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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 대한 죄책감: 돈 을 버는 것은 죄악인가, 아니면 선한 청지기의 사명인가?
일부 크리스천들은 '부자=죄인'이라는 무의식적인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경은 돈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지 않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경고합니다. 비즈니스를 통해 얻는 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며, 우리는 그 재물을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로 부름받았습니다. 이익 추구는 죄가 아니라, 청지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필수적인 활동입니다.

주제 2: 부에 대한 죄책감: 돈을 버는 것은 죄악인가, 아니면 선한 청지기의 사명인가?
Topic 2: Guilt about Wealth: Is Making Money a Sin, or the Mission of a Good Steward?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6:17-19)
서론: 주머니 속의 뜨거운 감자, '돈'
기독교 신앙을 가진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돈'이라는 뜨거운 감자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돈을 벌기 위해 매일같이 땀 흘려 일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서는 부를 축적하는 것에 대한 미묘한 죄책감과 불편함을 느낍니다. 주일 예배에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듣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경고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러면서도 월요일 아침이 되면, 더 나은 수입과 재정적 안정을 위해 다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내적 모순은 많은 신앙인의 삶을 갈등과 혼란으로 몰아넣습니다. 성실하게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이 과연 죄악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가난하게 살아야만 경건한 신앙인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부를 쌓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며, 그것을 잘 관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우리는 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거나, 반대로 부를 신앙의 척도로 삼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바로 이 '부에 대한 죄책감'의 실체를 파헤치고, 성경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재물관이 무엇인지 탐구하고자 합니다. 육하원칙(六何原則, 5W1H)에 따라, 돈과 신앙의 관계를 다각도로 조명함으로써 우리는 이 오래된 딜레마를 풀어낼 실마리를 찾을 것입니다. 돈을 버는 행위가 죄악인지, 아니면 선한 청지기의 사명인지에 대한 분별은 우리의 직업관, 생활 방식,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본질을 재정립하는 중요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돈 앞에서 위축되거나 교만해지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재물의 '선한 관리인'으로 당당히 서는 방법론과 방향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 Who (누가) 이 죄책감을 느끼는가?
부에 대한 죄책감은 탐욕스러운 부자나 비윤리적인 사업가에게만 국한된 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 양심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더 빈번하게 발견되는 보편적인 고뇌입니다.
첫째, 성실한 직장인과 소상공인들이 이 문제로 가장 많이 씨름합니다. 이들은 매일의 노동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습니다. 승진하여 연봉이 오르거나, 사업이 번창하여 수입이 늘어나는 것은 그들의 성실함에 대한 자연스러운 보상입니다. 하지만 수입이 늘어날수록, 마음속에서는 "내가 너무 돈을 밝히는 것은 아닐까?", "이 풍요로움이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는 않을까?"라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고, 더 좋은 차를 사는 것이 과연 신앙인으로서 합당한 삶의 모습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그들의 죄책감은 자신의 성실한 노력이 신앙적 타락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둘째, 전문직 종사자와 투자자들 역시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의사, 변호사, 금융인 등은 그들의 전문 지식과 기술을 통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입을 올립니다. 또한, 지혜로운 투자를 통해 자산을 증식시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명한 재테크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들은 종종 "나의 부가 과연 나의 노력만으로 얻어진 것인가?", "내가 가진 부 때문에 가난한 이웃의 아픔에 무감각해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특히 '돈이 돈을 버는' 자본 소득에 대해서는,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신성함과 배치되는 것처럼 느껴져 더욱 큰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부가 사회적 불평등에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셋째, 목회자와 신앙 공동체의 리더들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례비가 조금이라도 오르거나, 좋은 차를 타게 되면 '세속화되었다'는 비판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전이되어, 교회 안에서 부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건강한 재정 원칙을 배우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물질의 복을 주신다"고 설교하면서도, 정작 부유한 성도들을 보면 시기하거나 정죄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결국 교회 전체가 부에 대한 건강한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죄책감과 위선 사이를 오가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부에 대한 죄책감은 특정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주하는 실존적 질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돈'이라는 강력한 힘을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이며, 그 주체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입니다.
2. What (무엇이) 이 죄책감의 핵심인가? - 상충하는 두 성경관
우리가 부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 자체가 돈에 대해 양면적인, 심지어는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칠 때 죄책감에 빠지거나, 반대로 탐욕에 물들게 됩니다.
관점 1: 재물은 '위험한 올무(Snare)'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재물이 가져올 수 있는 영적 위험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이 관점은 부에 대한 죄책감의 주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합니다.
우상숭배의 위험: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고 단언하셨습니다. 재물은 단순히 유용한 도구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강력한 속성, 즉 '맘몬(Mammon)'의 성격을 지닙니다.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이 됩니다.
교만과 영적 무감각: 디모데전서 6장 17절은 부한 자들이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부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마치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착각하게 합니다. 또한, 편안하고 안락한 삶에 안주하게 만들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영적인 민감성을 잃게 할 위험이 큽니다.
사랑의 식어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디모데전서 6:10)라는 말씀처럼, 돈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들고 가난한 이웃의 고통에 눈을 감게 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그가 가진 재물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 재물이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관점 2: 재물은 '선용할 도구(Tool)'이다
반면, 성경은 재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그분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축복의 도구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축복: 신명기 8장 18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지혜, 건강, 기회 등 부를 얻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욥, 솔로몬 등 믿음의 선조들은 당대에 큰 부를 누렸으며, 성경은 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묘사합니다.
청지기적 사명: 달란트 비유(마태복음 25장)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재능과 재물을 맡기시고, 그것을 잘 활용하여 이윤을 남기기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재물은 단순히 숨겨두거나 소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증식시켜야 할 '자본(Capital)'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성실한 부의 창출이 악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받을 만한 사명임을 시사합니다.
선한 영향력의 수단: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과 나누었으며(사도행전 4:34-35), 바나바와 같은 부유한 신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드려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후원했습니다. 재물은 가난을 구제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상에 실현하는 매우 강력하고 실제적인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죄책감의 핵심은 이 두 관점 사이의 건강한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재물의 '위험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모든 부를 죄악시하며 가난을 미화하거나, 반대로 재물의 '유용성'만을 내세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며 그것을 믿음의 증거라고 합리화하는 것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극단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 두 관점을 통합하여, 재물의 위험성을 늘 경계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한 도구로 사용할 줄 아는 지혜에 있습니다.
3. When (언제) 이 죄책감은 우리를 찾아오는가?
부에 대한 죄책감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 구체적인 상황과 선택의 순간에 불쑥 고개를 드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첫째, '수입이 증가하는 순간' 죄책감은 기쁨과 함께 찾아옵니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연봉이 인상되거나, 사업이 잘 되어 큰 수익이 났을 때, 우리는 안도감과 성취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이것이 정말 다 내 것이 맞아도 되나?", "이렇게 나만 잘 살아도 괜찮은 걸까?"라는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들려옵니다. 특히 주변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친구나 가족이 있을 때, 나의 풍요는 기쁨이 아니라 미안함과 부담감으로 다가옵니다. 이 순간, 우리는 늘어난 수입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대한 책임감과 함께 영적인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소비와 지출의 순간' 우리는 이 죄책감과 직접적으로 마주합니다. 큰마음 먹고 값비싼 외식을 하거나, 오랫동안 원했던 명품 가방을 사거나, 가족 여행을 위해 목돈을 지출할 때, 우리는 만족감과 동시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이 돈이면 가난한 아이들 몇 명을 도울 수 있는데...", "이렇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라는 생각이 우리의 소비를 망설이게 만듭니다. 이는 '자신을 위한 소비'와 '이웃을 위한 나눔'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입니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 제3세계의 굶주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접하게 되면, 우리의 평범한 소비 생활조차도 죄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셋째, '신앙적 결단의 순간' 죄책감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특별 헌금이나 선교 후원을 작정해야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재정 상태를 돌아보며 갈등합니다. "내 집 마련도 아직인데, 이렇게 큰 금액을 헌금해도 될까?", "이 돈을 헌금하는 대신 주식에 투자하면 더 큰돈을 벌어서 나중에 더 많이 헌금할 수 있지 않을까?"와 같은 현실적인 계산이 우리의 신앙적 결단을 가로막습니다. 반대로, 헌금을 드린 후에는 생활의 어려움 앞에서 "내가 너무 무모한 결정을 한 것은 아닐까?"라며 후회와 불안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돈의 문제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넷째, '타인과 비교하는 순간' 죄책감은 시기심이나 우월감이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질됩니다. 나보다 더 부유한 신앙인을 보며 "저 사람은 분명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 거야"라고 비난하거나, "하나님은 왜 나에게는 저런 복을 주시지 않는가?"라며 불평하게 됩니다. 반대로, 나보다 가난한 사람을 보며 "나는 저 사람보다 믿음이 좋아서 복을 받았어"라는 교만한 생각을 품기도 합니다. 이처럼 부에 대한 건강한 기준이 없을 때, 우리는 재물을 통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를 짓게 되며, 이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심각한 영적 문제로 이어집니다.
4. Where (어디에서) 이 잘못된 재물관이 형성되는가?
우리가 느끼는 부에 대한 죄책감은 개인의 성향 문제를 넘어,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문화 속에서 학습되고 강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잘못된 재물관이 형성되는 주요한 장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장소는 '잘못된 가르침이 있는 교회' 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성경적인 재물관을 가르치는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혼란의 근원지가 되기도 합니다. 한쪽 극단에는 '가난'을 경건의 상징처럼 여기는 '청빈주의'가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부유한 성도들을 잠재적인 죄인으로 취급하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영적인 타락과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성실한 노동과 그로 인한 부를 죄악시하게 만들고, 위선적인 가난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다른 쪽 극단에는 물질적 축복을 신앙의 유일한 척도로 삼는 '번영신학'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부자가 된다"는 식의 가르침은 성경의 메시지를 심각하게 왜곡합니다. 이는 부를 얻기 위한 인간의 탐욕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가난하거나 고난받는 이들을 '믿음이 부족한 자'로 낙인찍는 비극을 낳습니다. 이 두 극단적인 가르침은 모두 성경의 균형 잡힌 시각을 잃어버린 것으로, 성도들을 죄책감과 탐욕이라는 양극단으로 내몰게 됩니다.
두 번째 장소는 '유교적 전통이 남은 가정과 사회' 입니다. 한국 사회의 저변에는 전통적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대표되는, 상업과 돈 버는 행위를 천시하는 유교적 가치관이 남아있습니다. "선비는 돈을 멀리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은연중에 우리에게 '돈 = 더러운 것', '부자 =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 위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다 보니, 성경이 말하는 재물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이러한 전통적 가치관과 결합하여 부에 대한 과도한 죄책감과 부정적 인식을 형성하게 된 측면이 있습니다.
세 번째 장소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장' 입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시장 경제는 '무한 경쟁'과 '이윤 극대화'를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이기심, 탐욕, 시기심과 같은 죄성이 어떻게 부와 결합하여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지를 목격합니다. 부를 위해 사람을 속이고, 노동자를 착취하며,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돈 버는 것'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감과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시장의 냉혹한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돈의 선한 가능성보다는 악한 측면에 더 집중하게 만들고, "과연 이 세상에서 정직하게 부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결국, 교회와 사회, 그리고 시장이라는 세 공간에서 우리는 부에 대한 혼란스러운 메시지들을 동시에 접하게 됩니다. 이 상충하는 가치관들 속에서 명확한 성경적 기준을 세우지 못할 때, 우리는 부에 대한 뿌리 깊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5. Why (왜) 우리는 돈을 죄악시하는가? - 죄책감의 심리적·신학적 뿌리
우리가 유독 부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느끼는 데에는 몇 가지 심리적, 신학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이 뿌리를 이해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첫째, 성경에 대한 '선택적 오해'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맥락을 보기보다, 우리의 죄책감을 지지하는 특정 구절들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마 19:24),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딤전 6:10)와 같은 구절들은 매우 강력하게 우리의 뇌리에 박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부를 축복으로 묘사하고(창 13:2),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며(신 8:18), 맡은 달란트를 두 배로 남긴 종을 칭찬하는(마 25:21) 구절들은 상대적으로 간과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선택적 독서는 성경의 균형 잡힌 재물관을 왜곡하고, 부 자체를 죄와 동일시하는 극단적인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둘째, '책임에 대한 두려움' 이라는 심리적 기제가 작용합니다. 부는 우리에게 편안함과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엄청난 책임감을 요구합니다. 재물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부담도 커집니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 교회를 향한 책임, 사회를 향한 책임이 어깨를 짓누릅니다. 차라리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책임질 것도 없다"고 말하는 편이 마음 편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책감이 이러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자기방어 기제일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써, 우리는 부자에게 요구되는 청지기의 무거운 사명을 피해 가려는 것입니다.
셋째, '성(聖)과 속(俗)의 이원론적 사고방식' 이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 예배, 봉사와 같은 종교 활동은 '거룩한(聖) 일'로, 돈을 벌고, 사업을 하고, 투자하는 경제 활동은 '세속적인(俗) 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틀 안에서 '돈'은 자연스럽게 세속적이고 더러운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따라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은 거룩함에서 멀어지는 과정으로 인식되고, 죄책감을 유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예배라고 가르칩니다(롬 12:1). 우리가 일터에서 정직하게 땀 흘려 돈을 버는 행위 역시 목회자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만큼이나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될 수 있다는 통합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재물을 내 힘으로 얻고 지켜야 할 '내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물이 많아지면 교만해지고, 재물을 잃을까 봐 불안해합니다. 만약 우리가 재물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나는 단지 그것을 잠시 맡은 관리인(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재물이 많아져도 교만할 이유가 없고, 재물이 적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주인이신 하나님이 맡기신 자산을 그분의 뜻대로 얼마나 잘 관리하고 있는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에 대한 죄책감은 결국 재물의 주인을 '나'라고 생각하는 불신앙에서 비롯되는 영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6. How (어떻게) 죄책감을 넘어 사명으로 나아갈 것인가? - 방법론과 방향 제시
부에 대한 죄책감을 극복하고 그것을 선한 청지기의 사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의도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방법론과 방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방법론 1: 소유권 이전(Ownership Transfer) - '내 돈'에서 '하나님의 돈'으로
모든 변화의 시작은 재물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이전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는 단순히 관념적인 동의가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결단입니다.
재정 고백 기도: 매일 아침 "하나님, 나의 모든 재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루 그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 살겠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도록 지혜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수입의 첫 열매 구별: 월급이나 수입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구별하여 드리는 훈련을 합니다. 이는 "이 모든 수입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신앙을 실제적인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의무감이 아닌, 주 되심을 인정하는 기쁨의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예산과 결산의 영성화: 가계부를 쓰는 것을 단순히 돈의 흐름을 기록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주인께 보고하는 청지기의 보고서'로 생각합니다. 매달 예산을 세울 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결산하며 자신의 관리 능력을 평가하고 개선해 나갑니다.
방법론 2: 목적의 재설정(Purpose Re-alignment) - '축적'에서 '흐름'으로
청지기의 목표는 재물을 쌓아두는 저수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재물이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Channel)가 되는 것입니다.
'주는 삶'의 포트폴리오 구성: 자신의 재정을 '나를 위한 소비', '미래를 위한 저축', 그리고 '이웃을 위한 나눔(Giving)'이라는 세 가지 영역으로 명확히 구분하고 균형을 맞춥니다. 특히 '나눔'을 소비하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수입의 일정 비율을 미리 정해놓고 최우선 순위로 실행하는 '의도적 나눔'을 실천합니다.
창의적 나눔의 실천: 단순히 헌금이나 구제 기부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시간과 재능, 전문성을 활용한 다양한 나눔을 시도합니다. 사회적 기업에 투자하거나, 공익적인 프로젝트를 후원하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청년들의 멘토가 되어주는 등, 재물을 활용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상에 실현하는 창의적인 방법을 모색합니다.
유산의 재정의: 내가 죽은 뒤에 남길 최고의 유산이 부동산이나 현금이 아니라, 나의 삶을 통해 흘려보낸 사랑과 선한 영향력임을 기억합니다. 자녀에게 물려줄 것은 '재산'이 아니라, '재물을 다스리는 경건한 지혜', 즉 청지기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방법론 3: 과정의 성화(Sanctification of Process) - '어떻게' 버는가에 집중하기
선한 청지기는 '어떻게 쓰는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버는가'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합니다. 돈을 버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직업의 소명 의식: 나의 직업을 단순히 돈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나를 부르신 거룩한 소명(Calling)으로 여깁니다. 일터에서 정직, 성실, 탁월함으로 일함으로써 비신자 동료와 고객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윤리적 부의 추구: 불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방법, 타인의 눈물을 통해 얻는 부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당장의 이익이 줄어들더라도, 장기적으로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 창출을 통한 가치 창조: 사업을 하거나 투자를 할 때, 단순히 수익률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기업(혹은 투자)이 세상에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가?"를 함께 고려합니다. 환경을 보호하고, 공정한 고용을 창출하며,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기업에 투자하고 그러한 기업을 세우는 것은 매우 성경적인 부의 창출 방식입니다.
방향 제시: 죄책감을 넘어 '감사와 책임'으로
결론적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부에 대한 죄책감을 '감사'와 '책임'이라는 두 가지 건강한 감정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재물을 맡기신 분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거룩한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돈은 죄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죄악입니다. 돈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용해야 할 강력한 도구입니다. 선한 청지기의 사명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돈 앞에서 주눅 들거나 갈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을 버는 행위는 세상에 하나님의 가치를 심는 거룩한 노동이 되고, 돈을 쓰는 행위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 되며, 돈을 관리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부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 나라의 재정을 맡은 신실한 동역자'라는 기쁨과 사명감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