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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유일성, 타종교에 대한 태도,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대화

종교학 및 비교 종교

유일성과 공존: 다원주의 사회 속 기독교의 자기 이해와 대화

서론: 교차로에 선 신앙
인류의 역사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문화, 신념, 그리고 세계관이 밀접하게 교차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는 더 이상 신학적 담론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이웃의 얼굴과 일상의 풍경 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모든 종교 전통에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핵심 교리로 삼는 기독교에게 이 질문은 더욱 첨예하고 실존적인 무게로 다가온다.

만약 기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이 유일한 진리라면, 다른 종교적 전통 속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수십억 인류의 영적 여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독교의 배타적 진리 주장은 필연적으로 타 종교에 대한 배척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자신의 고유한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타자와 깊이 있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공동선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가능한가?

본 보고서는 이처럼 복잡하고 민감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세 가지 핵심적인 축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의 유일성'**의 신학적 근거를 탐색한다. 기독교가 왜 스스로를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하는지, 그 핵심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둘째, 이러한 유일성에 대한 신념이 역사적으로 **'타종교에 대한 다양한 태도'**로 어떻게 분화되어 왔는지를 신학적 스펙트럼을 통해 조명한다. 모든 타 종교를 오류로 간주하는 배타주의에서부터, 모든 종교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는 다원주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사상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걸어온 고뇌의 길을 추적할 것이다.

셋째, 이러한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대화의 원리'**를 모색한다. 이는 단순히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는 것을 넘어,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타 종교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공동선을 위해 협력하며,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보고서는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다원적 현실에 대한 겸손한 개방성이 결코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자 한다. 오히려 이 둘 사이의 창조적 긴장이야말로, 21세기 교회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의미 있는 소통과 섬김을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는 것이 본 보고서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제1부 "오직 한 길": 기독교 구원론의 배타적 유일성
기독교가 타 종교와 구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지점은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한 주장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는 선언은 기독교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 이러한 배타적 유일성의 주장은 독선이나 문화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내적 논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유일무이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인격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를 단순히 위대한 도덕 교사나 선지자, 혹은 깨달은 자 중 한 명으로 보지 않는다. 기독교의 핵심 주장은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성육신(Incarnation) 교리에 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고 증언한다.

이 '성육신' 개념은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근본적으로 구별 짓는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이 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리키는' 존재라면, 예수는 스스로가 '길' 자체라고 선언한다(요한복음 14:6). 그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노력의 정점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찾아오신 자기 계시의 절정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간극을 스스로의 인격 안에서 연결한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주장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는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중보자가 된다.

1.2. 십자가와 부활: 구원의 결정적 사건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그의 인격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 특히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독특성에서 비롯된다.

첫째,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십자가는 단순히 숭고한 순교나 불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친히 치르신 '대속(Atonement)'의 사건이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되었으며, 이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고 선언한다. 십자가는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으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속적 희생의 개념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이다.   

둘째, 육체적 부활이다. 십자가가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건이라면,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증한 사건이다. 기독교는 영혼불멸이나 윤회를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소망은 '몸의 부활'에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이자, 장차 모든 믿는 자들이 경험하게 될 부활의 첫 열매가 된다. 이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자신이 죽음을 이긴 생명의 주님임을 증명하셨으며,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이처럼 기독교의 유일성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토대 위에 서 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고(성육신),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며(십자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부활)는 이 세 가지 기둥이 무너지면 기독교의 유일성 주장도 함께 무너진다. 바로 이 때문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나 윤리적 실천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배타적 입장을 견지하게 되는 것이다.   

제2부: 타자를 향한 시선 - 타종교를 바라보는 기독교의 신학적 스펙트럼
기독교의 유일성이라는 확고한 신념은 '그렇다면 타 종교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필연적인 질문을 낳는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독교 신학은 역사적으로 크게 세 가지 입장—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으로 분화되어 왔다. 이 세 가지 입장은 각각 기독교의 '특수성'(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하나님의 '보편성'(모든 인류를 향한 사랑)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2.1. 배타주의(Exclusivism): 오직 명시적 신앙을 통한 구원
배타주의는 전통적인 복음주의 기독교의 가장 지배적인 입장이다. 이 관점의 핵심은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고 고백하는 '명시적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와 같은 성경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결과다.

배타주의의 신학적 논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개인에게 적용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식적이고 개인적인 믿음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

이 입장은 복음의 유일성과 성경의 권위를 가장 강력하게 옹호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타 종교 속에서 나타나는 진실한 신앙과 선행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하는 어려운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질문 때문에 배타주의는 종종 독선적이고 사랑이 없는 태도로 비판받기도 한다.   

2.2. 포용주의(Inclusivism): 그리스도를 통한 보편적 구원 가능성
포용주의는 배타주의가 직면한 신학적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이 관점의 핵심은 구원의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지만, 그 구원의 은혜가 반드시 '명시적 신앙'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즉, 타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자신의 양심과 그들 종교 안에 있는 진리의 빛에 따라 진실하게 살아간다면,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포용주의의 신학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계시하신다(일반 계시). 타 종교 안에도 '로고스의 씨앗'이나 '진리의 빛'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구원의 가능성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다.

이 입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현대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에 가깝다. 포용주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강조하고 타 종교와의 대화에 문을 연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복음 전도의 시급성을 약화시키고, 타 종교의 고유성을 존중하기보다는 결국 기독교의 틀 안으로 흡수하려는 '신학적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2.3. 종교 다원주의(Pluralism):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배타주의와 포용주의를 모두 넘어서려는 가장 급진적인 입장이다. 이 관점의 핵심은 모든 주요 종교들은 서로 다른 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향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등한 구원의 효력을 지닌다는 주장이다. 다원주의자들에게 예수는 '하나의' 구원자일 수는 있지만, '유일한' 구원자는 아니다.

다원주의의 철학적, 신학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인식론적 겸손: 유한한 인간의 언어와 개념으로는 무한한 궁극적 실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각 종교는 단지 그 실재의 한 단면을 자신들의 문화적 틀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윤리적 공통점: 모든 주요 종교들은 사랑, 자비, 이타심과 같은 공통된 윤리적 가르침을 공유하며,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신학의 중심을 '그리스도 중심주의(Christocentrism)'에서 '신 중심주의(Theocentrism)'로 전환해야 한다. 즉, 구원의 중심은 예수가 아니라, 모든 종교가 경배하는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입장은 종교 간의 평화와 상호 존중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서 큰 호소력을 가진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결정성을 사실상 포기함으로써, 기독교의 정체성 자체를 해체하고 결국 모든 종교를 하나의 도덕주의로 환원시키는 위험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세 가지 입장은 기독교가 타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복잡한 신학적 지형을 보여준다.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 그리고 인간의 책임이라는 신학적 주제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고 있다.

제3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증언과 대화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는 것을 넘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소통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는 자신의 신앙적 확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타 종교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어가는 지혜를 요구한다. 이러한 실천은 '선언'과 '대화'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겸손한 확신'이라는 윤리적 자세를 통해, 그리고 '공동선'을 향한 협력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3.1. 선언과 대화의 변증법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선언적'이다. 복음은 타협의 대상이 아닌, 선포되어야 할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다원주의 사회에서 일방적인 선언은 종종 오만과 폭력으로 인식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증언은 반드시 '대화적' 형태를 취해야 한다. 여기서 대화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거나 상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며, 그들의 언어와 사고방식으로 복음을 설명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다.

진정한 대화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된다. 그들의 신앙이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겪고 있는 실존적 고뇌는 무엇인지를 공감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경청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신뢰가 형성되고, 기독교 신앙이 그들의 질문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솔한 나눔이 가능해진다. 선언과 대화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가야 할 기독교적 소통의 두 축이다.   

3.2. 겸손한 확신: 대화의 윤리적 자세
타 종교인들과의 대화에 임하는 기독교인은 '겸손한 확신'이라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확신: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과 복음의 진리성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대화는 의미 없는 담소로 전락하거나,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혼합주의에 빠지게 된다.

겸손: 그러나 이 확신은 결코 지적, 도덕적, 문화적 우월감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은 자신이 진리의 소유자가 아니라, 은혜로 진리를 받은 '증인'일 뿐임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이해와 해석이 불완전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타 종교 전통 속에서도 배울 점이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은 이러한 자세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권면한다.

이처럼 겸손과 확신이 결합될 때, 기독교인은 독선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증언할 수 있으며, 타 종교인들에게 위협이 아닌 평화의 동반자로 다가갈 수 있다.

3.3. 공동선을 향한 협력: 사회적 참여의 장
신학적 교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는 사회의 평화와 정의,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 증진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질 수 있다. 종교 간 대화는 단순히 신학적 담론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선(Common Good)'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난과 기아, 환경 파괴, 인권 침해, 전쟁과 폭력 등 인류가 직면한 공동의 문제 앞에서 종교인들은 각자의 신앙적 동기에 따라 힘을 모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은 '이웃 사랑'의 계명에 따라, 불교인은 '자비'의 정신에 따라, 무슬림은 '자카트'의 의무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함께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의 실천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종교가 사회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중요한 자원임을 증명한다. 둘째, 함께 땀 흘리는 과정 속에서 서로에 대한 편견이 허물어지고 깊은 신뢰와 우정이 쌓인다. 셋째, 기독교인에게는 말뿐이 아닌 삶으로 복음의 가치를 증언하는 가장 강력한 '행동하는 변증'이 된다.

3.4. '알지 못하는 신'에서 '화해의 자녀'까지: 변증적 접점 찾기
효과적인 대화와 증언을 위해서는 각 문화와 종교의 세계관 깊숙이 들어가 복음의 '접점'을 찾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는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진 제단을 보고,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사도행전 17:23)고 말하며 복음을 설명했던 변증적 전략과 같다.   

선교인류학자 돈 리처드슨은 이를 '구속적 유비(Redemptive Analogy)'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배신을 미덕으로 여기던 뉴기니의 한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어려움을 겪다가, 부족 간의 평화를 위해 추장이 자신의 아기를 '화해의 자녀(Peace Child)'로 내어주는 관습을 발견했다. 그는 이 문화적 유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와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자신의 아들 예수를 '화해의 자녀'로 보내주셨다는 복음의 진리를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문화 속에는 비록 불완전하고 왜곡되었을지라도, 인간의 근원적인 영적 갈망과 진리에 대한 희미한 그림자가 담겨 있다. 선교적 과제는 이러한 '로고스의 씨앗'을 발견하고,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고 완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타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복음의 유일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창의적이고 성육신적인 소통 방식이다.   

결론: 유일한 진리, 다양한 대화
본 보고서는 기독교의 유일성 주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신학적 필연성에 근거함을 밝혔다. 이 확고한 신념은 역사적으로 타 종교에 대해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라는 다양한 태도를 낳았으며, 오늘날에도 기독교 내부의 신학적 논쟁을 형성하는 핵심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종교 다원주의 사회의 도래는 기독교에 더 이상 신학적 입장 정립에만 머무를 수 없음을 요구한다. 이제 교회는 자신의 유일성에 대한 '확신'을 '겸손'이라는 그릇에 담아, 타 종교인들과의 진정한 '대화'와 '협력'의 장으로 나아가야 할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이는 결코 복음의 진리를 상대화하거나 타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복음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성육신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즉, 낯선 문화와 세계관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 그들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의 가장 깊은 갈망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으로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공동선'을 위해 협력하며, 각 문화 속에 숨겨진 '구속적 유비'를 통해 창의적으로 소통할 때, 기독교의 유일성 주장은 더 이상 배타적인 독선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깊고 절실한 사랑의 초대장으로 울려 퍼질 것이다. 이것이 다원주의의 파도 속에서 교회가 붙잡아야 할 희망이자 사명이다.

종교 간 대화론

유일성과 공존: 다원주의 사회 속 기독교의 자기 이해와 대화

서론: 교차로에 선 신앙
인류의 역사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문화, 신념, 그리고 세계관이 밀접하게 교차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는 더 이상 신학적 담론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이웃의 얼굴과 일상의 풍경 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모든 종교 전통에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핵심 교리로 삼는 기독교에게 이 질문은 더욱 첨예하고 실존적인 무게로 다가온다.

만약 기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이 유일한 진리라면, 다른 종교적 전통 속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수십억 인류의 영적 여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독교의 배타적 진리 주장은 필연적으로 타 종교에 대한 배척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자신의 고유한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타자와 깊이 있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공동선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가능한가?

본 보고서는 이처럼 복잡하고 민감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세 가지 핵심적인 축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의 유일성'**의 신학적 근거를 탐색한다. 기독교가 왜 스스로를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하는지, 그 핵심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둘째, 이러한 유일성에 대한 신념이 역사적으로 **'타종교에 대한 다양한 태도'**로 어떻게 분화되어 왔는지를 신학적 스펙트럼을 통해 조명한다. 모든 타 종교를 오류로 간주하는 배타주의에서부터, 모든 종교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는 다원주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사상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걸어온 고뇌의 길을 추적할 것이다.

셋째, 이러한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대화의 원리'**를 모색한다. 이는 단순히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는 것을 넘어,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타 종교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공동선을 위해 협력하며,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보고서는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다원적 현실에 대한 겸손한 개방성이 결코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자 한다. 오히려 이 둘 사이의 창조적 긴장이야말로, 21세기 교회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의미 있는 소통과 섬김을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는 것이 본 보고서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제1부 "오직 한 길": 기독교 구원론의 배타적 유일성
기독교가 타 종교와 구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지점은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한 주장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는 선언은 기독교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 이러한 배타적 유일성의 주장은 독선이나 문화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내적 논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유일무이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인격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를 단순히 위대한 도덕 교사나 선지자, 혹은 깨달은 자 중 한 명으로 보지 않는다. 기독교의 핵심 주장은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성육신(Incarnation) 교리에 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고 증언한다.

이 '성육신' 개념은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근본적으로 구별 짓는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이 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리키는' 존재라면, 예수는 스스로가 '길' 자체라고 선언한다(요한복음 14:6). 그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노력의 정점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찾아오신 자기 계시의 절정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간극을 스스로의 인격 안에서 연결한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주장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는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중보자가 된다.

1.2. 십자가와 부활: 구원의 결정적 사건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그의 인격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 특히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독특성에서 비롯된다.

첫째,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십자가는 단순히 숭고한 순교나 불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친히 치르신 '대속(Atonement)'의 사건이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되었으며, 이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고 선언한다. 십자가는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으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속적 희생의 개념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이다.  

둘째, 육체적 부활이다. 십자가가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건이라면,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증한 사건이다. 기독교는 영혼불멸이나 윤회를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소망은 '몸의 부활'에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이자, 장차 모든 믿는 자들이 경험하게 될 부활의 첫 열매가 된다. 이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자신이 죽음을 이긴 생명의 주님임을 증명하셨으며,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이처럼 기독교의 유일성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토대 위에 서 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고(성육신),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며(십자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부활)는 이 세 가지 기둥이 무너지면 기독교의 유일성 주장도 함께 무너진다. 바로 이 때문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나 윤리적 실천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배타적 입장을 견지하게 되는 것이다.  

제2부: 타자를 향한 시선 - 타종교를 바라보는 기독교의 신학적 스펙트럼
기독교의 유일성이라는 확고한 신념은 '그렇다면 타 종교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필연적인 질문을 낳는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독교 신학은 역사적으로 크게 세 가지 입장—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으로 분화되어 왔다. 이 세 가지 입장은 각각 기독교의 '특수성'(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하나님의 '보편성'(모든 인류를 향한 사랑)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2.1. 배타주의(Exclusivism): 오직 명시적 신앙을 통한 구원
배타주의는 전통적인 복음주의 기독교의 가장 지배적인 입장이다. 이 관점의 핵심은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고 고백하는 '명시적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와 같은 성경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결과다.

배타주의의 신학적 논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개인에게 적용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식적이고 개인적인 믿음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

이 입장은 복음의 유일성과 성경의 권위를 가장 강력하게 옹호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타 종교 속에서 나타나는 진실한 신앙과 선행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하는 어려운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질문 때문에 배타주의는 종종 독선적이고 사랑이 없는 태도로 비판받기도 한다.  

2.2. 포용주의(Inclusivism): 그리스도를 통한 보편적 구원 가능성
포용주의는 배타주의가 직면한 신학적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이 관점의 핵심은 구원의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지만, 그 구원의 은혜가 반드시 '명시적 신앙'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즉, 타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자신의 양심과 그들 종교 안에 있는 진리의 빛에 따라 진실하게 살아간다면,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포용주의의 신학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계시하신다(일반 계시). 타 종교 안에도 '로고스의 씨앗'이나 '진리의 빛'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구원의 가능성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다.

이 입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현대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에 가깝다. 포용주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강조하고 타 종교와의 대화에 문을 연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복음 전도의 시급성을 약화시키고, 타 종교의 고유성을 존중하기보다는 결국 기독교의 틀 안으로 흡수하려는 '신학적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2.3. 종교 다원주의(Pluralism):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배타주의와 포용주의를 모두 넘어서려는 가장 급진적인 입장이다. 이 관점의 핵심은 모든 주요 종교들은 서로 다른 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향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등한 구원의 효력을 지닌다는 주장이다. 다원주의자들에게 예수는 '하나의' 구원자일 수는 있지만, '유일한' 구원자는 아니다.

다원주의의 철학적, 신학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인식론적 겸손: 유한한 인간의 언어와 개념으로는 무한한 궁극적 실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각 종교는 단지 그 실재의 한 단면을 자신들의 문화적 틀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윤리적 공통점: 모든 주요 종교들은 사랑, 자비, 이타심과 같은 공통된 윤리적 가르침을 공유하며,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신학의 중심을 '그리스도 중심주의(Christocentrism)'에서 '신 중심주의(Theocentrism)'로 전환해야 한다. 즉, 구원의 중심은 예수가 아니라, 모든 종교가 경배하는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입장은 종교 간의 평화와 상호 존중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서 큰 호소력을 가진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결정성을 사실상 포기함으로써, 기독교의 정체성 자체를 해체하고 결국 모든 종교를 하나의 도덕주의로 환원시키는 위험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세 가지 입장은 기독교가 타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복잡한 신학적 지형을 보여준다.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 그리고 인간의 책임이라는 신학적 주제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고 있다.

제3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증언과 대화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는 것을 넘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소통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는 자신의 신앙적 확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타 종교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어가는 지혜를 요구한다. 이러한 실천은 '선언'과 '대화'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겸손한 확신'이라는 윤리적 자세를 통해, 그리고 '공동선'을 향한 협력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3.1. 선언과 대화의 변증법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선언적'이다. 복음은 타협의 대상이 아닌, 선포되어야 할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다원주의 사회에서 일방적인 선언은 종종 오만과 폭력으로 인식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증언은 반드시 '대화적' 형태를 취해야 한다. 여기서 대화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거나 상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며, 그들의 언어와 사고방식으로 복음을 설명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다.

진정한 대화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된다. 그들의 신앙이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겪고 있는 실존적 고뇌는 무엇인지를 공감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경청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신뢰가 형성되고, 기독교 신앙이 그들의 질문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솔한 나눔이 가능해진다. 선언과 대화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가야 할 기독교적 소통의 두 축이다.  

3.2. 겸손한 확신: 대화의 윤리적 자세
타 종교인들과의 대화에 임하는 기독교인은 '겸손한 확신'이라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확신: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과 복음의 진리성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대화는 의미 없는 담소로 전락하거나,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혼합주의에 빠지게 된다.

겸손: 그러나 이 확신은 결코 지적, 도덕적, 문화적 우월감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은 자신이 진리의 소유자가 아니라, 은혜로 진리를 받은 '증인'일 뿐임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이해와 해석이 불완전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타 종교 전통 속에서도 배울 점이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은 이러한 자세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권면한다.

이처럼 겸손과 확신이 결합될 때, 기독교인은 독선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증언할 수 있으며, 타 종교인들에게 위협이 아닌 평화의 동반자로 다가갈 수 있다.

3.3. 공동선을 향한 협력: 사회적 참여의 장
신학적 교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는 사회의 평화와 정의,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 증진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질 수 있다. 종교 간 대화는 단순히 신학적 담론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선(Common Good)'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난과 기아, 환경 파괴, 인권 침해, 전쟁과 폭력 등 인류가 직면한 공동의 문제 앞에서 종교인들은 각자의 신앙적 동기에 따라 힘을 모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은 '이웃 사랑'의 계명에 따라, 불교인은 '자비'의 정신에 따라, 무슬림은 '자카트'의 의무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함께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의 실천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종교가 사회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중요한 자원임을 증명한다. 둘째, 함께 땀 흘리는 과정 속에서 서로에 대한 편견이 허물어지고 깊은 신뢰와 우정이 쌓인다. 셋째, 기독교인에게는 말뿐이 아닌 삶으로 복음의 가치를 증언하는 가장 강력한 '행동하는 변증'이 된다.

3.4. '알지 못하는 신'에서 '화해의 자녀'까지: 변증적 접점 찾기
효과적인 대화와 증언을 위해서는 각 문화와 종교의 세계관 깊숙이 들어가 복음의 '접점'을 찾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는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진 제단을 보고,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사도행전 17:23)고 말하며 복음을 설명했던 변증적 전략과 같다.  

선교인류학자 돈 리처드슨은 이를 '구속적 유비(Redemptive Analogy)'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배신을 미덕으로 여기던 뉴기니의 한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어려움을 겪다가, 부족 간의 평화를 위해 추장이 자신의 아기를 '화해의 자녀(Peace Child)'로 내어주는 관습을 발견했다. 그는 이 문화적 유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와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자신의 아들 예수를 '화해의 자녀'로 보내주셨다는 복음의 진리를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문화 속에는 비록 불완전하고 왜곡되었을지라도, 인간의 근원적인 영적 갈망과 진리에 대한 희미한 그림자가 담겨 있다. 선교적 과제는 이러한 '로고스의 씨앗'을 발견하고,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고 완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타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복음의 유일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창의적이고 성육신적인 소통 방식이다.  

결론: 유일한 진리, 다양한 대화
본 보고서는 기독교의 유일성 주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신학적 필연성에 근거함을 밝혔다. 이 확고한 신념은 역사적으로 타 종교에 대해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라는 다양한 태도를 낳았으며, 오늘날에도 기독교 내부의 신학적 논쟁을 형성하는 핵심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종교 다원주의 사회의 도래는 기독교에 더 이상 신학적 입장 정립에만 머무를 수 없음을 요구한다. 이제 교회는 자신의 유일성에 대한 '확신'을 '겸손'이라는 그릇에 담아, 타 종교인들과의 진정한 '대화'와 '협력'의 장으로 나아가야 할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이는 결코 복음의 진리를 상대화하거나 타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복음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성육신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즉, 낯선 문화와 세계관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 그들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의 가장 깊은 갈망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으로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공동선'을 위해 협력하며, 각 문화 속에 숨겨진 '구속적 유비'를 통해 창의적으로 소통할 때, 기독교의 유일성 주장은 더 이상 배타적인 독선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깊고 절실한 사랑의 초대장으로 울려 퍼질 것이다. 이것이 다원주의의 파도 속에서 교회가 붙잡아야 할 희망이자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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Дэлхийн Интернэт Номлолын Нийгэмлэг (SWIM) нь 1996 онд байгуулагдсан номлогчийн байгууллага бөгөөд 20 гаруй жилийн турш интернет болон мэдээллийн технологийн тусламжтайгаар дэлхийн номлолд хувь нэмрээ оруулсаар ирсэ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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