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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지역 이슬람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
종교신학 (Theology of Religion)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이슬람
제 1부: 소비에트 이전 시대: 중앙아시아와 캅카스의 이슬람 문명
서론: 잊혀진 이슬람의 심장부
오늘날 '구소련 지역'이라는 단어는 많은 이들에게 70년간의 공산주의 통치와 그 이후의 혼란스러운 전환기라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이 지역의 이슬람은 종종 억압받고, 단절되었으며, 고립된 채 명맥만 유지해 온 변방의 신앙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지난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지역이 이슬람 세계의 가장 역동적이고 찬란한 문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는 장엄한 역사를 간과하게 만드는 심각한 오해이다. 소비에트라는 거대한 빙하가 덮치기 이전,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그리고 볼가-우랄 지역은 결코 이슬람의 변방이 아니었다. 그곳은 이슬람 신학과 법학, 철학과 과학을 이끌었던 위대한 학자들을 배출한 지성의 산실이었으며,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 문명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였고,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의 영성이 꽃피운 신앙의 심장부였다.
따라서 구소련 지역 이슬람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은, 소비에트라는 70년의 예외적인 시대를 잠시 걷어내고, 그 이전에 존재했던 깊고 풍부한 이슬람 문명의 토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다. 이 선행 작업 없이는 소비에트의 억압이 무엇을 파괴하려 했는지, 그 억압 속에서 무슬림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소련 붕괴 후의 '이슬람 부흥'이 왜 그토록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양상을 띠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본 장에서는 소비에트 이전 시대, 즉 7세기 이슬람의 전래로부터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정복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서 이슬람이 어떻게 전파되고, 발전하며, 독특한 지역적 문화를 형성했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특히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로 대표되는 학문적 황금기, 이 지역 이슬람의 성격을 규정한 수피즘의 압도적인 영향력, 그리고 토착 문화와의 융합을 통해 나타난 혼합주의적 특성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구소련 지역 이슬람이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연약한 식물이 아니라, 천 년의 세월 동안 깊이 뿌리내린 거대한 고목이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슬람의 전래와 확산: 다양한 경로, 하나의 신앙
구소련 지역에 이슬람이 전파된 경로는 지역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각기 다른 전파 방식은 해당 지역 이슬람의 초기 성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 중앙아시아: 정복과 페르시아 문화의 세례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이 위치한 중앙아시아(역사적으로는 '트란스옥시아나')는 7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아랍-이슬람 제국의 군사적 정복을 통해 처음 이슬람을 접했다. 초기에는 조로아스터교, 불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등을 믿던 현지인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8세기 중반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가 중국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지배권이 확고해졌다. 그러나 진정한 이슬람화는 군사적 정복 이후, 이 지역에 들어선 페르시아계 이슬람 왕조인 사만 왕조(9-10세기)의 문화적 후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만 왕조는 아랍어와 더불어 페르시아어를 이슬람 학문과 행정의 언어로 장려했으며,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초기부터 페르시아 문화의 깊은 세례를 받은 세련되고 지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부하라, 사마르칸트, 히바와 같은 도시들은 이 시기 이슬람 세계의 가장 중요한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2. 캅카스 지역: 저항과 점진적 침투
체치냐, 다게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이 위치한 캅카스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비잔틴, 조지아, 아르메니아, 러시아)가 첨예하게 맞서는 경계 지대였다. 이슬람은 7세기경 '철의 문'이라 불리던 데르벤트(다게스탄)를 통해 매우 일찍 전파되었지만, 산악 지대의 험준한 지형과 강력한 지역 부족들의 저항으로 인해 이슬람화는 매우 길고 점진적인 과정을 거쳤다. 이 지역의 이슬람은 종종 외부의 기독교 세력에 대한 저항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으며, 이는 19세기 제정 러시아에 맞서 싸운 이맘 샤밀의 저항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캅카스 지역 이슬람에 매우 호전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3. 볼가-우랄 지역: 평화적 개종과 정체성 형성
현재의 타타르스탄, 바시코르토스탄 등이 위치한 볼가-우랄 지역의 이슬람은 군사적 정복이 아닌, 평화적인 방식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922년, 볼가 강 유역에 위치했던 볼가 불가르 왕국의 통치자가 자발적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인 것이 그 시초였다. 이후 킵차크 칸국(금장 한국) 시대에 이슬람은 이 지역 튀르크-타타르 민족의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 잡았다. 이들에게 이슬람은 주변의 슬라브-러시아 정교회 세력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민족적 정체성'의 표지가 되었다. 이러한 평화적 개종의 역사는 이 지역 이슬람이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상업 지향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지성의 황금기: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
중세 시대 중앙아시아는 이슬람의 변방이 아니라, 바그다드, 카이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슬람 문명의 핵심적인 중심지였다. 이슬람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들 중 상당수가 바로 이 지역 출신이다.
이맘 알-부카리 (Imam al-Bukhari, 810-870): 오늘날 부하라 인근에서 태어난 그는, 수니파 무슬림들에게 꾸란 다음으로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여겨지는 하디스 모음집 『사히흐 알-부카리』를 편찬했다. 그의 업적은 이슬람 법학과 신학의 근간을 세운 것으로, 중앙아시아가 이슬람 학문의 최정점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븐 시나 (Ibn Sina / Avicenna, 980-1037): 역시 부하라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철학, 의학, 천문학, 수학 등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업적을 남긴 중세 이슬람 최고의 지성이었다. 그의 의학 저서인 『의학 정전(The Canon of Medicine)』은 수 세기 동안 동서양 의학계의 가장 중요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알-비루니 (Al-Biruni, 973-1048), 알-콰리즈미 (Al-Khwarizmi, 780-850) 등 수많은 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며 인류 지성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이러한 지적 활동의 중심에는 부하라, 사마르칸트, 히바 등에 세워진 수많은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 고등 교육기관)**들이 있었다. 이 마드라사들은 전 이슬람 세계에서 온 학생들을 가르쳤고, 수많은 도서관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최신 과학에 이르는 방대한 장서를 자랑했다. 티무르 제국 시대에 건설된 사마르칸트 레기스탄 광장의 울루그벡, 쉐르도르, 틸라카리 마드라사는 오늘날까지도 그 화려하고 정교한 건축미를 통해 당시의 영광을 증언하고 있다.
수피즘의 압도적 영향과 혼합주의적 특성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지역 이슬람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수피즘(Sufism, 이슬람 신비주의)**의 압도적인 영향력이다. 이 지역의 이슬람은 법학자들의 엄격한 율법주의보다는, 하나님과의 신비적 합일을 추구하는 수피들의 대중적인 가르침을 통해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수피 종단: 이 지역에서는 특히 두 개의 강력한 수피 종단(타리카, Tariqa)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첫째는 '조용한 디크르(신을 기억하는 염송)'와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며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던 나크쉬반디(Naqshbandi) 종단이다. 둘째는 튀르크 민족의 샤머니즘적 전통과 이슬람을 결합시킨 아흐마드 야사비(Ahmad Yasawi)가 창시한 야사위(Yasawi) 종단이다. 야사위의 가르침은 복잡한 아랍어 신학이 아닌, 쉽고 단순한 튀르크어 시(詩)를 통해 전파되었기 때문에 유목민들 사이에 특히 인기가 높았다.
성자 숭배와 성지 순례: 수피즘의 대중화는 살아있는 스승(셰이크, 이샨)과 죽은 성자(왈리)에 대한 숭배, 그리고 그들의 무덤(마자르, Mazar)을 순례하는(지야랏, Ziyarat) 문화를 낳았다. 이 마자르 순례는 메카를 향한 공식적인 순례(핫지, Hajj)보다 민중들의 신앙생활에서 훨씬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사람들은 마자르를 찾아가 성자의 중보를 통해 병을 고치고, 아이를 낳고, 소원을 빌었다. 이는 이슬람 이전의 조상 숭배, 영웅 숭배, 그리고 샤머니즘의 성소(聖所) 숭배 전통과 자연스럽게 결합된 대표적인 혼합주의적 현상이었다.
토착 문화와의 융합: 수피들은 이슬람을 전파하면서 현지의 토착 신앙과 관습을 배척하기보다는, 그것을 이슬람의 틀 안으로 끌어안는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튀르크 민족의 샤먼(박시, bakhshi)들은 이슬람의 성자로 재해석되었고, 그들의 치유 의식은 이슬람식 기도와 결합되었다. 고대 이란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한 춘분 축제 '나우루즈(Nowruz)'는 이슬람과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민족적, 문화적 축제로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다.
결론: 제정 러시아 이전의 이슬람 유산
결론적으로, 18-19세기 제정 러시아가 이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마주한 이슬람은 결코 미개하거나 원시적인 신앙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 년의 역사를 통해 이 지역의 문화와 정체성 자체와 동의어가 된, 깊고 풍부하며 복합적인 문명이었다. 알-부카리와 이븐 시나를 배출한 위대한 지적 전통, 나크쉬반디와 야사위 종단이 이끈 깊은 수피적 영성, 그리고 샤머니즘과 고대 종교의 유산과 결합된 다채로운 민중 신앙이 그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정 러시아와 그 뒤를 이은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는 단순히 정치적, 군사적 정복을 넘어, 이 지역 사람들의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이슬람 문명 자체를 통제하고, 변형시키며, 궁극적으로는 말살하려는 시도였다. 이처럼 소비에트 이전 시대의 풍부한 유산을 이해하는 것은, 이후 시대에 이 지역 무슬림들이 겪게 될 거대한 시련의 무게와, 그 시련 속에서도 그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된다. 다음 장에서는 제정 러시아의 정복이 이슬람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으며, '자디드' 운동으로 대표되는 무슬림들의 근대적 저항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제 2부: 제정 러시아의 정복과 '자디드' 운동
서론: 첫 번째 충격, 기독교 제국과의 조우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볼가-우랄 지역의 이슬람 문명은 16세기부터 19세기 말에 걸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역사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북쪽에서 끊임없이 팽창해 온 거대한 기독교 제국, 즉 제정 러시아와의 충돌과 그에 이은 정복이었다. 몽골 제국의 지배 이후, 이 지역의 무슬림들이 비(非)무슬림 세력의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첫 번째 충격'은 이슬람 공동체의 정치적 자율성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회 구조, 경제, 법률, 그리고 종교적 삶의 방식 전반에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정 러시아의 통치는 단순한 억압과 통제로만 점철되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이슬람 사회 내부에 격렬한 자기 성찰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왜 이교도들에게 정복당했는가?", "우리의 약점은 무엇인가?", "이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라는 절박한 질문 앞에서, 무슬림 지식인들은 전통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서구의 근대성을 수용하여 개혁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태동한 것이 바로 **'자디드 운동(Jadid Movement)'**으로 알려진 이슬람 근대 개혁 운동이다. 본 장에서는 제정 러시아의 점진적인 정복 과정과 이슬람에 대한 통치 정책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무슬림 사회의 반응, 특히 자디드 운동의 등장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소비에트 시대라는 '두 번째 충격'이 닥치기 전, 이 지역 이슬람이 이미 근대 세계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변화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자디드 운동의 실패와 성공은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의 이슬람 정체성 논쟁에까지 그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제국의 팽창: 러시아의 남진(南進)과 이슬람 세계의 정복
러시아의 이슬람 세계 정복은 수 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1단계: 볼가-우랄 지역의 정복 (16세기)
러시아의 이슬람 세계 공략은 1552년 '뇌제' 이반 4세가 킵차크 칸국의 후예인 카잔 칸국을 정복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러시아가 슬라브의 영역을 넘어 튀르크-무슬림 세계로 팽창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아스트라한, 시비르 칸국이 차례로 정복되면서 볼가-우랄 지역의 무슬림들은 러시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2단계: 캅카스 정복 (18-19세기)
표트르 대제 이후 남쪽으로의 부동항을 확보하려던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험준한 산악 지형과 체첸, 다게스탄 등 지역 부족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정복은 100년 가까이 소요되는 기나긴 전쟁이 되었다. 특히, 나크쉬반디 수피 종단의 지도자였던 **이맘 샤밀(Imam Shamil)**은 1834년부터 1859년까지 약 25년간 러시아에 맞서 성전(가자와트, ghazawat)을 이끌며 전설적인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패배로 캅카스는 마침내 러시아에 복속되었다.
3단계: 중앙아시아 정복 (19세기 후반)
19세기 후반, 영국과의 중앙아시아 패권 경쟁,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 본격화되면서 러시아는 부하라, 히바, 코칸트 등 중앙아시아의 칸국들을 차례로 공략했다. 1865년 타슈켄트 함락을 시작으로, 1880년대에 이르면 중앙아시아 대부분이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거나 직접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로써 중앙아시아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독립은 막을 내렸다.
제정 러시아의 이슬람 통치 정책: 통제와 동화 사이
정복 이후, 제정 러시아는 광대한 영토의 수많은 무슬림 신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사용했다. 그 정책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강경책과 유화책 사이를 오갔다.
초기의 강제 개종과 동화 정책: 카잔 칸국 정복 초기, 러시아는 무슬림들을 강제로 정교회로 개종시키고, 모스크를 파괴하며, 러시아식 이름을 강요하는 등 강력한 동화 정책을 펼쳤다. 이는 타타르인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고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유화책과 제도적 통제: 18세기 후반 계몽 군주였던 예카테리나 2세는 정책을 바꾸어 이슬람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용을 베푸는 유화책을 사용했다. 그녀는 1788년 우파(Ufa)에 **'오렌부르크 무슬림 종무국(Orenburg Muslim Spiritual Assembly)'**을 설립했다. 이는 국가가 이슬람 성직자(이맘, 무프티)를 임명하고, 모스크 건설을 허가하며,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따른 일부 재판을 관할하도록 한 제도였다. 표면적으로는 이슬람을 인정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이슬람 지도자들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고 그들을 통해 무슬림 사회를 관리하려는 고도의 통치 전략이었다. 이 '국가 통제형 이슬람' 모델은 훗날 소비에트 시대의 '공식 이슬람' 제도의 원형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러시아화(Russification) 정책: 19세기 후반 민족주의가 강화되면서, 러시아는 다시금 무슬림들을 러시아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러시아화' 정책을 강화했다. 러시아어 교육을 의무화하고, 러시아인들의 이주를 장려하며, 무슬림들의 법적, 사회적 지위를 '이노베르치(inovertsy, 이교도)'로 규정하여 차별했다. 이 시기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적 정체성이 심각한 위협에 처해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근대적 대응의 시작: 자디드 운동 (Jadid Movement)
이러한 제정 러시아의 지배와 서구 근대 문명의 도전이라는 이중의 위기 앞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일단의 무슬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바로 **자디드 운동(Jadidism)**이다. '자디드'는 아랍어로 '새로운'이라는 뜻으로, 이 운동은 '우술 이 자디드(usul-i jadid)', 즉 **'새로운 방식'**의 교육을 옹호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1. 자디드 운동의 선구자: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
크림 타타르 출신의 지식인이었던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Ismail Gasprinsky, 1851-1914)**는 자디드 운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자신이 발행한 신문 『테르지üman(Tercüman, 통역사)』을 통해 "언어, 사상, 행동의 통일(Dilde, Fikirde, İşte Birlik)"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러시아 제국 내 모든 튀르크-무슬림 민족의 단결과 개혁을 호소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무슬림 사회가 서구에 뒤처진 원인이 이슬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 세기 동안 지속된 무지와 광신, 그리고 낡은 교육 방식에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2. 자디드 운동의 핵심 사상과 활동
자디드 운동의 목표는 이슬람의 근본 가치를 지키면서도, 서구의 과학 기술과 근대적 제도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무슬림 사회를 현대화하고, 이를 통해 러시아로부터의 실질적인 자율성과 발전을 꾀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방식'의 교육: 자디드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활동은 교육 개혁이었다. 그들은 기존의 마드라사가 꾸란 암송과 고전 주석에만 치중하는 '카딤(qadim, 낡은) 방식'을 비판하고, 읽기, 쓰기, 산수와 같은 기초 교육과 더불어 역사, 지리, 과학과 같은 근대 학문을 함께 가르치는 '새로운 방식'의 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에서는 이슬람 경전과 세속 학문이 공존했다.
인쇄술의 도입과 언론 활동: 자디드들은 자신들의 개혁 사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인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신문, 잡지, 교과서를 출판했다. 이는 무슬림 대중의 계몽과 여론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여성 교육과 해방: 자디드들은 사회 발전의 중요한 전제 조건으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들은 여성을 위한 학교와 잡지를 창간하고, 낡은 가부장적 관습(조혼, 강제 결혼 등)을 비판하며 여성의 사회 참여를 옹호했다.
문화 활동: 전통적인 이슬람에서는 금기시되었던 연극, 소설, 음악과 같은 근대적인 문화 예술 활동을 통해 민족 계몽과 사회 비판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3. 전통주의자(카디미스트)와의 갈등
자디드들의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 운동은 기존의 보수적인 이슬람 지도자들, 즉 **'카디미스트(Qadimists)'**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카디미스트들은 자디드들의 근대 교육이 이슬람의 전통을 파괴하고, 청년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며, 결국 러시아 문화에 동화시키는 이적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자디드-카딤 갈등은 20세기 초 무슬림 사회 내부의 가장 중요한 노선 투쟁이었으며, 이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까지 이어졌다.
결론: 미완의 근대화 프로젝트
결론적으로, 제정 러시아의 정복은 구소련 지역 이슬람 사회에 정치적 종속이라는 시련과 더불어, 근대성이라는 거대한 도전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태동한 자디드 운동은 이슬람 세계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중요한 근대화 프로젝트였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서구화나 맹목적인 전통 고수를 넘어, '이슬람을 통한 근대화'라는 제3의 길을 모색했다. 비록 카디미스트들의 반대와 제정 러시아의 견제 속에서 그들의 개혁은 많은 한계에 부딪혔지만, 자디드 운동은 이 지역 무슬림 사회에 근대적인 민족의식과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지적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이 미완의 프로젝트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라는 더 큰 역사적 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초기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적인 제정 러시아와 보수 이슬람 지도자들을 함께 비판했던 자디드들을 잠시 동맹으로 삼아 이용했다. 하지만 볼셰비키의 권력이 공고해지자, 자디드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혀 가장 먼저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이슬람을 현대적으로 개혁하려던 그들의 꿈은, 이슬람 자체를 완전히 말살하려 했던 소비에트의 무신론 폭풍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바로 이 지점, 즉 소비에트 정권이 어떻게 이슬람을 파괴하려 했는지 그 체계적인 공격의 역사를 추적할 것이다.
제 3부: 소비에트의 공격: 무신론 국가와 이슬람의 대결
서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은 구소련 지역 이슬람의 역사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근본적이고 파괴적인 단절을 가져왔다. 제정 러시아의 통치가 이슬람을 통제하고 동화시키려는 '관리'의 차원이었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소비에트 연방의 목표는 이슬람을 포함한 모든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자 '봉건 사회의 잔재'로 규정하고, 인간의 의식과 사회로부터 완전히 뿌리 뽑아 '박멸(Eradication)'하는 것이었다. 70여 년간 지속된 소비에트 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체계적이고, 폭력적이며, 지속적으로 종교를 말살하려 했던 거대한 사회 실험의 현장이었다.
소비에트의 이슬람 공격은 단순히 모스크를 파괴하고 성직자를 탄압하는 물리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이슬람적 가치관에 기반한 전통적인 삶의 방식 전체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공산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새로운 인간형, 즉 **'호모 소비에티쿠스(Homo Sovieticus)'**를 창조하려는 총체적인 프로젝트였다. 이를 위해 소비에트 정권은 법률, 교육, 문화, 언어 등 사회의 모든 영역을 동원했다. 본 장에서는 소비에트 정권이 이슬람을 파괴하기 위해 시기별로 어떻게 다른 전략을 구사하며 공격을 전개했는지를 연대기적으로 추적하고자 한다. 초기 볼셰비키의 기만적인 유화책에서 시작하여, 스탈린 시대의 대대적인 유혈 탄압,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교묘한 '공식 이슬람' 통제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그 집요하고 다층적인 공격의 역사를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소비에트라는 거대한 무신론 제국이 어떻게 이슬람 문명의 천년 유산을 단절시키려 했으며, 이러한 전례 없는 시련이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이슬람의 모습에 어떤 깊은 상처와 유산을 남겼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1단계 (1917년 ~ 1920년대 후반): 기만적 유화책과 내부 분열 조장
볼셰비키 혁명 직후, 레닌이 이끌던 초기 소비에트 정권은 아직 권력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광대한 영토의 비(非)러시아 민족들, 특히 무슬림들의 지지를 확보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제정 러시아의 억압 정책과 정반대되는, 매우 유화적이고 기만적인 정책을 펼쳤다.
종교의 자유 약속: 1917년 11월, 레닌은 '러시아와 동방의 모든 무슬림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통해 "앞으로 당신들의 신앙과 관습, 당신들의 민족적, 문화적 제도는 자유롭고 침해받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고 약속했다. 이는 제정 러시아의 압제에 시달려온 무슬림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으며, 많은 무슬림들이 내전 기간 동안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디드와의 일시적 동맹: 소비에트 정권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제정 러시아와 보수 이슬람 지도자(카디미스트)들을 비판했던 근대 개혁주의자들, 즉 자디드들을 초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볼셰비키는 자디드들을 행정 관료로 등용하고, 그들의 교육 개혁과 여성 해방 운동을 지지하는 척했다. 자디드들 역시 볼셰비키를 자신들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실현해 줄 동맹으로 착각하고 협력했다.
내부 분열 조장: 동시에 소비에트 정권은 이슬람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조장했다. 자디드와 카디미스트 간의 갈등, 부유층과 빈곤층 간의 계급 갈등을 부추겨 이슬람 공동체의 단결을 약화시켰다. 이 시기 소비에트의 전략은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이슬람 내부의 힘을 이용하여 스스로 붕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2단계 (1920년대 후반 ~ 2차 세계대전): 스탈린 시대의 전면적인 공격
1920년대 후반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기만적인 유화책은 끝나고 전면적이고 폭력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는 농업 집산화와 급진적인 사회주의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슬람을 '봉건적, 반혁명적 세력'으로 규정하고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성직자 및 지식인 엘리트의 숙청: 가장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은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었다. 한때 협력했던 자디드 지식인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혀 대부분 처형되거나 굴라크(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보수적인 이슬람 성직자(울라마)와 수피 지도자(셰이크)들 역시 '인민의 적'으로 규정되어 대대적으로 체포, 처형, 추방되었다. 이로써 이슬람의 지적, 영적 리더십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모스크와 마드라사의 대규모 파괴: 전국의 수만 개에 달했던 모스크와 마드라사는 강제로 폐쇄되었다. 일부는 창고, 영화관, 클럽, 무신론 박물관 등으로 용도가 변경되었고, 대부분은 아예 파괴되었다. 1917년 러시아 제국에 약 26,000개의 모스크가 있었으나, 1970년대에는 그 수가 약 500개로 급감했다. 이슬람 교육은 완전히 불법화되었다.
샤리아 법원의 폐지와 이슬람 관습 철폐: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따라 결혼, 이혼, 상속 등을 다루던 종교 법원은 완전히 폐지되고, 모든 법률은 소비에트의 세속법으로 대체되었다. 이슬람식 복장, 특히 여성의 베일(파란자, paranja)은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규정되어, '후줌(Hujum, 공격)'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베일 벗기 캠페인을 통해 강제로 철폐하려 했다. 라마단 금식이나 이슬람식 장례와 같은 종교적 실천 역시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아랍 문자 폐지와 언어 정책: 이슬람 세계와의 연결 고리이자 꾸란과 고전 문헌을 읽는 통로였던 아랍 문자는 이슬람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핵심 공격 대상이 되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0년대 후반 중앙아시아와 캅카스의 튀르크계 언어들의 표기법을 아랍 문자에서 라틴 문자로, 그리고 1930년대 후반에는 다시 키릴 문자로 강제 변경했다. 이 정책은 새로운 세대들이 자신들의 이슬람적, 문화적 유산이 담긴 과거의 문헌들을 읽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와의 의도적인 단절을 꾀한 문화적 학살(Cultural Genocide)이었다.
3단계 (2차 세계대전 ~ 1980년대): '공식 이슬람'을 통한 교묘한 통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국민적 단결이 필요해진 스탈린은 종교에 대한 극단적인 탄압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실용적인 노선을 취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새로운 정책은 이슬람을 완전히 제거하기보다는, 국가의 엄격한 통제 아래 '길들여진' 형태로 존재하도록 관리하는 방식으로 굳어졌다.
'공식 이슬람' 기구 설립: 스탈린은 1943년,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을 관할하는 **'중앙아시아 무슬림 종무국(SADUM)'**을 타슈켄트에 설립하는 등, 전국을 4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국가가 통제하는 공식적인 이슬람 관리 기구를 만들었다. 이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종무국 모델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 기구들은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엄격한 감독 아래, 소수의 등록된 모스크를 관리하고, 국가가 승인한 성직자(이맘, 무프티)를 임명하는 역할을 했다.
충성스러운 '붉은 무프티': 이 공식 이슬람 기구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체제에 충성하고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을 찬양하는 설교를 해야 했다. 이들은 대외적으로는 소비에트 연방에 종교의 자유가 존재하는 것처럼 선전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중동 및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소비에트의 외교 정책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들은 일반 무슬림들 사이에서 '붉은 무프티(Red Muftis)'라 불리며 경멸과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이중적 탄압의 지속: 이러한 '공식 이슬람'의 존재는 겉보기일 뿐, 실제로는 이슬람에 대한 억압이 계속되었다. 공식 기구에 속하지 않은 '비공식' 이슬람 활동(비밀 종교 교육, 수피즘 활동, 성지 순례 등)은 '불법'으로 간주되어 KGB에 의해 지속적으로 감시받고 탄압되었다. 여전히 종교 교육은 금지되었고, 종교 서적의 출판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이데올로기 전쟁: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창조
물리적인 탄압과 더불어, 소비에트 정권은 이슬람의 정신적 기반을 파괴하기 위한 장기적인 이데올로기 전쟁을 벌였다.
무신론 선전과 교육: 학교 교육 과정 전체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무신론에 입각하여 구성되었다. 이슬람을 비롯한 모든 종교는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미신'이자, 민중을 착취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도구'로 가르쳐졌다. 박물관, 영화, 신문 등 모든 미디어는 반(反)종교적 선전의 도구로 동원되었다.
소비에트 의례의 창조: 이슬람의 통과 의례(출생, 할례, 결혼, 장례)가 가지는 사회적 기능을 대체하기 위해, 소비에트 정권은 '붉은 결혼식', '별의 아이 명명식'과 같은 새로운 세속적 의례들을 만들어 보급하려 했다. 이는 사람들의 삶에서 종교의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였다.
결론: 파괴된 유산과 꺾이지 않은 영혼
결론적으로, 70년에 걸친 소비에트의 공격은 구소련 지역 이슬람 문명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수 세대에 걸쳐 축적된 지적 전통은 단절되었고, 이슬람의 공적, 제도적 기반은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무슬림들이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거나 고통받았다. 소비에트 정권은 이슬람을 사람들의 삶과 의식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그 자리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채우려는 거대한 실험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실험은 궁극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소비에트 정권은 이슬람의 공식적인 '몸'을 파괴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 '영혼'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이슬람은 어떻게 이 전례 없는 무신론의 빙하기를 견뎌내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국가가 통제하는 '공식 이슬람'의 외피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간 '지하 이슬람(Underground Islam)'에 있다. 다음 장에서는 바로 이 지하 이슬람의 생존 전략, 즉 가족, 수피 공동체, 그리고 민중 신앙이 어떻게 이슬람의 불씨를 지켜냈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제 4부: 지하 이슬람: 소비에트 시대의 생존 전략
서론: 공식과 비공식, 두 개의 이슬람
소비에트 연방이 70여 년간 자행한 체계적이고 무자비한 이슬람 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1991년 연방이 붕괴되었을 때 이슬람은 마치 동토(凍土)를 뚫고 솟아나는 새싹처럼 경이로운 부활을 시작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수만 개의 모스크가 파괴되고, 성직자 엘리트가 숙청되었으며, 모든 공식적인 종교 교육이 금지된 암흑기 속에서 이슬람의 불씨는 어떻게 꺼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그 해답은 소비에트 시대에 존재했던 '두 개의 이슬람'을 구분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엄격한 통제 아래 소수의 등록된 모스크와 관제 성직자들을 통해 명맥만 유지하던 **'공식 이슬람(Official Islam)'**이다. 이는 소비에트 정권이 대외 선전용으로 내세운 껍데기에 불과했으며, 대다수 민중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공식적인 제도의 틀을 벗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간 또 다른 이슬람, 즉 '비공식 이슬람(Unofficial Islam)' 또는 **'지하 이슬람(Underground Islam)'**이 존재했다. 이 지하 이슬람은 '병행 이슬람(Parallel Islam)'이라고도 불리며, 소비에트의 탄압을 피해 다양한 형태로 위장하고 적응하며 신앙의 핵심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비밀스러운 통로 역할을 했다. 본 장에서는 바로 이 지하 이슬람의 구체적인 생존 전략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신앙의 최후 보루였던 '가족 공동체', 비밀리에 지식과 영성을 전수한 '수피 네트워크', 그리고 민족의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은 '민중 신앙'과 '성지 순례'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슬람이 어떻게 무신론 제국의 심장부에서 살아남았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에 부활한 이슬람이 왜 그토록 수피적이고, 민중적이며, 혼합주의적인 특성을 강하게 띠게 되었는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제1의 보루: 가족, 신앙의 최후 성채
공식적인 종교 기관이 모두 파괴된 상황에서, 이슬람 신앙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단위는 바로 **'가족'**이었다. 국가는 학교와 미디어를 통해 무신론을 주입했지만, 가정은 소비에트 이데올로기가 침투하기 어려운 최후의 성채였다.
할머니(Babushka) 신학: 이슬람의 지적 전통을 담당했던 남성 엘리트(울라마, 자디드)들이 대부분 숙청된 상황에서, 신앙 전수의 역할은 역설적으로 가정의 여성, 특히 할머니들에게 돌아갔다. 남성들이 공적인 활동으로 인해 더 많은 감시와 위험에 노출되었던 반면, 여성들은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을 실천하고 가르칠 수 있었다. 할머니들은 공식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체득한 꾸란 구절 암송, 기본적인 기도 방법, 예언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슬람적 가치관(정직, 환대, 어른 공경 등)을 손자, 손녀들에게 구전으로 물려주었다. 이는 체계적인 교리보다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이슬람, 즉 '문화적 이슬람'이 살아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통과 의례의 비밀스러운 실천: 소비에트 정권은 이슬람식 통과 의례를 세속적인 소비에트 의례로 대체하려 했지만, 대부분의 가정은 이를 비밀리에 고수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병원에서 '의학적인 이유'로 포경 수술을 하는 방식으로 **할례(순낫)**를 치렀고, 결혼식은 공식적으로는 소비에트 방식의 민사 등록으로 치른 뒤, 집에서 가까운 친지들만 모여 이맘(비공식)의 주례 하에 이슬람식 혼인 서약(니카, nikah)을 따로 진행했다. 특히 장례 의식은 가장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슬람적 전통이었다. 사람들은 공식적으로는 무신론적 장례를 치르더라도, 비밀리에 시신을 염하고, 수의를 입히며, 이슬람식 장례 기도를 드렸다. 이러한 통과 의례들은 개인과 가족이 여전히 무슬림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중요한 정체성의 표지였다.
라마단과 이슬람식 식단: 라마단 기간 동안 공개적으로 금식을 하는 것은 위험했지만, 많은 이들이 집 안에서 조용히 금식을 지켰다. 또한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할랄 방식으로 도축된 고기를 선호하는 이슬람식 식단(할랄)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중요한 문화적 정체성으로 유지되었다.
제2의 동력: 수피 네트워크, 비밀의 거미줄
가족이 신앙의 '보존'에 중점을 두었다면, 신앙의 '심화'와 '확산'은 주로 비밀리에 활동했던 수피 종단(타리카, Tariqa)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캅카스와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강력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던 나크쉬반디 종단 등은 소비에트의 탄압에 맞서 지하 이슬람을 이끈 핵심 동력이었다.
스승-제자 관계의 견고함: 수피즘의 핵심은 스승(셰이크, 무르시드)과 제자(무리드) 간의 절대적인 신뢰와 복종 관계에 있다. 이러한 소규모의 점조직 형태는 KGB의 감시망을 피해 비밀리에 활동하기에 매우 적합했다. 스승은 자신의 집이나 비밀 장소(후즈라, hujra)에서 소수의 제자들을 모아 꾸란, 하디스, 그리고 수피즘의 가르침을 비밀리에 전수했다.
지식과 영성의 명맥 유지: 공식적인 마드라사가 모두 파괴된 상황에서, 이 수피 스승들은 이슬람의 고등 지식과 영성의 명맥을 이어간 유일한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수 세대에 걸쳐 구전과 필사를 통해 전수된 지식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의 비공식 종교 지도자들을 양성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갑자기 등장한 수많은 이맘과 종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 지하 수피 네트워크를 통해 교육받은 이들이었다.
조직적 저항의 구심점: 캅카스 지역, 특히 체치냐와 다게스탄에서 수피 종단은 단순한 종교 집단을 넘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들은 소비에트의 집단 농장 정책에 반대하고, 민족의 전통과 언어를 지키려는 노력을 주도했다. 이러한 저항의 역사는 캅카스 지역의 이슬람에 매우 강력하고 전투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제3의 피난처: 민중 신앙과 성지 순례
소비에트 정권의 공격은 주로 모스크, 샤리아 법원, 울라마 등 '제도적 이슬람'과 '고등 종교'에 집중되었다. 반면,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민중 신앙(Folk Islam)**의 영역은 상대적으로 통제하기가 더 어려웠다. 많은 경우, 이러한 민중 신앙은 '종교'가 아닌 '민족의 관습'이나 '미신'으로 위장하여 살아남았다.
성지 순례(지야랏)의 지속: 공식적인 예배와 메카 순례는 불가능했지만, 지역의 성자 묘소(마자르)를 찾아가는 비공식적인 순례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사람들은 마자르 방문을 '역사 유적지 탐방', '소풍', 또는 '조상의 묘 방문'과 같은 세속적인 활동으로 위장했다. 마자르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영적인 위안을 주는 장소이자, 다른 무슬림들과 만나 교제하고 공동체 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적 공간으로 기능했다. 성자 묘소 주변의 나무에 천 조각을 묶으며 소원을 비는 행위는 소비에트 시대 내내 지속된 가장 대표적인 지하 신앙의 모습이었다.
치유사와 부적: 사람들은 소비에트의 공식 의료 시스템을 이용하면서도, 병이 낫지 않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전통적인 치유사(박시, 타빕)나 점술가를 찾아갔다. 이들은 꾸란 구절을 이용한 주술이나 부적을 통해 심리적인 안정과 치유를 제공했다. 이러한 행위는 공식적으로는 '미신'으로 치부되었지만,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족 축제의 외피: 중앙아시아의 나우루즈 축제와 같이 이슬람 이전부터 존재했던 민족 고유의 축제들은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도 '민족 문화'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축제를 통해 자신들의 이슬람 이전의 정체성과 더불어, 그 안에 융합되어 있던 이슬람적 가치관과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고 다음 세대에 전수할 수 있었다.
결론: 압력이 만들어낸 독특한 이슬람
결론적으로, 소비에트라는 거대한 무신론의 빙하기 속에서 이슬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제도와 텍스트 속에만 갇혀 있던 종교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문화 속에 깊이 녹아든 살아있는 유기체였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이슬람의 지상 구조물들이 모두 파괴되었을 때, 신앙은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세포 단위로 숨어들었고, 수피 네트워크라는 비밀스러운 지하 수맥을 통해 생명수를 공급받았으며, 민중 신앙이라는 두꺼운 문화적 외투를 입고 혹독한 겨울을 견뎌냈다.
그러나 이러한 70년의 지하 생존은 구소련 지역 이슬람에 독특한 유산을 남겼다. 오랜 기간 지적, 제도적 기반과 단절된 결과, 이 지역의 이슬람은 교리적으로는 다소 단순화되고, 실천적으로는 가족과 지역 공동체 중심의 의례를 중시하며, 영적으로는 수피즘과 민중 신앙의 혼합주의적 색채가 매우 강한 형태로 남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고 종교의 자유가 찾아왔을 때, 부활의 기반이 된 이슬람의 모습이었다. 다음 마지막 장에서는 이 '지하 이슬람'이 마침내 지상으로 나왔을 때, 어떤 혼란과 갈등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제 5부: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의 부흥: 혼란스러운 르네상스
서론: 해빙, 그리고 터져 나온 갈증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구소련 지역 무슬림들에게 70여 년간 굳게 닫혀 있던 종교의 자유라는 수문을 활짝 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수십 년간 억눌려왔던 영적 갈증은 마치 터져 나오는 홍수처럼 폭발적인 '이슬람 부흥(Islamic Revival)'으로 이어졌다. 파괴되었던 모스크들이 재건되고, 해외에서 수많은 꾸란과 이슬람 서적들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사람들은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이슬람 정체성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은 더 이상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정신적 자원으로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부흥'은 결코 과거로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고립되고 단절되었던 이슬람 공동체가 갑자기 전 지구적인 이슬람 네트워크와 조우하면서 겪게 되는,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정체성의 재구성'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포스트 소비에트 이슬람은 크게 세 개의 세력이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며, 때로는 타협하는 거대한 각축장이 되었다. 첫째는 각국 정부가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는 **'국가 주도 공식 이슬람'**이며, 둘째는 소비에트 시절 지하에서 살아남은 **'전통적 민중/수피 이슬람'**의 부활이고, 셋째는 해외에서 유입된 **'글로벌 개혁/살라피 이슬람'**의 도전이다. 본 장에서는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이슬람 부흥의 다층적인 모습을 이 세 가지 세력 간의 역학 관계를 중심으로 심층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지역의 이슬람이 왜 '르네상스'인 동시에 '혼란'을 겪고 있는지, 그리고 이 거대한 전환이 21세기 이 지역의 미래와 세계 이슬람의 지형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를 종합적으로 전망하며 논의를 마무리할 것이다.
부흥의 외적 모습: 하드웨어의 재건
소련 붕괴 후 가장 먼저 눈에 띄게 나타난 변화는 이슬람의 물리적, 제도적 기반, 즉 '하드웨어'의 급속한 재건이었다.
모스크와 마드라사의 재건: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전역에서 수천 개의 새로운 모스크가 건설되거나, 박물관이나 창고로 사용되던 옛 모스크들이 복원되어 원래의 기능을 되찾았다. 이 과정에는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이란, 파키스탄 등 해외 이슬람 국가들의 막대한 자금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초급 꾸란 학교에서부터 고등 교육기관인 이슬람 대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마드라사가 다시 문을 열었다.
종교 서적의 홍수: 수십 년간 종교 서적의 진공 상태에 있었던 이 지역에는 해외에서 번역되거나 원어로 된 수백만 권의 꾸란, 하디스, 이슬람 법학 서적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는 사람들에게 이슬람 지식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기회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다양한, 때로는 서로 상충하는 이슬람 해석들이 무분별하게 유입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공적인 이슬람의 복원: 라마단 금식, 이드 축제, 금요 합동 예배가 다시 공적인 삶의 일부가 되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는 종교 프로그램이 방송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슬람식 복장을 하고 수염을 기르는 등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메카 순례(핫지)의 길이 다시 열리면서 매년 수만 명의 순례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했다.
부흥의 내적 갈등: 세 개의 이슬람, 하나의 영토
물리적인 재건의 이면에서, 포스트 소비에트 이슬람의 '소프트웨어', 즉 그 내용과 정체성을 둘러싼 치열한 내부 투쟁이 전개되었다.
1. 국가 통제하의 '공식 이슬람'
소련 붕괴 후 독립한 중앙아시아와 아제르바이잔 등의 신생 국가들은 대부분 권위주의적인 세속 정권의 형태를 띠었다. 이들 정권에게 이슬람은 한편으로는 공산주의를 대체할 민족 정체성의 핵심 요소로서 장려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정치적 이슬람'의 원천으로서 엄격하게 통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들 정부는 소비에트 시대의 '종무국' 모델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여, 국가가 이맘을 임명하고, 설교 내용을 검열하며, 모든 종교 활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식 이슬람' 체제를 유지하거나 더욱 강화했다. 이 공식 이슬람은 정부에 순응적이며, 민족주의와 결합된 온건하고 '전통적인' 이슬람을 지향한다.
2. '전통 이슬람'의 부활: 민중/수피 이슬람
지하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전통적인 민중/수피 이슬람 역시 부흥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었다. 특히 나이 든 세대를 중심으로, 소비에트 시절 비밀리에 지켜왔던 성지 순례(지야랏), 성자 기념 축제, 그리고 다양한 민중적 의례들이 다시 공개적으로 행해지기 시작했다. 우즈베키스탄의 바하uddin 나크쉬반드 묘소나 카자흐스탄의 아흐마드 야사비 묘소 등은 다시 수많은 순례자들로 붐볐다. 이러한 전통 이슬람은 신생 국가 정부들에게도 환영받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그것이 해당 국가의 '고유한 민족 문화'의 일부로 간주되며, 해외의 급진적인 사상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3. 새로운 도전: 글로벌 '살라피 이슬람'의 유입
포스트 소비에트 이슬람 부흥의 가장 복잡하고 논쟁적인 측면은 바로 해외로부터 유입된 **살라피즘(Salafism)/와하비즘(Wahhabism)**의 도전이다. 이는 '순수한' 이슬람을 표방하며, 수피즘과 성자 숭배를 포함한 모든 지역적, 혼합주의적 전통을 '쉬르크(우상숭배)'이자 '비드아(이단)'로 규정하고 배격하는 개혁주의 운동이다.
젊은 세대를 사로잡다: 이슬람 지식에 목말라 있던 젊은 세대들에게, 살라피즘은 부모 세대의 '미신적인' 민중 신앙과는 다른, 텍스트에 기반한 명료하고, 합리적이며, 전 세계의 '진정한' 무슬림들과 연대할 수 있는 '글로벌 이슬람'이라는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해외 자본과 네트워크: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은 자선 단체와 선교사들은 모스크와 학교를 짓고, 젊은이들을 중동으로 유학 보내 살라피 이념을 전파했다.
갈등의 폭발: 살라피즘의 확산은 전통 이슬람 공동체 내부에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다. 살라피 추종자들은 전통적인 이맘들을 비판하고, 성지 순례를 하는 사람들을 우상숭배자라고 비난하며, 자신들만의 모스크를 세우는 등 분파적인 행동을 보였다. 캅카스 지역, 특히 체치냐와 다게스탄에서는 전통적인 수피 종단과 새로운 살라피 그룹 간의 갈등이 무력 충돌과 지하드 운동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타지키스탄 내전(1992-1997) 역시 이러한 이슬람 내부의 이념 갈등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지역별 부흥의 다양한 양상
이 세 가지 세력 간의 상호작용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이슬람 카리모프와 같은 강력한 권위주의 지도자들은 '와하비즘 척결'을 명분으로 모든 비공식 이슬람 활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이로 인해 이슬람 부흥은 국가가 엄격하게 통제하는 공식 이슬람과 민족 문화로서의 민중 이슬람의 형태로 제한되었다.
캅카스 (체치냐, 다게스탄): 전통적인 수피즘의 뿌리가 깊은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저항의 역사와 맞물려 살라피-지하디즘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이곳은 전통과 개혁, 그리고 민족주의와 지하디즘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는 '뜨거운' 지역이 되었다.
볼가-우랄 (타타르스탄): 상대적으로 경제 수준이 높고 러시아와의 교류가 깊었던 타타르스탄에서는 보다 온건하고 지적인 형태의 부흥이 나타났다. 이들은 소비에트 이전 자디드 운동의 유산을 재발견하며, 이슬람과 현대성, 그리고 러시아 내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조화시키려는 '유로 이슬람(Euro-Islam)'을 모색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시아파가 다수인 아제르바이잔은 이웃한 이란의 종교적 영향력과 터키의 세속주의 모델, 그리고 러시아의 영향력 사이에서 복잡한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으며, 국가의 강력한 세속주의 정책으로 인해 부흥이 상대적으로 더딘 편이다.
결론: 새로운 정체성을 향한 고통스러운 여정
결론적으로,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의 이슬람 부흥은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70년의 단절 이후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르네상스이다. 그것은 국가의 통제, 전통의 부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세 개의 강력한 힘이 서로 충돌하고 협상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이 지역의 무슬림들은 "진정한 이슬람이란 무엇인가?", "무슬림으로서 새로운 세속 국가의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고 힘든 여정 위에 서 있다. 소비에트라는 거대한 압력이 사라진 후, 이슬람은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내부적인 분열과 외부 사상의 거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혼란스러운 르네상스가 과연 이 지역 고유의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이슬람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외부에서 유입된 배타적인 이데올로기에 잠식될지는 여전히 예측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이 거대한 실험의 결과가 구소련 지역 수천만 무슬림의 운명뿐만 아니라, 21세기 세계 이슬람의 미래 지형을 결정짓는 중요한 한 축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