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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합리적 근거, 악의 문제, 과학과 종교의 관계

세계관과 변증

이성의 시대, 신앙을 말하다: 합리적 근거, 악의 문제, 그리고 과학과의 동행

서론: 흔들리는 믿음, 이성의 질문 앞에 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신앙'은 종종 '맹목'과 동의어로 여겨진다.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와 같은 '신 무신론자'들의 목소리가 높은 지적 권위를 얻는 시대 속에서, 종교적 믿음은 증거 없이 도약하는 비이성적 행위이자, 과학적 사실과 충돌하는 낡은 미신의 잔재로 치부되곤 한다. 이러한 지성적 분위기 속에서 신앙은 세 가지 거대한 질문 앞에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첫째, 과연 신앙에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근거가 존재하는가? 둘째, 만약 선하고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에 만연한 이 끔찍한 악과 고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셋째, 과학이 우주의 비밀을 속속들이 밝혀내는 오늘날, 종교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 세 가지 질문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 많은 이들의 신앙을 뿌리째 흔드는 실존적 도전이다. 신앙을 가지려는 구도자에게는 넘기 힘든 거대한 장벽으로, 신앙을 가진 이에게는 떨칠 수 없는 내면의 의심으로 작용한다. 많은 사람들은 결국 이성과 신앙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거짓된 딜레마 앞에 서게 되고, 차가운 이성의 법정에서 신앙은 유죄 판결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신앙과 이성은 정말로 양립 불가능한 적대 관계인가? 악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가? 과학의 발전은 종교의 종말을 고하는 조종(弔鐘)인가? 본고는 이러한 통념에 도전하며, 기독교 신앙이 결코 지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견고한 합리적 토대 위에 서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우주와 인간의 이성, 도덕, 역사를 통해 신의 존재를 가리키는 다양한 합리적 근거들을 탐구할 것이다. 다음으로,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지는 '악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여, 그것이 신 존재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이고, 기독교가 이 문제에 대해 제공하는 심오하고 독특한 답변을 제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전쟁'이라는 왜곡된 프레임에서 해방시켜, 둘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갈등이 아닌 상호 보완과 조화일 수 있음을, 나아가 기독교 신앙이 근대 과학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을 밝힐 것이다. 이 지성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신앙이 어둠 속으로의 맹목적인 도약이 아니라, 밝은 빛을 향해 눈을 뜨는 이성적인 신뢰의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I. 신앙의 합리적 근거: 이성은 신을 가리키는가?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이들은 종종 "믿음은 증거가 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이성을 신앙의 적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로 여겨왔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은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그리고 "알기 위해 믿는다(fides quaerens intellectum)"고 말하며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했다. 신앙은 이성이 멈춘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제공하는 증거들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실재를 신뢰하는 합리적인 결단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성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1. 우주론적 논증: 모든 것의 시작에는 시작이 없는 시작자가 있다

가장 오래되고 직관적인 논증 중 하나는 우주의 존재 자체에서 출발한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우주론적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첫째, 시작된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경험과 과학적 탐구의 기초가 되는 형이상학적 원리이다. 어떤 것도 무(無)로부터 스스로 생겨날 수 없다.
둘째, 우주는 시작을 가졌다. 이 주장은 과거에는 철학적 논의에 머물렀지만, 20세기 현대 천문학의 발견들은 이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허블의 법칙)을 역으로 추적하면, 모든 시공간과 물질, 에너지가 약 138억 년 전 하나의 지극히 작고 뜨거운 특이점(singularity)에서 폭발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빅뱅 이론'에 도달한다. 또한, 닫힌계의 무질서도(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은, 만약 우주가 영원히 존재해왔다면 벌써 오래전에 모든 유용한 에너지가 소진된 '열적 죽음' 상태에 도달했어야 함을 보여준다. 현재 우주가 여전히 질서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주가 유한한 과거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셋째, 그러므로 우주에는 원인이 있다. 만약 우주가 시작되었고, 시작된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면, 우주 역시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은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의 첫 번째 원인'은 어떤 속성을 가져야 하는가? 이 원인은 시간, 공간, 물질을 포함하는 우주 자체를 시작하게 했으므로, 스스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야 하며 비물질적이어야 한다. 또한, 이 원인은 우주라는 거대한 결과를 낳았으므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 원인은 영원한 정지 상태에서 유한한 과거의 특정 시점에 우주를 시작시키기로 '선택'했으므로, 인격적인 의지를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이처럼 우주론적 논증은 우리를 '시작이 없으시며, 시간을 초월하시고, 비물질적이시며, 전능하시고, 인격적인 첫 번째 원인'으로 인도하는데, 이는 유신론의 신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2. 목적론적 논증: 모든 설계에는 설계자가 있다

우주가 단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미세 조정(Fine-tuning)' 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또 다른 논증으로 이끈다. 목적론적 논증 또는 설계 논증은 우주에 나타나는 복잡성과 질서가 우연의 산물이라고 보기에는 통계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며, 지적인 설계자의 존재를 강력하게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물리학자들은 20세기 후반부터 우주를 지배하는 수십 개의 물리 상수들(중력의 세기, 전자기력, 우주 상수 등)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극도로 좁은 범위 안에 설정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만약 중력이 지금보다 아주 미세하게 더 강했다면 우주는 시작과 동시에 다시 붕괴했을 것이고, 약간만 더 약했다면 별과 은하가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주 상수는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 10의 120제곱 분의 1의 정확도로 조정되어 있는데, 이는 온 북미 대륙에 동전을 쌓아 올리고 그중 단 하나의 동전에 표시를 해둔 뒤, 눈을 가린 채 단번에 그 동전을 집어낼 확률보다도 훨씬 낮은 확률이다.

이러한 '우주적 우연'에 대해 자연주의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하나는 순전한 '우연'이라는 설명이지만, 이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에 가깝다. 다른 하나는 우리 우주 외에 무한히 많은 다른 우주들(다중우주)이 존재하며, 각각 다른 물리 법칙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우연히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우주에 살고 있을 뿐이라는 '다중우주 가설'이다. 그러나 다중우주 가설은 경험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하며, 왜 그렇게 많은 우주를 생성하는 '우주 생성 기계'가 존재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더 큰 문제에 봉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단순하고 합리적인 설명은, 이 우주가 지적인 설계자에 의해 생명체를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설계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정교한 시계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모래와 바람의 우연한 작용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지적인 시계공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인 것과 같다.

3. 도덕 논증: 모든 법에는 입법자가 있다

세 번째 논증은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인간의 내면, 즉 도덕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C.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탁월하게 논증했듯이, 모든 인간은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도덕 법칙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단지 개인적인 선호를 넘어, 어떤 행위는 객관적으로 '선하고' 어떤 행위는 객관적으로 '악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어린 아이를 학대하는 행위가 단지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은 '정말로 잘못된' 행위라고 주장한다.

도덕 논증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첫째, 만약 객관적인 도덕 가치와 의무가 존재한다면, 신은 존재한다. 둘째, 객관적인 도덕 가치와 의무는 존재한다. 셋째,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이 논증의 핵심은 두 번째 전제에 있다. 우리는 왜 객관적인 도덕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그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직관과 경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만약 도덕이 단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르완다의 인종 청소를 객관적으로 비난할 근거를 잃게 된다. 그것은 단지 그들 사회의 규범이었을 뿐이며, 우리의 규범과 다를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의, 사랑, 평등과 같은 가치들이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기준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초월적인 도덕 법칙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자연주의는 진화 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한 이타적 행동이 유전자에 각인된 것이라고 설명하려 하지만, 이는 왜 우리가 도덕적 '의무감'을 느끼는지,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생존에 불리한 이타적 행동(예: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것)을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객관적인 도덕 법칙의 가장 합리적인 근거는, 선하시고 정의로우신 인격적인 입법자, 즉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의 도덕적 양심은 바로 그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새겨진 희미한 흔적인 것이다.

4. 역사적 논증: 빈 무덤은 부활하신 구원자를 가리킨다

지금까지의 논증들이 일반적인 '신'의 존재를 가리킨다면, 역사적 논증은 우리를 구체적인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인도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 속의 특정 인물, 즉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는 그가 주장했던 모든 것,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주장이 진실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예수의 부활을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이라는 역사학적 방법론으로 접근할 때, 우리는 비판적인 학자들도 대부분 동의하는 몇 가지 '최소한의 사실(minimal facts)'에서 출발할 수 있다. 첫째,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둘째, 그의 제자들은 그가 묻혔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셋째, 제자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했다. 넷째,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절망에 빠져 흩어졌던 제자들은 예수를 신으로 경배하고 그의 부활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공동체(교회)로 변화되었으며, 대부분 순교를 당하기까지 그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

이 네 가지 사실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쳤다는 '도둑설'은 그들이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전파했다는 심리학적 개연성이 부족하다. 제자들이 헛것을 보았다는 '환각설'은 개인적인 경험인 환각이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집단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예수가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기절설'은 로마의 잔혹한 처형 방식과, 피를 흘려 거의 죽은 상태의 사람이 무덤을 막은 거대한 돌을 굴리고 경비병들을 피해 달아났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모든 대안 가설들이 가진 설명의 허점들을 고려할 때, 제자들이 주장했던 그대로, 즉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실제로 다시 살리셨다는 '부활'이야말로 이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가장 포괄적이고 만족스럽게 설명하는 가설이 된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 그리고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흔적들을 따라가는 합리적인 여정의 귀결이 될 수 있다.

II. 가장 큰 걸림돌, 악의 문제
신앙의 합리적 근거가 아무리 강력하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문턱을 넘지 못하게 만드는 거대한 걸림돌이 있다. 바로 '악의 문제(The Problem of Evil)'이다.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전쟁, 테러, 기아, 질병, 자연재해의 끔찍한 소식을 접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잃는 개인적인 고통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통의 현실 앞에서, "만약 전지전능하고 전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이 세상에 이토록 끔찍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는 지적, 정서적 도전이다.

1. 문제의 제기: 논리적 도전과 정서적 절규

악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뉜다. 첫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제기한 것으로 알려진 **'논리적 문제'**이다. 그 논증은 다음과 같다. 만약 신이 전능하다면, 그는 악을 제거할 능력이 있다. 만약 신이 전선(全善)하다면, 그는 악을 제거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악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전능하고 전선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논증은 신의 핵심적인 속성(전능, 전선)과 악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함을 주장함으로써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이다.

둘째는 **'정서적(혹은 실존적) 문제'**이다. 이는 추상적인 논리 문제를 넘어, 고통의 현실 한복판에서 터져 나오는 실존적인 절규에 가깝다. 어린 아이가 백혈병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혹은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참상을 목격하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감정적으로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정서적 문제 앞에서는 어떤 철학적 논증도 공허하게 들릴 수 있으며, 논리적 답변보다는 목회적 위로와 공감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적인 정직성을 위해 우리는 먼저 논리적 문제에 대한 답변을 모색해야 한다.

2. 논리적 문제에 대한 답변: 자유의지 변론

20세기 기독교 철학자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는 악의 논리적 문제에 대해 매우 강력한 반론인 **'자유의지 변론(Free Will Defense)'**을 제시했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이 왜 악을 허용하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신정론, Theodicy)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능하고 전선하신 신의 존재와 악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변론(Defense)'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의 논증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피조물을 창조하기를 원하셨다. 진정한 자유는 선을 선택할 가능성뿐만 아니라 악을 선택할 가능성도 포함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오직 선만 행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으로 만드셨다면, 그 선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강요된 순종이 아닌 자발적인 사랑을 원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유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면, 그들이 그 자유를 오용하여 악을 행할 가능성을 허용하시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피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악을 직접 창조하시거나 원하신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라는 더 큰 선을 위해 악의 '가능성'을 허용하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니다. 따라서 악의 존재가 전능하고 전선하신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반증한다는 무신론자의 주장은 실패한다. 이 자유의지 변론은 인간이 저지르는 '도덕적 악'(살인, 증오 등)의 근원을 설명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3. 더 넓은 관점: 영혼 형성 신정론

그러나 자유의지 변론만으로는 지진, 쓰나미, 질병과 같은 '자연적 악'의 문제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보완적인 설명으로 신학자 존 힉(John Hick)이 발전시킨 **'영혼 형성 신정론(Soul-making Theodicy)'**이 있다. 고대 교부 이레니우스에 뿌리를 둔 이 관점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안락하고 고통 없는 쾌락의 정원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시련과 역경을 통해 도덕적,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영혼을 빚는 장(Vale of soul-making)'으로 의도하셨다고 본다.

이 관점에 따르면, 고난과 고통은 비록 그 자체로는 악이지만, 용기, 인내, 동정심, 자비와 같은 고귀한 덕성들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 이 세상에 어떤 위험이나 어려움도 없다면, 우리는 결코 용기나 자기희생과 같은 가치를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없다면 동정심을 기를 수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과 고통을 때로는 우리의 영적 성숙과 인격적 완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의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작동하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4. 기독교 고유의 답변: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

자유의지 변론과 영혼 형성 신정론이 철학적으로 유용한 답변을 제공한다면, 기독교는 악의 문제에 대해 다른 어떤 세계관도 제공하지 못하는 심오하고 독특한 답변을 가지고 있다.

첫째, **십자가에 나타난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방관하시는 냉담한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역사 속으로, 고통의 한복판으로 직접 들어오셨다. 예수님은 가난과 배척을 경험하셨고,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으며, 가장 가까운 제자에게 배신당하시고, 불의한 재판을 받아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형벌인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끌어안으셨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절규할 때, 십자가를 통해 "내가 너와 함께 여기 있다"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둘째, **부활이 주는 '궁극적인 소망'**이다.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최종 답변은 이 땅에서의 완전한 설명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궁극적인 승리와 회복에 대한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과 고통, 죽음이 이 세상의 최종적인 권력이 아님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승전보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장차 모든 악을 심판하시고,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며, 모든 깨어진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보증이다. 이 종말론적 소망은 현재의 고통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으며, 오히려 그 고통을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잠시의 것으로 여기게 하는 힘을 준다. 기독교는 악의 문제에 대해 완벽한 '설명'을 제공하기보다는,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악을 이길 궁극적인 '소망'을 제공한다.

III. 충돌인가, 조화인가?: 과학과 종교의 관계
현대 사회에서 신앙에 대한 또 다른 강력한 도전은 과학의 영역에서 온다. 과학적 방법론이 자연 세계의 작동 원리를 놀라운 수준으로 밝혀냄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신'이라는 가설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종교는 본질적으로 서로를 배척하는 적대 관계이며, 진리의 영역을 놓고 싸우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갈등 모델(Conflict Model)'이 대중적인 상식이 되었다.

1. '갈등 모델'의 신화 해체

대중매체와 교육을 통해 널리 퍼진 갈등 모델은 종종 두 가지 역사적 사건, 즉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에 대한 종교 재판'과 '진화론을 둘러싼 기독교의 반발'을 그 대표적인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연구는 이러한 사건들이 '과학 대 종교'라는 단순한 구도로 설명될 수 없는, 훨씬 더 복잡한 정치적, 철학적, 개인적 갈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갈릴레오의 경우, 문제는 단순히 성경 해석의 차이를 넘어, 당시 학계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 과학과 새로운 코페르니쿠스 과학 사이의 충돌, 그리고 교황과의 개인적인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오히려 '과학 대 종교'라는 갈등 구도는 19세기 후반, 특정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가진 존 윌리엄 드레이퍼나 앤드루 딕슨 화이트 같은 인물들에 의해 대중화된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다. 역사적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근대 과학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비옥한 토양 위에서 태동하고 성장했다. 아이작 뉴턴, 요하네스 케플러, 로버트 보일, 블레즈 파스칼과 같은 과학 혁명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성적이고 질서정연한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 있는 우주를 탐구하고 있다고 믿었다. 우주가 이해 가능하다는 신념, 자연 법칙이 보편적이고 일정하다는 믿음, 그리고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치 있는 일이라는 신학적 동기가 있었기에 근대 과학은 발전할 수 있었다. 즉,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과 종교는 적이 아니라 동맹 관계에 더 가까웠다.

2. 대안적 관계 모델 제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설명하는 더 정확하고 생산적인 모델은 무엇일까? 신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이언 바버(Ian Barbour)는 네 가지 유형의 관계 모델을 제시했으며, 이는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갈등 (Conflict): 앞서 비판적으로 검토한 모델로, 과학적 유물론자(모든 실재는 물질뿐이라고 믿는 사람)와 성경 문자주의자(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는 사람)라는 양 극단에서 주로 발견된다. 이들은 과학과 종교가 동일한 질문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답을 내놓는다고 본다.

독립 (Independence):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제안한 '겹치지 않는 교도권(Non-Overlapping Magisteria, NOMA)' 모델이 대표적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영역의 질문에 답한다. 과학은 자연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사실의 영역)를 다루고, 종교는 삶의 '왜', 즉 궁극적인 의미와 도덕적 가치(가치의 영역)를 다룬다. 따라서 둘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충돌할 이유가 없다. 이는 갈등을 피하는 데 유용하지만, 인간의 기원이나 우주의 시작처럼 두 영역이 겹치는 중요한 문제들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대화 (Dialogue): 독립 모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관계로, 과학과 종교가 서로에게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본다. 과학은 종종 철학적, 윤리적 질문들을 제기하며(예: 유전 공학의 윤리, 인공지능의 미래), 종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지혜를 제공할 수 있다. 반대로, 과학적 발견(예: 빅뱅 이론, 양자역학)은 기존의 신학적 이해를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도록 도전할 수 있다.

통합 (Integration): 가장 긴밀한 관계로, 과학과 종교가 서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는 자연 세계를 통해 신의 존재와 속성을 발견하려는 '자연 신학'이나, 기독교 세계관이 과학 활동의 철학적 전제를 제공한다는 관점 등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과학 활동은 '자연이 질서정연하고 이해 가능하다'는 믿음을 전제해야 하는데, 바로 이 믿음의 가장 견고한 기초를 이성적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3. 과학의 한계와 종교의 역할

갈등 모델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과학주의(Scientism)', 즉 과학만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이며, 과학이 다루지 않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철학적 신념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 방법론의 본질상 스스로에게 한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과학은 반복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물리적 현상만을 다룰 수 있다. 따라서 과학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침묵한다.

의미와 목적의 문제: "나는 왜 존재하는가?", "우주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가치와 도덕의 문제: "무엇이 선하고 악한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형이상학적 문제: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는가?", "과학 법칙은 어디서 왔는가?"

미학적 문제: "무엇이 아름다운가?"

과학은 우리에게 수소 폭탄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공백을 메우는 것이 종교와 철학의 역할이다. 종교는 우리에게 실재에 대한 포괄적인 지도를 제공하며, 그 지도 안에서 과학적 탐구가 의미 있는 자리를 찾도록 돕는다. 과학이 우주라는 아름다운 시(詩)의 문법과 구조를 분석한다면, 종교는 그 시의 의미와 저자의 의도를 묻는다. 둘은 적이 아니라, 실재라는 하나의 거대한 책을 각기 다른 차원에서 읽어내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

결론: 이성을 품은 신앙, 소망을 품은 이성
우리는 이성의 시대에 신앙이 마주한 세 가지 거대한 도전을 따라 길고 험난한 지성의 여정을 걸어왔다. 첫째, 신앙은 이성의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맹목적인 도약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내면, 그리고 역사가 가리키는 증거들을 따라가는 합리적인 신뢰의 행위일 수 있음을 확인했다. 우주의 시작과 정교한 설계, 우리 안에 새겨진 보편적 도덕률, 그리고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증명된 고대의 기적인 예수의 부활은, 신앙이 견고한 이성적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인 악의 문제는,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반증하지 못함을 밝혔다. 자유의지라는 더 큰 선을 위한 악의 허용 가능성과, 고통을 통한 영혼의 성숙이라는 관점은 이 문제에 대한 철학적 답변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통의 한복판으로 들어오신 십자가의 하나님과, 모든 악과 죽음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약속하는 부활의 소망이야말로 기독교가 이 실존적 절규에 내놓는 가장 심오하고 유일한 답변이다.

셋째,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전쟁'이라는 대중적 신화와는 달리,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훨씬 더 복잡하고 생산적인 관계일 수 있음을 논증했다. 갈등보다는 대화와 통합의 모델이 둘의 관계를 더 정확하게 설명하며, 기독교 세계관은 오히려 근대 과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지성적 자궁 역할을 했음을 확인했다. 과학은 '어떻게'를 묻고 종교는 '왜'를 물으며, 둘은 실재에 대한 더 온전한 이해를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이성의 질문 앞에 위축되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들을 끌어안고 정직하게 씨름하며, 가장 깊고 포괄적인 답변을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21세기의 지성인은 더 이상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낡고 거짓된 이분법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성을 통해 신앙의 문턱에 이를 수 있으며, 신앙을 통해 이성이 가 닿을 수 없는 더 높은 진리의 지평을 바라볼 수 있다. 진정한 신앙은 이성을 품고, 진정한 이성은 소망을 품는다. 이 둘이 조화롭게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변증학 개론

이성의 시대, 신앙을 말하다: 합리적 근거, 악의 문제, 그리고 과학과의 동행

서론: 흔들리는 믿음, 이성의 질문 앞에 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신앙'은 종종 '맹목'과 동의어로 여겨진다.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와 같은 '신 무신론자'들의 목소리가 높은 지적 권위를 얻는 시대 속에서, 종교적 믿음은 증거 없이 도약하는 비이성적 행위이자, 과학적 사실과 충돌하는 낡은 미신의 잔재로 치부되곤 한다. 이러한 지성적 분위기 속에서 신앙은 세 가지 거대한 질문 앞에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첫째, 과연 신앙에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근거가 존재하는가? 둘째, 만약 선하고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에 만연한 이 끔찍한 악과 고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셋째, 과학이 우주의 비밀을 속속들이 밝혀내는 오늘날, 종교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 세 가지 질문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 많은 이들의 신앙을 뿌리째 흔드는 실존적 도전이다. 신앙을 가지려는 구도자에게는 넘기 힘든 거대한 장벽으로, 신앙을 가진 이에게는 떨칠 수 없는 내면의 의심으로 작용한다. 많은 사람들은 결국 이성과 신앙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거짓된 딜레마 앞에 서게 되고, 차가운 이성의 법정에서 신앙은 유죄 판결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신앙과 이성은 정말로 양립 불가능한 적대 관계인가? 악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가? 과학의 발전은 종교의 종말을 고하는 조종(弔鐘)인가? 본고는 이러한 통념에 도전하며, 기독교 신앙이 결코 지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견고한 합리적 토대 위에 서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우주와 인간의 이성, 도덕, 역사를 통해 신의 존재를 가리키는 다양한 합리적 근거들을 탐구할 것이다. 다음으로,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지는 '악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여, 그것이 신 존재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이고, 기독교가 이 문제에 대해 제공하는 심오하고 독특한 답변을 제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전쟁'이라는 왜곡된 프레임에서 해방시켜, 둘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갈등이 아닌 상호 보완과 조화일 수 있음을, 나아가 기독교 신앙이 근대 과학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을 밝힐 것이다. 이 지성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신앙이 어둠 속으로의 맹목적인 도약이 아니라, 밝은 빛을 향해 눈을 뜨는 이성적인 신뢰의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I. 신앙의 합리적 근거: 이성은 신을 가리키는가?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이들은 종종 "믿음은 증거가 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이성을 신앙의 적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로 여겨왔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은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그리고 "알기 위해 믿는다(fides quaerens intellectum)"고 말하며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했다. 신앙은 이성이 멈춘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제공하는 증거들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실재를 신뢰하는 합리적인 결단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성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1. 우주론적 논증: 모든 것의 시작에는 시작이 없는 시작자가 있다

가장 오래되고 직관적인 논증 중 하나는 우주의 존재 자체에서 출발한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우주론적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첫째, 시작된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경험과 과학적 탐구의 기초가 되는 형이상학적 원리이다. 어떤 것도 무(無)로부터 스스로 생겨날 수 없다.
둘째, 우주는 시작을 가졌다. 이 주장은 과거에는 철학적 논의에 머물렀지만, 20세기 현대 천문학의 발견들은 이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허블의 법칙)을 역으로 추적하면, 모든 시공간과 물질, 에너지가 약 138억 년 전 하나의 지극히 작고 뜨거운 특이점(singularity)에서 폭발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빅뱅 이론'에 도달한다. 또한, 닫힌계의 무질서도(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은, 만약 우주가 영원히 존재해왔다면 벌써 오래전에 모든 유용한 에너지가 소진된 '열적 죽음' 상태에 도달했어야 함을 보여준다. 현재 우주가 여전히 질서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주가 유한한 과거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셋째, 그러므로 우주에는 원인이 있다. 만약 우주가 시작되었고, 시작된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면, 우주 역시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은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의 첫 번째 원인'은 어떤 속성을 가져야 하는가? 이 원인은 시간, 공간, 물질을 포함하는 우주 자체를 시작하게 했으므로, 스스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야 하며 비물질적이어야 한다. 또한, 이 원인은 우주라는 거대한 결과를 낳았으므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 원인은 영원한 정지 상태에서 유한한 과거의 특정 시점에 우주를 시작시키기로 '선택'했으므로, 인격적인 의지를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이처럼 우주론적 논증은 우리를 '시작이 없으시며, 시간을 초월하시고, 비물질적이시며, 전능하시고, 인격적인 첫 번째 원인'으로 인도하는데, 이는 유신론의 신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2. 목적론적 논증: 모든 설계에는 설계자가 있다

우주가 단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미세 조정(Fine-tuning)' 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또 다른 논증으로 이끈다. 목적론적 논증 또는 설계 논증은 우주에 나타나는 복잡성과 질서가 우연의 산물이라고 보기에는 통계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며, 지적인 설계자의 존재를 강력하게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물리학자들은 20세기 후반부터 우주를 지배하는 수십 개의 물리 상수들(중력의 세기, 전자기력, 우주 상수 등)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극도로 좁은 범위 안에 설정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만약 중력이 지금보다 아주 미세하게 더 강했다면 우주는 시작과 동시에 다시 붕괴했을 것이고, 약간만 더 약했다면 별과 은하가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주 상수는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 10의 120제곱 분의 1의 정확도로 조정되어 있는데, 이는 온 북미 대륙에 동전을 쌓아 올리고 그중 단 하나의 동전에 표시를 해둔 뒤, 눈을 가린 채 단번에 그 동전을 집어낼 확률보다도 훨씬 낮은 확률이다.

이러한 '우주적 우연'에 대해 자연주의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하나는 순전한 '우연'이라는 설명이지만, 이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에 가깝다. 다른 하나는 우리 우주 외에 무한히 많은 다른 우주들(다중우주)이 존재하며, 각각 다른 물리 법칙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우연히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우주에 살고 있을 뿐이라는 '다중우주 가설'이다. 그러나 다중우주 가설은 경험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하며, 왜 그렇게 많은 우주를 생성하는 '우주 생성 기계'가 존재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더 큰 문제에 봉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단순하고 합리적인 설명은, 이 우주가 지적인 설계자에 의해 생명체를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설계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정교한 시계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모래와 바람의 우연한 작용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지적인 시계공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인 것과 같다.

3. 도덕 논증: 모든 법에는 입법자가 있다

세 번째 논증은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인간의 내면, 즉 도덕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C.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탁월하게 논증했듯이, 모든 인간은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도덕 법칙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단지 개인적인 선호를 넘어, 어떤 행위는 객관적으로 '선하고' 어떤 행위는 객관적으로 '악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어린 아이를 학대하는 행위가 단지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은 '정말로 잘못된' 행위라고 주장한다.

도덕 논증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첫째, 만약 객관적인 도덕 가치와 의무가 존재한다면, 신은 존재한다. 둘째, 객관적인 도덕 가치와 의무는 존재한다. 셋째,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이 논증의 핵심은 두 번째 전제에 있다. 우리는 왜 객관적인 도덕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그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직관과 경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만약 도덕이 단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르완다의 인종 청소를 객관적으로 비난할 근거를 잃게 된다. 그것은 단지 그들 사회의 규범이었을 뿐이며, 우리의 규범과 다를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의, 사랑, 평등과 같은 가치들이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기준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초월적인 도덕 법칙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자연주의는 진화 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한 이타적 행동이 유전자에 각인된 것이라고 설명하려 하지만, 이는 왜 우리가 도덕적 '의무감'을 느끼는지,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생존에 불리한 이타적 행동(예: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것)을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객관적인 도덕 법칙의 가장 합리적인 근거는, 선하시고 정의로우신 인격적인 입법자, 즉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의 도덕적 양심은 바로 그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새겨진 희미한 흔적인 것이다.

4. 역사적 논증: 빈 무덤은 부활하신 구원자를 가리킨다

지금까지의 논증들이 일반적인 '신'의 존재를 가리킨다면, 역사적 논증은 우리를 구체적인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인도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 속의 특정 인물, 즉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는 그가 주장했던 모든 것,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주장이 진실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예수의 부활을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이라는 역사학적 방법론으로 접근할 때, 우리는 비판적인 학자들도 대부분 동의하는 몇 가지 '최소한의 사실(minimal facts)'에서 출발할 수 있다. 첫째,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둘째, 그의 제자들은 그가 묻혔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셋째, 제자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했다. 넷째,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절망에 빠져 흩어졌던 제자들은 예수를 신으로 경배하고 그의 부활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공동체(교회)로 변화되었으며, 대부분 순교를 당하기까지 그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

이 네 가지 사실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쳤다는 '도둑설'은 그들이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전파했다는 심리학적 개연성이 부족하다. 제자들이 헛것을 보았다는 '환각설'은 개인적인 경험인 환각이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집단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예수가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기절설'은 로마의 잔혹한 처형 방식과, 피를 흘려 거의 죽은 상태의 사람이 무덤을 막은 거대한 돌을 굴리고 경비병들을 피해 달아났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모든 대안 가설들이 가진 설명의 허점들을 고려할 때, 제자들이 주장했던 그대로, 즉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실제로 다시 살리셨다는 '부활'이야말로 이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가장 포괄적이고 만족스럽게 설명하는 가설이 된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 그리고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흔적들을 따라가는 합리적인 여정의 귀결이 될 수 있다.

II. 가장 큰 걸림돌, 악의 문제
신앙의 합리적 근거가 아무리 강력하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문턱을 넘지 못하게 만드는 거대한 걸림돌이 있다. 바로 '악의 문제(The Problem of Evil)'이다.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전쟁, 테러, 기아, 질병, 자연재해의 끔찍한 소식을 접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잃는 개인적인 고통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통의 현실 앞에서, "만약 전지전능하고 전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이 세상에 이토록 끔찍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는 지적, 정서적 도전이다.

1. 문제의 제기: 논리적 도전과 정서적 절규

악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뉜다. 첫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제기한 것으로 알려진 **'논리적 문제'**이다. 그 논증은 다음과 같다. 만약 신이 전능하다면, 그는 악을 제거할 능력이 있다. 만약 신이 전선(全善)하다면, 그는 악을 제거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악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전능하고 전선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논증은 신의 핵심적인 속성(전능, 전선)과 악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함을 주장함으로써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이다.

둘째는 **'정서적(혹은 실존적) 문제'**이다. 이는 추상적인 논리 문제를 넘어, 고통의 현실 한복판에서 터져 나오는 실존적인 절규에 가깝다. 어린 아이가 백혈병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혹은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참상을 목격하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감정적으로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정서적 문제 앞에서는 어떤 철학적 논증도 공허하게 들릴 수 있으며, 논리적 답변보다는 목회적 위로와 공감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적인 정직성을 위해 우리는 먼저 논리적 문제에 대한 답변을 모색해야 한다.

2. 논리적 문제에 대한 답변: 자유의지 변론

20세기 기독교 철학자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는 악의 논리적 문제에 대해 매우 강력한 반론인 **'자유의지 변론(Free Will Defense)'**을 제시했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이 왜 악을 허용하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신정론, Theodicy)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능하고 전선하신 신의 존재와 악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변론(Defense)'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의 논증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피조물을 창조하기를 원하셨다. 진정한 자유는 선을 선택할 가능성뿐만 아니라 악을 선택할 가능성도 포함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오직 선만 행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으로 만드셨다면, 그 선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강요된 순종이 아닌 자발적인 사랑을 원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유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면, 그들이 그 자유를 오용하여 악을 행할 가능성을 허용하시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피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악을 직접 창조하시거나 원하신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라는 더 큰 선을 위해 악의 '가능성'을 허용하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니다. 따라서 악의 존재가 전능하고 전선하신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반증한다는 무신론자의 주장은 실패한다. 이 자유의지 변론은 인간이 저지르는 '도덕적 악'(살인, 증오 등)의 근원을 설명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3. 더 넓은 관점: 영혼 형성 신정론

그러나 자유의지 변론만으로는 지진, 쓰나미, 질병과 같은 '자연적 악'의 문제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보완적인 설명으로 신학자 존 힉(John Hick)이 발전시킨 **'영혼 형성 신정론(Soul-making Theodicy)'**이 있다. 고대 교부 이레니우스에 뿌리를 둔 이 관점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안락하고 고통 없는 쾌락의 정원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시련과 역경을 통해 도덕적,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영혼을 빚는 장(Vale of soul-making)'으로 의도하셨다고 본다.

이 관점에 따르면, 고난과 고통은 비록 그 자체로는 악이지만, 용기, 인내, 동정심, 자비와 같은 고귀한 덕성들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 이 세상에 어떤 위험이나 어려움도 없다면, 우리는 결코 용기나 자기희생과 같은 가치를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없다면 동정심을 기를 수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과 고통을 때로는 우리의 영적 성숙과 인격적 완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의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작동하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4. 기독교 고유의 답변: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

자유의지 변론과 영혼 형성 신정론이 철학적으로 유용한 답변을 제공한다면, 기독교는 악의 문제에 대해 다른 어떤 세계관도 제공하지 못하는 심오하고 독특한 답변을 가지고 있다.

첫째, **십자가에 나타난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방관하시는 냉담한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역사 속으로, 고통의 한복판으로 직접 들어오셨다. 예수님은 가난과 배척을 경험하셨고,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으며, 가장 가까운 제자에게 배신당하시고, 불의한 재판을 받아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형벌인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끌어안으셨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절규할 때, 십자가를 통해 "내가 너와 함께 여기 있다"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둘째, **부활이 주는 '궁극적인 소망'**이다.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최종 답변은 이 땅에서의 완전한 설명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궁극적인 승리와 회복에 대한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과 고통, 죽음이 이 세상의 최종적인 권력이 아님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승전보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장차 모든 악을 심판하시고,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며, 모든 깨어진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보증이다. 이 종말론적 소망은 현재의 고통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으며, 오히려 그 고통을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잠시의 것으로 여기게 하는 힘을 준다. 기독교는 악의 문제에 대해 완벽한 '설명'을 제공하기보다는,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악을 이길 궁극적인 '소망'을 제공한다.

III. 충돌인가, 조화인가?: 과학과 종교의 관계
현대 사회에서 신앙에 대한 또 다른 강력한 도전은 과학의 영역에서 온다. 과학적 방법론이 자연 세계의 작동 원리를 놀라운 수준으로 밝혀냄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신'이라는 가설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종교는 본질적으로 서로를 배척하는 적대 관계이며, 진리의 영역을 놓고 싸우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갈등 모델(Conflict Model)'이 대중적인 상식이 되었다.

1. '갈등 모델'의 신화 해체

대중매체와 교육을 통해 널리 퍼진 갈등 모델은 종종 두 가지 역사적 사건, 즉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에 대한 종교 재판'과 '진화론을 둘러싼 기독교의 반발'을 그 대표적인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연구는 이러한 사건들이 '과학 대 종교'라는 단순한 구도로 설명될 수 없는, 훨씬 더 복잡한 정치적, 철학적, 개인적 갈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갈릴레오의 경우, 문제는 단순히 성경 해석의 차이를 넘어, 당시 학계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 과학과 새로운 코페르니쿠스 과학 사이의 충돌, 그리고 교황과의 개인적인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오히려 '과학 대 종교'라는 갈등 구도는 19세기 후반, 특정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가진 존 윌리엄 드레이퍼나 앤드루 딕슨 화이트 같은 인물들에 의해 대중화된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다. 역사적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근대 과학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비옥한 토양 위에서 태동하고 성장했다. 아이작 뉴턴, 요하네스 케플러, 로버트 보일, 블레즈 파스칼과 같은 과학 혁명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성적이고 질서정연한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 있는 우주를 탐구하고 있다고 믿었다. 우주가 이해 가능하다는 신념, 자연 법칙이 보편적이고 일정하다는 믿음, 그리고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치 있는 일이라는 신학적 동기가 있었기에 근대 과학은 발전할 수 있었다. 즉,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과 종교는 적이 아니라 동맹 관계에 더 가까웠다.

2. 대안적 관계 모델 제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설명하는 더 정확하고 생산적인 모델은 무엇일까? 신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이언 바버(Ian Barbour)는 네 가지 유형의 관계 모델을 제시했으며, 이는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갈등 (Conflict): 앞서 비판적으로 검토한 모델로, 과학적 유물론자(모든 실재는 물질뿐이라고 믿는 사람)와 성경 문자주의자(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는 사람)라는 양 극단에서 주로 발견된다. 이들은 과학과 종교가 동일한 질문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답을 내놓는다고 본다.

독립 (Independence):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제안한 '겹치지 않는 교도권(Non-Overlapping Magisteria, NOMA)' 모델이 대표적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영역의 질문에 답한다. 과학은 자연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사실의 영역)를 다루고, 종교는 삶의 '왜', 즉 궁극적인 의미와 도덕적 가치(가치의 영역)를 다룬다. 따라서 둘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충돌할 이유가 없다. 이는 갈등을 피하는 데 유용하지만, 인간의 기원이나 우주의 시작처럼 두 영역이 겹치는 중요한 문제들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대화 (Dialogue): 독립 모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관계로, 과학과 종교가 서로에게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본다. 과학은 종종 철학적, 윤리적 질문들을 제기하며(예: 유전 공학의 윤리, 인공지능의 미래), 종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지혜를 제공할 수 있다. 반대로, 과학적 발견(예: 빅뱅 이론, 양자역학)은 기존의 신학적 이해를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도록 도전할 수 있다.

통합 (Integration): 가장 긴밀한 관계로, 과학과 종교가 서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는 자연 세계를 통해 신의 존재와 속성을 발견하려는 '자연 신학'이나, 기독교 세계관이 과학 활동의 철학적 전제를 제공한다는 관점 등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과학 활동은 '자연이 질서정연하고 이해 가능하다'는 믿음을 전제해야 하는데, 바로 이 믿음의 가장 견고한 기초를 이성적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3. 과학의 한계와 종교의 역할

갈등 모델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과학주의(Scientism)', 즉 과학만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이며, 과학이 다루지 않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철학적 신념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 방법론의 본질상 스스로에게 한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과학은 반복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물리적 현상만을 다룰 수 있다. 따라서 과학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침묵한다.

의미와 목적의 문제: "나는 왜 존재하는가?", "우주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가치와 도덕의 문제: "무엇이 선하고 악한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형이상학적 문제: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는가?", "과학 법칙은 어디서 왔는가?"

미학적 문제: "무엇이 아름다운가?"

과학은 우리에게 수소 폭탄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공백을 메우는 것이 종교와 철학의 역할이다. 종교는 우리에게 실재에 대한 포괄적인 지도를 제공하며, 그 지도 안에서 과학적 탐구가 의미 있는 자리를 찾도록 돕는다. 과학이 우주라는 아름다운 시(詩)의 문법과 구조를 분석한다면, 종교는 그 시의 의미와 저자의 의도를 묻는다. 둘은 적이 아니라, 실재라는 하나의 거대한 책을 각기 다른 차원에서 읽어내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

결론: 이성을 품은 신앙, 소망을 품은 이성
우리는 이성의 시대에 신앙이 마주한 세 가지 거대한 도전을 따라 길고 험난한 지성의 여정을 걸어왔다. 첫째, 신앙은 이성의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맹목적인 도약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내면, 그리고 역사가 가리키는 증거들을 따라가는 합리적인 신뢰의 행위일 수 있음을 확인했다. 우주의 시작과 정교한 설계, 우리 안에 새겨진 보편적 도덕률, 그리고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증명된 고대의 기적인 예수의 부활은, 신앙이 견고한 이성적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인 악의 문제는,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반증하지 못함을 밝혔다. 자유의지라는 더 큰 선을 위한 악의 허용 가능성과, 고통을 통한 영혼의 성숙이라는 관점은 이 문제에 대한 철학적 답변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통의 한복판으로 들어오신 십자가의 하나님과, 모든 악과 죽음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약속하는 부활의 소망이야말로 기독교가 이 실존적 절규에 내놓는 가장 심오하고 유일한 답변이다.

셋째,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전쟁'이라는 대중적 신화와는 달리,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훨씬 더 복잡하고 생산적인 관계일 수 있음을 논증했다. 갈등보다는 대화와 통합의 모델이 둘의 관계를 더 정확하게 설명하며, 기독교 세계관은 오히려 근대 과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지성적 자궁 역할을 했음을 확인했다. 과학은 '어떻게'를 묻고 종교는 '왜'를 물으며, 둘은 실재에 대한 더 온전한 이해를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이성의 질문 앞에 위축되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들을 끌어안고 정직하게 씨름하며, 가장 깊고 포괄적인 답변을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21세기의 지성인은 더 이상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낡고 거짓된 이분법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성을 통해 신앙의 문턱에 이를 수 있으며, 신앙을 통해 이성이 가 닿을 수 없는 더 높은 진리의 지평을 바라볼 수 있다. 진정한 신앙은 이성을 품고, 진정한 이성은 소망을 품는다. 이 둘이 조화롭게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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Дэлхийн Интернэт Номлолын Нийгэмлэг (SWIM) нь 1996 онд байгуулагдсан номлогчийн байгууллага бөгөөд 20 гаруй жилийн турш интернет болон мэдээллийн технологийн тусламжтайгаар дэлхийн номлолд хувь нэмрээ оруулсаар ирсэ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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