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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신학적 이해와 평가.

종교신학 (Theology of Religion)

타종교와의 만남: 초대교회부터 현대까지 기독교 신학의 응답

서론: '타자'에 대한 오랜 질문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은 단순히 여러 종교를 비교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 내부에 존재하는 비판적이고 본질적인 분과입니다. 이 학문은 교회가 시작된 이래로 끊임없이 마주해 온 근본적인 질문과 씨름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결정적이고 특수한 계시가 인류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다채로운 종교적 신념 및 실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분야 전체는 하나의 깊은 신학적 긴장 관계에 의해 추동됩니다. 한편으로는 '특수성의 스캔들(scandal of particularity)'이 존재합니다. 이는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만 중재된다는 핵심적인 기독교 신앙 고백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세계의 현실과,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의지를 베푸시는 정의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확신이 존재합니다.   

이 복잡한 역사를 탐색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는 고전이 된 세 가지 유형론—배타주의(Exclusivism), 포함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를 주요 분석 틀로 사용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정적인 상자로 취급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해 온 역동적인 패러다임으로 다룰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 틀을 넘어 종교 간의 만남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하려는 현대의 방법론들을 탐구할 것입니다.

제1부: 역사적 기초와 근대 이전의 만남
이 첫 번째 부분에서는 현대의 논쟁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자기 이해를 형성한 근본적인 만남들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립하고자 합니다.

1.1 초대교회: 정죄와 수용 사이에서
초기 기독교 운동은 세 가지 주요 '타자'에 맞서 자신을 정의해야 했습니다. 모태 종교인 유대교, 지배적이었던 그리스-로마의 이교, 그리고 그리스 철학의 지적 조류가 그것입니다. 이에 대한 응답은 결코 획일적이지 않았으며, 이후 모든 기독교적 태도의 선례를 남겼습니다.   

유스티누스 순교자와 '로고스 스페르마티코스' (말씀의 씨앗)
2세기 변증가였던 유스티누스는 선구적인 포함주의적 접근을 대표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육신하신 바로 그 신적 로고스(말씀)가 역사 속, 특히 그리스 철학 안에 진리의 '씨앗'(spermatikos)을 흩뿌렸다고 주장했습니다. 유스티누스에게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인물들은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 안에서 온전히 계시된 진리에 무의식적으로 참여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수용 전략이었습니다. 즉, 기독교는 새롭고 이상한 컬트가 아니라, 인간 이성의 가장 높은 열망을 성취하고 명확히 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거부: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인물은 테르툴리아누스로, 그는 강력한 배타주의적 목소리를 냅니다. 그에게 그리스 철학은 이단의 어머니이자 포용이 아닌 거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질문은 신적 계시와 인간 이성 사이의 급진적인 불연속성에 대한 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입장은 다른 체계들을 경쟁자로 간주하며 기독교 신앙의 자기 충족성과 최종성을 강조합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게네스와 같은 인물들은 더 복잡하고 종합적인 접근법을 발전시켰습니다. 클레멘트는 율법이 히브리인들을 위한 것이었듯, 철학은 그리스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교사' 역할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위대한 학자였던 오리게네스는 주변의 철학 체계들과 깊이 교류했으나, 그의 사변적인 신학은 훗날 이단으로 정죄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작업은 주변 문화를 단순히 거부하기보다는 그것과 지적으로 교류하려는 자신감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논쟁은 단순히 종교신학의 역사적 서막이 아니라, 이후 전개될 모든 역사의 원형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 사상에 주어진 근본적인 선택지들을 처음으로 확립한 사건이었습니다. 유스티누스의 수용 전략과 테르툴리아누스의 거부 전략 사이의 대립은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비기독교 세계 속에서 생존하고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신학적 전략의 차이였습니다. 유스티누스의 '로고스 스페르마티코스' 개념은 현대 포함주의(예: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직접적인 지적 조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의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되는 보편적인 신적 현존을 상정합니다. 반면, 테르툴리아누스의 입장은 현대 배타주의(예: 헨드릭 크래머)의 선구자입니다. 이는 계시와 인간의 종교/철학 사이의 급진적인 불연속성을 가정합니다. 따라서 현대의 배타주의와 포함주의 패러다임은 20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라, 2세기와 3세기에 처음으로 명료화된 논증들이 정교하게 발전된 형태입니다. 이는 기독교 신학 자체에 내재된 지속적인 구조적 긴장을 드러냅니다.

1.2 중세 스콜라주의: 아퀴나스와 이슬람과의 만남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에 이르러 이슬람은 더 이상 멀리 있는 '타자'가 아니라, 강력한 문명적, 지적 이웃이었습니다. 아비센나(이븐 시나)나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와 같은 이슬람 철학자들에 의해 보존되고 주석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재발견되면서 스콜라주의 발전의 주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지적 교류와 신학적 비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중적인 접근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이슬람 철학을 순전히 이성적인 근거 위에서 다루며, 그 주창자들을 진리의 동반 탐구자로 대했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 아베로에스는 '주석가'로 칭함). 그는 신앙과 이성의 기념비적인 종합을 구축하기 위해 그들의 개념적 도구들을 활용했으며, 지식 추구에 있어 비기독교 자료로부터 배우려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이성의 대화였습니다.   

다른 한편, 이슬람을 계시 종교로서 다룰 때 아퀴나스의 어조는 극적으로 바뀝니다. 선교사들을 위한 지침서로 쓰인 그의 저서 《이교도 논박 대전》(Summa Contra Gentiles)에서 그는 논쟁적인 비판을 가합니다. 그는 이슬람의 진리 주장이 의심스러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논증합니다.   

이슬람은 진리와 기적의 설득력이 아닌 칼의 힘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 약속들은 육체적 쾌락에 호소하여 현명한 자들보다는 "잔인한 자들과 사막의 방랑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자신의 사명을 입증할 초자연적 표적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슬람은 구약과 신약의 증언들을 자신의 서사에 맞게 왜곡했습니다.   

아퀴나스의 이중적 태도는 '이성의 대화'(철학)와 '계시의 대화'(신학) 사이의 중요한 구분을 드러내며, 이는 오늘날 종교 간 대화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한 신학자가 어떻게 동시에 차용자인 동시에 비판가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아퀴나스가 이슬람 학자들을 통해 전수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들을 기꺼이 사용한 것은 지적 수용의 행위입니다. 동시에 그가 이슬람의 종교적 기초를 가혹하게 비판한 것은 신학적 논쟁의 행위입니다. 이 모순은 그의 사상 체계를 이해함으로써 해결됩니다. 아퀴나스에게 자연 이성은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이므로, 그는 무슬림 철학자와 공유된 이성적 기반 위에서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나 성육신과 같은 계시적 진리는 초자연적인 선물입니다. 이 관점에서 이슬람은 단지 다른 철학이 아니라 경쟁적인 계시였으며, 그는 이를 기독교 변증학에서 파생된 기준(기적, 도덕성, 성경과의 연속성)에 따라 평가했습니다. 이는 이성으로 접근 가능한 진리는 보편적이며 공통 기반이 될 수 있지만, 계시로부터 온 진리는 특수하며 구별과 비판의 근거가 된다는 위계를 암시합니다. 이러한 중세적 구분은 종교 간 대화가 공유된 윤리(이성)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아니면 논쟁적인 교리(계시)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에 대한 현대적 논쟁을 예고합니다.   

1.3 종교개혁: 루터와 '하나님의 채찍'
종교개혁가들, 특히 마르틴 루터에게 주된 비기독교 '타자'는 오스만 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의 군사적 확장은 유럽에 실존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위협에 대한 신학적 해석
루터의 반응은 지정학적이기보다는 주로 신학적이었습니다. 그는 교황이 촉구한 신성한 '십자군'을 이기적이고 신학적으로 파산한 발상으로 거부했습니다. 대신 그는 튀르크의 진격을 '하나님의 채찍'(   

flagellum Dei)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진정한 적인 로마의 적그리스도가 이끄는, 부패하고 회개하지 않는 기독교 세계에 대한 신적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응답: 회개와 세속적 방어
따라서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전투는 영적인 전투, 즉 회개였습니다. 교회의 역할은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설교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튀르크에 대한 군사적 방어는 필요하지만 세속적인 의무로서, '성전'이 아니라 신이 부여한 역할에 따라 신민을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해야 할 세속 권위자(황제, 제후)들에 의해 수행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또한 이슬람과 신학적으로도 씨름했는데, 꾸란의 오류를 파악하고 논박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개종에 저항할 수 있도록 꾸란의 라틴어 번역을 지지했습니다.   

루터의 관점은 종교개혁의 강력한 '내면으로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외부의 '타자'는 주로 교회의 내부 부패를 비추는 거울이자 내부 개혁의 촉매제로 이해됩니다. 즉각적인 위협은 오스만 군대라는 외부적인 것이었지만 , 루터의 진단은 기독교 세계의 죄성과 교황 제도의 부패라는 내부적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외부의 위협은 하나님에 의해 내부 징계를 위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튀르크는 '채찍'일 뿐, 질병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이는 만남의 전체 구도를 재구성합니다. 주된 대응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회개)이며, 군사적 대응은 부차적이고 탈신성화됩니다. 그것은 교회의 신성한 사명이 아니라 국가에 의한 치안 및 통치의 문제입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사상에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는데, 외부의 종교적 적에 대한 집단적이고 신성화된 행동보다는 내부의 영적 순수성과 교리적 정확성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낳았습니다. 이는 영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라는 '두 왕국'을 분리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제2부: 거대한 분기점: 현대 신학의 패러다임
이 부분에서는 세계 선교, 탈계몽주의 사상, 그리고 탈식민주의 의식의 힘에 의해 추동된 세 가지 주요 현대적 접근법의 결정 과정을 분석합니다. 이 세 패러다임의 핵심적인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아래의 비교표는 각 입장의 주요 특징을 요약하여 제시합니다.

현대 종교신학 패러다임 비교					
패러다임	주요 주창자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	타종교의 위상	구원의 길	핵심 개념
배타주의	헨드릭 크래머	유일하고 유일한 구원자	계시와 근본적으로 불연속적인 인간의 종교적 노력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 신앙을 통해서만	성서적 실재론 / 불연속성
포함주의	칼 라너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규범적이고 결정적인 구원자, 그러나 그의 은총은 보편적으로 활동함	'진리의 빛'을 담고 있으며, 암묵적이거나 준비적인 길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가능함	익명의 그리스도인 / 성취
다원주의	폴 니터 / 존 힉	다수의 규범적 구원자 또는 신적 실재의 현현 중 하나	궁극적 실재에 이르는 독립적이고 유효한 길	다양한 종교 전통을 통해 가능함	신 중심적 전환 /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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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배타주의 – 특수성의 스캔들
네덜란드의 선교학자 헨드릭 크래머는 그의 영향력 있는 저서 《비기독교 세계 속의 기독교 메시지》(1938)에서 20세기 그리스도 중심적 배타주의의 가장 강력한 논증을 제시합니다.   

크래머의 '성서적 실재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일한 신적 자기 계시와 다른 모든 종교들 사이에 절대적이고 질적인 구별, 즉 급진적인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들은 인간 노력의 산물이며, "존재의 총체성을 파악하려는 인간의 시도"입니다. 그것들은 신적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종교성의 표현입니다.   

반면, 복음은 하나님의 행위이며, 교회 자체의 '경험적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인간 종교에 대한 심판으로 서 있는 하향식 주도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는 성취의 관계가 아니라 회심과 중생의 관계입니다. 공유된 신념에는 '접촉점'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공유된 인간 조건에만 접촉점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연속성이 아닌 대결의 신학입니다.   

2.2 포함주의 – 교회의 벽을 넘어서는 그리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 《우리 시대에》(Nostra Aetate, 1965)는 특히 로마 가톨릭 내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순간으로, 순수한 배타주의적 입장에서 결정적으로 전환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현대 종교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일 공식 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는 가톨릭교회가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참되고 거룩한 것을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으며" 그들의 교리와 계율을 "진심으로 존중한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합니다. 이는 타종교에 대한 새로운 존중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선언문은 각 종교에 대해 구체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힌두교: 신화, 철학, 금욕적 수행을 통해 "신적 신비"를 탐구하는 점을 인정합니다.   

불교: 세상의 불완전성을 깨닫고 "최고의 조명" 또는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점을 인식합니다.   

이슬람교: 유일신 숭배, 아브라함에 대한 존경, 예수를 예언자로, 마리아를 공경하는 점 등 공유된 신앙을 특별히 주목합니다. 문서는 과거의 갈등을 잊고 사회 정의와 평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촉구합니다.   

유대교: 교회의 신앙의 뿌리임을 확인하고, 신을 죽였다는 비난을 거부하며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를 규탄합니다.   

이러한 존중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는 확고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이 선언은 타종교들이 "모든 사람을 비추는 그 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포함주의의 본질입니다. 즉,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은 교회의 가시적인 경계 밖에서도 활동하고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3 다원주의 –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종교다원주의는 신학적 지형에 대한 근본적인 재구성을 제안합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옮겼듯이, 신학도 그리스도/기독교를 종교 세계의 중심에서 옮겨 그 자리에 하나님/궁극적 실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해방신학과 불교의 영향을 받은 전 가톨릭 사제 폴 니터는 이 관점의 핵심적인 주창자입니다. 그는 예수 자신이 자신의 신적 지위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 '신 중심적' 인물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배타적인 고등 기독론은 초대교회의 특정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후대의 발전이라는 것입니다. 다원주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자신들에게는 규범적임을 확언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배타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규범적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다"와 같은 '고백적 언어'를 "예수는 유일한 주님이시다"라는 존재론적 사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처와 같은 다른 인물들과 다른 전통들을 동일한 신적 실재에 이르는 별개의 유효한 길로 인정하는 문을 엽니다. 초점은 교리적 주장들에서 평화, 정의, 해방과 같은 공유된 윤리적 목표(구원 중심적 또는 해방 중심적 접근)로 이동합니다.   

이 세 가지 현대 패러다임은 단순히 다른 의견이 아니라, 계시의 본질,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고 역사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해석을 대표합니다. 크래머의 배타주의는 계시를 '점적(punctiliar)'으로 봅니다. 즉,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이고 유일하게 일어났습니다. 역사는 그리스도 이전/이후로, 지리는 기독교/비기독교로 나뉩니다. 《우리 시대에》의 포함주의는 계시를 '확산적(diffused)'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방사되는 빛과 같아서 그 '빛줄기'가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역사는 그리스도를 정점이자 성취로 하는 보편적인 은총의 이야기입니다. 니터의 다원주의는 계시를 '다중적(multiplex)'으로 봅니다. 궁극적 실재는 역사를 통해 다양하고 문화적으로 특수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역사는 그리스도에게로 수렴하는 단일한 선이 아니라, 평행하고 잠재적으로 교차하는 여러 길들의 연속입니다. 따라서 이 패러다임들 사이의 선택은 단순히 '편협'하거나 '개방적'인 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론과 역사철학 자체에 관한 핵심적인 신학적 헌신에 대한 심오한 선택입니다. 이 논쟁은 단지 타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에 관한 논쟁입니다.   

제3부: 현대의 방법론과 대화의 미래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세 가지 패러다임 모델을 넘어, 최근 수십 년 동안 등장한 종교 간 교류를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론들을 검토합니다.

3.1 후기자유주의적 전환: 조지 린드벡의 문화-언어 모델
보수적인 명제주의와 자유주의적인 경험주의 모두에 불만족했던 예일대 신학자 조지 린드벡은 그의 저서 《교리의 본질》(The Nature of Doctrine)에서 '문화-언어적' 접근법을 제안했습니다.   

린드벡은 종교가 포괄적인 문화적, 언어적 체계처럼 기능한다고 주장합니다. 종교는 공동체의 현실과 경험을 형성하는 '언어'(상징, 이야기, 의례)를 제공합니다. 교리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진리 주장(명제주의)도, 공통된 내적 감정의 표현(경험주의)도 아닙니다. 대신, 그것은 해당 신앙의 언어가 어떻게 올바르게 사용되고 살아져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문법 규칙'입니다.   

이 모델은 종교 간 만남의 목표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합니다. 목표는 누구의 교리가 진리인지 증명하거나 공통된 경험적 핵심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그것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유사합니다. 목표는 타자의 '문법'과 '삶의 형식'을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채택하지 않으면서도 내부로부터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판단과 종합보다는 깊은 기술(description)과 상호 이해를 우선시합니다.   

3.2 깊이 있는 참여: 네 가지 실천 모델
관상적 길: 토머스 머튼
트라피스트회 수사 토머스 머튼은 특히 선불교와의 영적 체험의 대화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동서양의 '부정적(apophatic)' 또는 신비주의적 전통에서처럼, 관상 수행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수행자들이 교리적 차이를 초월하는 '공통 기반'의 경험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상호 변혁'과 공유된 영적 수련을 통해 '근원적 일치'를 회복하고, 여러 전통을 아우르는 '영적 가족'을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재종교적 길: 라이문도 파니카
힌두교도 아버지와 스페인 가톨릭 신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파니카는 자신의 삶을 '기독교-힌두교-불교인'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신학은    

종교 간(inter-religious, 두 개의 분리된 것 사이)의 신학이 아니라, 하나의 복합적인 개인적 경험 안에서의(intra-religious) 신학입니다.

그의 '힌두교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도발적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실재, 즉 신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 사이의 보편적 중재자가 힌두교 내에서 비록 그렇게 인식되지는 않더라도 다른 이름과 형태(예: 이스바라, 푸루샤)로 현존하며 활동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의 삼위일체 신학은 성부를 불교의 부정적 침묵(열반, 공)과, 성자(로고스)를 힌두교의 인격적 현현들과, 그리고 성령을 모든 전통에 내재하는 신적 에너지와 연결시킵니다. 이는 기독교 신비주의 범주에 기반을 둔 급진적인 종합적, 다원주의적 비전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학문적 길: 프랜시스 클루니의 비교신학
예수회 학자 프랜시스 클루니는 '비교신학'이라는 엄격한 학문적 방법론을 개발했습니다. 이는 중립적인 비교종교학이나 이론적인 종교신학과 구별됩니다.   

비교신학자는 자신의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채('신학'), 다른 전통의 성스러운 텍스트에 대한 훈련되고, 깊이 있으며, 공감적인 연구에 참여합니다('비교'). 목표는 종합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전통의 텍스트를 깊이 읽는 과정이    

자신의 전통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통찰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신앙의 렌즈를 통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주된 도구는 면밀하고 신중한 텍스트 읽기입니다.   

윤리적 길: "우리와 당신 사이의 공통의 말씀"
2007년 138명의 저명한 무슬림 학자들이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보낸 이 공개서한은 실천적인 종교 간 관계에서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이 서한은 그리스도나 무함마드의 본질과 같은 논쟁적인 교리적 문제를 우회하고, 꾸란과 성경 모두가 공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계명,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 공통 기반을 제안합니다. 이는 상당수의 무슬림 지도자들이 공유된 핵심 가치에 기반한 대화를 시작하려는 전략적이고 신학적인 움직임을 나타내며, 평화, 정의, 상호 존중에 관한 실질적인 협력의 토대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현대 방법론들은 타종교에 대해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세 가지 패러다임)에서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로의 중요한 전환을 보여줍니다. 그것들은 정적인 이론적 분류보다 실천, 관계, 그리고 변혁을 우선시합니다. 고전적인 패러다임들은 주로 종교 세계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지도를 확립하는 데 관심이 있는 교리적 분류 작업이었습니다. 반면 린드벡의 모델은 질문을 "그것이 진실인가?"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로 바꾸며, 기능과 내적 일관성을 이해하려는 방법론적 전환을 이룹니다. 머튼, 파니카, 클루니, 그리고 "공통의 말씀" 저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인 참여    

실천을 제안합니다: 관상 수행(머튼), 전기적 종합(파니카), 깊이 있는 텍스트 연구(클루니), 그리고 윤리적 협력("공통의 말씀"). 이러한 전환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이론에서 구체적이고, 특수하며, 관계적인 지식 형태로 나아가는 더 넓은 문화적, 학문적 움직임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종교신학의 미래는 세 가지 패러다임을 정교화하는 것보다 이러한 다양하고 실천적인 참여 방법론을 개발하고 성찰하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초점은 이론에서 실천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결론: 다양한 신앙의 세계 속에서의 신실한 증언
우리는 길고 복잡한 여정을 추적해왔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적 입장은 초대교회의 정체성 투쟁에서부터 중세의 논쟁과 종교개혁의 내적 성찰을 거쳐, 현대 사상의 극명하게 갈라진 길들,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의 새로운 실천적 방법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움직임은 대체로 대결과 정죄에서 대화와 깊은 배움으로 향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핵심적인 도전 과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고백하는 신앙의 온전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다른 전통에서 발견되는 진리와 거룩함에 대해 진정으로 열려 있을 수 있는가?

대화는 어떻게 한편으로는 상대주의적 다원주의의 함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가부장적인 포함주의의 함정을 피할 수 있는가?

대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회심인가, 상호 이해인가, 사회적 협력인가, 아니면 상호 영적 변혁인가? 그 답은 전적으로 개인이 채택하는 신학적 패러다임에 달려 있습니다.

21세기 기독교 종교신학의 과제는 '타자'의 문제에 대한 단 하나의 최종적인 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중적 시선'을 기르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특수성에 대한 더욱 깊어지는 신실함으로 안을 향해 바라보고, 인류가 하나님의 신비를 명명하고자 했던 다양한 방식들을 향해 더욱 넓어지는 공감과 지적 호기심으로 밖을 향해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신실하고 열린 참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타자'가 단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로움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끌 수 있는 선물임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종교신학

타종교와의 만남: 초대교회부터 현대까지 기독교 신학의 응답

서론: '타자'에 대한 오랜 질문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은 단순히 여러 종교를 비교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 내부에 존재하는 비판적이고 본질적인 분과입니다. 이 학문은 교회가 시작된 이래로 끊임없이 마주해 온 근본적인 질문과 씨름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결정적이고 특수한 계시가 인류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다채로운 종교적 신념 및 실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분야 전체는 하나의 깊은 신학적 긴장 관계에 의해 추동됩니다. 한편으로는 '특수성의 스캔들(scandal of particularity)'이 존재합니다. 이는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만 중재된다는 핵심적인 기독교 신앙 고백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세계의 현실과,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의지를 베푸시는 정의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확신이 존재합니다.  

이 복잡한 역사를 탐색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는 고전이 된 세 가지 유형론—배타주의(Exclusivism), 포함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를 주요 분석 틀로 사용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정적인 상자로 취급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해 온 역동적인 패러다임으로 다룰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 틀을 넘어 종교 간의 만남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하려는 현대의 방법론들을 탐구할 것입니다.

제1부: 역사적 기초와 근대 이전의 만남
이 첫 번째 부분에서는 현대의 논쟁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자기 이해를 형성한 근본적인 만남들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립하고자 합니다.

1.1 초대교회: 정죄와 수용 사이에서
초기 기독교 운동은 세 가지 주요 '타자'에 맞서 자신을 정의해야 했습니다. 모태 종교인 유대교, 지배적이었던 그리스-로마의 이교, 그리고 그리스 철학의 지적 조류가 그것입니다. 이에 대한 응답은 결코 획일적이지 않았으며, 이후 모든 기독교적 태도의 선례를 남겼습니다.  

유스티누스 순교자와 '로고스 스페르마티코스' (말씀의 씨앗)
2세기 변증가였던 유스티누스는 선구적인 포함주의적 접근을 대표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육신하신 바로 그 신적 로고스(말씀)가 역사 속, 특히 그리스 철학 안에 진리의 '씨앗'(spermatikos)을 흩뿌렸다고 주장했습니다. 유스티누스에게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인물들은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 안에서 온전히 계시된 진리에 무의식적으로 참여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수용 전략이었습니다. 즉, 기독교는 새롭고 이상한 컬트가 아니라, 인간 이성의 가장 높은 열망을 성취하고 명확히 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거부: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인물은 테르툴리아누스로, 그는 강력한 배타주의적 목소리를 냅니다. 그에게 그리스 철학은 이단의 어머니이자 포용이 아닌 거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질문은 신적 계시와 인간 이성 사이의 급진적인 불연속성에 대한 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입장은 다른 체계들을 경쟁자로 간주하며 기독교 신앙의 자기 충족성과 최종성을 강조합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게네스와 같은 인물들은 더 복잡하고 종합적인 접근법을 발전시켰습니다. 클레멘트는 율법이 히브리인들을 위한 것이었듯, 철학은 그리스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교사' 역할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위대한 학자였던 오리게네스는 주변의 철학 체계들과 깊이 교류했으나, 그의 사변적인 신학은 훗날 이단으로 정죄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작업은 주변 문화를 단순히 거부하기보다는 그것과 지적으로 교류하려는 자신감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논쟁은 단순히 종교신학의 역사적 서막이 아니라, 이후 전개될 모든 역사의 원형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 사상에 주어진 근본적인 선택지들을 처음으로 확립한 사건이었습니다. 유스티누스의 수용 전략과 테르툴리아누스의 거부 전략 사이의 대립은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비기독교 세계 속에서 생존하고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신학적 전략의 차이였습니다. 유스티누스의 '로고스 스페르마티코스' 개념은 현대 포함주의(예: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직접적인 지적 조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의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되는 보편적인 신적 현존을 상정합니다. 반면, 테르툴리아누스의 입장은 현대 배타주의(예: 헨드릭 크래머)의 선구자입니다. 이는 계시와 인간의 종교/철학 사이의 급진적인 불연속성을 가정합니다. 따라서 현대의 배타주의와 포함주의 패러다임은 20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라, 2세기와 3세기에 처음으로 명료화된 논증들이 정교하게 발전된 형태입니다. 이는 기독교 신학 자체에 내재된 지속적인 구조적 긴장을 드러냅니다.

1.2 중세 스콜라주의: 아퀴나스와 이슬람과의 만남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에 이르러 이슬람은 더 이상 멀리 있는 '타자'가 아니라, 강력한 문명적, 지적 이웃이었습니다. 아비센나(이븐 시나)나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와 같은 이슬람 철학자들에 의해 보존되고 주석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재발견되면서 스콜라주의 발전의 주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지적 교류와 신학적 비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중적인 접근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이슬람 철학을 순전히 이성적인 근거 위에서 다루며, 그 주창자들을 진리의 동반 탐구자로 대했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 아베로에스는 '주석가'로 칭함). 그는 신앙과 이성의 기념비적인 종합을 구축하기 위해 그들의 개념적 도구들을 활용했으며, 지식 추구에 있어 비기독교 자료로부터 배우려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이성의 대화였습니다.  

다른 한편, 이슬람을 계시 종교로서 다룰 때 아퀴나스의 어조는 극적으로 바뀝니다. 선교사들을 위한 지침서로 쓰인 그의 저서 《이교도 논박 대전》(Summa Contra Gentiles)에서 그는 논쟁적인 비판을 가합니다. 그는 이슬람의 진리 주장이 의심스러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논증합니다.  

이슬람은 진리와 기적의 설득력이 아닌 칼의 힘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 약속들은 육체적 쾌락에 호소하여 현명한 자들보다는 "잔인한 자들과 사막의 방랑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자신의 사명을 입증할 초자연적 표적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슬람은 구약과 신약의 증언들을 자신의 서사에 맞게 왜곡했습니다.  

아퀴나스의 이중적 태도는 '이성의 대화'(철학)와 '계시의 대화'(신학) 사이의 중요한 구분을 드러내며, 이는 오늘날 종교 간 대화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한 신학자가 어떻게 동시에 차용자인 동시에 비판가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아퀴나스가 이슬람 학자들을 통해 전수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들을 기꺼이 사용한 것은 지적 수용의 행위입니다. 동시에 그가 이슬람의 종교적 기초를 가혹하게 비판한 것은 신학적 논쟁의 행위입니다. 이 모순은 그의 사상 체계를 이해함으로써 해결됩니다. 아퀴나스에게 자연 이성은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이므로, 그는 무슬림 철학자와 공유된 이성적 기반 위에서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나 성육신과 같은 계시적 진리는 초자연적인 선물입니다. 이 관점에서 이슬람은 단지 다른 철학이 아니라 경쟁적인 계시였으며, 그는 이를 기독교 변증학에서 파생된 기준(기적, 도덕성, 성경과의 연속성)에 따라 평가했습니다. 이는 이성으로 접근 가능한 진리는 보편적이며 공통 기반이 될 수 있지만, 계시로부터 온 진리는 특수하며 구별과 비판의 근거가 된다는 위계를 암시합니다. 이러한 중세적 구분은 종교 간 대화가 공유된 윤리(이성)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아니면 논쟁적인 교리(계시)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에 대한 현대적 논쟁을 예고합니다.  

1.3 종교개혁: 루터와 '하나님의 채찍'
종교개혁가들, 특히 마르틴 루터에게 주된 비기독교 '타자'는 오스만 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의 군사적 확장은 유럽에 실존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위협에 대한 신학적 해석
루터의 반응은 지정학적이기보다는 주로 신학적이었습니다. 그는 교황이 촉구한 신성한 '십자군'을 이기적이고 신학적으로 파산한 발상으로 거부했습니다. 대신 그는 튀르크의 진격을 '하나님의 채찍'(  

flagellum Dei)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진정한 적인 로마의 적그리스도가 이끄는, 부패하고 회개하지 않는 기독교 세계에 대한 신적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응답: 회개와 세속적 방어
따라서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전투는 영적인 전투, 즉 회개였습니다. 교회의 역할은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설교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튀르크에 대한 군사적 방어는 필요하지만 세속적인 의무로서, '성전'이 아니라 신이 부여한 역할에 따라 신민을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해야 할 세속 권위자(황제, 제후)들에 의해 수행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또한 이슬람과 신학적으로도 씨름했는데, 꾸란의 오류를 파악하고 논박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개종에 저항할 수 있도록 꾸란의 라틴어 번역을 지지했습니다.  

루터의 관점은 종교개혁의 강력한 '내면으로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외부의 '타자'는 주로 교회의 내부 부패를 비추는 거울이자 내부 개혁의 촉매제로 이해됩니다. 즉각적인 위협은 오스만 군대라는 외부적인 것이었지만 , 루터의 진단은 기독교 세계의 죄성과 교황 제도의 부패라는 내부적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외부의 위협은 하나님에 의해 내부 징계를 위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튀르크는 '채찍'일 뿐, 질병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이는 만남의 전체 구도를 재구성합니다. 주된 대응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회개)이며, 군사적 대응은 부차적이고 탈신성화됩니다. 그것은 교회의 신성한 사명이 아니라 국가에 의한 치안 및 통치의 문제입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사상에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는데, 외부의 종교적 적에 대한 집단적이고 신성화된 행동보다는 내부의 영적 순수성과 교리적 정확성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낳았습니다. 이는 영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라는 '두 왕국'을 분리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제2부: 거대한 분기점: 현대 신학의 패러다임
이 부분에서는 세계 선교, 탈계몽주의 사상, 그리고 탈식민주의 의식의 힘에 의해 추동된 세 가지 주요 현대적 접근법의 결정 과정을 분석합니다. 이 세 패러다임의 핵심적인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아래의 비교표는 각 입장의 주요 특징을 요약하여 제시합니다.

현대 종교신학 패러다임 비교
패러다임 주요 주창자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 타종교의 위상 구원의 길 핵심 개념
배타주의 헨드릭 크래머 유일하고 유일한 구원자 계시와 근본적으로 불연속적인 인간의 종교적 노력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 신앙을 통해서만 성서적 실재론 / 불연속성
포함주의 칼 라너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규범적이고 결정적인 구원자, 그러나 그의 은총은 보편적으로 활동함 '진리의 빛'을 담고 있으며, 암묵적이거나 준비적인 길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가능함 익명의 그리스도인 / 성취
다원주의 폴 니터 / 존 힉 다수의 규범적 구원자 또는 신적 실재의 현현 중 하나 궁극적 실재에 이르는 독립적이고 유효한 길 다양한 종교 전통을 통해 가능함 신 중심적 전환 /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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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배타주의 – 특수성의 스캔들
네덜란드의 선교학자 헨드릭 크래머는 그의 영향력 있는 저서 《비기독교 세계 속의 기독교 메시지》(1938)에서 20세기 그리스도 중심적 배타주의의 가장 강력한 논증을 제시합니다.  

크래머의 '성서적 실재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일한 신적 자기 계시와 다른 모든 종교들 사이에 절대적이고 질적인 구별, 즉 급진적인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들은 인간 노력의 산물이며, "존재의 총체성을 파악하려는 인간의 시도"입니다. 그것들은 신적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종교성의 표현입니다.  

반면, 복음은 하나님의 행위이며, 교회 자체의 '경험적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인간 종교에 대한 심판으로 서 있는 하향식 주도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는 성취의 관계가 아니라 회심과 중생의 관계입니다. 공유된 신념에는 '접촉점'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공유된 인간 조건에만 접촉점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연속성이 아닌 대결의 신학입니다.  

2.2 포함주의 – 교회의 벽을 넘어서는 그리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 《우리 시대에》(Nostra Aetate, 1965)는 특히 로마 가톨릭 내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순간으로, 순수한 배타주의적 입장에서 결정적으로 전환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현대 종교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일 공식 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는 가톨릭교회가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참되고 거룩한 것을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으며" 그들의 교리와 계율을 "진심으로 존중한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합니다. 이는 타종교에 대한 새로운 존중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선언문은 각 종교에 대해 구체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힌두교: 신화, 철학, 금욕적 수행을 통해 "신적 신비"를 탐구하는 점을 인정합니다.  

불교: 세상의 불완전성을 깨닫고 "최고의 조명" 또는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점을 인식합니다.  

이슬람교: 유일신 숭배, 아브라함에 대한 존경, 예수를 예언자로, 마리아를 공경하는 점 등 공유된 신앙을 특별히 주목합니다. 문서는 과거의 갈등을 잊고 사회 정의와 평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촉구합니다.  

유대교: 교회의 신앙의 뿌리임을 확인하고, 신을 죽였다는 비난을 거부하며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를 규탄합니다.  

이러한 존중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는 확고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이 선언은 타종교들이 "모든 사람을 비추는 그 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포함주의의 본질입니다. 즉,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은 교회의 가시적인 경계 밖에서도 활동하고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3 다원주의 –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종교다원주의는 신학적 지형에 대한 근본적인 재구성을 제안합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옮겼듯이, 신학도 그리스도/기독교를 종교 세계의 중심에서 옮겨 그 자리에 하나님/궁극적 실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해방신학과 불교의 영향을 받은 전 가톨릭 사제 폴 니터는 이 관점의 핵심적인 주창자입니다. 그는 예수 자신이 자신의 신적 지위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 '신 중심적' 인물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배타적인 고등 기독론은 초대교회의 특정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후대의 발전이라는 것입니다. 다원주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자신들에게는 규범적임을 확언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배타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규범적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다"와 같은 '고백적 언어'를 "예수는 유일한 주님이시다"라는 존재론적 사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처와 같은 다른 인물들과 다른 전통들을 동일한 신적 실재에 이르는 별개의 유효한 길로 인정하는 문을 엽니다. 초점은 교리적 주장들에서 평화, 정의, 해방과 같은 공유된 윤리적 목표(구원 중심적 또는 해방 중심적 접근)로 이동합니다.  

이 세 가지 현대 패러다임은 단순히 다른 의견이 아니라, 계시의 본질,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고 역사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해석을 대표합니다. 크래머의 배타주의는 계시를 '점적(punctiliar)'으로 봅니다. 즉,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이고 유일하게 일어났습니다. 역사는 그리스도 이전/이후로, 지리는 기독교/비기독교로 나뉩니다. 《우리 시대에》의 포함주의는 계시를 '확산적(diffused)'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방사되는 빛과 같아서 그 '빛줄기'가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역사는 그리스도를 정점이자 성취로 하는 보편적인 은총의 이야기입니다. 니터의 다원주의는 계시를 '다중적(multiplex)'으로 봅니다. 궁극적 실재는 역사를 통해 다양하고 문화적으로 특수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역사는 그리스도에게로 수렴하는 단일한 선이 아니라, 평행하고 잠재적으로 교차하는 여러 길들의 연속입니다. 따라서 이 패러다임들 사이의 선택은 단순히 '편협'하거나 '개방적'인 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론과 역사철학 자체에 관한 핵심적인 신학적 헌신에 대한 심오한 선택입니다. 이 논쟁은 단지 타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에 관한 논쟁입니다.  

제3부: 현대의 방법론과 대화의 미래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세 가지 패러다임 모델을 넘어, 최근 수십 년 동안 등장한 종교 간 교류를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론들을 검토합니다.

3.1 후기자유주의적 전환: 조지 린드벡의 문화-언어 모델
보수적인 명제주의와 자유주의적인 경험주의 모두에 불만족했던 예일대 신학자 조지 린드벡은 그의 저서 《교리의 본질》(The Nature of Doctrine)에서 '문화-언어적' 접근법을 제안했습니다.  

린드벡은 종교가 포괄적인 문화적, 언어적 체계처럼 기능한다고 주장합니다. 종교는 공동체의 현실과 경험을 형성하는 '언어'(상징, 이야기, 의례)를 제공합니다. 교리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진리 주장(명제주의)도, 공통된 내적 감정의 표현(경험주의)도 아닙니다. 대신, 그것은 해당 신앙의 언어가 어떻게 올바르게 사용되고 살아져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문법 규칙'입니다.  

이 모델은 종교 간 만남의 목표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합니다. 목표는 누구의 교리가 진리인지 증명하거나 공통된 경험적 핵심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그것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유사합니다. 목표는 타자의 '문법'과 '삶의 형식'을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채택하지 않으면서도 내부로부터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판단과 종합보다는 깊은 기술(description)과 상호 이해를 우선시합니다.  

3.2 깊이 있는 참여: 네 가지 실천 모델
관상적 길: 토머스 머튼
트라피스트회 수사 토머스 머튼은 특히 선불교와의 영적 체험의 대화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동서양의 '부정적(apophatic)' 또는 신비주의적 전통에서처럼, 관상 수행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수행자들이 교리적 차이를 초월하는 '공통 기반'의 경험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상호 변혁'과 공유된 영적 수련을 통해 '근원적 일치'를 회복하고, 여러 전통을 아우르는 '영적 가족'을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재종교적 길: 라이문도 파니카
힌두교도 아버지와 스페인 가톨릭 신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파니카는 자신의 삶을 '기독교-힌두교-불교인'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신학은  

종교 간(inter-religious, 두 개의 분리된 것 사이)의 신학이 아니라, 하나의 복합적인 개인적 경험 안에서의(intra-religious) 신학입니다.

그의 '힌두교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도발적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실재, 즉 신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 사이의 보편적 중재자가 힌두교 내에서 비록 그렇게 인식되지는 않더라도 다른 이름과 형태(예: 이스바라, 푸루샤)로 현존하며 활동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의 삼위일체 신학은 성부를 불교의 부정적 침묵(열반, 공)과, 성자(로고스)를 힌두교의 인격적 현현들과, 그리고 성령을 모든 전통에 내재하는 신적 에너지와 연결시킵니다. 이는 기독교 신비주의 범주에 기반을 둔 급진적인 종합적, 다원주의적 비전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학문적 길: 프랜시스 클루니의 비교신학
예수회 학자 프랜시스 클루니는 '비교신학'이라는 엄격한 학문적 방법론을 개발했습니다. 이는 중립적인 비교종교학이나 이론적인 종교신학과 구별됩니다.  

비교신학자는 자신의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채('신학'), 다른 전통의 성스러운 텍스트에 대한 훈련되고, 깊이 있으며, 공감적인 연구에 참여합니다('비교'). 목표는 종합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전통의 텍스트를 깊이 읽는 과정이  

자신의 전통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통찰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신앙의 렌즈를 통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주된 도구는 면밀하고 신중한 텍스트 읽기입니다.  

윤리적 길: "우리와 당신 사이의 공통의 말씀"
2007년 138명의 저명한 무슬림 학자들이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보낸 이 공개서한은 실천적인 종교 간 관계에서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이 서한은 그리스도나 무함마드의 본질과 같은 논쟁적인 교리적 문제를 우회하고, 꾸란과 성경 모두가 공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계명,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 공통 기반을 제안합니다. 이는 상당수의 무슬림 지도자들이 공유된 핵심 가치에 기반한 대화를 시작하려는 전략적이고 신학적인 움직임을 나타내며, 평화, 정의, 상호 존중에 관한 실질적인 협력의 토대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현대 방법론들은 타종교에 대해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세 가지 패러다임)에서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로의 중요한 전환을 보여줍니다. 그것들은 정적인 이론적 분류보다 실천, 관계, 그리고 변혁을 우선시합니다. 고전적인 패러다임들은 주로 종교 세계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지도를 확립하는 데 관심이 있는 교리적 분류 작업이었습니다. 반면 린드벡의 모델은 질문을 "그것이 진실인가?"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로 바꾸며, 기능과 내적 일관성을 이해하려는 방법론적 전환을 이룹니다. 머튼, 파니카, 클루니, 그리고 "공통의 말씀" 저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인 참여  

실천을 제안합니다: 관상 수행(머튼), 전기적 종합(파니카), 깊이 있는 텍스트 연구(클루니), 그리고 윤리적 협력("공통의 말씀"). 이러한 전환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이론에서 구체적이고, 특수하며, 관계적인 지식 형태로 나아가는 더 넓은 문화적, 학문적 움직임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종교신학의 미래는 세 가지 패러다임을 정교화하는 것보다 이러한 다양하고 실천적인 참여 방법론을 개발하고 성찰하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초점은 이론에서 실천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결론: 다양한 신앙의 세계 속에서의 신실한 증언
우리는 길고 복잡한 여정을 추적해왔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적 입장은 초대교회의 정체성 투쟁에서부터 중세의 논쟁과 종교개혁의 내적 성찰을 거쳐, 현대 사상의 극명하게 갈라진 길들,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의 새로운 실천적 방법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움직임은 대체로 대결과 정죄에서 대화와 깊은 배움으로 향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핵심적인 도전 과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고백하는 신앙의 온전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다른 전통에서 발견되는 진리와 거룩함에 대해 진정으로 열려 있을 수 있는가?

대화는 어떻게 한편으로는 상대주의적 다원주의의 함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가부장적인 포함주의의 함정을 피할 수 있는가?

대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회심인가, 상호 이해인가, 사회적 협력인가, 아니면 상호 영적 변혁인가? 그 답은 전적으로 개인이 채택하는 신학적 패러다임에 달려 있습니다.

21세기 기독교 종교신학의 과제는 '타자'의 문제에 대한 단 하나의 최종적인 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중적 시선'을 기르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특수성에 대한 더욱 깊어지는 신실함으로 안을 향해 바라보고, 인류가 하나님의 신비를 명명하고자 했던 다양한 방식들을 향해 더욱 넓어지는 공감과 지적 호기심으로 밖을 향해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신실하고 열린 참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타자'가 단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로움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끌 수 있는 선물임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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Дэлхийн Интернэт Номлолын Нийгэмлэг (SWIM) нь 1996 онд байгуулагдсан номлогчийн байгууллага бөгөөд 20 гаруй жилийн турш интернет болон мэдээллийн технологийн тусламжтайгаар дэлхийн номлолд хувь нэмрээ оруулсаар ирсэ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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