1950년, 교황청은 마침내 테레사와 그녀의 동료들을 새로운 수도회,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로 공식 인가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청빈, 정결, 순명이라는 세 가지 서원 외에, "가장 가난한 이들을 온 마음을 다해 무료로 섬긴다"는 네 번째 서원을 했다.
'사랑의 선교회'의 사역은 곧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버려진 아기들을 위한 '시슈 브하반(아이들의 집)', 나병 환자들을 위한 마을,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등, 그들의 손길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고 소외된 모든 이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 모든 사역의 중심에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다. 마더 테레사에게, 굶주린 아이, 죽어가는 노인, 버림받은 나병 환자는 더 이상 그냥 불쌍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변장한 그리스도(Christ in distressing disguise)"였다. 그녀가 그들의 상처를 닦아줄 때, 그녀는 예수님의 상처를 닦고 있었던 것이다.
본론 3: 영광의 이면 - 어두운 밤과 논란
마더 테레사가 '살아있는 성녀'로 전 세계적인 추앙을 받는 동안에도, 그녀의 사역에 대한 비판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내면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깊은 어둠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50년간의 '영적 어둠'
2007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 그녀가 영적 지도자들에게 보냈던 사적인 편지들이 공개되면서 세상은 큰 충격에 빠졌다. 편지 속에서 그녀는 콜카타의 빈민가로 들어간 직후부터 죽을 때까지, 거의 50년 동안 하나님이 부재하는 듯한 깊은 '영혼의 어두운 밤(dark night of the soul)'을 겪었다고 고백했다.
"내 안에는 어둠과 차가움, 그리고 공허함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내 생각을 들어 올리면, 텅 비어 있음이 나를 덮칩니다... 하나님이 나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끔찍한 고통을 느낍니다."
이 고백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한다. 그녀의 모든 헌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풍성하게 느끼는 기쁨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것 같은 영적 고통 속에서, 오직 순수한 '믿음의 의지' 하나만으로 그 모든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섬기던 가장 가난한 이들이 느끼는 버림받음과 외로움을, 자신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동일하게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논란의 중심에서
그녀의 사역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비판가들은 '사랑의 선교회'가 운영하는 시설의 비위생적인 환경과 부족한 의료 수준(진통제 사용 억제, 주삿바늘 재사용 등)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우리는 병원이 아니라, 아름답게 죽을 수 있도록 돕는 집"이라고 응수했다. 또한, 그녀의 단체가 받은 막대한 후원금의 행방이 투명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녀는 낙태와 산아제한에 대한 확고한 반대 입장을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까지 밝히며, 서구 자유주의 진영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들은 그녀가 흠 없는 완벽한 성인이 아니라, 자신의 시대와 신념 안에 있는 한계와 모순을 지닌 한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결론: 행동으로 쓴 복음
마더 테레사는 1997년 9월 5일, 87세의 나이로 자신이 평생을 섬겼던 도시 콜카타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장례식은 인도 국장(國葬)으로 치러졌으며, 전 세계의 지도자들과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그녀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그녀의 유산은 그녀가 세운 병원이나 고아원의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녀의 진정한 유산은, 사랑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굶주린 이에게 주는 빵 한 조각, 외로운 이의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체온, 죽어가는 이의 상처를 닦아주는 구체적인 '행동'임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그녀를 둘러싼 논란과 그녀가 겪었던 깊은 영적 고뇌는 그녀의 성인적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헌신을 더욱 위대하고 숭고하게 만든다. 그녀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가장 작은 자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믿음은 감정이 아닌, 결단이었다.
마더 테레사는 신학 책을 거의 쓰지 않았지만, 그녀의 삶 자체가 한 권의 위대한 복음서였다. 복잡한 이념과 논쟁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녀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가장 단순하고 불편하며 근본적인 진리, 즉 "우리는 고통받는 이웃의 일그러진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