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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복음 전파의 역사.

종교신학 (Theology of Religion)

불꽃에서 횃불로, 그리고 온 세상으로: 2천 년의 복음 전파 역사
서론: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선교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수의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명령,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는 말씀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지속적인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예루살렘의 작은 다락방에서 시작된 미약한 불꽃은, 2천 년의 세월을 거치며 제국을 변화시키고, 문명을 형성하며, 대륙과 대양을 건너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거대한 횃불이 되었다.

이 장대한 복음 전파의 역사는 결코 단선적이거나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격랑 속에서 선교의 의미와 방법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때로는 숭고한 순교의 피로, 때로는 비극적인 과오의 눈물로 점철된 복잡다단한 드라마였다. 교회가 소수 집단일 때의 선교 방식과, 지배적인 권력이 되었을 때의 선교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랐으며, 세상의 변화에 따라 선교의 최전선 역시 끊임없이 이동했다.

본 기사는 이 위대한 선교의 흐름을 주요 역사적 분기점을 따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중앙 통제 기구 없이 이름 없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증거를 통해 로마 제국을 복음화했던 초대교회의 폭발적인 확산기를 분석한다. 이어서, 서로마 제국의 붕괴라는 혼돈 속에서 문명의 변방이었던 아일랜드가 어떻게 유럽을 재복음화하는 선교의 중심지로 부상했는지를 추적하며 아일랜드 수도원 선교의 독특한 영성을 조명한다.

다음으로, 교회와 국가가 결합된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형성 속에서 선교가 어떻게 정치적 확장과 군사적 정복의 수단으로 변모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중세 선교의 빛과 그림자를 다각적으로 분석한다. 종교개혁 이후,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영적 부흥이 어떻게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를 통해 개신교 선교의 문을 활짝 열었는지, 그리고 19세기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거치며 선교 전략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중심이 서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하고, 선교의 패러다임이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전환된 21세기 현대 선교가 마주한 복합적인 도전과 새로운 가능성들을 진단한다. 이 역사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선교가 결코 고정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각 시대의 신학적, 문화적, 정치적 상황과 치열하게 상호작용하며 그 형태를 달리해 온 살아있는 유기체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적 과업의 본질과 방향을 성찰하는 데 귀중한 역사적 지혜와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제1부 자발적 확산과 순교의 증거: 초기 교회의 선교 (c. 100-500 AD)
사도 시대 이후 약 4세기 동안 기독교는 예루살렘의 작은 유대교 분파에서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성장하는 경이로운 확장을 경험했다. 이 시기의 선교는 현대적인 의미의 '선교 단체'나 '파송 본부' 없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마치 누룩이 조용히 퍼져나가 전체 반죽을 부풀게 하듯, 이름 없는 수많은 평신도들의 삶과 관계, 그리고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자발적이고 유기적인 운동이었다.

1.1. 팍스 로마나: 선교를 위한 무대
초기 교회의 확산은 로마 제국이 제공한 독특한 역사적 환경,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로마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최적의 무대를 마련했다.

물리적 연결망: 로마가 군사적, 행정적 목적으로 건설한 광대한 도로망과 해적을 소탕하여 안전해진 지중해 항로는 복음 전파자들의 이동을 용이하게 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상인, 군인, 노예 등 수많은 사람들이 제국 전역을 이동하면서, 그들은 복음을 실어 나르는 무의식적인 매개체가 되었다.

언어와 사상의 통일: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코이네 그리스어'가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lingua franca)가 되었다. 이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이 언어의 장벽 없이 전달될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약성경 자체가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스토아 철학 등에서 제기된 보편적 로고스 사상이나 영혼 불멸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수용될 수 있는 철학적 토양을 마련해주었다.

영적 공허감: 팍스 로마나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안정 이면에는 깊은 영적 공허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통적인 로마의 다신교는 더 이상 개인의 실존적 질문(삶의 의미, 죽음, 고통의 문제)에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영적 갈증은 이시스, 미트라스와 같은 동방의 밀의 종교들이 성행하게 만들었고, 바로 이 틈을 비집고 기독교는 개인적 구원과 사랑의 공동체라는 강력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1.2. 이름 없는 증인들: 평신도 중심의 '관계적 선교'
초대교회 선교의 주역은 사도나 전문 사역자가 아닌, 이름 없는 평범한 신자들이었다. 역사가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이 지적했듯이, 초기 기독교의 확산은 공식적인 설교나 변증보다는 "비공식적인 선교사들의 비공식적인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삶의 현장이 선교지: 상인들은 시장에서 거래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군인들은 주둔지에서 동료들에게, 노예들은 주인의 가정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들의 삶의 모든 자리가 선교의 현장이었다. 특히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이었던 노예와 여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에게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며 존엄하다는 복음의 메시지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가정 교회(House Church)의 역할: 초기 기독교인들은 별도의 교회 건물이 없었다. 그들은 신자들의 가정에 모여 예배하고 교제했다. 이 '가정 교회'는 선교의 가장 중요한 세포이자 전초기지였다. 새로운 신자는 이 친밀하고 따뜻한 공동체 안에서 신앙을 배우고, 사랑과 돌봄을 경험하며, 자연스럽게 복음을 자신의 가족과 이웃에게 전파하는 증인으로 성장해갔다. 리디아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자신의 집을 교회로 개방한 사람들은 초기 선교의 중요한 후원자이자 지도자였다.

급진적 사랑의 실천: 초기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던진 가장 큰 충격은 그들의 '사랑의 공동체'였다. 로마 사회가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사람을 엄격히 차별했던 것과 달리, 교회 안에서는 귀족과 노예,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었다(갈 3:28). 또한,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았다. 주기적으로 역병이 창궐할 때, 로마인들은 감염을 피해 가족조차 버리고 도시를 떠났지만, 기독교인들은 도시에 남아 병든 자들을 간호하고 죽은 자들을 묻어주었다. 과부와 고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였다. 이러한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은 이교도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말로 하는 설교보다 더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되었다.

1.3. 순교의 피: 죽음으로 증언된 신앙
초기 기독교의 확산은 결코 평화로운 과정이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은 유일신 신앙 때문에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하기를 거부했고, 황제 숭배를 거부했다. 이는 로마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반사회적, 반국가적 행위로 간주되어, 네로 황제 이후 약 250년간 간헐적이지만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박해와 순교는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2세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증인으로서의 죽음: '순교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마르튀스'(martys)는 본래 '증인'이라는 뜻이다. 순교자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평안 가운데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부활의 소망이 실제임을 온몸으로 증언했다.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찬송하는 그들의 모습은 로마 군중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가?"

변증가들의 지적 투쟁: 박해에 맞서, 유스티누스 순교자(Justin Martyr),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변증가'(Apologist)들은 기독교 신앙을 지적으로 변호하는 글들을 썼다. 그들은 기독교가 결코 무신론적이거나 비이성적인 미신이 아니며, 오히려 헬라 철학이 추구하던 최고의 진리를 완성하는 '참된 철학'임을 논증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도덕적이고 충성스러운 시민임을 주장하며 황제와 원로원을 설득하고자 했다. 이러한 지적 노력은 기독교가 단순한 하층민의 종교가 아니라, 지성인들에게도 호소력 있는 진리 체계임을 보여주었다.

1.4.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세계의 탄생: 선교의 전환점
수 세기 동안의 박해 끝에, 기독교 역사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칙령으로 기독교는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공인받았고,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380년에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국교로 선포된다.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 선교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전까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확산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황제와 지배계층의 후원 아래 '위로부터의 선교'가 가능해졌다. 대규모 교회 건물이 세워지고, 성직자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수많은 이교도들이 사회적, 정치적 유익을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대중 개종'(mass conversion) 현상이 일어났다. 이로써 교회와 제국이 거의 동일시되는 '기독교 세계'(Christendom)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선교의 목표는 이제 개인의 신실한 회심보다는, 제국의 경계를 확장하고 이교도 '야만족'들을 기독교 문명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가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된 '빛'과 함께,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탁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그림자'를 동시에 드리웠다.

제2부 변방에서 중심으로: 아일랜드 수도원 선교 (c. 400-800 AD)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5세기경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유럽 대륙은 정치적 혼란과 문화적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과거 로마가 제공했던 안정과 질서, 연결망이 사라지면서 기독교의 확산 동력도 약화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 로마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었던 문명의 변방, 아일랜드에서 새로운 형태의 선교 운동이 불꽃처럼 일어나 유럽 대륙을 재복음화하는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2.1. 성 패트릭과 켈트 수도원 운동
아일랜드 선교의 문을 연 인물은 성 패트릭(St. Patrick, c. 385-461)이다. 브리튼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6세 때 아일랜드 해적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그는 꿈에서 아일랜드인들이 자신을 다시 부르는 환상을 보고, 자신을 노예로 삼았던 바로 그 땅으로 돌아가 선교사가 되었다.

패트릭의 선교 방식은 로마의 방식과는 달랐다. 그는 로마의 교구 중심 행정 구조 대신 아일랜드의 부족(clan) 중심 체제를 존중하며 토착화된 접근을 시도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이 세운 교회들은 주교가 아닌 수도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이 수도원들은 켈트 기독교의 영성과 학문, 예술, 그리고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켈트 수도원 운동이 낳은 가장 독특하고 강력한 선교 동력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 혹은 '그리스도를 위한 유배'라는 개념인 Peregrinatio pro Christo였다. 아일랜드 수도사들에게 '순례'는 지상의 모든 안락함과 애착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해 정처 없이 낯선 땅을 떠도는 최고의 영적 수행이었다. 그들은 특정한 선교 전략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채 바다로 나아갔고, 이 자발적 유배는 그들을 유럽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선교사들로 만들었다.

2.2. 유럽 대륙의 재복음화
Peregrinatio의 영성에 사로잡힌 수많은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유럽 대륙으로 향했다. 콜룸바(Columba)는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작은 섬 아이오나(Iona)에 수도원을 세워 북부 브리튼 복음화의 중심 기지로 삼았고, 콜룸바누스(Columbanus)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에 뤽세이유(Luxeuil), 보비오(Bobbio)와 같은 수도원들을 세워 암흑기를 밝히는 등불 역할을 했다.

아일랜드 수도원 선교는 선교가 반드시 거대한 제국의 후원이나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문명의 중심이 무너졌을 때, 변방의 작은 공동체가 지녔던 순수한 영성과 희생적인 헌신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역사적 사례이다.

제3부 검과 십자가: 중세 선교의 흐름 (c. 800-1500 AD)
중세는 기독교 선교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시대이다. 한편으로는 교회와 국가가 결합된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힘을 바탕으로 유럽의 경계를 넓히는 대규모 확장이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강압과 폭력이 동원되고 선교의 본질이 심각하게 왜곡되기도 했다.

3.1. 샤를마뉴와 '기독교 세계': 정복으로서의 선교
800년, 교황이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Charlemagne)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하면서, 교회와 국가가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로 결합된 '기독교 세계'가 탄생했다. 이 이념 속에서 선교는 제국의 경계를 확장하고 이교도 '야만족'들을 기독교 문명 안으로 편입시키는 정치적, 군사적 행위와 동일시되었다. 샤를마뉴는 작센족을 정복하고 '세례 혹은 죽음'을 강요했으며, 이러한 '검의 선교' 모델은 이후 북유럽과 동유럽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주된 방식이 되었다.

3.2. 수도원 개혁 운동과 새로운 선교적 열정
'기독교 세계'의 확장은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을 가져왔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려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들이 일어났다. 클뤼니 개혁 운동과 시토회는 엄격한 영성 생활의 회복을 강조했다.

중세 선교에 가장 큰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13세기에 등장한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s)였다. 이들은 담장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살며 복음을 전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가 시작한 프란체스코회는 청빈과 평화의 복음을 실천했으며, 성 도미니쿠스(Dominic de Guzmán)가 창설한 도미니코회는 이단에 맞서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복음을 변증하는 '지적 선교'의 전통을 세웠다.

3.3. 십자군 전쟁: 선교의 비극적 왜곡
중세 선교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는 단연 십자군 전쟁(1096-1291)이다.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이 '성전'(Holy War)은, 십자가를 사랑과 희생이 아닌 증오와 폭력의 상징으로 전락시켰다. 십자군은 선교를 군사적 행위와 동일시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했고, 이슬람 세계에 기독교에 대한 깊은 불신을 남겨 이후 수 세기 동안 관계를 악화시키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3.4. 새로운 지평: 동방 선교와 지적 선교
십자군의 광기 속에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방식의 선교적 돌파구들이 열리고 있었다. 9세기 비잔틴 제국의 형제 선교사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는 슬라브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키릴 문자'를 창안하고 성경을 번역하여 토착화 선교의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또한,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았던 네스토리안 교회는 동쪽으로 나아가 중앙아시아와 중국에까지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전했다. 십자군의 실패를 목격한 라몬 룰(Ramon Llull)은 무력 대신 아랍어와 이슬람 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이성적인 변증을 통해 무슬림을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대를 앞서간 선교 전략을 제시했다.

제4부 종교개혁과 현대 선교의 여명 (c. 1500-1950)
종교개혁은 교회의 신학을 성경의 권위 위에 바로 세웠지만, 역설적으로 그 직접적인 열매가 세계 선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개혁가들은 사도 시대의 종언과 함께 지상대위임명령의 의무도 끝났다고 보았고, 개신교회는 거의 2세기 동안 선교라는 과업 앞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4.1. 대각성 운동: 현대 선교의 영적 발전소
18세기 대서양 양편에서 타오른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은 이 잠자던 거인을 깨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등이 주도한 이 부흥 운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개인적 회심'과 '거듭남'에 두었다. 이러한 강조는 신자들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폭발적인 내적 동력을 창출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자기희생적인 삶과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모라비안 공동체의 선구적인 선교 활동은 이러한 열정에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19세기 초 제2차 대각성 운동은 '자발적 결사체'라는 조직적 모델을 낳았고, '건초더미 기도회'와 같은 사건을 통해 청년들의 선교 헌신을 이끌어냈다.

4.2. 윌리엄 캐리: 현대 선교의 문을 열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대각성 운동의 신학적 유산 위에서 개신교 선교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다. 그는 1792년 『연구』(An Enquiry)라는 책을 통해 지상대위임명령이 사도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영속적으로 순종해야 할 '의무'임을 논증했다. 그는 세계의 영적 필요를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자발적 선교회'라는 혁신적인 구조를 제안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그의 외침은 세계 최초의 개신교 선교회인 침례교선교회(BMS)의 창립으로 이어졌고, 그 자신은 1호 선교사가 되어 인도로 향했다. 인도에서의 그의 사역은 성경 번역, 교육, 사티(Sati) 폐지와 같은 사회 개혁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것이었다.

4.3. '위대한 세기'와 전략의 진화
윌리엄 캐리가 문을 연 19세기는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불릴 만큼 개신교 선교의 폭발적인 확장기였다. 초기 선교는 주로 해안 거점에 '선교 기지'를 세우고 서구 문명과 복음을 함께 전파하는 '외지 선교' 모델을 따랐다. 이는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큰 공헌을 했지만, 문화적 제국주의와 내륙 복음화의 지체라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와 중국내지선교회(CIM)는 철저한 '상황화'와 '믿음 선교' 원칙을 통해 내륙 깊숙이 복음을 전파하는 '내지 선교' 모델을 제시하며 선교의 지평을 혁명적으로 확장시켰다.

제5부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21세기 현대 선교 (c. 1950-현재)
20세기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극적인 인구 지형의 변화를 겪은 시기이다. 기독교의 중심이 서구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남반구(Global South)로 급격히 이동했다. 이는 더 이상 서구 교회가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중심이 아님을 의미한다.

5.1. 새로운 패러다임: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선교는 이제 '서구에서 나머지 세계로' 향하는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from everyone to everywhere) 향하는 다방향적인 운동이 되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교회들이 이제는 유럽과 북미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역선교 현상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선교의 주도권을 현지 교회와 토착 지도자들에게 이양하고, 서구 선교사는 동등한 '동반자'로서 협력해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을 요구한다.

5.2. 신학적 논쟁과 통합: 총체적 선교
20세기 후반, 선교의 우선순위를 둘러싸고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은 치열한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 에큐메니칼 진영은 선교를 사회 구조악 철폐와 인간 해방, 정의와 평화(샬롬)의 실현으로 이해하며 사회 구원을 강조했다. 반면, 복음주의 진영은 이러한 경향이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개인의 회심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하며 영혼 구원의 우선성을 재확인하고자 했다. 이 두 진영의 간극을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 것이 1974년 시작된 '로잔 운동'이다. 로잔 운동은 '로잔 언약'을 통해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제로 통합하는 '총체적 선교' 개념을 정립하며 21세기 선교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5.3. 새로운 선교의 장과 과제
21세기 교회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복합적인 도전들에 직면해 있다.

도시화와 메가시티 선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인종과 문화, 극심한 빈부 격차가 응축된 메가시티는 새로운 선교의 최전선이다.

디아스포라 선교: 세계화로 인해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인구가 급증하면서, 우리 곁의 이웃이 새로운 선교지가 되었다. 특히 전 세계에 흩어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은 중요한 선교 자원이 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와 사이버 선교: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는 지리적 제약 없이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새로운 선교의 공간을 열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 절대 진리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변증하고, 타종교와 대화하며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지적, 영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전략: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비즈니스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비즈니스 선교'(BAM), 전문성을 활용하는 NGO 사역, 그리고 현지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복음의 씨앗을 심는 '상황화' 전략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결론: 미완의 과업, 계속되는 이야기
오순절 다락방에서 시작된 복음 전파의 역사는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미완의 이야기'이다. 그 형태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자발적인 증인의 공동체에서 제국의 종교로, 변방의 수도원에서 세계적인 선교회로, 그리고 이제는 모든 대륙에서 모든 대륙으로 향하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그 모습을 바꾸어왔다.

이 장대한 역사는 우리에게 선교가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 이전에, 세상 끝날까지 당신의 백성과 함께하시며(마 28:20)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 즉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임을 가르쳐준다. 우리의 역할은 그 위대한 드라마에 신실한 참여자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과거의 유산은 우리에게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준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신실함과 수도사들의 헌신, 개혁가들의 용기를 본받아야 하지만, 동시에 교회가 권력과 결탁하고 문화적 오만에 빠졌던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21세기의 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복잡한 도전 앞에 서 있지만, 동시에 과거 어느 때보다 다양한 기회의 문 앞에 서 있기도 하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가 어린 양의 보좌 앞에서 함께 찬양하는 그 날을 소망하며(계 7:9),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방식으로 이 위대한 복음 전파의 역사를 계속해서 써 내려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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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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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선교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수의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명령,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는 말씀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지속적인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예루살렘의 작은 다락방에서 시작된 미약한 불꽃은, 2천 년의 세월을 거치며 제국을 변화시키고, 문명을 형성하며, 대륙과 대양을 건너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거대한 횃불이 되었다.

이 장대한 복음 전파의 역사는 결코 단선적이거나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격랑 속에서 선교의 의미와 방법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때로는 숭고한 순교의 피로, 때로는 비극적인 과오의 눈물로 점철된 복잡다단한 드라마였다. 교회가 소수 집단일 때의 선교 방식과, 지배적인 권력이 되었을 때의 선교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랐으며, 세상의 변화에 따라 선교의 최전선 역시 끊임없이 이동했다.

본 기사는 이 위대한 선교의 흐름을 주요 역사적 분기점을 따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중앙 통제 기구 없이 이름 없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증거를 통해 로마 제국을 복음화했던 초대교회의 폭발적인 확산기를 분석한다. 이어서, 서로마 제국의 붕괴라는 혼돈 속에서 문명의 변방이었던 아일랜드가 어떻게 유럽을 재복음화하는 선교의 중심지로 부상했는지를 추적하며 아일랜드 수도원 선교의 독특한 영성을 조명한다.

다음으로, 교회와 국가가 결합된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형성 속에서 선교가 어떻게 정치적 확장과 군사적 정복의 수단으로 변모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중세 선교의 빛과 그림자를 다각적으로 분석한다. 종교개혁 이후,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영적 부흥이 어떻게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를 통해 개신교 선교의 문을 활짝 열었는지, 그리고 19세기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거치며 선교 전략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중심이 서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하고, 선교의 패러다임이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전환된 21세기 현대 선교가 마주한 복합적인 도전과 새로운 가능성들을 진단한다. 이 역사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선교가 결코 고정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각 시대의 신학적, 문화적, 정치적 상황과 치열하게 상호작용하며 그 형태를 달리해 온 살아있는 유기체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적 과업의 본질과 방향을 성찰하는 데 귀중한 역사적 지혜와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제1부 자발적 확산과 순교의 증거: 초기 교회의 선교 (c. 100-500 AD)
사도 시대 이후 약 4세기 동안 기독교는 예루살렘의 작은 유대교 분파에서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성장하는 경이로운 확장을 경험했다. 이 시기의 선교는 현대적인 의미의 '선교 단체'나 '파송 본부' 없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마치 누룩이 조용히 퍼져나가 전체 반죽을 부풀게 하듯, 이름 없는 수많은 평신도들의 삶과 관계, 그리고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자발적이고 유기적인 운동이었다.

1.1. 팍스 로마나: 선교를 위한 무대
초기 교회의 확산은 로마 제국이 제공한 독특한 역사적 환경,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로마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최적의 무대를 마련했다.

물리적 연결망: 로마가 군사적, 행정적 목적으로 건설한 광대한 도로망과 해적을 소탕하여 안전해진 지중해 항로는 복음 전파자들의 이동을 용이하게 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상인, 군인, 노예 등 수많은 사람들이 제국 전역을 이동하면서, 그들은 복음을 실어 나르는 무의식적인 매개체가 되었다.

언어와 사상의 통일: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코이네 그리스어'가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lingua franca)가 되었다. 이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이 언어의 장벽 없이 전달될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약성경 자체가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스토아 철학 등에서 제기된 보편적 로고스 사상이나 영혼 불멸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수용될 수 있는 철학적 토양을 마련해주었다.

영적 공허감: 팍스 로마나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와 안정 이면에는 깊은 영적 공허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통적인 로마의 다신교는 더 이상 개인의 실존적 질문(삶의 의미, 죽음, 고통의 문제)에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영적 갈증은 이시스, 미트라스와 같은 동방의 밀의 종교들이 성행하게 만들었고, 바로 이 틈을 비집고 기독교는 개인적 구원과 사랑의 공동체라는 강력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1.2. 이름 없는 증인들: 평신도 중심의 '관계적 선교'
초대교회 선교의 주역은 사도나 전문 사역자가 아닌, 이름 없는 평범한 신자들이었다. 역사가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이 지적했듯이, 초기 기독교의 확산은 공식적인 설교나 변증보다는 "비공식적인 선교사들의 비공식적인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삶의 현장이 선교지: 상인들은 시장에서 거래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군인들은 주둔지에서 동료들에게, 노예들은 주인의 가정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들의 삶의 모든 자리가 선교의 현장이었다. 특히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이었던 노예와 여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에게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며 존엄하다는 복음의 메시지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가정 교회(House Church)의 역할: 초기 기독교인들은 별도의 교회 건물이 없었다. 그들은 신자들의 가정에 모여 예배하고 교제했다. 이 '가정 교회'는 선교의 가장 중요한 세포이자 전초기지였다. 새로운 신자는 이 친밀하고 따뜻한 공동체 안에서 신앙을 배우고, 사랑과 돌봄을 경험하며, 자연스럽게 복음을 자신의 가족과 이웃에게 전파하는 증인으로 성장해갔다. 리디아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자신의 집을 교회로 개방한 사람들은 초기 선교의 중요한 후원자이자 지도자였다.

급진적 사랑의 실천: 초기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던진 가장 큰 충격은 그들의 '사랑의 공동체'였다. 로마 사회가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사람을 엄격히 차별했던 것과 달리, 교회 안에서는 귀족과 노예,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었다(갈 3:28). 또한,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았다. 주기적으로 역병이 창궐할 때, 로마인들은 감염을 피해 가족조차 버리고 도시를 떠났지만, 기독교인들은 도시에 남아 병든 자들을 간호하고 죽은 자들을 묻어주었다. 과부와 고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였다. 이러한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은 이교도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말로 하는 설교보다 더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되었다.

1.3. 순교의 피: 죽음으로 증언된 신앙
초기 기독교의 확산은 결코 평화로운 과정이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은 유일신 신앙 때문에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하기를 거부했고, 황제 숭배를 거부했다. 이는 로마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반사회적, 반국가적 행위로 간주되어, 네로 황제 이후 약 250년간 간헐적이지만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박해와 순교는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2세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증인으로서의 죽음: '순교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마르튀스'(martys)는 본래 '증인'이라는 뜻이다. 순교자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평안 가운데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부활의 소망이 실제임을 온몸으로 증언했다.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찬송하는 그들의 모습은 로마 군중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가?"

변증가들의 지적 투쟁: 박해에 맞서, 유스티누스 순교자(Justin Martyr),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변증가'(Apologist)들은 기독교 신앙을 지적으로 변호하는 글들을 썼다. 그들은 기독교가 결코 무신론적이거나 비이성적인 미신이 아니며, 오히려 헬라 철학이 추구하던 최고의 진리를 완성하는 '참된 철학'임을 논증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도덕적이고 충성스러운 시민임을 주장하며 황제와 원로원을 설득하고자 했다. 이러한 지적 노력은 기독교가 단순한 하층민의 종교가 아니라, 지성인들에게도 호소력 있는 진리 체계임을 보여주었다.

1.4.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세계의 탄생: 선교의 전환점
수 세기 동안의 박해 끝에, 기독교 역사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칙령으로 기독교는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공인받았고,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380년에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국교로 선포된다.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 선교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전까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확산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황제와 지배계층의 후원 아래 '위로부터의 선교'가 가능해졌다. 대규모 교회 건물이 세워지고, 성직자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수많은 이교도들이 사회적, 정치적 유익을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대중 개종'(mass conversion) 현상이 일어났다. 이로써 교회와 제국이 거의 동일시되는 '기독교 세계'(Christendom)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선교의 목표는 이제 개인의 신실한 회심보다는, 제국의 경계를 확장하고 이교도 '야만족'들을 기독교 문명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가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된 '빛'과 함께,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탁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그림자'를 동시에 드리웠다.

제2부 변방에서 중심으로: 아일랜드 수도원 선교 (c. 400-800 AD)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5세기경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유럽 대륙은 정치적 혼란과 문화적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과거 로마가 제공했던 안정과 질서, 연결망이 사라지면서 기독교의 확산 동력도 약화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 로마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었던 문명의 변방, 아일랜드에서 새로운 형태의 선교 운동이 불꽃처럼 일어나 유럽 대륙을 재복음화하는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2.1. 성 패트릭과 켈트 수도원 운동
아일랜드 선교의 문을 연 인물은 성 패트릭(St. Patrick, c. 385-461)이다. 브리튼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6세 때 아일랜드 해적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그는 꿈에서 아일랜드인들이 자신을 다시 부르는 환상을 보고, 자신을 노예로 삼았던 바로 그 땅으로 돌아가 선교사가 되었다.

패트릭의 선교 방식은 로마의 방식과는 달랐다. 그는 로마의 교구 중심 행정 구조 대신 아일랜드의 부족(clan) 중심 체제를 존중하며 토착화된 접근을 시도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이 세운 교회들은 주교가 아닌 수도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이 수도원들은 켈트 기독교의 영성과 학문, 예술, 그리고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켈트 수도원 운동이 낳은 가장 독특하고 강력한 선교 동력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 혹은 '그리스도를 위한 유배'라는 개념인 Peregrinatio pro Christo였다. 아일랜드 수도사들에게 '순례'는 지상의 모든 안락함과 애착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해 정처 없이 낯선 땅을 떠도는 최고의 영적 수행이었다. 그들은 특정한 선교 전략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채 바다로 나아갔고, 이 자발적 유배는 그들을 유럽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선교사들로 만들었다.

2.2. 유럽 대륙의 재복음화
Peregrinatio의 영성에 사로잡힌 수많은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유럽 대륙으로 향했다. 콜룸바(Columba)는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작은 섬 아이오나(Iona)에 수도원을 세워 북부 브리튼 복음화의 중심 기지로 삼았고, 콜룸바누스(Columbanus)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에 뤽세이유(Luxeuil), 보비오(Bobbio)와 같은 수도원들을 세워 암흑기를 밝히는 등불 역할을 했다.

아일랜드 수도원 선교는 선교가 반드시 거대한 제국의 후원이나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문명의 중심이 무너졌을 때, 변방의 작은 공동체가 지녔던 순수한 영성과 희생적인 헌신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역사적 사례이다.

제3부 검과 십자가: 중세 선교의 흐름 (c. 800-1500 AD)
중세는 기독교 선교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시대이다. 한편으로는 교회와 국가가 결합된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힘을 바탕으로 유럽의 경계를 넓히는 대규모 확장이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강압과 폭력이 동원되고 선교의 본질이 심각하게 왜곡되기도 했다.

3.1. 샤를마뉴와 '기독교 세계': 정복으로서의 선교
800년, 교황이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Charlemagne)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하면서, 교회와 국가가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로 결합된 '기독교 세계'가 탄생했다. 이 이념 속에서 선교는 제국의 경계를 확장하고 이교도 '야만족'들을 기독교 문명 안으로 편입시키는 정치적, 군사적 행위와 동일시되었다. 샤를마뉴는 작센족을 정복하고 '세례 혹은 죽음'을 강요했으며, 이러한 '검의 선교' 모델은 이후 북유럽과 동유럽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주된 방식이 되었다.

3.2. 수도원 개혁 운동과 새로운 선교적 열정
'기독교 세계'의 확장은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을 가져왔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려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들이 일어났다. 클뤼니 개혁 운동과 시토회는 엄격한 영성 생활의 회복을 강조했다.

중세 선교에 가장 큰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13세기에 등장한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s)였다. 이들은 담장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살며 복음을 전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가 시작한 프란체스코회는 청빈과 평화의 복음을 실천했으며, 성 도미니쿠스(Dominic de Guzmán)가 창설한 도미니코회는 이단에 맞서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복음을 변증하는 '지적 선교'의 전통을 세웠다.

3.3. 십자군 전쟁: 선교의 비극적 왜곡
중세 선교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는 단연 십자군 전쟁(1096-1291)이다.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이 '성전'(Holy War)은, 십자가를 사랑과 희생이 아닌 증오와 폭력의 상징으로 전락시켰다. 십자군은 선교를 군사적 행위와 동일시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했고, 이슬람 세계에 기독교에 대한 깊은 불신을 남겨 이후 수 세기 동안 관계를 악화시키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3.4. 새로운 지평: 동방 선교와 지적 선교
십자군의 광기 속에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방식의 선교적 돌파구들이 열리고 있었다. 9세기 비잔틴 제국의 형제 선교사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는 슬라브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키릴 문자'를 창안하고 성경을 번역하여 토착화 선교의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또한,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았던 네스토리안 교회는 동쪽으로 나아가 중앙아시아와 중국에까지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전했다. 십자군의 실패를 목격한 라몬 룰(Ramon Llull)은 무력 대신 아랍어와 이슬람 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이성적인 변증을 통해 무슬림을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대를 앞서간 선교 전략을 제시했다.

제4부 종교개혁과 현대 선교의 여명 (c. 1500-1950)
종교개혁은 교회의 신학을 성경의 권위 위에 바로 세웠지만, 역설적으로 그 직접적인 열매가 세계 선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개혁가들은 사도 시대의 종언과 함께 지상대위임명령의 의무도 끝났다고 보았고, 개신교회는 거의 2세기 동안 선교라는 과업 앞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4.1. 대각성 운동: 현대 선교의 영적 발전소
18세기 대서양 양편에서 타오른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은 이 잠자던 거인을 깨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등이 주도한 이 부흥 운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개인적 회심'과 '거듭남'에 두었다. 이러한 강조는 신자들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폭발적인 내적 동력을 창출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자기희생적인 삶과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모라비안 공동체의 선구적인 선교 활동은 이러한 열정에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19세기 초 제2차 대각성 운동은 '자발적 결사체'라는 조직적 모델을 낳았고, '건초더미 기도회'와 같은 사건을 통해 청년들의 선교 헌신을 이끌어냈다.

4.2. 윌리엄 캐리: 현대 선교의 문을 열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대각성 운동의 신학적 유산 위에서 개신교 선교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다. 그는 1792년 『연구』(An Enquiry)라는 책을 통해 지상대위임명령이 사도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영속적으로 순종해야 할 '의무'임을 논증했다. 그는 세계의 영적 필요를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자발적 선교회'라는 혁신적인 구조를 제안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그의 외침은 세계 최초의 개신교 선교회인 침례교선교회(BMS)의 창립으로 이어졌고, 그 자신은 1호 선교사가 되어 인도로 향했다. 인도에서의 그의 사역은 성경 번역, 교육, 사티(Sati) 폐지와 같은 사회 개혁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것이었다.

4.3. '위대한 세기'와 전략의 진화
윌리엄 캐리가 문을 연 19세기는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불릴 만큼 개신교 선교의 폭발적인 확장기였다. 초기 선교는 주로 해안 거점에 '선교 기지'를 세우고 서구 문명과 복음을 함께 전파하는 '외지 선교' 모델을 따랐다. 이는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큰 공헌을 했지만, 문화적 제국주의와 내륙 복음화의 지체라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와 중국내지선교회(CIM)는 철저한 '상황화'와 '믿음 선교' 원칙을 통해 내륙 깊숙이 복음을 전파하는 '내지 선교' 모델을 제시하며 선교의 지평을 혁명적으로 확장시켰다.

제5부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21세기 현대 선교 (c. 1950-현재)
20세기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극적인 인구 지형의 변화를 겪은 시기이다. 기독교의 중심이 서구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남반구(Global South)로 급격히 이동했다. 이는 더 이상 서구 교회가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중심이 아님을 의미한다.

5.1. 새로운 패러다임: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선교는 이제 '서구에서 나머지 세계로' 향하는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from everyone to everywhere) 향하는 다방향적인 운동이 되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교회들이 이제는 유럽과 북미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역선교 현상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선교의 주도권을 현지 교회와 토착 지도자들에게 이양하고, 서구 선교사는 동등한 '동반자'로서 협력해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을 요구한다.

5.2. 신학적 논쟁과 통합: 총체적 선교
20세기 후반, 선교의 우선순위를 둘러싸고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은 치열한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 에큐메니칼 진영은 선교를 사회 구조악 철폐와 인간 해방, 정의와 평화(샬롬)의 실현으로 이해하며 사회 구원을 강조했다. 반면, 복음주의 진영은 이러한 경향이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개인의 회심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하며 영혼 구원의 우선성을 재확인하고자 했다. 이 두 진영의 간극을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 것이 1974년 시작된 '로잔 운동'이다. 로잔 운동은 '로잔 언약'을 통해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제로 통합하는 '총체적 선교' 개념을 정립하며 21세기 선교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5.3. 새로운 선교의 장과 과제
21세기 교회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복합적인 도전들에 직면해 있다.

도시화와 메가시티 선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인종과 문화, 극심한 빈부 격차가 응축된 메가시티는 새로운 선교의 최전선이다.

디아스포라 선교: 세계화로 인해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인구가 급증하면서, 우리 곁의 이웃이 새로운 선교지가 되었다. 특히 전 세계에 흩어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은 중요한 선교 자원이 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와 사이버 선교: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는 지리적 제약 없이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새로운 선교의 공간을 열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 절대 진리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변증하고, 타종교와 대화하며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지적, 영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전략: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비즈니스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비즈니스 선교'(BAM), 전문성을 활용하는 NGO 사역, 그리고 현지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복음의 씨앗을 심는 '상황화' 전략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결론: 미완의 과업, 계속되는 이야기
오순절 다락방에서 시작된 복음 전파의 역사는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미완의 이야기'이다. 그 형태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자발적인 증인의 공동체에서 제국의 종교로, 변방의 수도원에서 세계적인 선교회로, 그리고 이제는 모든 대륙에서 모든 대륙으로 향하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그 모습을 바꾸어왔다.

이 장대한 역사는 우리에게 선교가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 이전에, 세상 끝날까지 당신의 백성과 함께하시며(마 28:20)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 즉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임을 가르쳐준다. 우리의 역할은 그 위대한 드라마에 신실한 참여자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과거의 유산은 우리에게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준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신실함과 수도사들의 헌신, 개혁가들의 용기를 본받아야 하지만, 동시에 교회가 권력과 결탁하고 문화적 오만에 빠졌던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21세기의 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복잡한 도전 앞에 서 있지만, 동시에 과거 어느 때보다 다양한 기회의 문 앞에 서 있기도 하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가 어린 양의 보좌 앞에서 함께 찬양하는 그 날을 소망하며(계 7:9),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방식으로 이 위대한 복음 전파의 역사를 계속해서 써 내려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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