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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 Dei, 삼위일체와 선교, 하나님 나라와 선교의 관계

선교학 개론

선교학 개론: 하나님의 선교, 삼위일체, 그리고 하나님 나라

서론: 선교 패러다임의 전환과 신학적 기초
현대 선교학의 문을 열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선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선교는 "교회의 선교란 무엇인가?" 혹은 "우리는 어떻게 선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의해 주도되어 왔습니다. 이 질문들은 교회를 선교의 주체로, 인간의 전략과 활동을 선교의 핵심 동력으로 상정합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신학계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는 혁명적인 통찰에 도달했습니다. 선교에 대한 올바른 질문은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질문의 전환은 단순히 용어의 변경이 아니라, 선교의 주체, 동력, 그리고 궁극적 목표에 대한 이해를 송두리째 바꾸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며, 현대 선교학의 진정한 출발점이 됩니다.   

이러한 신학적 전환은 20세기 초중반 기독교 세계가 마주한 깊은 위기감 속에서 잉태되었습니다. 19세기는 흔히 선교의 '위대한 세기'로 불리지만, 그 이면에는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과 맞물린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했습니다. 서구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는 종종 문화적 우월주의와 결합하여 피선교지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기보다는 서구의 제도와 문화를 이식하는 '교회 확장주의'(Missio Ecclesiae)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개인의 회심과 구령(救靈)을 최우선으로 삼고, 지리적 경계를 넘어 교세를 확장하는 것이 선교의 주된 목표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바로 그 '기독교 문명'의 심장부에서 발발했습니다. 이 비극은 서구 기독교가 지녔던 신학적, 문화적 낙관주의를 산산조각 냈고, 식민주의 시대의 종언과 함께 과거 선교 방식에 대한 깊은 죄책감과 성찰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선교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는 개인 구원과 교세 확장을 넘어서는 새로운 선교 이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공백과 실천적 위기 속에서 대안으로 부상한 개념이 바로 '하나님의 선교', 즉 Missio Dei입니다. 이 라틴어 용어는 선교의 주도권이 인간이나 교회가 아닌, 창세 전부터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혁명적 개념입니다. 선교는 교회가 수행하는 여러 사역 중 하나가 아니라, '보내시는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며, 교회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선교의 중심이 교회에서 하나님으로, 그 무대가 교회 안에서 세상 전체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본 강의안은 현대 선교신학을 떠받치는 세 가지 핵심 기둥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첫째, 선교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의미, 그리고 오늘날의 논쟁을 심도 있게 다룰 것입니다. 둘째, 선교의 근원적 동력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관계와 경륜적 사역이 어떻게 선교의 존재론적 기초가 되는지를 분석할 것입니다. 셋째, 선교의 궁극적 목표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확장이 선교의 방향성과 목적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고찰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주제—선교의 주체, 동력, 목표—를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우리는 파편화된 선교 이해를 극복하고 성경적이면서도 통합적인 선교신학의 견고한 기초를 정립하고자 합니다.

본론
제1부: 선교의 주체 -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1.1. Missio Dei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태동
Missio Dei 개념의 등장은 20세기 중반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신학적 지층 위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학문적 유행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과 신학적 반성의 필연적 귀결이었습니다.

시대적 배경: 반성과 전환의 요구
19세기 선교 운동은 놀라운 양적 성장을 이루었으나, 그 동력은 서구의 정치적, 경제적 팽창과 분리하기 어려웠습니다.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이라는 기치 아래, 기독교 복음은 종종 서구 문화와 동일시되었고, 선교는 피선교지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하는 문화적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교회 중심적, 서구 중심적 선교 모델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을 자부하던 유럽이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전쟁터로 변모한 현실은 서구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에 깊은 상처와 회의를 남겼습니다. 더불어 전후 식민지들이 독립하면서 과거 제국주의와 결탁했던 선교 방식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고, 서구 교회는 깊은 죄책감 속에서 보다 적극적인 선교를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과거와 같은 공간적, 양적 교세 확장 중심의 선교를 넘어, 선교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신학적 재검토를 요구했습니다.   

1952년 빌링겐(Willingen) 국제선교협의회(IMC): 역사적 분수령
이러한 전환의 요구가 구체적인 신학적 개념으로 결정화된 역사적 현장이 바로 1952년 서독 빌링겐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IMC)였습니다. 이 회의는 선교신학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으로 평가받는데, 여기서 독일의 선교학자 칼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이 처음으로 Missio Dei라는 용어를 신학적 담론의 중심에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신학계를 휩쓸던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아, 선교의 기초를 인간의 활동이나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파송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빌링겐 회의는 선교의 위기가 본질적으로 신학의 위기임을 천명하고, 선교의 삼위일체적 토대를 재확인했습니다. 이는 선교의 주도권을 인간과 교회로부터 하나님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으며, 이후 현대 선교신학의 흐름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칼 바르트의 신학적 토대
Missio Dei 개념이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는 칼 바르트입니다. 바르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이성, 경험, 문화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자연신학'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과 역사 속에서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기독교는 이러한 보편적 종교성의 가장 고상한 표현일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신학은 선교를 인간의 문화적, 종교적 성취를 확장하는 활동으로 전락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바르트는 이에 맞서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철저한 계시 중심, 그리스도 중심 신학을 구축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으로 발견되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를 말씀(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드러내시는 주체적인 분입니다. 이 신학적 입장은 선교에 직접적인 함의를 가집니다. 만약 하나님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자신을 계시하신다면, 선교의 주도권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게 됩니다. 선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시작하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하신 자기 계시와 화해의 역사에 인간이 응답하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나치즘에 동조했던 '독일 기독교인들'이 히틀러를 제2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끔찍한 현실을 목도하며, 인간의 경험이나 자연 질서를 계시의 근거로 삼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죄와 실패 가능성을 철저히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만 신학의 기초를 두려는 바르트의 신학은, 선교의 주인을 인간과 교회에서 하나님으로 되돌려 놓는    

Missio Dei 개념의 가장 강력한 신학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게오르크 비체돔(Georg F. Vicedom)의 공헌
빌링겐 회의에서 제시된 Missio Dei 개념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고 널리 알린 인물은 독일의 선교학자 게오르크 비체돔입니다. 그의 저서 <<하나님의 선교 (Actio Dei)>>는 이 개념을 심도 있게 다룬 최초의 저작 중 하나로, 선교가 하나님의 행위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는 선교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파송 행위로 규정하고, 교회가 이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도구임을 밝혔습니다. 비록 비체돔 자신은 훗날 이 개념이 교회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오용되는 것을 우려하여 비판적 입장으로 선회하기도 했지만 , 그의 초기 저작은    

Missio Dei를 현대 선교학의 핵심 용어로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2. Missio Dei의 핵심 신학: 선교의 주인을 재발견하다
Missio Dei는 단순히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바꾸는 것을 넘어, 선교의 기원과 방향, 그리고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신학적 원리입니다.

선교의 기원: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선교
전통적으로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대위임명령(마 28:18-20)에 대한 교회의 순종 행위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선교를 교회가 수행해야 할 여러 과업 중 하나로 위치시킵니다. 그러나 Missio Dei는 선교의 기원을 교회의 활동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본성, 즉 그분의 속성(Attribute)에서 찾습니다. 저명한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가 통찰했듯이, "선교는 본질적으로 교회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선교사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내어주고, 관계를 맺고, 세상으로 나아가시는 '보내시는 하나님'(a sending God)입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역동성 자체가 선교적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교회와 선교의 관계를 전복시킵니다. 더 이상 '교회가 선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가 교회를 낳는' 것이 됩니다. 즉, "선교가 있기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이며, 그 선교의 결과물로서 역사 속에 나타난 실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 본질상 선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선교의 방향성 전환: '하나님-세계-교회'
Missio Dei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 전환 중 하나는 선교의 방향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전통적인 Missio Ecclesiae 모델은 '하나님-교회-세계'라는 순차적 구도를 가집니다. 즉, 하나님은 먼저 교회를 부르시고, 그 교회를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시며, 세상은 교회가 정복하고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Missio Dei는 이 구도를 '하나님-세계-교회'로 재정렬합니다. 이 새로운 구도에서 선교의 첫 번째 무대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이미 온 세상 속에서 모든 피조물을 구속하고 회복하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과제는 세상에 없는 하나님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이미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활동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교회가 세상을 적대시하거나 도피하는 대신, 세상을 섬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선교적 거대 서사(Grand Narrative)
Missio Dei는 성경을 읽는 새로운 렌즈, 즉 '선교적 성경 해석학'(missional hermeneutics)을 제공합니다. 이 관점은 성경을 교리나 도덕률, 혹은 개인의 영적 위로를 위한 구절들의 모음집으로 보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 전체를 창조에서 새 창조에 이르기까지, 타락한 인간과 피조세계를 구원하고 회복하여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 즉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라는 거대 서사(Grand Narrative)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해석학적 틀 안에서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 출애굽 사건,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로서의 소명은 모두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을 드러내는 사건들로 재해석됩니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은 이 하나님의 선교가 절정에 이른 사건이며, 교회의 탄생과 확장은 그 선교를 이어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선교의 기록이며, 교회는 그 선교의 산물입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를 선교적 관점에서 조망할 때, 우리는 선교가 신약의 몇몇 구절에 근거한 특정 활동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핵심적인 사역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표 1: 선교 패러다임 비교 (Comparison of Mission Paradigms)

구분 (Category)	교회의 선교 (Missio Ecclesiae)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선교의 기원	교회의 순종 (지상대위임명령)	하나님의 본성 (보내시는 하나님)
주요 행위자	교회, 선교사	삼위일체 하나님
교회의 역할	선교의 주체, 주도자	선교의 도구, 참여자, 동역자
선교의 목표	교회 개척, 영혼 구원, 교세 확장	하나님 나라의 구현, 샬롬의 회복
선교의 범위	지리적 확장 (미전도 지역)	세상의 모든 영역 (정치, 경제, 문화 등)
세상을 보는 관점	정복하고 변화시켜야 할 대상	하나님이 이미 일하고 계시는 활동 무대
신학적 구도	하나님 → 교회 → 세계	하나님 → 세계 →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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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Missio Dei의 확장과 논쟁: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의 갈림길
Missio Dei 개념이 등장한 이후, 그 의미와 적용 범위를 둘러싸고 신학 진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타났으며, 이는 특히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 사이에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논쟁은 단순히 선교 방법론의 차이를 넘어, 구원의 본질과 범위에 대한 근본적인 신학적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에큐메니칼(WCC) 진영의 해석: 샬롬의 구현
에큐메니칼 진영은 Missio Dei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원으로 급진적으로 확장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 교회라는 종교적 영역을 넘어, 고통받는 세상 전체의 안녕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억압적인 정치 구조로부터의 해방, 경제적 불의의 극복, 인종차별 철폐, 생태계 보전 등 세상의 총체적인 '샬롬'(Shalom)을 구현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WCC는 선교의 목표를 전통적인 의미의 복음화(evangelism)가 아닌 인간화(humanization)로 설정하며, "세상이 선교의 의제를 설정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관점에서 선교는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 실현, 평화 구축, 창조질서 보전과 같은 구체적인 사회 참여와 동일시되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Missio Dei가 약자에 대한 배려와 사회 정의를 선교의 핵심 과제로 부각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의 비판과 재수용: 총체적 선교
반면, 복음주의 진영은 에큐메니칼 진영의 이러한 해석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이들은 Missio Dei가 사회-정치적 활동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십자가의 대속이라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약화시키거나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선교가 인간의 노력으로 세상을 개선하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는 경고였습니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은 선교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 역시 Missio Dei 개념을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자신들의 신학적 틀 안에서 재해석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결실이 1974년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에서 구체화된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 또는 Integral Mission) 개념입니다. 로잔 언약은 "복음전도와 사회적-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가지 부분"이라고 선언하며, 영혼 구원과 사회적 책임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제로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복음주의적 Missio Dei를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입니다. 그는 성경 전체의 거대한 내러티브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가 단지 인간의 구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창조세계 전체에서 악한 모든 것을 완전히 멸하는 것"이라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구속이 창조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 창조세계 돌봄이 모두 성경적인 선교의 본질적인 요소임을 역설하며,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의 통합적 접근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의 논쟁 사이에서 신학적 가교를 놓고 Missio Dei를 가장 심도 있고 통합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입니다. 그의 신학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극단적인 사회적 불의의 현장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백인 개혁교회 출신이었지만, 흑인들과의 만남과 선교 사역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의 비인간성을 절감하고, 복음이 개인의 영적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적 악의 변혁과도 직결되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기념비적 역작 <<변화하고 있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에서 보쉬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전환' 이론을 적용하여 기독교 2000년의 선교 역사를 분석하고, 현대 선교를 위한 새로운 '포스트모던-에큐메니칼'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Missio Dei를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으로 삼고, 복음전도, 제자도, 정의, 평화, 상황화, 교회와 선교의 관계 등 다양한 주제들을 통합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보쉬에게 선교는 영혼 구원이나 사회 참여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구원의 총체성을 강조하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정의 실현이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임을 역설했습니다. 또한, 그는 서구 중심적 선교를 비판하며, 복음이 각 지역의 문화와 상황 속에서 의미 있게 뿌리내려야 하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보쉬는 에큐메니칼 진영의 사회적 통찰과 복음주의 진영의 복음 중심성을    

Missio Dei라는 큰 틀 안에서 변증법적으로 통합함으로써, 20세기 선교신학을 집대성하고 21세기를 위한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1.4. Missio Dei의 현대적 과제: 교회의 역할과 정체성
Missio Dei는 선교의 신학적 지평을 넓히는 데 지대하게 공헌했지만, 동시에 교회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실천적 과제를 남겼습니다.

교회 약화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Missio Dei가 강조하는 '하나님-세계-교회' 구도는 자칫 교회의 중요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아닌 세상의 다양한 기구와 운동을 통해서도 당신의 선교를 이루어 가신다는 주장은,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기관이 아닌 여러 선택지 중 하나, 혹은 하나의 '첨가물'로 여기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신학자 찰스 밴 엥겐(Charles Van Engen)은 이러한 경향이 극단화될 경우, 교회를 '하나님의 행위에 박수를 보내는 구경꾼'으로 전락시키고 결국 '교회의 안락사'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역시 "선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장이 선교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고 지적하며, 왜곡된    

Missio Dei 신학이 교회의 복음 전도 사명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습니다. 신약성경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수행하는 핵심적인 공동체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의 역할을 과도하게 상대화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선교 범위의 무한 확장 문제
Missio Dei가 선교의 범위를 세상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또 다른 실천적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세상의 샬롬을 회복하고 구조악을 해결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선교로 규정할 경우, 선교의 정의가 모호해지고 교회가 감당해야 할 과제가 무한정 늘어나게 됩니다. 제한된 인력과 자원을 가진 교회가 모든 사회 문제에 개입하려 할 때, 정작 가장 본질적인 사명에 집중하지 못하고 선교의 효율성이 저하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 선교학자 스티븐 닐(Stephen Neill)의 유명한 경고입니다: "모든 것이 선교라면, 아무것도 선교가 아니다(If everything is mission, nothing is mission)". 심지어    

Missio Dei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조차 말년에 WCC가 복음의 특수성을 상실하고 다원주의로 기울어가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며, 선교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는 선교의 포괄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복음 전도라는 교회의 고유한 사명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중요한 과제를 제기합니다.   

대안으로서의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이러한 비판과 과제에 대한 가장 건설적인 신학적 응답 중 하나가 바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론입니다. 선교적 교회론은 Missio Dei의 핵심 통찰, 즉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명제를 수용하면서도 교회의 적극적인 역할과 정체성을 재확립하려는 시도입니다. 이 관점에서 교회는 단순히 '선교 프로그램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세상을 위해 보냄 받은 선교적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활동—예배, 교육, 친교, 봉사—은 교회 내부의 유지와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성도들은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와 교제를 통해 힘을 얻고, 주중에는 각자의 삶의 현장(가정, 직장, 사회)으로 흩어져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는 '보냄 받은 자들'로서 살아갑니다. 이처럼 선교적 교회론은    

Missio Dei가 야기할 수 있는 교회 약화의 위험을 극복하고, 교회를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다시 세우는 중요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이는 교회가 자기중심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세상을 섬기는 본질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며, 선교를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는 Missio Dei의 근본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하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2부: 선교의 동력 - 삼위일체 하나님 (The Trinity and Mission)
Missio Dei가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밝혔다면, 이제 우리는 선교가 왜, 그리고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답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심오한 신비이자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됩니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 그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필연적인 활동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는 선교를 위한 추상적인 신학적 배경이 아니라, 선교의 심장이자 꺼지지 않는 동력원입니다. 이는 선교가 단순히 '무엇을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속하여 그 생명에 참여하는가'라는 존재론적 문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2.1. 선교의 존재론적 근거로서의 삼위일체
'보내시는 하나님'(A Sending God)
'선교'(mission)라는 단어는 '보내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동사 'mittere'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어원 자체가 선교가 본질적으로 '보냄 받음'의 사건임을 말해줍니다. 성경은 바로 이 '보내심'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보내셨으니)"(요 3:16)라고 선포하며, 구원의 역사가 성부께서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는 행위에서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시며 교회의 선교가 당신의 보냄 받으심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더 나아가 성부와 성자께서는 교회를 돕고 선교를 가능하게 하시기 위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십니다(요 14:26, 16:7).

이처럼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시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이 연속적인 파송(sending)의 역동성이야말로 선교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가 고안해 낸 프로그램이나 지상명령에 대한 마지못한 의무 이행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파송(self-sending)이라는 존재론적 행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 보내심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사랑의 역동성으로서의 선교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보내시는가? 그 근원적인 동력은 바로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이 고독하고 정적인 단일 개체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person) 사이의 완전하고 역동적인 사랑의 교제 가운데 존재하심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관계적이시며, 그 관계의 본질은 어떠한 결핍이나 이기심도 없는 온전한 사랑과 친밀감, 선함의 상호 교류입니다.   

이 삼위일체 내적인 사랑은 너무나도 충만하고 풍성하여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바깥으로 '흘러넘치는'(overflow) 속성을 가집니다. 창조는 바로 이 흘러넘치는 사랑과 선하심의 첫 번째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외롭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충만한 사랑의 교제에 피조물을 참여시키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을 향한 구속 사역 역시 이 흘러넘치는 사랑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성부께서 아들을 내어주시고, 아들께서 자신을 희생하시며,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구원의 역사는 삼위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이 역사 속으로 흘러넘쳐 들어온 사건입니다.   

따라서 선교는 이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사랑 운동에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이유는 율법적 의무감이나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먼저 우리에게 부어진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한 자는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이웃과 세상을 향해 흘려보내고자 하는 역동성을 갖게 됩니다. 선교는 받은 사랑에 대한 자연스럽고 기쁨에 찬 응답이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에 우리 자신을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2.2.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와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
삼위일체 하나님과 선교의 관계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으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구별하고, 동시에 그 둘의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념 정의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는 창조나 구속과 같은 외부를 향한 활동과 관계없이, 하나님 자신 안에(ad intra) 영원히 존재하는 성부, 성자, 성령의 내적 관계와 존재 방식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성부는 영원히 성자를 '낳으시고'(beget), 성령을 '발출하시는'(spirate) 분으로,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고'(begotten),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proceeding) 분으로 설명되는 것이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입니다. 이는 시간과 역사를 초월한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에 대한 설명입니다.   

반면,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는 우리를 향한(ad extra) 하나님의 활동, 즉 창조, 구속, 교회의 역사, 그리고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는 구원의 경륜(economy of salvation) 속에서 나타나시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 방식을 가리킵니다. 성부께서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그 구원을 성취하시며, 성령께서 그 구원을 각 사람에게 적용하시고 교회를 통해 확장해 나가시는 사역이 바로 경륜적 삼위일체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통해 경험하고 인식하는 하나님은 바로 이 경륜적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라너의 법칙(Rahner's Rule): 계시와 신비의 통일성
그렇다면 이 두 삼위일체는 별개의 것인가? 20세기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이 둘의 관계를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The economic Trinity is the immanent Trinity and vice versa)"는 유명한 공리(axiom)로 정리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즉 선교의 현장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 안에 계신 본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심오한 통찰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장하거나 일부만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구원 활동을 통해 당신의 본질을 진실하게 계시하십니다.   

이 원칙은 선교에 지대한 신학적 함의를 가집니다. 첫째, 선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장(場)이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정의를 세우는 선교의 모든 활동을 통해 우리는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닌,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일하시는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이는 선교에 있어서 '계시'와 '신비' 사이의 건강한 긴장감을 부여합니다.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다는 확신(계시)을 갖지만, 내재적 삼위일체의 무한하심은 우리의 이해와 경험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초월성(신비)을 인정하게 합니다. 이는 우리가 선교의 결과를 통제하거나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교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겸손한 신뢰를 갖게 합니다. 선교 현장에서 겪는 예측 불가능한 성공과 실패 모두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2.3.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된 선교적 역할
경륜적 삼위일체는 한 분 하나님께서 세 가지 다른 양태나 역할로 나타나시는 것(양태론)이 아니라, 구별된 세 위격이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완벽한 통일성 속에서 함께 일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교 사역 역시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되면서도 조화로운 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부 하나님: 선교의 설계자이자 목적
성부 하나님은 모든 선교의 궁극적인 시작점이자 목적지입니다. 그분은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선교의 위대한 설계자이십니다. 성부의 사랑은 선교의 원천이며,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 선교의 방향입니다. 또한,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잃어버린 자녀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그분께 예배하며,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성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선교는 성부의 사랑에서 시작하여 성부의 영광으로 귀결되는 거대한 운동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선교의 모델이자 내용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 보냄 받아 이 땅에 오심으로써 선교 그 자체가 되신 분입니다. 그분의 전 생애는 선교의 완벽한 모델이자 살아있는 내용입니다.

성육신(Incarnation):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성육신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자신을 낮추고 타자에게 다가가는 선교의 근본 원리를 보여줍니다.

삶(Life):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공생애는 선교가 말뿐만 아니라 삶으로 증거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와 부활(Cross and Resurrection):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은 선교가 선포해야 할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파송(Sending): 부활하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선교를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분이 시작하신 선교를 역사 속에서 이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성령 하나님: 선교의 동력이자 실행자
만약 성부께서 선교를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선교의 길을 여셨다면, 성령 하나님은 그 선교를 실제로 가능하게 하시는 능력의 실행자이십니다. 성령은 선교의 '제1 동인(動因)'이자 원동력입니다.   

교회의 탄생과 능력 부여: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비로소 교회가 탄생했으며,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능력을 받았습니다 (행 1:8). 성령 없이는 교회도, 선교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복음 증거의 효과: 성령은 선포되는 말씀을 능력 있게 하여 듣는 이들의 마음을 열고 죄를 깨닫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인간의 설득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이 선교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인도와 보호: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선교사들을 특정 지역으로 인도하시거나(행 16:6-10), 때로는 막으시며 선교의 전 과정을 주도하고 감독하십니다. 또한,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보호하시는 보혜사이십니다.   

교회의 연합과 성화: 성령은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주시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로 빚어가십니다.

2.4. 삼위일체 선교신학의 함의와 도전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선교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 선교에 몇 가지 중요한 실천적 함의와 신학적 도전을 제시합니다.

선교 동기의 재정립
선교의 동력이 삼위 하나님의 내적 사랑의 흘러넘침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선교 동기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하도록 요구합니다. 선교는 더 이상 실적을 내야 하는 부담스러운 과업이나, 지키지 않으면 벌받을 것 같은 율법적 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쁨에 찬 응답이며, 그 사랑의 교제에 다른 이들을 초청하는 특권입니다. 이러한 동기의 전환은 선교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과 무관심 속에서도 쉽게 소진되거나 좌절하지 않고,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역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사회 참여의 신학적 근거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물질세계의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모든 영역을 구속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선교신학은 선교가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사회의 구조적 악과 불의에 맞서 싸우고, 정의와 평화를 세우며, 파괴된 창조세계를 돌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강력한 신학적 정당성을 제공합니다. 이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분리하는 이원론을 극복하고, 총체적 선교를 위한 견고한 신학적 기반이 됩니다.   

신학적 위험성에 대한 경계
동시에 삼위일체 선교신학은 몇 가지 신학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지혜로운 분별이 요구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보편적인 창조와 섭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유일하고 특수한 구속 사역의 중요성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둘째, 세상의 모든 긍정적 변화를 하나님의 선교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선교의 범위를 과도하게 확장하여 교회의 고유한 복음 전파 사명의 긴급성과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셋째, 모든 종교 안에 있는 선함과 진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편적 활동의 결과로 보려는 경향은 자칫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희석시키고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선교신학을 견지하되, 성경이 증언하는 복음의 핵심과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굳게 붙드는 균형 잡힌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제3부: 선교의 목표 - 하나님 나라 (The Kingdom of God and Mission)
선교의 주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그 동력이 하나님의 내적 사랑의 흘러넘침이라면, 그 모든 선교 활동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성경은 그 목표를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의 도래와 완성이라고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선교는 하나님 나라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그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며, 모든 사람을 그 나라로 초청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선교의 목적이 단순히 교회라는 조직의 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임하는 더 크고 궁극적인 비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3.1. 예수 사역의 핵심: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
성경적 개념 정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 투 테우'(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는 현대적 의미의 국가처럼 지리적 영토나 정치적 체제를 의미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나라'(malkuth, basileia)의 일차적 의미는 왕의 '통치'(reign), '주권'(rule), '지배'(dominion)라는 역동적인 활동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실현되는 영역이자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마 6:10).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였으며, 그분이 전하신 '복음'(기쁜 소식)의 내용 그 자체였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통해 도래할 하나님의 구원적 통치를 고대해왔고(단 2:44), 예수님은 바로 그 나라가 자신을 통해 이 땅에 임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과 가치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죄와 죽음, 사탄으로 대표되는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승리라고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질병의 권세를 깨뜨리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귀신 축출 사역은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거였습니다(마 12:28).   

이러한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의),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며(평강),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되어(희락) 온전한 '샬롬'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샬롬은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조화를 이루는 총체적인 안녕과 번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7장에서 가르치신 산상수훈은 흔히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 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 강령'으로 불립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팔복의 선언은 세상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 나라의 역설적인 가치를 보여줍니다. 선교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상에 선포하고 살아내는 활동입니다.   

3.2.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의 종말론적 긴장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는 독특한 시간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종말론적 긴장 속에 존재합니다. 이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의 긴장을 이해하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올바로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먼 미래에 갑자기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공생애 사역,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결정적으로 역사 속으로 '이미' 침투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계신 곳에, 그분의 통치가 미치는 곳에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인 실재가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전히 죄와 고통, 불의와 죽음의 세력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아직' 그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실현은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든 눈물이 씻기고,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입니다(계 21:4).   

긴장 속의 선교적 사명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긴장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역동적인 선교적 사명을 촉발합니다.   

증언의 사명: 우리는 '이미' 우리 삶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과 능력, 기쁨과 소망을 아직 그것을 맛보지 못한 세상에 증언해야 합니다.

영적 전투와 성화: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죄와 불의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영적 전투를 수행해야 합니다. 동시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의 세력과 싸우며,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거룩한 삶을 살아내는 성화의 과정에 힘써야 합니다.   

소망의 사명: 우리는 현재의 고난과 불완전함에 절망하지 않고,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인내하고, 그 소망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이 긴장감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선교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3.3.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
선교의 목표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면, 교회는 그 목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 둘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역사적으로 이 관계를 오해했을 때 선교는 심각하게 왜곡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동일시의 위험
역사적으로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지상의 제도적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을 가졌고, 이는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탁하여 세상을 지배하려는 '교회 제국주의'(Christendom)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신학 아래서 선교는 이교도 왕국을 정복하고 그들을 교회의 통치 아래 두는 군사적, 정치적 행위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할 때, 교회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를 절대화하며, 섬김의 대상인 세상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교만한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표현: 표징, 도구, 선취
교회는 하나님 나라 그 자체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와 분리된 별개의 실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경험하게 하는 공동체적 표현입니다. 신학자들은 교회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표징(Sign):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표지판'과 같습니다. 교회가 사랑과 용서,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며 살아갈 때, 세상은 그 모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도구(Instrument): 교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상에 확장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복음 선포와 제자 삼는 사역을 통해 교회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통로 역할을 감당합니다.   

선취(Foretaste): 교회는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축복을 '미리 맛보는' 공동체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와 성도의 교제를 통해,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경험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Agent)으로서의 교회
결론적으로,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대리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도록 보냄 받은 '대리인'(agent)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사명을 위임받아 세상 속에서 그분의 나라를 세워가는 대리점과 같습니다. 이 역할은 교회에 거룩한 특권과 책임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여전히 죄와 연약함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불완전한 공동체라는 한계를 가집니다. 따라서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개혁하고,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더욱 신실하게 대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3.4. 선교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이러한 이해 위에서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한 모든 활동으로 재정의될 수 있습니다.

선교의 궁극적 목표: 교회 성장을 넘어서
선교의 최종 목표는 단순히 교인의 수를 늘리거나, 더 크고 많은 교회 건물을 짓는 '교회 성장'(church growth)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 성장은 선교의 중요한 열매일 수 있지만, 그것이 목표 자체는 아닙니다. 선교의 궁극적 목표는 개인의 삶과 가정, 직장, 공동체, 나아가 사회와 문화, 정치, 경제 등 세상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교회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이지, 목표 그 자체가 아닙니다.   

총체적 선교와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가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면, 선교 역시 총체적인 접근을 요구합니다. 이 관점에서 선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차원을 모두 포함합니다.

복음 전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 선교는 말과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사람들이 죄와 사망의 나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는 활동입니다.

사회 참여를 통한 하나님 나라 가치의 구현: 선교는 또한 이 땅에 만연한 불의와 억압, 가난과 질병, 환경 파괴와 같은 문제들에 맞서 싸우며, 정의와 평화, 생명 존중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활동입니다.   

따라서 의료 선교, 교육 선교, 구제와 개발 사역, 인권 및 평화 운동, 창조세계 보전을 위한 환경 운동 등은 더 이상 복음 전도를 위한 '수단'이나 '접촉점'이 아니라, 그 자체로 깨어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치유와 회복을 증언하고 확장하는 본질적인 선교 활동이 됩니다. 이러한 총체적 접근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몸과 관계,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세상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성경적 진리를 온전히 반영하는 것입니다.   

결론적 비전: 새 하늘과 새 땅
선교는 결국 요한계시록 21-22장이 그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궁극적인 소망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영혼이 사후에 천국에 가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세계를 새롭게 하시고 눈물과 고통, 죽음이 없는 온전한 샬롬의 상태를 회복하시는 우주적 비전입니다. 교회의 모든 선교 활동은 이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순례의 여정이며, 그 나라가 반드시 임할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오늘을 살아가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결론: 통합적 선교신학을 향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현대 선교신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기둥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삼위일체',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각각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이 세 기둥이 어떻게 서로 맞물려 하나의 견고하고 통합적인 구조를 이루는지 종합하며 강의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 세 개념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통일된 실체로서, 21세기 교회가 나아갈 선교의 방향을 제시하는 신학적 나침반이 됩니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 즉 영원 전부터 세 위격 간에 존재했던 완전한 사랑의 교제가 외부로 '흘러넘쳐' 나타난 필연적인 활동입니다. 이 사랑의 역동성은 성부께서 성자를,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보내심'의 역사, 즉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로 구체화됩니다. 이로써 선교의 주체와 동력은 인간의 열심이나 교회의 조직이 아닌, 하나님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선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이 땅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임하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이처럼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어(동력), 그분의 주도적인 활동으로 전개되며(주체), 그분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목표)으로 귀결됩니다. 이 세 기둥은 선교의 '왜', '누가', '무엇을 위해'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명확하고 성경적인 답변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통합적 선교신학의 관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절대 진리를 거부하는 종교 다원주의, 급속한 세속화, 기후 위기와 같은 전 지구적 도전, 그리고 끝없는 분쟁과 불평등에 직면한 21세기 교회의 선교적 과제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첫째, 선교는 더 이상 개교회의 성장이나 교파의 세력 확장을 목표로 하는 성과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다양한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며,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정의와 평화, 생명 존중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둘째, 선교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 개인과 사회로 분리하는 이원론적 접근을 극복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를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는 일과 더불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필요를 채우고, 다음 세대를 온전한 인격체로 양육하며, 파괴된 창조세계를 돌보는 총체적 선교를 균형 있게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 존재의 전인적인 회복과 피조세계 전체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논의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됩니다. 선교는 더 이상 소수의 특별한 전문가나 선교사에게만 위임된 과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가정과 직장, 학교와 지역사회에서—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그 가치를 구현하며 살아가는 '선교적 삶'(missional living)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자신이 먼저 삼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 나라의 작은 '표징'과 '선취'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학 개론의 최종 목적지이자, 모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시작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교의 신학적 기초

선교학 개론: 하나님의 선교, 삼위일체, 그리고 하나님 나라

서론: 선교 패러다임의 전환과 신학적 기초
현대 선교학의 문을 열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선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선교는 "교회의 선교란 무엇인가?" 혹은 "우리는 어떻게 선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의해 주도되어 왔습니다. 이 질문들은 교회를 선교의 주체로, 인간의 전략과 활동을 선교의 핵심 동력으로 상정합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신학계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는 혁명적인 통찰에 도달했습니다. 선교에 대한 올바른 질문은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질문의 전환은 단순히 용어의 변경이 아니라, 선교의 주체, 동력, 그리고 궁극적 목표에 대한 이해를 송두리째 바꾸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며, 현대 선교학의 진정한 출발점이 됩니다.  

이러한 신학적 전환은 20세기 초중반 기독교 세계가 마주한 깊은 위기감 속에서 잉태되었습니다. 19세기는 흔히 선교의 '위대한 세기'로 불리지만, 그 이면에는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과 맞물린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했습니다. 서구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는 종종 문화적 우월주의와 결합하여 피선교지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기보다는 서구의 제도와 문화를 이식하는 '교회 확장주의'(Missio Ecclesiae)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개인의 회심과 구령(救靈)을 최우선으로 삼고, 지리적 경계를 넘어 교세를 확장하는 것이 선교의 주된 목표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바로 그 '기독교 문명'의 심장부에서 발발했습니다. 이 비극은 서구 기독교가 지녔던 신학적, 문화적 낙관주의를 산산조각 냈고, 식민주의 시대의 종언과 함께 과거 선교 방식에 대한 깊은 죄책감과 성찰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선교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는 개인 구원과 교세 확장을 넘어서는 새로운 선교 이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공백과 실천적 위기 속에서 대안으로 부상한 개념이 바로 '하나님의 선교', 즉 Missio Dei입니다. 이 라틴어 용어는 선교의 주도권이 인간이나 교회가 아닌, 창세 전부터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혁명적 개념입니다. 선교는 교회가 수행하는 여러 사역 중 하나가 아니라, '보내시는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며, 교회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선교의 중심이 교회에서 하나님으로, 그 무대가 교회 안에서 세상 전체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본 강의안은 현대 선교신학을 떠받치는 세 가지 핵심 기둥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첫째, 선교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의미, 그리고 오늘날의 논쟁을 심도 있게 다룰 것입니다. 둘째, 선교의 근원적 동력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관계와 경륜적 사역이 어떻게 선교의 존재론적 기초가 되는지를 분석할 것입니다. 셋째, 선교의 궁극적 목표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확장이 선교의 방향성과 목적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고찰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주제—선교의 주체, 동력, 목표—를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우리는 파편화된 선교 이해를 극복하고 성경적이면서도 통합적인 선교신학의 견고한 기초를 정립하고자 합니다.

본론
제1부: 선교의 주체 -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1.1. Missio Dei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태동
Missio Dei 개념의 등장은 20세기 중반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신학적 지층 위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학문적 유행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과 신학적 반성의 필연적 귀결이었습니다.

시대적 배경: 반성과 전환의 요구
19세기 선교 운동은 놀라운 양적 성장을 이루었으나, 그 동력은 서구의 정치적, 경제적 팽창과 분리하기 어려웠습니다.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이라는 기치 아래, 기독교 복음은 종종 서구 문화와 동일시되었고, 선교는 피선교지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하는 문화적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교회 중심적, 서구 중심적 선교 모델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을 자부하던 유럽이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전쟁터로 변모한 현실은 서구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에 깊은 상처와 회의를 남겼습니다. 더불어 전후 식민지들이 독립하면서 과거 제국주의와 결탁했던 선교 방식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고, 서구 교회는 깊은 죄책감 속에서 보다 적극적인 선교를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과거와 같은 공간적, 양적 교세 확장 중심의 선교를 넘어, 선교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신학적 재검토를 요구했습니다.  

1952년 빌링겐(Willingen) 국제선교협의회(IMC): 역사적 분수령
이러한 전환의 요구가 구체적인 신학적 개념으로 결정화된 역사적 현장이 바로 1952년 서독 빌링겐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IMC)였습니다. 이 회의는 선교신학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으로 평가받는데, 여기서 독일의 선교학자 칼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이 처음으로 Missio Dei라는 용어를 신학적 담론의 중심에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신학계를 휩쓸던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아, 선교의 기초를 인간의 활동이나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파송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빌링겐 회의는 선교의 위기가 본질적으로 신학의 위기임을 천명하고, 선교의 삼위일체적 토대를 재확인했습니다. 이는 선교의 주도권을 인간과 교회로부터 하나님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으며, 이후 현대 선교신학의 흐름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칼 바르트의 신학적 토대
Missio Dei 개념이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는 칼 바르트입니다. 바르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이성, 경험, 문화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자연신학'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과 역사 속에서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기독교는 이러한 보편적 종교성의 가장 고상한 표현일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신학은 선교를 인간의 문화적, 종교적 성취를 확장하는 활동으로 전락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바르트는 이에 맞서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철저한 계시 중심, 그리스도 중심 신학을 구축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으로 발견되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를 말씀(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드러내시는 주체적인 분입니다. 이 신학적 입장은 선교에 직접적인 함의를 가집니다. 만약 하나님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자신을 계시하신다면, 선교의 주도권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게 됩니다. 선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시작하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하신 자기 계시와 화해의 역사에 인간이 응답하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나치즘에 동조했던 '독일 기독교인들'이 히틀러를 제2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끔찍한 현실을 목도하며, 인간의 경험이나 자연 질서를 계시의 근거로 삼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죄와 실패 가능성을 철저히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만 신학의 기초를 두려는 바르트의 신학은, 선교의 주인을 인간과 교회에서 하나님으로 되돌려 놓는  

Missio Dei 개념의 가장 강력한 신학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게오르크 비체돔(Georg F. Vicedom)의 공헌
빌링겐 회의에서 제시된 Missio Dei 개념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고 널리 알린 인물은 독일의 선교학자 게오르크 비체돔입니다. 그의 저서 <<하나님의 선교 (Actio Dei)>>는 이 개념을 심도 있게 다룬 최초의 저작 중 하나로, 선교가 하나님의 행위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는 선교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파송 행위로 규정하고, 교회가 이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도구임을 밝혔습니다. 비록 비체돔 자신은 훗날 이 개념이 교회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오용되는 것을 우려하여 비판적 입장으로 선회하기도 했지만 , 그의 초기 저작은  

Missio Dei를 현대 선교학의 핵심 용어로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2. Missio Dei의 핵심 신학: 선교의 주인을 재발견하다
Missio Dei는 단순히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바꾸는 것을 넘어, 선교의 기원과 방향, 그리고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신학적 원리입니다.

선교의 기원: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선교
전통적으로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대위임명령(마 28:18-20)에 대한 교회의 순종 행위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선교를 교회가 수행해야 할 여러 과업 중 하나로 위치시킵니다. 그러나 Missio Dei는 선교의 기원을 교회의 활동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본성, 즉 그분의 속성(Attribute)에서 찾습니다. 저명한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가 통찰했듯이, "선교는 본질적으로 교회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선교사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내어주고, 관계를 맺고, 세상으로 나아가시는 '보내시는 하나님'(a sending God)입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역동성 자체가 선교적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교회와 선교의 관계를 전복시킵니다. 더 이상 '교회가 선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가 교회를 낳는' 것이 됩니다. 즉, "선교가 있기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이며, 그 선교의 결과물로서 역사 속에 나타난 실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 본질상 선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선교의 방향성 전환: '하나님-세계-교회'
Missio Dei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 전환 중 하나는 선교의 방향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전통적인 Missio Ecclesiae 모델은 '하나님-교회-세계'라는 순차적 구도를 가집니다. 즉, 하나님은 먼저 교회를 부르시고, 그 교회를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시며, 세상은 교회가 정복하고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Missio Dei는 이 구도를 '하나님-세계-교회'로 재정렬합니다. 이 새로운 구도에서 선교의 첫 번째 무대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이미 온 세상 속에서 모든 피조물을 구속하고 회복하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과제는 세상에 없는 하나님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이미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활동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교회가 세상을 적대시하거나 도피하는 대신, 세상을 섬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선교적 거대 서사(Grand Narrative)
Missio Dei는 성경을 읽는 새로운 렌즈, 즉 '선교적 성경 해석학'(missional hermeneutics)을 제공합니다. 이 관점은 성경을 교리나 도덕률, 혹은 개인의 영적 위로를 위한 구절들의 모음집으로 보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 전체를 창조에서 새 창조에 이르기까지, 타락한 인간과 피조세계를 구원하고 회복하여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 즉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라는 거대 서사(Grand Narrative)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해석학적 틀 안에서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 출애굽 사건,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로서의 소명은 모두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을 드러내는 사건들로 재해석됩니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은 이 하나님의 선교가 절정에 이른 사건이며, 교회의 탄생과 확장은 그 선교를 이어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선교의 기록이며, 교회는 그 선교의 산물입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를 선교적 관점에서 조망할 때, 우리는 선교가 신약의 몇몇 구절에 근거한 특정 활동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핵심적인 사역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표 1: 선교 패러다임 비교 (Comparison of Mission Paradigms)

구분 (Category) 교회의 선교 (Missio Ecclesiae)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선교의 기원 교회의 순종 (지상대위임명령) 하나님의 본성 (보내시는 하나님)
주요 행위자 교회, 선교사 삼위일체 하나님
교회의 역할 선교의 주체, 주도자 선교의 도구, 참여자, 동역자
선교의 목표 교회 개척, 영혼 구원, 교세 확장 하나님 나라의 구현, 샬롬의 회복
선교의 범위 지리적 확장 (미전도 지역) 세상의 모든 영역 (정치, 경제, 문화 등)
세상을 보는 관점 정복하고 변화시켜야 할 대상 하나님이 이미 일하고 계시는 활동 무대
신학적 구도 하나님 → 교회 → 세계 하나님 → 세계 →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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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Missio Dei의 확장과 논쟁: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의 갈림길
Missio Dei 개념이 등장한 이후, 그 의미와 적용 범위를 둘러싸고 신학 진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타났으며, 이는 특히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 사이에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논쟁은 단순히 선교 방법론의 차이를 넘어, 구원의 본질과 범위에 대한 근본적인 신학적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에큐메니칼(WCC) 진영의 해석: 샬롬의 구현
에큐메니칼 진영은 Missio Dei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원으로 급진적으로 확장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 교회라는 종교적 영역을 넘어, 고통받는 세상 전체의 안녕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억압적인 정치 구조로부터의 해방, 경제적 불의의 극복, 인종차별 철폐, 생태계 보전 등 세상의 총체적인 '샬롬'(Shalom)을 구현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WCC는 선교의 목표를 전통적인 의미의 복음화(evangelism)가 아닌 인간화(humanization)로 설정하며, "세상이 선교의 의제를 설정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관점에서 선교는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 실현, 평화 구축, 창조질서 보전과 같은 구체적인 사회 참여와 동일시되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Missio Dei가 약자에 대한 배려와 사회 정의를 선교의 핵심 과제로 부각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의 비판과 재수용: 총체적 선교
반면, 복음주의 진영은 에큐메니칼 진영의 이러한 해석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이들은 Missio Dei가 사회-정치적 활동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십자가의 대속이라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약화시키거나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선교가 인간의 노력으로 세상을 개선하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는 경고였습니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은 선교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 역시 Missio Dei 개념을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자신들의 신학적 틀 안에서 재해석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결실이 1974년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에서 구체화된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 또는 Integral Mission) 개념입니다. 로잔 언약은 "복음전도와 사회적-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가지 부분"이라고 선언하며, 영혼 구원과 사회적 책임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제로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복음주의적 Missio Dei를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입니다. 그는 성경 전체의 거대한 내러티브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가 단지 인간의 구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창조세계 전체에서 악한 모든 것을 완전히 멸하는 것"이라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구속이 창조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 창조세계 돌봄이 모두 성경적인 선교의 본질적인 요소임을 역설하며,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의 통합적 접근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의 논쟁 사이에서 신학적 가교를 놓고 Missio Dei를 가장 심도 있고 통합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입니다. 그의 신학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극단적인 사회적 불의의 현장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백인 개혁교회 출신이었지만, 흑인들과의 만남과 선교 사역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의 비인간성을 절감하고, 복음이 개인의 영적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적 악의 변혁과도 직결되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기념비적 역작 <<변화하고 있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에서 보쉬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전환' 이론을 적용하여 기독교 2000년의 선교 역사를 분석하고, 현대 선교를 위한 새로운 '포스트모던-에큐메니칼'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Missio Dei를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으로 삼고, 복음전도, 제자도, 정의, 평화, 상황화, 교회와 선교의 관계 등 다양한 주제들을 통합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보쉬에게 선교는 영혼 구원이나 사회 참여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구원의 총체성을 강조하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정의 실현이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임을 역설했습니다. 또한, 그는 서구 중심적 선교를 비판하며, 복음이 각 지역의 문화와 상황 속에서 의미 있게 뿌리내려야 하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보쉬는 에큐메니칼 진영의 사회적 통찰과 복음주의 진영의 복음 중심성을  

Missio Dei라는 큰 틀 안에서 변증법적으로 통합함으로써, 20세기 선교신학을 집대성하고 21세기를 위한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1.4. Missio Dei의 현대적 과제: 교회의 역할과 정체성
Missio Dei는 선교의 신학적 지평을 넓히는 데 지대하게 공헌했지만, 동시에 교회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실천적 과제를 남겼습니다.

교회 약화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Missio Dei가 강조하는 '하나님-세계-교회' 구도는 자칫 교회의 중요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아닌 세상의 다양한 기구와 운동을 통해서도 당신의 선교를 이루어 가신다는 주장은,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기관이 아닌 여러 선택지 중 하나, 혹은 하나의 '첨가물'로 여기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신학자 찰스 밴 엥겐(Charles Van Engen)은 이러한 경향이 극단화될 경우, 교회를 '하나님의 행위에 박수를 보내는 구경꾼'으로 전락시키고 결국 '교회의 안락사'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역시 "선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장이 선교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고 지적하며, 왜곡된  

Missio Dei 신학이 교회의 복음 전도 사명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습니다. 신약성경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수행하는 핵심적인 공동체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의 역할을 과도하게 상대화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선교 범위의 무한 확장 문제
Missio Dei가 선교의 범위를 세상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또 다른 실천적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세상의 샬롬을 회복하고 구조악을 해결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선교로 규정할 경우, 선교의 정의가 모호해지고 교회가 감당해야 할 과제가 무한정 늘어나게 됩니다. 제한된 인력과 자원을 가진 교회가 모든 사회 문제에 개입하려 할 때, 정작 가장 본질적인 사명에 집중하지 못하고 선교의 효율성이 저하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 선교학자 스티븐 닐(Stephen Neill)의 유명한 경고입니다: "모든 것이 선교라면, 아무것도 선교가 아니다(If everything is mission, nothing is mission)". 심지어  

Missio Dei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조차 말년에 WCC가 복음의 특수성을 상실하고 다원주의로 기울어가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며, 선교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는 선교의 포괄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복음 전도라는 교회의 고유한 사명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중요한 과제를 제기합니다.  

대안으로서의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이러한 비판과 과제에 대한 가장 건설적인 신학적 응답 중 하나가 바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론입니다. 선교적 교회론은 Missio Dei의 핵심 통찰, 즉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명제를 수용하면서도 교회의 적극적인 역할과 정체성을 재확립하려는 시도입니다. 이 관점에서 교회는 단순히 '선교 프로그램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세상을 위해 보냄 받은 선교적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활동—예배, 교육, 친교, 봉사—은 교회 내부의 유지와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성도들은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와 교제를 통해 힘을 얻고, 주중에는 각자의 삶의 현장(가정, 직장, 사회)으로 흩어져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는 '보냄 받은 자들'로서 살아갑니다. 이처럼 선교적 교회론은  

Missio Dei가 야기할 수 있는 교회 약화의 위험을 극복하고, 교회를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다시 세우는 중요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이는 교회가 자기중심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세상을 섬기는 본질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며, 선교를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는 Missio Dei의 근본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하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2부: 선교의 동력 - 삼위일체 하나님 (The Trinity and Mission)
Missio Dei가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밝혔다면, 이제 우리는 선교가 왜, 그리고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답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심오한 신비이자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됩니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 그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필연적인 활동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는 선교를 위한 추상적인 신학적 배경이 아니라, 선교의 심장이자 꺼지지 않는 동력원입니다. 이는 선교가 단순히 '무엇을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속하여 그 생명에 참여하는가'라는 존재론적 문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2.1. 선교의 존재론적 근거로서의 삼위일체
'보내시는 하나님'(A Sending God)
'선교'(mission)라는 단어는 '보내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동사 'mittere'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어원 자체가 선교가 본질적으로 '보냄 받음'의 사건임을 말해줍니다. 성경은 바로 이 '보내심'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보내셨으니)"(요 3:16)라고 선포하며, 구원의 역사가 성부께서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는 행위에서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시며 교회의 선교가 당신의 보냄 받으심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더 나아가 성부와 성자께서는 교회를 돕고 선교를 가능하게 하시기 위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십니다(요 14:26, 16:7).

이처럼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시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이 연속적인 파송(sending)의 역동성이야말로 선교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가 고안해 낸 프로그램이나 지상명령에 대한 마지못한 의무 이행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파송(self-sending)이라는 존재론적 행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 보내심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사랑의 역동성으로서의 선교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보내시는가? 그 근원적인 동력은 바로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이 고독하고 정적인 단일 개체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person) 사이의 완전하고 역동적인 사랑의 교제 가운데 존재하심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관계적이시며, 그 관계의 본질은 어떠한 결핍이나 이기심도 없는 온전한 사랑과 친밀감, 선함의 상호 교류입니다.  

이 삼위일체 내적인 사랑은 너무나도 충만하고 풍성하여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바깥으로 '흘러넘치는'(overflow) 속성을 가집니다. 창조는 바로 이 흘러넘치는 사랑과 선하심의 첫 번째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외롭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충만한 사랑의 교제에 피조물을 참여시키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을 향한 구속 사역 역시 이 흘러넘치는 사랑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성부께서 아들을 내어주시고, 아들께서 자신을 희생하시며,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구원의 역사는 삼위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이 역사 속으로 흘러넘쳐 들어온 사건입니다.  

따라서 선교는 이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사랑 운동에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이유는 율법적 의무감이나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먼저 우리에게 부어진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한 자는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이웃과 세상을 향해 흘려보내고자 하는 역동성을 갖게 됩니다. 선교는 받은 사랑에 대한 자연스럽고 기쁨에 찬 응답이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에 우리 자신을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2.2.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와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
삼위일체 하나님과 선교의 관계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으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구별하고, 동시에 그 둘의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념 정의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는 창조나 구속과 같은 외부를 향한 활동과 관계없이, 하나님 자신 안에(ad intra) 영원히 존재하는 성부, 성자, 성령의 내적 관계와 존재 방식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성부는 영원히 성자를 '낳으시고'(beget), 성령을 '발출하시는'(spirate) 분으로,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고'(begotten),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proceeding) 분으로 설명되는 것이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입니다. 이는 시간과 역사를 초월한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에 대한 설명입니다.  

반면,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는 우리를 향한(ad extra) 하나님의 활동, 즉 창조, 구속, 교회의 역사, 그리고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는 구원의 경륜(economy of salvation) 속에서 나타나시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 방식을 가리킵니다. 성부께서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그 구원을 성취하시며, 성령께서 그 구원을 각 사람에게 적용하시고 교회를 통해 확장해 나가시는 사역이 바로 경륜적 삼위일체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통해 경험하고 인식하는 하나님은 바로 이 경륜적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라너의 법칙(Rahner's Rule): 계시와 신비의 통일성
그렇다면 이 두 삼위일체는 별개의 것인가? 20세기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이 둘의 관계를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The economic Trinity is the immanent Trinity and vice versa)"는 유명한 공리(axiom)로 정리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즉 선교의 현장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 안에 계신 본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심오한 통찰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장하거나 일부만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구원 활동을 통해 당신의 본질을 진실하게 계시하십니다.  

이 원칙은 선교에 지대한 신학적 함의를 가집니다. 첫째, 선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장(場)이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정의를 세우는 선교의 모든 활동을 통해 우리는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닌,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일하시는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이는 선교에 있어서 '계시'와 '신비' 사이의 건강한 긴장감을 부여합니다.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다는 확신(계시)을 갖지만, 내재적 삼위일체의 무한하심은 우리의 이해와 경험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초월성(신비)을 인정하게 합니다. 이는 우리가 선교의 결과를 통제하거나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교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겸손한 신뢰를 갖게 합니다. 선교 현장에서 겪는 예측 불가능한 성공과 실패 모두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2.3.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된 선교적 역할
경륜적 삼위일체는 한 분 하나님께서 세 가지 다른 양태나 역할로 나타나시는 것(양태론)이 아니라, 구별된 세 위격이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완벽한 통일성 속에서 함께 일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교 사역 역시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되면서도 조화로운 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부 하나님: 선교의 설계자이자 목적
성부 하나님은 모든 선교의 궁극적인 시작점이자 목적지입니다. 그분은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선교의 위대한 설계자이십니다. 성부의 사랑은 선교의 원천이며,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 선교의 방향입니다. 또한,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잃어버린 자녀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그분께 예배하며,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성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선교는 성부의 사랑에서 시작하여 성부의 영광으로 귀결되는 거대한 운동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선교의 모델이자 내용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 보냄 받아 이 땅에 오심으로써 선교 그 자체가 되신 분입니다. 그분의 전 생애는 선교의 완벽한 모델이자 살아있는 내용입니다.

성육신(Incarnation):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성육신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자신을 낮추고 타자에게 다가가는 선교의 근본 원리를 보여줍니다.

삶(Life):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공생애는 선교가 말뿐만 아니라 삶으로 증거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와 부활(Cross and Resurrection):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은 선교가 선포해야 할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파송(Sending): 부활하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선교를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분이 시작하신 선교를 역사 속에서 이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성령 하나님: 선교의 동력이자 실행자
만약 성부께서 선교를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선교의 길을 여셨다면, 성령 하나님은 그 선교를 실제로 가능하게 하시는 능력의 실행자이십니다. 성령은 선교의 '제1 동인(動因)'이자 원동력입니다.  

교회의 탄생과 능력 부여: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비로소 교회가 탄생했으며,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능력을 받았습니다 (행 1:8). 성령 없이는 교회도, 선교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복음 증거의 효과: 성령은 선포되는 말씀을 능력 있게 하여 듣는 이들의 마음을 열고 죄를 깨닫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인간의 설득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이 선교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인도와 보호: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선교사들을 특정 지역으로 인도하시거나(행 16:6-10), 때로는 막으시며 선교의 전 과정을 주도하고 감독하십니다. 또한,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보호하시는 보혜사이십니다.  

교회의 연합과 성화: 성령은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주시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로 빚어가십니다.

2.4. 삼위일체 선교신학의 함의와 도전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선교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 선교에 몇 가지 중요한 실천적 함의와 신학적 도전을 제시합니다.

선교 동기의 재정립
선교의 동력이 삼위 하나님의 내적 사랑의 흘러넘침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선교 동기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하도록 요구합니다. 선교는 더 이상 실적을 내야 하는 부담스러운 과업이나, 지키지 않으면 벌받을 것 같은 율법적 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쁨에 찬 응답이며, 그 사랑의 교제에 다른 이들을 초청하는 특권입니다. 이러한 동기의 전환은 선교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과 무관심 속에서도 쉽게 소진되거나 좌절하지 않고,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역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사회 참여의 신학적 근거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물질세계의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모든 영역을 구속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선교신학은 선교가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사회의 구조적 악과 불의에 맞서 싸우고, 정의와 평화를 세우며, 파괴된 창조세계를 돌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강력한 신학적 정당성을 제공합니다. 이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분리하는 이원론을 극복하고, 총체적 선교를 위한 견고한 신학적 기반이 됩니다.  

신학적 위험성에 대한 경계
동시에 삼위일체 선교신학은 몇 가지 신학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지혜로운 분별이 요구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보편적인 창조와 섭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유일하고 특수한 구속 사역의 중요성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둘째, 세상의 모든 긍정적 변화를 하나님의 선교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선교의 범위를 과도하게 확장하여 교회의 고유한 복음 전파 사명의 긴급성과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셋째, 모든 종교 안에 있는 선함과 진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편적 활동의 결과로 보려는 경향은 자칫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희석시키고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선교신학을 견지하되, 성경이 증언하는 복음의 핵심과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굳게 붙드는 균형 잡힌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제3부: 선교의 목표 - 하나님 나라 (The Kingdom of God and Mission)
선교의 주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그 동력이 하나님의 내적 사랑의 흘러넘침이라면, 그 모든 선교 활동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성경은 그 목표를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의 도래와 완성이라고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선교는 하나님 나라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그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며, 모든 사람을 그 나라로 초청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선교의 목적이 단순히 교회라는 조직의 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임하는 더 크고 궁극적인 비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3.1. 예수 사역의 핵심: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
성경적 개념 정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 투 테우'(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는 현대적 의미의 국가처럼 지리적 영토나 정치적 체제를 의미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나라'(malkuth, basileia)의 일차적 의미는 왕의 '통치'(reign), '주권'(rule), '지배'(dominion)라는 역동적인 활동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실현되는 영역이자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마 6:10).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였으며, 그분이 전하신 '복음'(기쁜 소식)의 내용 그 자체였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통해 도래할 하나님의 구원적 통치를 고대해왔고(단 2:44), 예수님은 바로 그 나라가 자신을 통해 이 땅에 임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과 가치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죄와 죽음, 사탄으로 대표되는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승리라고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질병의 권세를 깨뜨리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귀신 축출 사역은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거였습니다(마 12:28).  

이러한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의),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며(평강),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되어(희락) 온전한 '샬롬'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샬롬은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조화를 이루는 총체적인 안녕과 번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7장에서 가르치신 산상수훈은 흔히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 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 강령'으로 불립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팔복의 선언은 세상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 나라의 역설적인 가치를 보여줍니다. 선교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상에 선포하고 살아내는 활동입니다.  

3.2.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의 종말론적 긴장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는 독특한 시간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종말론적 긴장 속에 존재합니다. 이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의 긴장을 이해하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올바로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먼 미래에 갑자기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공생애 사역,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결정적으로 역사 속으로 '이미' 침투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계신 곳에, 그분의 통치가 미치는 곳에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인 실재가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전히 죄와 고통, 불의와 죽음의 세력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아직' 그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실현은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든 눈물이 씻기고,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입니다(계 21:4).  

긴장 속의 선교적 사명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긴장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역동적인 선교적 사명을 촉발합니다.  

증언의 사명: 우리는 '이미' 우리 삶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과 능력, 기쁨과 소망을 아직 그것을 맛보지 못한 세상에 증언해야 합니다.

영적 전투와 성화: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죄와 불의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영적 전투를 수행해야 합니다. 동시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의 세력과 싸우며,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거룩한 삶을 살아내는 성화의 과정에 힘써야 합니다.  

소망의 사명: 우리는 현재의 고난과 불완전함에 절망하지 않고,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인내하고, 그 소망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이 긴장감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선교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3.3.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
선교의 목표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면, 교회는 그 목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 둘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역사적으로 이 관계를 오해했을 때 선교는 심각하게 왜곡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동일시의 위험
역사적으로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지상의 제도적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을 가졌고, 이는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탁하여 세상을 지배하려는 '교회 제국주의'(Christendom)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신학 아래서 선교는 이교도 왕국을 정복하고 그들을 교회의 통치 아래 두는 군사적, 정치적 행위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할 때, 교회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를 절대화하며, 섬김의 대상인 세상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교만한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표현: 표징, 도구, 선취
교회는 하나님 나라 그 자체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와 분리된 별개의 실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경험하게 하는 공동체적 표현입니다. 신학자들은 교회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표징(Sign):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표지판'과 같습니다. 교회가 사랑과 용서,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며 살아갈 때, 세상은 그 모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도구(Instrument): 교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상에 확장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복음 선포와 제자 삼는 사역을 통해 교회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통로 역할을 감당합니다.  

선취(Foretaste): 교회는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축복을 '미리 맛보는' 공동체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와 성도의 교제를 통해,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경험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Agent)으로서의 교회
결론적으로,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대리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도록 보냄 받은 '대리인'(agent)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사명을 위임받아 세상 속에서 그분의 나라를 세워가는 대리점과 같습니다. 이 역할은 교회에 거룩한 특권과 책임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여전히 죄와 연약함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불완전한 공동체라는 한계를 가집니다. 따라서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개혁하고,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더욱 신실하게 대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3.4. 선교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이러한 이해 위에서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한 모든 활동으로 재정의될 수 있습니다.

선교의 궁극적 목표: 교회 성장을 넘어서
선교의 최종 목표는 단순히 교인의 수를 늘리거나, 더 크고 많은 교회 건물을 짓는 '교회 성장'(church growth)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 성장은 선교의 중요한 열매일 수 있지만, 그것이 목표 자체는 아닙니다. 선교의 궁극적 목표는 개인의 삶과 가정, 직장, 공동체, 나아가 사회와 문화, 정치, 경제 등 세상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교회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이지, 목표 그 자체가 아닙니다.  

총체적 선교와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가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면, 선교 역시 총체적인 접근을 요구합니다. 이 관점에서 선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차원을 모두 포함합니다.

복음 전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 선교는 말과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사람들이 죄와 사망의 나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는 활동입니다.

사회 참여를 통한 하나님 나라 가치의 구현: 선교는 또한 이 땅에 만연한 불의와 억압, 가난과 질병, 환경 파괴와 같은 문제들에 맞서 싸우며, 정의와 평화, 생명 존중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활동입니다.  

따라서 의료 선교, 교육 선교, 구제와 개발 사역, 인권 및 평화 운동, 창조세계 보전을 위한 환경 운동 등은 더 이상 복음 전도를 위한 '수단'이나 '접촉점'이 아니라, 그 자체로 깨어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치유와 회복을 증언하고 확장하는 본질적인 선교 활동이 됩니다. 이러한 총체적 접근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몸과 관계,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세상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성경적 진리를 온전히 반영하는 것입니다.  

결론적 비전: 새 하늘과 새 땅
선교는 결국 요한계시록 21-22장이 그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궁극적인 소망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영혼이 사후에 천국에 가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세계를 새롭게 하시고 눈물과 고통, 죽음이 없는 온전한 샬롬의 상태를 회복하시는 우주적 비전입니다. 교회의 모든 선교 활동은 이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순례의 여정이며, 그 나라가 반드시 임할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오늘을 살아가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결론: 통합적 선교신학을 향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현대 선교신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기둥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삼위일체',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각각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이 세 기둥이 어떻게 서로 맞물려 하나의 견고하고 통합적인 구조를 이루는지 종합하며 강의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 세 개념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통일된 실체로서, 21세기 교회가 나아갈 선교의 방향을 제시하는 신학적 나침반이 됩니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 즉 영원 전부터 세 위격 간에 존재했던 완전한 사랑의 교제가 외부로 '흘러넘쳐' 나타난 필연적인 활동입니다. 이 사랑의 역동성은 성부께서 성자를,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보내심'의 역사, 즉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로 구체화됩니다. 이로써 선교의 주체와 동력은 인간의 열심이나 교회의 조직이 아닌, 하나님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선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이 땅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임하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이처럼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어(동력), 그분의 주도적인 활동으로 전개되며(주체), 그분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목표)으로 귀결됩니다. 이 세 기둥은 선교의 '왜', '누가', '무엇을 위해'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명확하고 성경적인 답변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통합적 선교신학의 관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절대 진리를 거부하는 종교 다원주의, 급속한 세속화, 기후 위기와 같은 전 지구적 도전, 그리고 끝없는 분쟁과 불평등에 직면한 21세기 교회의 선교적 과제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첫째, 선교는 더 이상 개교회의 성장이나 교파의 세력 확장을 목표로 하는 성과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다양한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며,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정의와 평화, 생명 존중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둘째, 선교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 개인과 사회로 분리하는 이원론적 접근을 극복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를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는 일과 더불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필요를 채우고, 다음 세대를 온전한 인격체로 양육하며, 파괴된 창조세계를 돌보는 총체적 선교를 균형 있게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 존재의 전인적인 회복과 피조세계 전체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논의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됩니다. 선교는 더 이상 소수의 특별한 전문가나 선교사에게만 위임된 과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가정과 직장, 학교와 지역사회에서—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그 가치를 구현하며 살아가는 '선교적 삶'(missional living)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자신이 먼저 삼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 나라의 작은 '표징'과 '선취'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학 개론의 최종 목적지이자, 모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시작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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Дэлхийн Интернэт Номлолын Нийгэмлэг (SWIM) нь 1996 онд байгуулагдсан номлогчийн байгууллага бөгөөд 20 гаруй жилийн турш интернет болон мэдээллийн технологийн тусламжтайгаар дэлхийн номлолд хувь нэмрээ оруулсаар ирсэ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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