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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선 교 접근.
종교신학 (Theology of Religion)

세계관과 선교
뿌리 깊은 나무를 심는 지혜: 대상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선교 접근
서론: '다른 복음'의 비극을 넘어서
아프리카의 한 부족 마을에 열정적인 서구 선교사가 도착했다. 그는 유창한 현지어로 죄의 심각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의 은혜를 뜨겁게 설교했다. 몇몇 주민들이 그의 메시지에 감동하여 개종을 결심하고 세례를 받았다. 선교사는 큰 기쁨과 함께 첫 열매를 거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달 후, 마을에 심각한 가뭄이 닥치자, 세례를 받았던 교인들이 밤에 몰래 마을의 주술사를 찾아가 비를 내려달라며 전통적인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선교사는 그들의 '배교'에 깊은 실망과 혼란에 빠졌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이 가상의 이야기는 현대 선교가 직면해 온 가장 근본적인 실패, 즉 '세계관을 간과한 선교'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선교사는 '죄책감과 용서'라는 자신의 서구적 세계관 안에서 복음을 전달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현실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질문은 "어떻게 나의 죄책감을 해결할 것인가?"가 아니었다.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어떻게 예측 불가능한 영들의 노여움을 달래고 가뭄과 질병이라는 실존적 위협에서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두려움과 능력'의 문제였다. 선교사의 복음은 그들의 가장 깊은 질문에 가 닿지 못했고, 결국 예수는 그들이 섬기던 수많은 영들의 목록에 추가된 또 하나의 '힘센 영' 정도로만 받아들여졌다. 이는 복음의 옷만 걸친 채 속사람은 변하지 않은, 전형적인 '종교 혼합주의(Syncretism)'의 모습이다.
이러한 피상적 개종과 혼합주의의 비극을 넘어서기 위해, 오늘날 선교학은 복음이 한 개인과 문화의 가장 깊은 뿌리, 즉 **세계관(Worldview)**을 만나고 변혁시키는 과정에 주목한다. 효과적이고 진정한 선교는 단순히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거나 교리적 지식에 동의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문화가 현실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근본적인 틀 자체를 복음의 진리 안에서 새롭게 빚어가는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본고는 이처럼 뿌리 깊은 나무를 심는 지혜와 같은 선교적 접근, 즉 대상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선교의 원리와 과정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선교에 있어서 세계관 접근이 왜 필수적인지를 논증하고, 타문화의 세계관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단지 이해를 넘어 그 세계관을 복음으로 변혁시키는 과정이 어떻게 진리 대결, 능력 대결, 그리고 공동체 대결이라는 총체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논증할 것이다. 이 여정은 궁극적으로 복음이 '외래적인 종교'가 아닌, 각 문화권의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와 삶으로 고백하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되게 하는, 진정한 성육신적 선교의 길을 모색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I. 세계관: 보이지 않는 현실의 설계도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선교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세계관'이라는 개념 자체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세계관은 한 문화의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도, 정작 그 문화 속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인식되지 않는, 마치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존재이다.
1. 세계관의 정의와 기능 재론
세계관은 한 개인이나 사회가 실재(reality)에 대해 가지고 있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가장 근본적인 가정들의 집합이다. 그것은 무엇이 실재하고, 무엇이 가치 있으며, 무엇이 가능하고 불가능한지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 체계로서, 우리가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마음의 안경' 또는 '현실의 설계도'와 같다.
문화인류학자 폴 히버트(Paul Hiebert)는 문화를 빙산에 비유했다. 물 위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은 우리가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언어, 의복, 음식, 행동 양식 등이다. 그 바로 아래 수면에는 그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는 의식적인 신념과 가치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바로 세계관이다. 이 깊은 차원의 세계관은 대부분 의식적이거나 논리적인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듣고, 의례에 참여하며, 공동체의 삶을 통해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체화되는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세계관은 한 문화 안에서 몇 가지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현실 모델 제공 기능이다. 세계관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세상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다"라는 안정된 현실의 그림을 제공한다. 둘째, 설명적 기능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 즉 탄생과 죽음, 질병과 재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설명해주는 틀을 제공한다. 셋째, 평가적 기능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지, 무엇이 명예롭고 수치스러운지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공한다. 넷째, 행동 지침 기능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심리적 나침반 역할을 한다.
2. 왜 세계관 접근이 필수적인가?
선교사가 이러한 세계관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빙산의 꼭대기인 행동의 변화에만 집중할 때 앞서 언급한 비극이 발생한다. 세계관 접근이 선교에 필수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피상적 개종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의 행동은 세계관이라는 뿌리에서 나오는 열매와 같다. 뿌리는 그대로 둔 채 열매만 바꾸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조상 제사를 금지시키는 것만으로는 조상들의 영이 후손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세계관을 바꿀 수 없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공개적으로는 제사를 드리지 않지만, 여전히 조상의 영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거나, 제사를 대체할 다른 미신적인 행위를 찾게 될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행동의 근원이 되는 세계관 자체가 복음의 진리로 대체될 때에만 일어난다.
둘째, 혼합주의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혼합주의는 새로운 신앙(기독교)의 요소들이 기존의 토착 세계관의 틀 안으로 흡수되어 재해석됨으로써 복음의 본질이 왜곡되는 현상이다. 이는 마치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수많은 정령들의 존재를 믿는 애니미즘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성부, 성자, 성령은 단순히 그들이 섬기던 정령들의 목록에 추가된 '가장 힘센 세 명의 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님의 보혈은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아니라, 악령을 쫓는 주술적 효력을 가진 부적으로 전락할 수 있다. 혼합주의는 기존 세계관의 틀을 깨뜨리지 않고 복음을 그 위에 덧칠하려 할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셋째, 의미 있고 적실성 있는 복음 전달을 위함이다. 복음은 모든 문화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이지만, 그 진리가 의미 있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각 문화가 던지는 고유한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서구 문화가 주로 "나는 죄인인가 의인인가?"(죄책감-의로움)의 질문에 천착해왔다면, 많은 아시아 문화는 "나는 명예로운가 수치스러운가?"(명예-수치)의 질문을, 그리고 수많은 제3세계 부족 문화는 "나는 안전한가 위험한가?"(두려움-능력)의 질문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복음은 죄인을 의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수치를 당한 자에게 참된 명예를 회복시키시고, 두려움에 떠는 자에게 참된 능력을 주시는 분으로 선포될 수 있다. 어떤 질문에 답해야 할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들의 세계관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를 들어야 한다.
II. 이해의 단계: 그들의 안경으로 세상 보기
세계관을 변화시키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역설적으로 그 세계관을 있는 그대로,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겸손한 노력이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전에 먼저 정확한 진단을 내려야 하는 것과 같다. 타문화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과정은 단순한 정보 수집을 넘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들의 마음으로 삶을 느끼려는 성육신적 여정이다.
1. 성육신적 자세: 가르치는 자가 아닌 배우는 자로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교사의 태도이다. 선교사는 자신이 우월한 진리를 가진 '가르치는 자'라는 교만한 자세를 버리고, 그 문화와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겸손한 학습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육신의 모델이다. 그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연약함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언어와 삶을 배우셨다. 마찬가지로 선교사는 자신의 문화적 우월감(ethnocentrism)을 내려놓고, 기꺼이 그들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함께 먹고, 함께 일하고, 함께 슬퍼하며 그들의 삶에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진정성 있는 관계 속에서만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세계관의 이야기를 비로소 열어 보이기 시작한다.
2. 문화 인류학적 도구의 활용
겸손한 태도와 더불어, 타문화의 세계관을 분석하기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방법론이 필요하다.
참여 관찰 (Participant Observation): 선교사가 직접 그들의 삶의 현장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문화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이다. 결혼식, 장례식, 축제, 마을 회의 등 공동체의 중요한 의례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공동체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심층 인터뷰 (In-depth Interviews): 일상적인 대화를 넘어, 세계관의 차원에 닿는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농사를 지을 때 왜 이런 의식을 행하십니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간다고 믿으십니까?", "당신이 인생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공동체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와 같은 질문들은 그들의 신념과 가치, 그리고 현실 인식의 밑그림을 드러내 준다.
신화, 전설, 속담, 이야기 분석: 한 문화의 세계관은 종종 논리적인 명제로 정리되어 있기보다는,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오는 신화, 전설, 민담, 속담 속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 문화의 '무의식적인 교과서'와 같다. 창조 신화는 우주와 인간의 기원 및 목적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보여준다. 영웅 전설은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과 가치를 드러낸다. 속담은 일상생활 속에서 작동하는 지혜와 윤리관을 담고 있다. 선교사는 이러한 이야기들의 탐정이 되어, 그 안에 숨겨진 세계관의 코드를 해독해야 한다.
3. 세계관의 핵심 동력 파악하기
이러한 이해의 과정을 통해 선교사는 그 문화의 세계관을 움직이는 핵심적인 동력(dynamics)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류학자들은 문화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죄책감-의로움 문화 (Guilt-Innocence Culture): 주로 개인주의적인 서구 문화에서 발견되며, 개인의 양심과 내면의 죄책감이 행동의 중요한 동기가 된다. 이 문화에서는 법과 규칙을 어기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며, 해결책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아 법적인 의로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명예-수치 문화 (Honor-Shame Culture): 주로 집단주의적인 아시아, 중동, 라틴 문화에서 발견된다. 개인의 정체성과 가치는 소속된 공동체(가족, 부족)의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 공동체의 기대를 충족시켜 명예를 얻는 것이 최고의 선이며, 공동체에 해를 끼쳐 체면을 잃고 수치를 당하는 것이 최악의 악이다.
두려움-능력 문화 (Fear-Power Culture): 주로 애니미즘과 정령숭배 신앙을 가진 부족 문화에서 발견된다. 세상은 예측 불가능하고 변덕스러운 영적인 힘들(정령, 귀신, 저주)로 가득 차 있으며, 개인과 공동체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힘들을 달래거나 통제하여 재앙을 피하고 생존에 필요한 능력(풍요, 건강)을 얻는 것이다.
물론 어떤 문화도 단 하나의 동력으로만 움직이지는 않지만, 어떤 동력이 지배적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복음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III. 변혁의 단계: 복음, 새로운 현실의 설계도
세계관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그 세계관을 복음의 진리 안에서 변화시키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세계관의 변혁은 기존의 설계도를 무조건 파괴하고 완전히 새로운 설계도를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 설계도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더 완전하고 견고한 설계도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은 지적, 영적, 그리고 공동체적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1. 접촉점 찾기와 다리 놓기: 성육신적 상황화
세계관 변혁의 첫걸음은 복음과 그 문화의 세계관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보여준 선교 전략의 핵심이다(행 17:22-31).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심을 비난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들의 종교심을 칭찬하며, 그들이 세워놓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을 복음을 소개하는 '접촉점(point of contact)'으로 삼았다. 그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 주겠다"고 말하며, 그들의 영적 갈망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충족될 수 있음을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원리이다. 상황화는 복음의 초월적인 핵심 진리(메시지)는 결코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그 메시지를 담는 그릇(형태)은 수용하는 문화에 친숙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명예-수치 문화권에서는 죄를 단순히 법을 어긴 '범법 행위'로 설명하기보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에 수치를 돌리고 관계를 깨뜨린 '배신 행위'로 설명하는 것이 더 깊은 공감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 값을 치른 법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수치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원한 명예를 회복시켜 주신 사건으로 선포될 수 있다. 이처럼 복음은 어떤 문화 속으로 들어가든 그 문화의 언어와 상징을 통해 자신의 풍성함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2. 총체적 대결: 진리, 능력, 그리고 공동체
세계관은 단지 머리로만 동의하는 신념 체계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총체적인 현실 인식의 틀이다. 따라서 그 변혁 역시 총체적인 차원에서 일어나야 한다. 선교학자 찰스 크래프트(Charles Kraft)는 이를 세 가지 차원의 '대결(Encounter)'로 설명했다.
진리 대결 (Truth Encounter): 이는 세계관의 인지적, 철학적 차원에 대한 도전이다. 복음의 진리를 기존 세계관의 핵심적인 거짓 가정들과 명백히 대조시켜, 어느 것이 더 실재에 부합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이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적 세계관에 대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가르친다. 변덕스러운 영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야 하는 세계관에 대해,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유일하고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제시한다. 이 진리 대결은 체계적인 성경 교육과 변증을 통해 이루어지며, 사람들의 지성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능력 대결 (Power Encounter): 이는 특히 두려움-능력 문화권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우리 신이 당신들의 영보다 더 강하다"는 교리적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그 능력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능력 대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권세가 주술사의 저주나 악한 영들의 세력보다 실제로 더 강력하다는 것을 성령의 능력을 통해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질병의 치유를 위한 기도, 귀신 들린 자를 축사하는 사역, 그리고 악한 영들의 위협으로부터 담대하게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간증을 통해 이루어진다.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벌였던 대결처럼, 능력 대결은 영적 실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공동체 대결 (Community Encounter): 이는 세계관의 사회적, 행동적 차원에 대한 도전이다. 새로운 세계관은 그것을 살아내고 지지해주는 새로운 공동체 없이는 결코 뿌리내릴 수 없다. 교회는 바로 이 새로운 세계관, 즉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구현되는 '대안 사회(alternative community)'가 되어야 한다. 만약 기존 문화가 엄격한 신분 제도와 차별에 기반하고 있다면, 교회는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는 급진적인 평등의 공동체를 보여주어야 한다. 만약 기존 문화가 복수와 원한의 고리로 얽매여 있다면, 교회는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화해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세상과는 다른 교회의 독특한 삶의 방식 자체가, 복음이 단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 새로운 현실임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변증이 된다.
3. '결정적' 개종을 넘어 '과정적' 변혁으로
세계관의 변혁은 손을 들거나 기도문을 따라 하는 '결정적'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과정적'인 변화이다. 세례는 그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 긴 과정 속에서 교회는 지속적인 제자 훈련을 통해 성도들이 낡은 세계관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관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성경 이야기의 재구성 능력(Re-storying power of the Biblical Narrative)**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가 자신을 어떤 이야기의 일부로 여기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세계관 변혁의 핵심은,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낡은 부족의 신화나 세속적 성공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성경이 들려주는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온 세상의 참된 이야기(True Story of the Whole World) 속에 자신을 재위치시키는 것이다. 자신이 변덕스러운 영의 노예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사랑의 창조주에 의해 존귀하게 지음 받았고, 죄로 인해 길을 잃었으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았으며,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임을 깨달을 때, 그의 삶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은 근본적으로 재정립된다.
결론: 토착화된 신앙, 세상 속의 변혁적 소금
선교는 단순히 한 종교의 교리를 다른 문화에 수출하는 작업이 아니다. 진정한 선교는 마치 하나의 씨앗이 다른 토양에 심겨, 그 토양의 자양분을 빨아들여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고유한 모습의 나무로 자라나지만, 그 나무의 유전적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세계관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선교적 접근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 세계에 똑같은 모양의 '서구식 교회'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각 문화 속에서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그 문화의 옷을 입은, 살아있는 '토착화된 신앙(Indigenous Faith)'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교사는 먼저 자신의 문화적 안경을 벗고, 성육신의 겸손함으로 타문화의 세계관을 깊이 배우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깊은 질문과 갈망 속에서 복음의 다리를 놓을 접촉점을 찾아야 한다. 나아가, 진리와 능력, 그리고 공동체라는 총체적인 차원에서 복음이 어떻게 그들의 낡은 세계관을 깨뜨리고 새로운 현실의 설계도를 제공하는지를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이 길은 결코 쉽거나 빠르지 않다. 그것은 효율성과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 선교의 조급증을 내려놓고, 한 영혼과 한 문화가 깊이 변화되는 데 필요한 오랜 시간의 수고와 인내를 요구하는 농부의 길이다. 그러나 이 길만이 혼합주의의 늪과 피상적 개종의 비극을 넘어, 각 문화와 족속이 자신들의 고유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진정으로 풍성하고 다채로운 세계 교회를 세우는 유일한 길이다. 이처럼 뿌리 깊은 나무로 세워진 교회는 비로소 그 땅의 문화 속에서 부패를 막고 맛을 내는 '변혁적인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며, 이는 자신을 보내신 분의 뜻에 순종하는 교회의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