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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 확산, 아일랜드 선교, 중세 선교 흐름

선교 역사 및 전략

불꽃에서 제국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초기 교회부터 중세까지의 선교 역사

서론: 사도 시대 이후, 복음의 대장정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기독교 선교는 사도 시대의 종언과 함께 막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영적, 문화적 확장 운동의 서막에 불과했다. 사도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은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토양 속에서, 때로는 박해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뿌리내리며, 마침내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거대한 숲으로 자라났다. 이 장대한 여정은 결코 단선적이거나 순탄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대의 격랑 속에서 선교의 의미와 방법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때로는 숭고하게, 때로는 비극적으로 변모해 온 복잡한 드라마였다.

본 강의안은 이 위대한 선교의 흐름을 세 개의 주요 시기로 나누어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첫째, **초기 교회의 폭발적인 확산기(c. 100-500 AD)**이다. 중앙 통제 기구 없이, 이름 없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증거와 순교의 피를 통해 복음이 어떻게 로마 제국의 심장부까지 스며들었는지를 분석한다. 이 시기 선교의 비공식적이고 관계적인 특성과, 기독교 공동체가 보여준 급진적 사랑이 어떻게 로마 사회의 대안으로 작용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 **'어둠의 시대'를 밝힌 아일랜드 선교(c. 400-800 AD)**이다. 서로마 제국의 붕괴라는 혼돈 속에서, 문명의 변방이었던 아일랜드가 어떻게 독특한 켈트 수도원 운동을 통해 유럽을 재복음화하는 선교의 중심지로 부상했는지를 추적한다. 특히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Peregrinatio pro Christo)라는 독특한 선교 동력과 그들이 남긴 영적, 문화적 유산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셋째, **중세 선교의 다채로운 흐름(c. 800-1500 AD)**이다. 샤를마뉴 대제 이후 교회와 국가가 결합된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형성 속에서 선교가 어떻게 정치적 확장과 군사적 정복의 수단으로 변모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동시에, 이러한 세속화에 저항하며 등장한 클뤼니 수도원 개혁 운동과 프란체스코회와 같은 탁발 수도회의 새로운 선교적 열정, 그리고 십자군 전쟁이라는 선교의 가장 비극적인 왜곡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라몬 룰의 지적 선교에 이르기까지, 중세 시대 선교의 빛과 그림자를 다각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이 역사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선교가 결코 고정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각 시대의 신학적, 문화적, 정치적 상황과 치열하게 상호작용하며 그 형태를 달리해 온 살아있는 유기체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 21세기의 복잡한 도전 앞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선교의 본질과 방향을 성찰하는 데 귀중한 역사적 지혜와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제1부 자발적 확산과 순교의 증거: 초기 교회의 선교 (c. 100-500 AD)
사도 시대 이후 약 4세기 동안 기독교는 예루살렘의 작은 유대교 분파에서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성장하는 경이로운 확장을 경험했다. 이 시기의 선교는 현대적인 의미의 '선교 단체'나 '파송 본부' 없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마치 누룩이 조용히 퍼져나가 전체 반죽을 부풀게 하듯, 이름 없는 수많은 평신도들의 삶과 관계, 그리고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자발적이고 유기적인 운동이었다.

1.1. 팍스 로마나: 선교를 위한 무대
초기 교회의 확산은 로마 제국이 제공한 독특한 역사적 환경,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로마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최적의 무대를 마련했다.

물리적 연결망: 로마가 군사적, 행정적 목적으로 건설한 광대한 도로망과 해적을 소탕하여 안전해진 지중해 항로는 복음 전파자들의 이동을 용이하게 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상인, 군인, 노예 등 수많은 사람들이 제국 전역을 이동하면서, 그들은 복음을 실어 나르는 무의식적인 매개체가 되었다.

언어와 사상의 통일: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코이네 그리스어'가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lingua franca)가 되었다. 이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이 언어의 장벽 없이 전달될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약성경 자체가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스토아 철학 등에서 제기된 보편적 로고스 사상이나 영혼 불멸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수용될 수 있는 철학적 토양을 마련해주었다.

영적 공허감: 팍스 로마나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안정 이면에는 깊은 영적 공허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통적인 로마의 다신교는 더 이상 개인의 실존적 질문(삶의 의미, 죽음, 고통의 문제)에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영적 갈증은 이시스, 미트라스와 같은 동방의 밀의 종교들이 성행하게 만들었고, 바로 이 틈을 비집고 기독교는 개인적 구원과 사랑의 공동체라는 강력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1.2. 이름 없는 증인들: 평신도 중심의 '관계적 선교'
초대교회 선교의 주역은 사도나 전문 사역자가 아닌, 이름 없는 평범한 신자들이었다. 역사가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이 지적했듯이, 초기 기독교의 확산은 공식적인 설교나 변증보다는 "비공식적인 선교사들의 비공식적인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삶의 현장이 선교지: 상인들은 시장에서 거래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군인들은 주둔지에서 동료들에게, 노예들은 주인의 가정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들의 삶의 모든 자리가 선교의 현장이었다. 특히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이었던 노예와 여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에게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며 존엄하다는 복음의 메시지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가정 교회(House Church)의 역할: 초기 기독교인들은 별도의 교회 건물이 없었다. 그들은 신자들의 가정에 모여 예배하고 교제했다. 이 '가정 교회'는 선교의 가장 중요한 세포이자 전초기지였다. 새로운 신자는 이 친밀하고 따뜻한 공동체 안에서 신앙을 배우고, 사랑과 돌봄을 경험하며, 자연스럽게 복음을 자신의 가족과 이웃에게 전파하는 증인으로 성장해갔다. 리디아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자신의 집을 교회로 개방한 사람들은 초기 선교의 중요한 후원자이자 지도자였다.

급진적 사랑의 실천: 초기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던진 가장 큰 충격은 그들의 '사랑의 공동체'였다. 로마 사회가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사람을 엄격히 차별했던 것과 달리, 교회 안에서는 귀족과 노예,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었다(갈 3:28). 또한,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았다. 주기적으로 역병이 창궐할 때, 로마인들은 감염을 피해 가족조차 버리고 도시를 떠났지만, 기독교인들은 도시에 남아 병든 자들을 간호하고 죽은 자들을 묻어주었다. 과부와 고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였다. 이러한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은 이교도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말로 하는 설교보다 더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되었다.

1.3. 순교의 피: 죽음으로 증언된 신앙
초기 기독교의 확산은 결코 평화로운 과정이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은 유일신 신앙 때문에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하기를 거부했고, 황제 숭배를 거부했다. 이는 로마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반사회적, 반국가적 행위로 간주되어, 네로 황제 이후 약 250년간 간헐적이지만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박해와 순교는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2세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증인으로서의 죽음: '순교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마르튀스'(martys)는 본래 '증인'이라는 뜻이다. 순교자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평안 가운데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부활의 소망이 실제임을 온몸으로 증언했다.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찬송하는 그들의 모습은 로마 군중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가?"

변증가들의 지적 투쟁: 박해에 맞서, 유스티누스 순교자(Justin Martyr),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변증가'(Apologist)들은 기독교 신앙을 지적으로 변호하는 글들을 썼다. 그들은 기독교가 결코 무신론적이거나 비이성적인 미신이 아니며, 오히려 헬라 철학이 추구하던 최고의 진리를 완성하는 '참된 철학'임을 논증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도덕적이고 충성스러운 시민임을 주장하며 황제와 원로원을 설득하고자 했다. 이러한 지적 노력은 기독교가 단순한 하층민의 종교가 아니라, 지성인들에게도 호소력 있는 진리 체계임을 보여주었다.

1.4.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세계의 탄생: 선교의 전환점
수 세기 동안의 박해 끝에, 기독교 역사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칙령으로 기독교는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공인받았고,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380년에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국교로 선포된다.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 선교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위로부터의 선교' 시작: 이전까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확산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황제와 지배계층의 후원 아래 '위로부터의 선교'가 가능해졌다. 대규모 교회 건물이 세워지고, 성직자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수많은 이교도들이 사회적, 정치적 유익을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대중 개종'(mass conversion) 현상이 일어났다.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형성: 이로써 교회와 제국이 거의 동일시되는 '기독교 세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로마 시민이 되는 것과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거의 같은 의미가 되었다. 선교의 목표는 이제 개인의 신실한 회심보다는, 제국의 경계를 확장하고 이교도 '야만족'들을 기독교 문명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빛과 그림자: 이러한 변화는 교회가 더 이상 박해의 위협 없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하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는 엄청난 '빛'을 가져왔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탁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며, 진정한 회심 없는 명목상의 신자들이 급증하는 '그림자'를 낳았다. 또한, 과거에는 사랑과 설득으로 이루어지던 선교가 점차 강압과 폭력의 수단을 동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위험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이 '기독교 세계' 모델은 이후 천 년간의 중세 선교를 규정하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된다.

제2부 변방에서 중심으로: 아일랜드 수도원 선교 (c. 400-800 AD)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5세기경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유럽 대륙은 정치적 혼란과 문화적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과거 로마가 제공했던 안정과 질서, 연결망이 사라지면서 기독교의 확산 동력도 약화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 로마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었던 문명의 변방, 아일랜드에서 새로운 형태의 선교 운동이 불꽃처럼 일어나 유럽 대륙을 재복음화하는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2.1. 성 패트릭: 아일랜드 복음화의 씨앗
아일랜드 선교의 문을 연 인물은 성 패트릭(St. Patrick, c. 385-461)이다. 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선교 드라마다.

노예에서 선교사로: 브리튼의 로마-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패트릭은 16세 때 아일랜드 해적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갔다. 그는 6년간 양을 치는 고독한 노예 생활 속에서 뜨거운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극적으로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꿈속에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자신을 다시 불러 복음을 전해달라고 호소하는 환상을 본다. 그는 이 부르심에 순종하여 사제로 서품을 받고, 자신을 노예로 삼았던 바로 그 땅, 켈트족의 이교 문화가 지배하던 아일랜드로 다시 돌아가 선교사가 되었다.

토착화된 선교 방식: 패트릭의 선교 방식은 로마의 방식과는 달랐다. 그는 로마의 교구(diocese) 중심의 행정 구조를 이식하는 대신, 아일랜드의 사회 구조인 부족(clan) 중심 체제를 존중했다. 그는 먼저 각 지역의 부족장(chieftain)에게 접근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허락과 보호 아래 선교 활동을 펼쳤다. 또한, 그는 켈트 문화의 상징들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여 복음을 설명하는 데 활용했다. 예를 들어, 세 잎 클로버를 통해 삼위일체를 설명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그의 토착화된 접근 방식을 잘 보여준다.

수도원 중심의 교회: 패트릭과 그의 제자들은 아일랜드 전역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들은 주교가 다스리는 교구가 아니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아일랜드 교회가 이후 유럽 대륙과는 다른 독특한 '수도원 중심'의 형태를 띠게 되는 기초를 놓았다. 이 수도원들은 단순한 기도와 수행의 장소를 넘어, 켈트 기독교의 영성과 학문, 예술, 그리고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2.2. 켈트 수도원 운동: 선교의 엔진
서로마 멸망 이후 유럽 대륙의 학문과 문화가 쇠퇴하던 시기, 아일랜드의 수도원들은 역설적으로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학문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들은 성경과 고전을 필사하고, 아름다운 채색 필사본(illuminated manuscript)을 제작했으며(대표적으로 '켈스의 서' Book of Kells), 독특한 켈트 영성을 꽃피웠다.

켈트 영성의 핵심에는 창조 세계에 대한 깊은 사랑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민감함이 있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하나님의 손길이 깃든 '제2의 성경'이었다. 또한, 그들은 엄격한 금욕과 고행, 그리고 깊은 기도를 통해 영적 성숙을 추구했다.

이러한 켈트 수도원 운동이 낳은 가장 독특하고 강력한 선교 동력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 혹은 '그리스도를 위한 유배'라는 개념인 Peregrinatio pro Christo였다.

Peregrinatio pro Christo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 아일랜드 수도사들에게 '순례'는 지상의 모든 안락함과 애착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해 정처 없이 낯선 땅을 떠도는 최고의 영적 수행이었다. 그들은 특정한 선교 전략이나 목표 지점을 가지고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채, 복음을 전하고 수도 공동체를 세울 곳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바다로 나아갔다. 이는 안정된 고향을 떠나라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에 대한 가장 철저한 응답이었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행위였다. 이 자발적 유배는 그들을 유럽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고 영향력 있는 선교사들로 만들었다.

2.3. 아일랜드 선교사들: 유럽 대륙의 재복음화
Peregrinatio의 영성에 사로잡힌 수많은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작은 배(coracle)를 타고 바다를 건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유럽 대륙으로 향했다.

콜룸바(Columba, c. 521-597)와 아이오나 수도원: 아일랜드 왕족 출신인 콜룸바는 563년 12명의 동료와 함께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작은 섬 아이오나(Iona)에 정착하여 수도원을 세웠다. 이 아이오나 수도원은 이후 북부 브리튼과 픽트족 복음화의 중심 기지가 되었으며, 수많은 선교사를 양성하여 잉글랜드 북부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의 '발전소' 역할을 했다.

콜룸바누스(Columbanus, c. 543-615)와 대륙 선교: 아일랜드 선교의 열정을 유럽 대륙 깊숙이까지 옮겨 심은 인물은 콜룸바누스이다. 그는 590년경 12명의 동료와 함께 갈리아(현대 프랑스)로 건너가 뤽세이유(Luxeuil)를 비롯한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의 엄격한 수도 규칙과 타협 없는 신앙은 세속화된 프랑크 왕국의 귀족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그의 영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결국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의 보비오(Bobbio)에 마지막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이 세운 수도원들은 중세 초 유럽의 영적, 지적 중심지가 되어 암흑기를 밝히는 등불 역할을 했다.

로마 선교와의 만남과 갈등: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북쪽에서 내려와 잉글랜드를 복음화하고 있을 때, 남쪽에서는 교황 그레고리 1세가 파견한 로마 선교사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Canterbury)가 앵글로색슨족을 복음화하고 있었다. 이 두 선교 흐름은 결국 잉글랜드 중부에서 만나게 되었고, 부활절 날짜 계산법, 수도사의 삭발 방식 등 교회의 관습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664년 휘트비 회의(Synod of Whitby)에서 결국 로마의 관습을 따르기로 결정되면서 켈트 교회의 독자성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아일랜드 선교가 남긴 영적 유산은 중세 유럽 교회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일랜드 수도원 선교는 선교가 반드시 거대한 제국의 후원이나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문명의 중심이 무너졌을 때, 변방의 작은 공동체가 지녔던 순수한 영성과 희생적인 헌신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역사적 사례이다.

제3부 검과 십자가: 중세 선교의 흐름 (c. 800-1500 AD)
중세는 기독교 선교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시대이다. 한편으로는 교회와 국가가 결합된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힘을 바탕으로 유럽의 경계를 넓히는 대규모 확장이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강압과 폭력이 동원되고 선교의 본질이 심각하게 왜곡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두움 속에서도 프란체스코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숭고한 노력 또한 계속되었다.

3.1. 샤를마뉴와 '기독교 세계': 정복으로서의 선교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Charlemagne)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한 사건은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이로써 고대 로마 제국의 이상을 계승하는, 교회와 국가가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로 결합된 '기독교 세계'(Corpus Christianum)가 탄생했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의 이념 속에서 선교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선교는 이제 단순히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넘어, 제국의 경계를 확장하고 이교도 '야만족'들을 기독교 문명 안으로 편입시키는 정치적, 군사적 행위와 동일시되었다.

강제 개종 정책: 샤를마뉴는 수십 년에 걸친 작센 전쟁(Saxon Wars)을 통해 이교도였던 작센족을 정복하고, 그들에게 '세례 혹은 죽음'을 강요했다. 그는 정복지에 주교구를 설치하고 수도원을 세워 기독교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러한 '검의 선교'는 유럽의 기독교화를 급속도로 진전시켰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피와 폭력이 있었고, 개종은 종종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 아닌 정치적 복종의 표시에 불과했다.

북유럽과 동유럽으로의 확장: 이러한 정복과 식민화, 그리고 기독교화를 결합한 선교 모델은 이후 중세 내내 북유럽의 바이킹과 동유럽의 슬라브족, 발트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주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종종 주변 기독교 왕국과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었고, 백성들의 개종은 위로부터 강요되는 경우가 많았다.

3.2. 수도원 개혁 운동과 새로운 선교적 열정
'기독교 세계'의 확장은 교회를 부와 권력의 중심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심각한 세속화와 타락을 가져왔다. 성직자들은 영적인 지도자이기보다 봉건 영주처럼 행동했고, 수도원은 본래의 이상을 잃고 부유한 지주가 되었다. 이러한 타락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고 본래의 영성을 회복하려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들이 일어났다.

클뤼니 개혁 운동(10세기):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수도원이 봉건 영주나 주교의 간섭에서 벗어나 교황에게 직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베네딕트 규칙에 따른 엄격한 영성 생활과 전례의 회복을 강조했다. 이 개혁의 물결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수많은 수도원들을 갱신시켰고,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시토회(12세기): 클뤼니 수도원이 점차 부유해지고 화려해지자, 이에 대한 반성으로 베르나르두스(Bernard of Clairvaux)를 중심으로 한 시토회는 더욱 엄격한 청빈과 노동, 그리고 은둔 생활을 강조했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를 이루며, 노동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행위로 여겼다.

탁발 수도회(13세기):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중세 선교에 가장 큰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13세기에 등장한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s)였다. 이들은 기존의 수도사들처럼 담장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살며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운동이었다.

프란체스코회: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 c. 1181-1226)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은 '청빈, 순결, 순종'을 서약하고, 모든 소유를 버린 채 맨발로 다니며 평화의 복음을 전했다. 프란체스코는 자연 만물을 형제자매로 여기며 사랑했고, 심지어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집트로 건너가 술탄을 만나 평화적으로 대화하려 시도했다. 이는 당시의 '검의 선교'와는 정반대의, 사랑과 겸손에 기초한 선교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었다.

도미니코회: 성 도미니쿠스(Dominic de Guzmán, c. 1170-1221)가 창설한 도미니코회는 '설교자회'라는 별명처럼,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이단 사상에 맞서 정통 교리를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을 주된 사명으로 삼았다. 그들은 파리 대학과 같은 학문의 중심지에서 활동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을 배출했고, 지성과 논리를 통해 복음을 변증하는 '지적 선교'의 전통을 세웠다.

3.3. 십자군 전쟁: 선교의 비극적 왜곡
중세 선교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는 단연 십자군 전쟁(1096-1291)이다.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거의 200년간 8차례에 걸쳐 계속되면서 수많은 비극을 낳았다.

'성전'(Holy War) 이데올로기: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1095)에서 십자군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모든 죄를 사면해 주겠다고 선포하며, 이 전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했다. 이로써 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이교도를 향한 증오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전쟁의 깃발로 전락했다.

선교의 왜곡: 십자군은 선교를 '성지 탈환'이라는 군사적 행위와 동일시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했다. 사랑과 설득 대신 칼과 폭력으로 '그리스도의 원수'를 제거하는 것이 거룩한 의무가 되었다. 이는 이슬람 세계에 기독교에 대한 깊은 증오와 불신을 남겼고, 이후 수 세기 동안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십자군은 선교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실패이자 가장 심각한 배교 행위 중 하나로 기록된다.

3.4. 새로운 지평: 동방 선교와 지적 선교
십자군의 광기가 휩쓸던 시대에도,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방식의 선교적 돌파구들이 열리고 있었다.

동유럽 선교: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 9세기에 비잔틴 제국에서 파견된 형제 선교사 키릴루스(Cyril)와 메토디우스(Methodius)는 슬라브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연구하여 '키릴 문자'(Cyrillic alphabet)를 창안했다. 그리고 성경과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이는 라틴어만을 고집했던 서방 교회와는 달리, 현지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는 토착화 선교의 중요한 선례를 남겼으며, 오늘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동방 정교회 문화권의 기초를 놓았다.

네스토리안 교회의 아시아 선교: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았던 네스토리안 교회는 동쪽으로 나아가 중앙아시아와 중국, 인도에까지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선교적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교회를 세웠고, 7세기 당나라 시대에는 중국 수도 장안에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세우고 황제의 허락 아래 선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비록 이후 쇠퇴했지만, 그들의 선교는 기독교가 결코 유럽만의 종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라몬 룰(Ramon Llull, c. 1232-1315)의 대안: 십자군의 실패를 목격한 스페인의 평신도 신학자 라몬 룰은 무슬림 선교를 위한 혁신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무력으로는 결코 무슬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세 가지 새로운 전략을 제안했다. 첫째, 선교사들이 아랍어와 이슬람 문화를 깊이 연구해야 한다. 둘째, 기독교 진리를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변증하는 책을 써서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셋째, 이 모든 것을 위해 기꺼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는 직접 아랍어를 배우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무슬림 학자들과 토론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당대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시대를 훨씬 앞서간 선교 전략가로서 후대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결론: 역사 속에 나타난 선교의 다양한 얼굴
사도 시대의 종언부터 종교개혁의 여명기까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독교 선교는 실로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로마의 박해 속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순교자의 얼굴이었고, 유럽의 폐허 속에서 켈트의 영성을 꽃피운 아일랜드 수도사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제국의 깃발 아래 이교도를 정복하던 샤를마뉴의 얼굴이었고, 맨발로 가난한 이들에게 평화를 설교하던 프란체스코의 얼굴이었다. 또한, 성지를 탈환하겠다며 칼을 높이 든 십자군 기사의 얼굴이었고, 무슬림을 이해하기 위해 아랍어를 배우던 라몬 룰의 얼굴이기도 했다.

이 길고 복잡한 역사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첫째, 선교의 형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시대의 문화적, 정치적 상황과 치열하게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교회가 소수 집단일 때의 선교 방식과, 지배적인 권력이 되었을 때의 선교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둘째, 선교는 언제나 신학적 왜곡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교회가 권력과 결탁할 때, 선교는 복음의 본질인 사랑과 희생을 잃고 강압과 폭력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십자군의 역사는 비극적으로 증언한다.
셋째, 그러나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선교를 이어갈 새로운 길을 여신다. 제국의 중심이 무너졌을 때 변방의 아일랜드에서 새로운 불꽃이 일어났고, 교회가 세속화되었을 때 프란체스코와 같은 개혁가들을 통해 복음의 순수성을 회복시키셨다.

결국, 이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교(Missio Dei)가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 성공과 실패를 모두 사용하시며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거대한 과정임을 보여준다. 종교개혁과 대항해시대의 도래와 함께, 세계 선교는 이제 유럽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중세 교회가 남긴 빛과 그림자는, 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후대 교회에게 중요한 성찰의 거울이 될 것이다.

교부 시대 및 중세 선교

불꽃에서 제국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초기 교회부터 중세까지의 선교 역사

서론: 사도 시대 이후, 복음의 대장정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기독교 선교는 사도 시대의 종언과 함께 막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영적, 문화적 확장 운동의 서막에 불과했다. 사도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은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토양 속에서, 때로는 박해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뿌리내리며, 마침내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거대한 숲으로 자라났다. 이 장대한 여정은 결코 단선적이거나 순탄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대의 격랑 속에서 선교의 의미와 방법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때로는 숭고하게, 때로는 비극적으로 변모해 온 복잡한 드라마였다.

본 강의안은 이 위대한 선교의 흐름을 세 개의 주요 시기로 나누어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첫째, **초기 교회의 폭발적인 확산기(c. 100-500 AD)**이다. 중앙 통제 기구 없이, 이름 없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증거와 순교의 피를 통해 복음이 어떻게 로마 제국의 심장부까지 스며들었는지를 분석한다. 이 시기 선교의 비공식적이고 관계적인 특성과, 기독교 공동체가 보여준 급진적 사랑이 어떻게 로마 사회의 대안으로 작용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 **'어둠의 시대'를 밝힌 아일랜드 선교(c. 400-800 AD)**이다. 서로마 제국의 붕괴라는 혼돈 속에서, 문명의 변방이었던 아일랜드가 어떻게 독특한 켈트 수도원 운동을 통해 유럽을 재복음화하는 선교의 중심지로 부상했는지를 추적한다. 특히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Peregrinatio pro Christo)라는 독특한 선교 동력과 그들이 남긴 영적, 문화적 유산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셋째, **중세 선교의 다채로운 흐름(c. 800-1500 AD)**이다. 샤를마뉴 대제 이후 교회와 국가가 결합된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형성 속에서 선교가 어떻게 정치적 확장과 군사적 정복의 수단으로 변모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동시에, 이러한 세속화에 저항하며 등장한 클뤼니 수도원 개혁 운동과 프란체스코회와 같은 탁발 수도회의 새로운 선교적 열정, 그리고 십자군 전쟁이라는 선교의 가장 비극적인 왜곡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라몬 룰의 지적 선교에 이르기까지, 중세 시대 선교의 빛과 그림자를 다각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이 역사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선교가 결코 고정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각 시대의 신학적, 문화적, 정치적 상황과 치열하게 상호작용하며 그 형태를 달리해 온 살아있는 유기체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 21세기의 복잡한 도전 앞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선교의 본질과 방향을 성찰하는 데 귀중한 역사적 지혜와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제1부 자발적 확산과 순교의 증거: 초기 교회의 선교 (c. 100-500 AD)
사도 시대 이후 약 4세기 동안 기독교는 예루살렘의 작은 유대교 분파에서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성장하는 경이로운 확장을 경험했다. 이 시기의 선교는 현대적인 의미의 '선교 단체'나 '파송 본부' 없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마치 누룩이 조용히 퍼져나가 전체 반죽을 부풀게 하듯, 이름 없는 수많은 평신도들의 삶과 관계, 그리고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자발적이고 유기적인 운동이었다.

1.1. 팍스 로마나: 선교를 위한 무대
초기 교회의 확산은 로마 제국이 제공한 독특한 역사적 환경,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로마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최적의 무대를 마련했다.

물리적 연결망: 로마가 군사적, 행정적 목적으로 건설한 광대한 도로망과 해적을 소탕하여 안전해진 지중해 항로는 복음 전파자들의 이동을 용이하게 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상인, 군인, 노예 등 수많은 사람들이 제국 전역을 이동하면서, 그들은 복음을 실어 나르는 무의식적인 매개체가 되었다.

언어와 사상의 통일: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코이네 그리스어'가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lingua franca)가 되었다. 이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이 언어의 장벽 없이 전달될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약성경 자체가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스토아 철학 등에서 제기된 보편적 로고스 사상이나 영혼 불멸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수용될 수 있는 철학적 토양을 마련해주었다.

영적 공허감: 팍스 로마나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안정 이면에는 깊은 영적 공허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통적인 로마의 다신교는 더 이상 개인의 실존적 질문(삶의 의미, 죽음, 고통의 문제)에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영적 갈증은 이시스, 미트라스와 같은 동방의 밀의 종교들이 성행하게 만들었고, 바로 이 틈을 비집고 기독교는 개인적 구원과 사랑의 공동체라는 강력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1.2. 이름 없는 증인들: 평신도 중심의 '관계적 선교'
초대교회 선교의 주역은 사도나 전문 사역자가 아닌, 이름 없는 평범한 신자들이었다. 역사가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이 지적했듯이, 초기 기독교의 확산은 공식적인 설교나 변증보다는 "비공식적인 선교사들의 비공식적인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삶의 현장이 선교지: 상인들은 시장에서 거래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군인들은 주둔지에서 동료들에게, 노예들은 주인의 가정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들의 삶의 모든 자리가 선교의 현장이었다. 특히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이었던 노예와 여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에게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며 존엄하다는 복음의 메시지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가정 교회(House Church)의 역할: 초기 기독교인들은 별도의 교회 건물이 없었다. 그들은 신자들의 가정에 모여 예배하고 교제했다. 이 '가정 교회'는 선교의 가장 중요한 세포이자 전초기지였다. 새로운 신자는 이 친밀하고 따뜻한 공동체 안에서 신앙을 배우고, 사랑과 돌봄을 경험하며, 자연스럽게 복음을 자신의 가족과 이웃에게 전파하는 증인으로 성장해갔다. 리디아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자신의 집을 교회로 개방한 사람들은 초기 선교의 중요한 후원자이자 지도자였다.

급진적 사랑의 실천: 초기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던진 가장 큰 충격은 그들의 '사랑의 공동체'였다. 로마 사회가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사람을 엄격히 차별했던 것과 달리, 교회 안에서는 귀족과 노예,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었다(갈 3:28). 또한,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았다. 주기적으로 역병이 창궐할 때, 로마인들은 감염을 피해 가족조차 버리고 도시를 떠났지만, 기독교인들은 도시에 남아 병든 자들을 간호하고 죽은 자들을 묻어주었다. 과부와 고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였다. 이러한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은 이교도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말로 하는 설교보다 더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되었다.

1.3. 순교의 피: 죽음으로 증언된 신앙
초기 기독교의 확산은 결코 평화로운 과정이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은 유일신 신앙 때문에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하기를 거부했고, 황제 숭배를 거부했다. 이는 로마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반사회적, 반국가적 행위로 간주되어, 네로 황제 이후 약 250년간 간헐적이지만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박해와 순교는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2세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증인으로서의 죽음: '순교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마르튀스'(martys)는 본래 '증인'이라는 뜻이다. 순교자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평안 가운데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부활의 소망이 실제임을 온몸으로 증언했다.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찬송하는 그들의 모습은 로마 군중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가?"

변증가들의 지적 투쟁: 박해에 맞서, 유스티누스 순교자(Justin Martyr),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변증가'(Apologist)들은 기독교 신앙을 지적으로 변호하는 글들을 썼다. 그들은 기독교가 결코 무신론적이거나 비이성적인 미신이 아니며, 오히려 헬라 철학이 추구하던 최고의 진리를 완성하는 '참된 철학'임을 논증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도덕적이고 충성스러운 시민임을 주장하며 황제와 원로원을 설득하고자 했다. 이러한 지적 노력은 기독교가 단순한 하층민의 종교가 아니라, 지성인들에게도 호소력 있는 진리 체계임을 보여주었다.

1.4.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세계의 탄생: 선교의 전환점
수 세기 동안의 박해 끝에, 기독교 역사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칙령으로 기독교는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공인받았고,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380년에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국교로 선포된다.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 선교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위로부터의 선교' 시작: 이전까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확산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황제와 지배계층의 후원 아래 '위로부터의 선교'가 가능해졌다. 대규모 교회 건물이 세워지고, 성직자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수많은 이교도들이 사회적, 정치적 유익을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대중 개종'(mass conversion) 현상이 일어났다.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형성: 이로써 교회와 제국이 거의 동일시되는 '기독교 세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로마 시민이 되는 것과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거의 같은 의미가 되었다. 선교의 목표는 이제 개인의 신실한 회심보다는, 제국의 경계를 확장하고 이교도 '야만족'들을 기독교 문명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빛과 그림자: 이러한 변화는 교회가 더 이상 박해의 위협 없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하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는 엄청난 '빛'을 가져왔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탁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며, 진정한 회심 없는 명목상의 신자들이 급증하는 '그림자'를 낳았다. 또한, 과거에는 사랑과 설득으로 이루어지던 선교가 점차 강압과 폭력의 수단을 동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위험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이 '기독교 세계' 모델은 이후 천 년간의 중세 선교를 규정하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된다.

제2부 변방에서 중심으로: 아일랜드 수도원 선교 (c. 400-800 AD)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5세기경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유럽 대륙은 정치적 혼란과 문화적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과거 로마가 제공했던 안정과 질서, 연결망이 사라지면서 기독교의 확산 동력도 약화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 로마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었던 문명의 변방, 아일랜드에서 새로운 형태의 선교 운동이 불꽃처럼 일어나 유럽 대륙을 재복음화하는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2.1. 성 패트릭: 아일랜드 복음화의 씨앗
아일랜드 선교의 문을 연 인물은 성 패트릭(St. Patrick, c. 385-461)이다. 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선교 드라마다.

노예에서 선교사로: 브리튼의 로마-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패트릭은 16세 때 아일랜드 해적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갔다. 그는 6년간 양을 치는 고독한 노예 생활 속에서 뜨거운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극적으로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꿈속에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자신을 다시 불러 복음을 전해달라고 호소하는 환상을 본다. 그는 이 부르심에 순종하여 사제로 서품을 받고, 자신을 노예로 삼았던 바로 그 땅, 켈트족의 이교 문화가 지배하던 아일랜드로 다시 돌아가 선교사가 되었다.

토착화된 선교 방식: 패트릭의 선교 방식은 로마의 방식과는 달랐다. 그는 로마의 교구(diocese) 중심의 행정 구조를 이식하는 대신, 아일랜드의 사회 구조인 부족(clan) 중심 체제를 존중했다. 그는 먼저 각 지역의 부족장(chieftain)에게 접근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허락과 보호 아래 선교 활동을 펼쳤다. 또한, 그는 켈트 문화의 상징들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여 복음을 설명하는 데 활용했다. 예를 들어, 세 잎 클로버를 통해 삼위일체를 설명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그의 토착화된 접근 방식을 잘 보여준다.

수도원 중심의 교회: 패트릭과 그의 제자들은 아일랜드 전역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들은 주교가 다스리는 교구가 아니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아일랜드 교회가 이후 유럽 대륙과는 다른 독특한 '수도원 중심'의 형태를 띠게 되는 기초를 놓았다. 이 수도원들은 단순한 기도와 수행의 장소를 넘어, 켈트 기독교의 영성과 학문, 예술, 그리고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2.2. 켈트 수도원 운동: 선교의 엔진
서로마 멸망 이후 유럽 대륙의 학문과 문화가 쇠퇴하던 시기, 아일랜드의 수도원들은 역설적으로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학문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들은 성경과 고전을 필사하고, 아름다운 채색 필사본(illuminated manuscript)을 제작했으며(대표적으로 '켈스의 서' Book of Kells), 독특한 켈트 영성을 꽃피웠다.

켈트 영성의 핵심에는 창조 세계에 대한 깊은 사랑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민감함이 있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하나님의 손길이 깃든 '제2의 성경'이었다. 또한, 그들은 엄격한 금욕과 고행, 그리고 깊은 기도를 통해 영적 성숙을 추구했다.

이러한 켈트 수도원 운동이 낳은 가장 독특하고 강력한 선교 동력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 혹은 '그리스도를 위한 유배'라는 개념인 Peregrinatio pro Christo였다.

Peregrinatio pro Christo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 아일랜드 수도사들에게 '순례'는 지상의 모든 안락함과 애착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해 정처 없이 낯선 땅을 떠도는 최고의 영적 수행이었다. 그들은 특정한 선교 전략이나 목표 지점을 가지고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채, 복음을 전하고 수도 공동체를 세울 곳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바다로 나아갔다. 이는 안정된 고향을 떠나라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에 대한 가장 철저한 응답이었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행위였다. 이 자발적 유배는 그들을 유럽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고 영향력 있는 선교사들로 만들었다.

2.3. 아일랜드 선교사들: 유럽 대륙의 재복음화
Peregrinatio의 영성에 사로잡힌 수많은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작은 배(coracle)를 타고 바다를 건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유럽 대륙으로 향했다.

콜룸바(Columba, c. 521-597)와 아이오나 수도원: 아일랜드 왕족 출신인 콜룸바는 563년 12명의 동료와 함께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작은 섬 아이오나(Iona)에 정착하여 수도원을 세웠다. 이 아이오나 수도원은 이후 북부 브리튼과 픽트족 복음화의 중심 기지가 되었으며, 수많은 선교사를 양성하여 잉글랜드 북부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의 '발전소' 역할을 했다.

콜룸바누스(Columbanus, c. 543-615)와 대륙 선교: 아일랜드 선교의 열정을 유럽 대륙 깊숙이까지 옮겨 심은 인물은 콜룸바누스이다. 그는 590년경 12명의 동료와 함께 갈리아(현대 프랑스)로 건너가 뤽세이유(Luxeuil)를 비롯한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의 엄격한 수도 규칙과 타협 없는 신앙은 세속화된 프랑크 왕국의 귀족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그의 영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결국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의 보비오(Bobbio)에 마지막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이 세운 수도원들은 중세 초 유럽의 영적, 지적 중심지가 되어 암흑기를 밝히는 등불 역할을 했다.

로마 선교와의 만남과 갈등: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북쪽에서 내려와 잉글랜드를 복음화하고 있을 때, 남쪽에서는 교황 그레고리 1세가 파견한 로마 선교사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Canterbury)가 앵글로색슨족을 복음화하고 있었다. 이 두 선교 흐름은 결국 잉글랜드 중부에서 만나게 되었고, 부활절 날짜 계산법, 수도사의 삭발 방식 등 교회의 관습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664년 휘트비 회의(Synod of Whitby)에서 결국 로마의 관습을 따르기로 결정되면서 켈트 교회의 독자성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아일랜드 선교가 남긴 영적 유산은 중세 유럽 교회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일랜드 수도원 선교는 선교가 반드시 거대한 제국의 후원이나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문명의 중심이 무너졌을 때, 변방의 작은 공동체가 지녔던 순수한 영성과 희생적인 헌신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역사적 사례이다.

제3부 검과 십자가: 중세 선교의 흐름 (c. 800-1500 AD)
중세는 기독교 선교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시대이다. 한편으로는 교회와 국가가 결합된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힘을 바탕으로 유럽의 경계를 넓히는 대규모 확장이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강압과 폭력이 동원되고 선교의 본질이 심각하게 왜곡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두움 속에서도 프란체스코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숭고한 노력 또한 계속되었다.

3.1. 샤를마뉴와 '기독교 세계': 정복으로서의 선교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Charlemagne)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한 사건은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이로써 고대 로마 제국의 이상을 계승하는, 교회와 국가가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로 결합된 '기독교 세계'(Corpus Christianum)가 탄생했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의 이념 속에서 선교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선교는 이제 단순히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넘어, 제국의 경계를 확장하고 이교도 '야만족'들을 기독교 문명 안으로 편입시키는 정치적, 군사적 행위와 동일시되었다.

강제 개종 정책: 샤를마뉴는 수십 년에 걸친 작센 전쟁(Saxon Wars)을 통해 이교도였던 작센족을 정복하고, 그들에게 '세례 혹은 죽음'을 강요했다. 그는 정복지에 주교구를 설치하고 수도원을 세워 기독교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러한 '검의 선교'는 유럽의 기독교화를 급속도로 진전시켰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피와 폭력이 있었고, 개종은 종종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 아닌 정치적 복종의 표시에 불과했다.

북유럽과 동유럽으로의 확장: 이러한 정복과 식민화, 그리고 기독교화를 결합한 선교 모델은 이후 중세 내내 북유럽의 바이킹과 동유럽의 슬라브족, 발트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주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종종 주변 기독교 왕국과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었고, 백성들의 개종은 위로부터 강요되는 경우가 많았다.

3.2. 수도원 개혁 운동과 새로운 선교적 열정
'기독교 세계'의 확장은 교회를 부와 권력의 중심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심각한 세속화와 타락을 가져왔다. 성직자들은 영적인 지도자이기보다 봉건 영주처럼 행동했고, 수도원은 본래의 이상을 잃고 부유한 지주가 되었다. 이러한 타락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고 본래의 영성을 회복하려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들이 일어났다.

클뤼니 개혁 운동(10세기):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수도원이 봉건 영주나 주교의 간섭에서 벗어나 교황에게 직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베네딕트 규칙에 따른 엄격한 영성 생활과 전례의 회복을 강조했다. 이 개혁의 물결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수많은 수도원들을 갱신시켰고,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시토회(12세기): 클뤼니 수도원이 점차 부유해지고 화려해지자, 이에 대한 반성으로 베르나르두스(Bernard of Clairvaux)를 중심으로 한 시토회는 더욱 엄격한 청빈과 노동, 그리고 은둔 생활을 강조했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를 이루며, 노동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행위로 여겼다.

탁발 수도회(13세기):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중세 선교에 가장 큰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13세기에 등장한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s)였다. 이들은 기존의 수도사들처럼 담장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살며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운동이었다.

프란체스코회: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 c. 1181-1226)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은 '청빈, 순결, 순종'을 서약하고, 모든 소유를 버린 채 맨발로 다니며 평화의 복음을 전했다. 프란체스코는 자연 만물을 형제자매로 여기며 사랑했고, 심지어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집트로 건너가 술탄을 만나 평화적으로 대화하려 시도했다. 이는 당시의 '검의 선교'와는 정반대의, 사랑과 겸손에 기초한 선교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었다.

도미니코회: 성 도미니쿠스(Dominic de Guzmán, c. 1170-1221)가 창설한 도미니코회는 '설교자회'라는 별명처럼,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이단 사상에 맞서 정통 교리를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을 주된 사명으로 삼았다. 그들은 파리 대학과 같은 학문의 중심지에서 활동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을 배출했고, 지성과 논리를 통해 복음을 변증하는 '지적 선교'의 전통을 세웠다.

3.3. 십자군 전쟁: 선교의 비극적 왜곡
중세 선교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는 단연 십자군 전쟁(1096-1291)이다.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거의 200년간 8차례에 걸쳐 계속되면서 수많은 비극을 낳았다.

'성전'(Holy War) 이데올로기: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1095)에서 십자군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모든 죄를 사면해 주겠다고 선포하며, 이 전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했다. 이로써 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이교도를 향한 증오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전쟁의 깃발로 전락했다.

선교의 왜곡: 십자군은 선교를 '성지 탈환'이라는 군사적 행위와 동일시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했다. 사랑과 설득 대신 칼과 폭력으로 '그리스도의 원수'를 제거하는 것이 거룩한 의무가 되었다. 이는 이슬람 세계에 기독교에 대한 깊은 증오와 불신을 남겼고, 이후 수 세기 동안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십자군은 선교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실패이자 가장 심각한 배교 행위 중 하나로 기록된다.

3.4. 새로운 지평: 동방 선교와 지적 선교
십자군의 광기가 휩쓸던 시대에도,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방식의 선교적 돌파구들이 열리고 있었다.

동유럽 선교: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 9세기에 비잔틴 제국에서 파견된 형제 선교사 키릴루스(Cyril)와 메토디우스(Methodius)는 슬라브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연구하여 '키릴 문자'(Cyrillic alphabet)를 창안했다. 그리고 성경과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이는 라틴어만을 고집했던 서방 교회와는 달리, 현지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는 토착화 선교의 중요한 선례를 남겼으며, 오늘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동방 정교회 문화권의 기초를 놓았다.

네스토리안 교회의 아시아 선교: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았던 네스토리안 교회는 동쪽으로 나아가 중앙아시아와 중국, 인도에까지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선교적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교회를 세웠고, 7세기 당나라 시대에는 중국 수도 장안에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세우고 황제의 허락 아래 선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비록 이후 쇠퇴했지만, 그들의 선교는 기독교가 결코 유럽만의 종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라몬 룰(Ramon Llull, c. 1232-1315)의 대안: 십자군의 실패를 목격한 스페인의 평신도 신학자 라몬 룰은 무슬림 선교를 위한 혁신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무력으로는 결코 무슬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세 가지 새로운 전략을 제안했다. 첫째, 선교사들이 아랍어와 이슬람 문화를 깊이 연구해야 한다. 둘째, 기독교 진리를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변증하는 책을 써서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셋째, 이 모든 것을 위해 기꺼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는 직접 아랍어를 배우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무슬림 학자들과 토론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당대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시대를 훨씬 앞서간 선교 전략가로서 후대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결론: 역사 속에 나타난 선교의 다양한 얼굴
사도 시대의 종언부터 종교개혁의 여명기까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독교 선교는 실로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로마의 박해 속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순교자의 얼굴이었고, 유럽의 폐허 속에서 켈트의 영성을 꽃피운 아일랜드 수도사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제국의 깃발 아래 이교도를 정복하던 샤를마뉴의 얼굴이었고, 맨발로 가난한 이들에게 평화를 설교하던 프란체스코의 얼굴이었다. 또한, 성지를 탈환하겠다며 칼을 높이 든 십자군 기사의 얼굴이었고, 무슬림을 이해하기 위해 아랍어를 배우던 라몬 룰의 얼굴이기도 했다.

이 길고 복잡한 역사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첫째, 선교의 형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시대의 문화적, 정치적 상황과 치열하게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교회가 소수 집단일 때의 선교 방식과, 지배적인 권력이 되었을 때의 선교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둘째, 선교는 언제나 신학적 왜곡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교회가 권력과 결탁할 때, 선교는 복음의 본질인 사랑과 희생을 잃고 강압과 폭력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십자군의 역사는 비극적으로 증언한다.
셋째, 그러나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선교를 이어갈 새로운 길을 여신다. 제국의 중심이 무너졌을 때 변방의 아일랜드에서 새로운 불꽃이 일어났고, 교회가 세속화되었을 때 프란체스코와 같은 개혁가들을 통해 복음의 순수성을 회복시키셨다.

결국, 이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교(Missio Dei)가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 성공과 실패를 모두 사용하시며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거대한 과정임을 보여준다. 종교개혁과 대항해시대의 도래와 함께, 세계 선교는 이제 유럽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중세 교회가 남긴 빛과 그림자는, 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후대 교회에게 중요한 성찰의 거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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Дэлхийн Интернэт Номлолын Нийгэмлэг (SWIM) нь 1996 онд байгуулагдсан номлогчийн байгууллага бөгөөд 20 гаруй жилийн турш интернет болон мэдээллийн технологийн тусламжтайгаар дэлхийн номлолд хувь нэмрээ оруулсаар ирсэ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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