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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장 이슬람 선교의 새로운 모델

이슬람 선교의 새로운 모델


1. 비즈니스를 통한 호의적 접근
1)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 찾기
나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초창기 초보 선교사로서 언어를 배우면서도 전도에 몰입했다. 전도에 대한 열정이 있다 보니까 되지 않는 언어를 가지고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제시했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은 내가 사람을 찾아서 만나는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을 찾을 때 그들 대부분이 나보다 옷차림이 연루하거나 할 일없이 공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그들은 나보다 사회적 약자이다. 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더 복음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얄팍한 생각이었다. 나는 그들과 자주 만나면서 (우리는 그것을 관계 전도라고 한다)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하면서 접근한다. 그들은 나의 접근을 좋아했고, 나 역시 그들과 하나의 마음을 관계를 만들어 갔다. 시간이 갈수록 만 나는 사람은 많아졌고, 그들과 보내는 시간도 많아졌다. 만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는 그들에게 호의적이었고 그들 역시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나는 나에게 호의적일 것이라는 사람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복음에 접근성이 좋은 사람을 골라서 만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주님이 나에게 사람을 보냈다고 했다.

나와 같은 동급의 사람 찾기 내가 수많은 사람에게 접근을 하면서 현지인들이 내가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문제 삼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다. “당신 선교사 맞지? 경찰을 부르겠다!”라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접근하기 쉬운 사람, 나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사람을 찾기에 더 급급했다. 내가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람에게 접근하다 보니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거의 이런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만나기 좋은 사람 나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 여러 여건에서 나를 넘지 못하는 사람을 나는 만나기를 원했고 그들을 찾아서 나의 사람으로 관계를 맺어 간 것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찾기 그러다 보니까 나에게 필요한 사람만 찾고 있다. 물론 상위 레벌의 사람이 나를 찾아온다, 내가 만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전도는 해야 하니까 어찌하랴? 나와 같은 레벨의 사람을 찾든지 아니면 나보다 한수 아래인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 필요 적절한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고 만난다는 것이다.

2) 나도 모르게 무언가 주고 있는 나 자신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없냐 묻는다. 나는 그것을 나눔이라 포장한다. 나에게 있는 약간의 것, 다시 말하면 그들의 형편보다 좋다 보니 그들보다 더 가치 있고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또 필요하면 구입할 수 도 있고 한국으로부터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까 주는데 나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나눔의 천사였다. 주어진 것 속에서 나의 그물 안에 들어온 현지인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 개인적이든 가정적이든 필요로 한다. 그 필요함이 나와 암묵적으로 계약이 이루어져서 그들은 나의 그물 안에 들어오고 나는 그물 안에 들어 온 사람들을 잡는 어부가 되는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의 모임에 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내가 준 것 혹은 아내가 준 것을 전부 입고, 신고 걸치고 다녔다.

서서히 다가가 제시하는 복음 이러한 여건이 만들어지면 나의 거룩한 그물에 들어온 사람들을 서서히 복음으로 그들을 제압하기 시작한다. 복음으로 제압하는데 나는 항상 그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동원했다.
“나에게 친구가 성경을 주었는데 키릴문자로 되어 있어서 읽을 수 없는데 네가 우리 집에 와서 읽어줄 수 없을까?”

ᅠ요청해서 그들이 집에 오면 나는 성경을 주고 어떤 때는 해석(?)까지 시킨다. 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성경 박사나 된 것처럼 나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해석도 해준다. 참으로 놀라운 사건들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하면서 나는 그들과의 만남이 깊어지고 나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은 나의 그물 안에 있는 하나의 베드로 물고기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다.
3) 끝임없이 요구하는 현지인
서서히 복음이 전달되고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주 좋은 현상이었다. 선교사로서 최고의 가치이고 그것이 바로 복음과 연결되고 하나님 나라 영토 확장이 이루어지니 얼마나 기쁨이 넘칠까?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이다. 사람이 늘어가니까 요구사항도 늘어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산적하다. 현지인들과 살면서 느끼는 것이 만물박사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때로는 의사, 때로는 상담사, 때로는 모든 것을 해결해주어야 하는 멕가이버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현지인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고 반듯한 일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여전히 허우적거린다. 그것을 보는 입장에서 나 역시도 넉넉한 생활이 아닌 데도 그들과 교제하려면 계속 나누어 줄 수밖에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퍼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나는 외국이기 때문에 자기들보다 무엇이든지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 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그들과 복음을 암묵적으로 사고 파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나에게 복음을 들어주고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묵시적 관계라고 할까? 물론 이렇게 해서라도 복음이 전파된다면 무엇이든 못하랴!

4) 성장하지 않는 성도
하지만 이러한 관계 속에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 성장하여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물론 그들은 나와 함께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나의 말씀을 듣기도 한다. 물론 내가 전도한 사람 중에 참으로 현지 교회에서 충실하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한 사람이 복음 안에서 성장하여 제자가 되기까지 많은 진통과 아픔이 있고 시간이 필요하다. 선교지를 다니면서 많은 선교사를 만나보았다. 많은 선교사가 하나같이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쩌랴! 예수님과 같이한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나와 같은 사람이야!

2. 알아야 이기는 이슬람 선교 접근
ᅠ1) 이슬람의 자존심이란?
그들의 입장 테러는 이른바 합법적인 수단으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할 수 없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동원되는 폭력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군가가 그 합법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구와 이슬람은 평행선을 긋고 있어 대립적이긴 하나 양측은 서로 나름의 역사성을 갖고 있기에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지금껏 이슬람은 오해와 무지와 편견의 대상으로 존재했다. 비 이슬람인의 눈에 이슬람이 너무나 다른 세계인 것처럼 보인 것이 원인이 되긴 했지만 우선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아니 무시했다. 무시해도 좋을 대상이라면서. 여기는 서구의 지식인과 언론도 한몫 단단히 거들었다.

그들의 생각 인간은 모두 평등하므로 누가 누구를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으며, 정의를 독점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또 알라의 계시를 따르기 때문에 원칙 중심의 삶을 살고 자기 규율의 자세를 견지한다고 주장한다. 서구가 자랑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인간을 타락케 하는 것이므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으며 평화와 정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슬람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무슬림들은 간섭하지도 간섭받고 싶지도 않다는 태도를 줄곧 견지해 왔다. 외부로는 소극적, 적대적으로 비추어 졌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자신의 자유와 함께 남의 자유도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또 그걸 실천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서구식 자유가 아니다.

하드는 자기 방어용이다.  진정한 지하드는 외부의 공격에 대한 방어가 아니다. 이슬람 내부의 적으로부터 이슬람을 지키는 것이다. 부패에 찌든 사회, 도덕적으로 황폐해져 가는 자신을 지키는 지하드가 진짜 지하드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 방어는 전 세계적으로 문제를 만들었으며, 자기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망상은 사라져야 한다.

ᅠ 필요는 금지사항에 우선 한다. 이슬람의 기본원칙은 종교적 가르침에 입각한 삶은 오직 하나님의 잣대로 세상을 살려는 것이므로 비타협적일 수밖에 없다. 현세적 득실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할 수 없기에 그러하다. 이에 반해 서구사회는 이익 지향적이다. 기독교 문화를 저변에 깔고 있다고는 하나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들의 행동 결정에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길을 걸어오면서 철저히 이익 지향적 문화를 일구어 왔다. 이익 지향적인 삶에선 언제든지 타협할 수 있다. 어제의 적도 서로의 조건만 합치될 수 있다면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오로지 샤리아에만 충실한 삶을 살려는 이슬람 문명권은 비타협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타협적이라고 해서 이슬람을 그냥 둘 서구가 아니다. 자신의 문화,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그에 따른 경쟁체제를 이슬람 세계에 침투시키려 한다. 

그 다음은 자기네 문화를 비판적인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에 심대한 위해를 가하는 것이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이슬람주의자들은 당장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고자 이슬람의 전통을 고수하려 한다.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고 굳게 믿는 무슬림들이라 돈이 좀 있다고, 힘이 좀 세다가 하여 거들먹거리는 것은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만약 그런 자가 그 힘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피해를 끼친다면 그냥 둘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힘센 자, 가진 자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물질적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탐욕을 갖다 보면 남과 어쩔 수없이 타협해야 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들의 성격 더 이상 친절할 순 없다. 내가 살겠다고 손님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파슈툰족(아프가니스탄) 의 삶의 방식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활 무슬림들은 고행과도 같은 오행을 어김없이 굳세게 수행한다. 다른 종교에서라면 얼마간의 융통성이 주어질 텐데 이슬람에선 그런 것이 없다. 외부에서 보기엔 요령부득 같은 데도 무슬림들은 그 일을 말없이 해낸다. 누가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행한다. 마치 실천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아무 쓸모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오히려 사악하게 만드는 것임을 일깨워 주려는 듯 성聖과 속俗은 하나다.

꾸란은 무슬림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성이기 때문에, 무슬림들에겐 성과 속을 구별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모든 것이 알라의 뜻에 따라 행해지고 이루어지는데 무엇을 성이라 하고 무엇이 속이라 하겠는가? 이런 그들인지라 거룩하기 짝이 없다는 모스크는 마을과 떨어진 외딴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수크(아랍 전통시장) 가운데 세워진다. 성과 속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고 삶의 방식이고 총체적 체계이다.”라고 말한다.

서구의 시장경제가 경쟁과 소비를 부추기지만 이슬람의 상인은 직업으로서의 상인일뿐이다. 남을 속이려 한다거나 마케팅, 광고활동에 열을 올려 불필요한 소비를 부추긴 다거나 한탕 해서 한밑천 챙겨서는 남은 세월을 편히 보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利)는 노력한 정당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일 뿐, 추구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향락산업에는 손대지 않는다. 특히 이슬람은 이자를 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코란에는 원죄의 개념이 없다. 아담을 유혹하여 원죄를 저지르게 했다고 해서 하와를 차별하는 내용도 없다. 

신체노출: 남녀 모두에게 해당되는 의무이다. 공중목욕탕에서도 절대 맨 몸으로 있지 않는다. 이슬람에서의 간음은 합법적 배우자가 아닌 다른 상대방에게 성적인 욕구나 호기심을 갖는 것까지 포함된다.
결혼:  양 당사자는 서로를 잘 알아야 하며, 부도덕하거나 상대를 기만적으로 또는 이기적으로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은 그 가문이나 재산, 육체적 매력이 아니라 종교적 헌신 도덕적 성실성, 성격 등의 영속적이고도 내면적인 가치여야 한다.
일부다처제:  잦은 전쟁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거나 다쳐 과부나 고아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사회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는 인도적 배려였다.

2) 이슬람의 경제영토 확장방법
기독교 진영이 이슬람의 선교 방식을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들은 기독교의 안방을 이전에도 그리했듯이 지금도 밀고 들어오고 있다.
마호메드 사후에 매카와 매디나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슬람은 엄청나게 속도로 주변 지역을 정복해 나갔다. 마호메드가 죽은 지 불과 몇 년 안 되어 아라비아 반도를 이슬람의 초승달에 평정되었다. 마호메드의 후예들이 페르시아(지금의 이란)를 정복하고자 벌인 치열한 전쟁은 이슬람 팽창 역사에 기폭제가 된다. 그 전쟁의 핵심에 선 장군 누아만은 크테시폰 전투에서 다음과 같은 선포를 한다. 무타구치 요시로가 쓴 중동의 역사라는 책에 나오는 문구를 보자!

“우리들은 과오 속에서 살고 있지만 알라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예언자 한 사람을 보냈다. 그는 우리들의 동포이며 게다가 가장 고귀한 집안의 분이다. 그는 우리들을 이교도의 어둠에서 진실한 가르침의 빛으로 이끌어 주셨다. 이미 그는 돌아 가셨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가르침에 속하지 않은 자 모두와 싸우라고 유언하셨다. 즉 그자들은 가르침에 귀화하든지, 공물을 바치든지, 아니면 무기를 들고 저항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만약 가르침을 믿으면 우리들은 그대들에게 왕국을 남길 것이다. 믿고 싶지 않으면 공물을 바쳐라. 모두 원하지 않는다면 싸울 준비를 하라.”
상기의 글은 이슬람 선교와 전쟁의 조건을 잘 말해준다.
1. 가르침에 귀하 하라! 즉 무슬림으로 개종하라!
2. 개종하지 않으면 세금을 내라!
3. 아니면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겠다!
위의 세 가지는 인류 역사 가운데 왜 이슬람이 그토록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단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그 제자들에게 주시고 이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셨다. 한 영혼을 그리스도 예수 앞에 이끌기 까지 죽음도 불사하고 전하지만 개종을 위한 강요나 또는 세금 부여나 또는 국가와 국가, 그리고 지역과 지역을 가르는 전쟁을 일으키라는 말씀은 없었다. 천국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천국은 죄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진리만이 영원히 함께 하는 영광의 나라이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이 땅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종교라는 미명하에 기독교에서 이슬람의 영역으로 개종이나 믿음이라는 영역에 가면 그것을 바라보는 개념과 세계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슬람에 있어서 종교는 개인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이슬람 전체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ᅠ3) 이슬람을 위한 비즈니스 선교 전략
구소련이 붕괴되기 전에는 선교대상 국가의 대부분이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체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시장(市長)은 사실상 선교의 장(場)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그러나 구소련의 붕괴 이후 북한을 제외한 전 세계의 모든 나라는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자본주의를 채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세계 모든 국가가 복음의 진입에는 장벽을 둘지라도 경제발전을 위한 사업에는 진입의 장벽을 거두고 문을 활짝 열고 있다.

이제 시장을 통한 복음화 전략은 복음의 장벽을 뚫고 비즈니스와 함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주요한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다. 로잔 대회(1974년, 1983년)에서는 비즈니스가 선교의 수단을 넘어 선교로서의 비즈니스(Business As Mission)라는 개념을 정립하여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비즈니스가 선교의 유용한 도구임과 아울러 비즈니스 그 자체가 선교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성경적 근거를 뒷받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ᅠ 이러한 뒷받침 가운데 비즈니스 선교(BAM)는 이제 각 지역과 종족에 적합한 형태로 확충, 발전될 필요성이 있다. 사회적 기업 형태의 비즈니스 선교,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활용한 선교 그리고 이슬람권을 대상으로 한 비즈니스 선교가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이슬람권을 대상으로 한 비즈니스 선교의 중요성과 전략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ᅠ이슬람의 성장과 도전 이슬람은 2048년을 기점으로 전 세계의 이슬람화를 완성한다는 목적 하에 유럽과 북미 대륙은 물론 중남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에 진출하고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의 무슬림 인구는 성도의 교회 출석률을 앞지른 지 오래되었고, 스웨덴의 말모, 프랑스의 파리와 마르세이유, 벨기에의 브루셀, 영국의 런든과 브밍햄, 덴마크의 코펜하겐 등에서는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상당한 수의 무슬림이 살고 있다. Mapping the Global Muslim Population에 따르면 전 세계 무슬림 인구는 약 15억 700만 명으로 지난 세기에 무슬림 인구는 무려 500%나 성장했다고 한다.

ᅠ 이슬람은 구미 외에 특히 아시아에 집중되어 세계 4대 무슬림 국가로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 그리고 인도와 방글라데시를 꼽을 수 있다. 아시아에서는 이 4대 국가 외에 중국도 세계 9위의 이슬람 대국으로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터키 이집트 이란 나이지리아에 이어 무슬림 인구가 많은 나라다.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에서 가장 많은 무슬림이 있는 후이족 외에도 위구르 족, 카작 족, 우즈벡 족, 키르기스 족, 타직 족, 싸라 족, 둥샹 족, 바오안 족, 타타르 족의 주요 종교가 이슬람이다. 비공식 자료에 따르면 2022년 현재 1억 명 이상의 중국 무슬림이 있다고 한다. 중국 종교사무국에 따르면 모스크는 3만 여개, 종교지도자인 아홍(이맘)은 4만 여명에 달한다. 이와 같이 동일한 종교적 유전인자를 가진 이슬람은 전 세계에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에 이르기까지 통합적 시스템을 구축하였고 이슬람은 이제 하나의 방식으로서 삶과 문화가 되어 한번 구축되기만 하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 되고 있다. 더구나 세계 최대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가장 많은 선교비를 사용하고 있는 미남침례교회 선교부의 일 년 예산이 3억불인데 반하여 사우디 정부는 매일 1억 달라 씩을 이슬람 선교를 위해 쓰고 있다고 한다.

  오늘 날 세계 선교에 있어서 이슬람권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슬람권의 나라들과 종족에 대한 복음화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언제까지 우리는 여리고 성이라는 이슬람 세력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할 것인가? 이슬람권은 세계선교를 위한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큰 장벽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장벽을 돌파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이슬람을 위한 선교전략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이슬람선교 전략의 한 가지 방법으로 시장을 통한 선교, 곧 비즈니스와 함께하는 선교 접근방안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4) 이슬람권 선교를 위한 전략  
ᅠ이러한 이슬람권 선교를 위해 우리 한국 선교계가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무엇인가?
ᅠ첫째, 무슬림의 종교적 문화적 독특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선교전략으로 모색해야 한다. 식품은 물론이고 화장품, 의약품, 여행 및 서비스 등을 이용 할 필요가 있다.
ᅠ둘째, 우리 한국과 가깝고 익숙한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발판을 마련한 후에 중동 및 전 세계 무슬림 시장을 공략하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셋째, 젊은 세대들이 주도하는 입소문의 영향력이나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슬림은 오락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주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입소문의 영향력이 다른 문화권에 비해 큰 편이다. 특히 젊은이들은 휴대폰 문자 매시지는 물론 최근 페이스 북, 트윗터, 유튜브 등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기업의 판촉 정보와 개인적인 상품 평가까지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지역의 이슬람권을 대상으로 개별적인 비즈니스 선교전략을 수립해 볼 필요성이 있다. 

5) 이슬람 지역에서 기독교적 경제 영토 확장 방법
작금의 시대는 경제가 화두이다. 경제가 블루오션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이제 경제라는 화두는 거대한 파도를 타고 전 세계에 엄청나게 영향력을 주고 있으며, 어느 나라는 경제 불황을 맞고 어느 나라는 경제 호황을 맞는 현상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기독교는 너무도 얌전한 선교(?)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은 선교라는 말을 드러내고 사용하지는 않지만 기독교보다 더 공격적으로 전세를 2048년까지 이슬람화 하기 위하여 모든 이슬람협의회와 이슬람국가 그리고 이슬람 단체들이 하나로 일괄되게 영토 확장에 집중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각자가 자기의 영역에서 홀로 외로이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슬람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사역이 노출되어 추방으로 이어지고 사역의 효과는 반감되고 더 나아가 이제는 선교사가 입국 자체도 불가능해지고 있는 암울한 현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데도 대책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선교사들이 사역하기 좋고 거주하기 좋은 나라로 집중되고 또 그곳에서 사역의 영토가 겹쳐지고 이에 따라선교사들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는 안타까운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다. 현재 선교 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이슬람국가는 물론 불교국가 그리고 다 나아가 크리스천 국가마저도 선교사를 배척하고 환영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 약 90여개 국가에서 선교사 입국을 거절하고 있으며 나머지 국가도 선교사로서 사역은 고사하고 거주 자체도 불안한 상태이다. 이에 대한 대책을 각 단체나 교회, 선교사들이 비즈니스 선교가 대안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에 대해 과연 성공사례와 모델이 있느냐는 것을 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이 비즈니스 선교를 말하는데 비즈니스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실정이다.

나는 아제르바이잔 이슬람 국가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선교사로서 솔직히 선교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이슬람 선교를 위해서 생존방법과 선교영토 확장을 어떻게 할 것이냐 고민 속에서 내가 시행한 방법이 사업이었다. 나는 비즈니스를 통해 선교의 영역을 확장하였지만 선교를 위해 비즈니스 흉내 내는 방법을 이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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Дэлхийн Интернэт Номлолын Нийгэмлэг (SWIM) нь 1996 онд байгуулагдсан номлогчийн байгууллага бөгөөд 20 гаруй жилийн турш интернет болон мэдээллийн технологийн тусламжтайгаар дэлхийн номлолд хувь нэмрээ оруулсаар ирсэ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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