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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장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목사 이중직!

1. 이중직 한다는 것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불이 났다. 회사에서 미팅 중인데 끝없이 전화가 울렸다. 장시간의 미팅을 마치고 잠시 고민이 있었다. 모르는 전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급한 용건이라도 있는 모양이라 생각하여 전화를 했다. 알고 보니 감리교 목사였다. “선교사님의 사역을 보고 감명 받아 모든 책을 구입해 읽었습니다. 저도 이중직을 하고 있는데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이중직 영역을 확대하는 데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존경의 대화를 나누고 행복하였다.

또 한 사람을 소개한다면, 한국 일터 사역의 대부 이중직의 대부 방선기 목사는 전 이랜드 사목으로 있으면서 이중직 일터 사역의 선두 주자 역할을 하였다. 일터 사역을 통하여 크리스천 기업과 크리스천이 있는 모든 공동체에 일터 사역의 필요성을 부르짖어 왔다. 방선기 목사의 이런 수고 덕분에 한국에 일터 사역에 대한 길잡이가 마련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광주 어느 시골 목사 이야기다. 광주의 변두리 시골에서 목회하는 목사는 자칭 농사꾼 목사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조그만 동네에서 교회를 건축하고 농민들과 함께 목회를 시작한지 15년이 지났다. 그는 자기 동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동네의 유명 목사이다. 동네 사람의 친구처럼, 이웃처럼, 같이 농사짓고, 같이 밭일을 하며 같이 땀을 흘린다. 이 목사는 동네 사람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주변 동네 사람들의 가정사까지 다 알고 있다. 이 목사는 농사꾼 목사라고 불리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이중직의 가치 아닐까?

이중직을 할 때 나는 세상을 넓게 본다.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구원의 방주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가 복음의 역할을 더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수천억 들여 건축해 개방을 못 하는 교회가 과연 세상으로 들어가 역할을 다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환경을 넘어 이중직이라는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하다.

이중직을 하는 목사들을 보면 마음이 짠해진다. 좋은 자리에서 일하는 이중직 목사가 있지만, 대부분의 이중직 목사는 노동의 현장에 있다. 이중직하는 목사들이 있는 곳, 일하는 곳을 먼저 살펴보자. 목사 이중직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곳이 택시 운전이다. 운전하는 모습이 노출될 확률이 낮고, 일하는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좋은 조건이다. 더불어 1일 8시간 일하고 월평균 보수도 250~350만 원 정도로 높은 편이다.

이중직 목사들이 선호하는 또 하나의 장소는 유통 업체이다. 대량의 물류를 공급하는 곳이다. 하루에 12시간 정도 일하는데 낮과 밤을 선택할 수 있다. 제한된 공간과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목사, 선교사들이 일하고 있다. 이중직 목사들이 선호하는 곳은 지하철 배달이다. 지하철을 타고 각종의 문서를 전달하는 것인데 목사 이중직 자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그다음 선호하는 곳이 다단계 회사이다. 다단계 회사(부동산, 코인, 주식, 대지, 건강식품, 화장품, 다양한 다단계 회사가 있음)에 많은 목회자가 집중되어 있다. 이곳에 집중적으로 모이는 목사들은 주로 목회는 안 하고 명함만 목사인 경우가 많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안하는 목사들이 이중직 현장에 상당히 많다. 또 카페나 식당, 다양한 부분에서 이중직을 하는 목사들이 많다. 지방과 시골 목사의 경우는 농촌과 지역의 형편에 맞는 현장에 집중된 것을 볼 수 있다. 지방과 시골의 목사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 이중직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시골에서 이중직을 하는 목사를 이야기하겠다. 울산에 있는 A목사이다. 한때는 서울에서 큰 교회를 담임하였다. 울산이라는 시골의 동네에 정착한 목사는 먼저 한 일이 동네 사람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원주민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 지역의 유지가 되었다. 농사를 통해 지역 주민과 공동체를 만들고 사모는 미용 기술을 배워 주민들의 머리를 멋지게 해주는 사장님이다. 이처럼 다양한 곳에서 다양하게 이중직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택시 운전 못지않게 목사들이 모이는 곳이 또 있는데 대리운전이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로 인하여 대리운전이 어렵지만, 점점 회복되는 과정이라 듣고 있다. 한때 카페 교회도 목사를 이중직으로 활동하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카페 교회는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의 수많은 목사가 각양의 일터 현장에서 이중직을 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움직이는 일터를 책임지는 가장 강력한 주의 군사들이요, 하나님의 특별 대사들이다. 누가 그들에게 뭐라고 비판할 수 있는가? 없다. 그들의 교회가 어렵고 문을 닫고 고통의 아픔 속에 있지만, 그들도 주님으로부터 당당히 인정받는 목사들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이 이중직 목사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있으며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 정도 되면 이중직이 얼마나 중요한 사역이라는 것도 인지하였을 것이다.


2. 이중직 왜 여기까지 왔는가?

나는 목사로서 이중직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한국에서 목사의 생활은 교회에서의 삶 자체였다. 나는 이중직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니 이중직 자체를 상상도 안 했다.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의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게 질문했다. 잘 사는 나라에서 왜 이리도 못 사는 나라에 왔는가? 끝없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나는 선교지에서 언어를 배우려고 왔다. 역사를 배우려고 왔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그들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없었다. 더불어 비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사업을 해보기로 했다. 생전에 한 번도 경험이 없는 사업을 한다. 남들이 하니까 나라고 못 해라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문자답을 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앞서서 하실 거야! 뭐가 문제가 되겠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때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건방진 기도를 했나? 사업하기로 한 순간부터 꼬리를 물고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닌가? 왜 이리 난관이 많이 발생하는 것이지? 목사가 이중직에 대하여, 선교사 이중직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하나님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금식과 기도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응답이 없었다.

왜 여기까지 왔을까? 무엇 때문에 목사가 선교사가 이중직을 하여야 했을까? 대부분 목사가 이중직에 대하여 고민한다. 이중직을 하는 많은 목사를 만났다. 나와 똑같은 경험을 들었다. 무슨 경험일까? 그들은 돈이 필요했고, 삶을 책임져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중직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모르는 사람인가?
이중직 비난하는 목사들이 하는 말.

이중직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소리, 소리이다. 대형 교회 또는 중형 교회 목사들에게 물었다. 목사의 이중직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들의 답은 이랬다. 목회를 잘하면 하나님께서 교회, 가족, 자녀, 삶의 모든 것을 책임집니다. 이중직하는 목사의 답과는 완전히 달랐다. 같은 목사인데 답을 완전히 다르다. 누구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로 살고 누구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로 사는 것과 같았다.

와! 정답이다. 맞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


3.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모름?

이중직을 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모르는 사람들일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에서 이중직에 종사하는 수많은 목사. 이들은 진정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를 모르는 것일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몰라서 이중직을 하는 것일까?
이중직 안 하면 하나님의 풍성함을 공급받는 목사, 이중직하면 하나님의 풍성함을 공급받지 못하는 목사?
참 답답하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목사의 이중직을 누가 허락하였나?
이중직을 하는 목사는 누구인가?
이중직을 왜 하겠는가?

나는 이중직을 하는 목사이다. 나는 이중직을 하는 선교사이다. 누가 나에게 돌을 든지랴! 아무도 나에게 돈을 든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사도 바울이 아니다. 평범한 목사, 평범한 선교사이다. 나에게 주어진 이중직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는 목사, 선교사이다. 바울이 천막을 만들어 사역했기 때문에 이중직을 하나님의 주신 거룩함의 일부분이라 생각할 뿐이다. 나는 이중직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이중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역의 문제, 재정의 문제, 비자, 거주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중직을 하는 목사들의 문제도 나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중직을 하는 목사치고 잘 먹고, 교회가 잘되고, 경제적 여유가 넘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4. 나의 사명은 이중직인가?

나는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나의 사명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이중직을 수행한다고 해서 내가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명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 한 번도 내가 받은 목사의 사명을 잊어 본 적이 없다. 아니 이중직을 안 하는 목사보다 더 철저하고 투철한지도 모른다. 이중직을 안 할 때보다 더 기도가 깊어졌다. 이중직을 안 할 때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졌다.

나는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교회 성장을 위해 일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여기서 교회의 성장은 많은 의미가 있다.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육체적인 성장을 위하여 목양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성도들의 질적 양적 성장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성도들을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기 위하여 말씀을 준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내가 맡고 있는 소그룹을 위하여 양육을 위한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다. 더불어 가정을 보살피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성장시키는 것도 나의 몫이다.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나의 사명은 이중직 이전보다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내가 이중직을 한다고 해서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사명을 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중직을 수행하면서 나의 사명을 점검하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내가 만난 목사들 일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목사가 이중직을 수행하면 목사의 사명을 망각하게 되고 돈만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돈을 멀리해야 한다고 들었다.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다? 돈만 아는 목사. 저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돈을 멀리해야 한다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더 부자가 많은 것을 보았다. 더 좋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도 보았다. 성도들은 시장에서 콩나물 팔아 헌금하는 사람도 있는데 목사는 호화 궁궐에 사는 사람도 보았다. 그러면서 돈을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사실이지만, 이중직을 하는 사람치고 돈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중직을 하는 사람치고 호화 궁궐 아파트에 사는 사람 있을까? 여러분 걱정하지 마라. 이중직을 하는 사람치고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 없다. 삶의 여유가 있으면 이중직을 하겠는가? 부자들의 목사가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이중직을 하면 성도들이 은혜가 떨어진다고 한다. 이중직을 하면 성도들의 영성 관리가 안 된다고 한다. 이중직을 하면 성도들의 머리가 돈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누가 할까? 진정으로 이중직을 하는 목사를 찾아 위로해 주고 격려를 해보라. 당신에게 하늘의 상급이 넘칠 것이다.


5. 이중직 때문에 정말 바쁜가?

목사의 일은 바쁘다. 할 일이 너무도 많다. 대형 교회 담임 목사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우니 목회를 지원하는 다양한 목회자를 세운다. 이중직은 아무런 상관없다. 이중직을 하면 더 바쁜 것은 사실이다. 목회뿐만 아니라 이중직 즉 일에 대한 부분도 감당하여야 하므로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판이다. 내가 이중직을 해보니까 엄청나게 바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중직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친 적이 없다.

이중직을 하면서 얻은 게 있다. 양쪽의 추가같이 움직인다. 추가 한 쪽으로 기울어진 적이 없다. 오히려 목회와 일이 균형을 잡아 주었다. 목사들이 굉장히 바쁘다. 이유는 무엇일까?
설교 준비를 위해 바쁜가?
교회 성장을 위해 바쁜가?
기도로 무장하기 위해서 바쁜가?
전도 때문에 바쁜가?
가정을 위해 바쁜가?
교단과 노회가 바쁜가?
수많은 곳에 강의와 집회 때문에 바쁜가?
목양 때문에 바쁜가?

이것도 아니면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하므로 바쁜 것인가? 목사들의 스트레스는 가장 높은 질병 항목 가운데 하나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따라 많은 목사가 병에 노출되고 있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목회 때문에 자녀와 대화할 시간이 없어 자녀들이 목사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중직을 하면 바쁘다. 라는 것은 이중직에 대한 오해의 소리다. 나는 이중직을 수행 아니 삼중직(목사, 선교사, 사업가)을 수행한다. 하지만 바쁘지 않다.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목사로서 셀 그룹을 인도하고 있다. 선교사로서 선교사들에게 다양한 장르의 강의를 제공하며 다양한 콘텐츠를 선교사에게 제공한다. 사업가로서 국내와 해외 사업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 더불어 크리스천 기업인들에게 컨설팅을 제공하며 멘토링을 지원해 준다. 목사의 일 하나만 할 때 보다 더 여유 있고, 풍성하게 사역하며 나눔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다.

이중직을 수행하면 목회 일도 바쁜데 어떻게 이중직을 하느냐고 난리들이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이 있는 일의 현장에서 한 번도 일해 보지 못한 목사들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목회와 일을 병행할 수 없다고. 목사들의 단점이 무엇인지 아시냐요? 이 문제는 뒤에서 다루겠다. 목회와 일 즉 이중직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일이다. 어떤 일을 거룩하고 어떤 일을 추한 것이 아니다. 일을 양비론으로 나누는 것이 더 추한 것이다.

목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일,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은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추함이다. 성경은 어디에도 목회는 거룩하고 세상의 일은 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목회는 하나님의 일,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은 세속의 일이라는 논리는 맞지 않다.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거룩함을 나타내는 수단이다. 성경을 보라. 수많은 사람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든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기록되어 있다.

과거에는 설교를 준비하려면 주석을 수십 권 옆에 놓고 더불어 예화집 책들을 참고하여 준비하느냐고 설교 준비 시간이 부족할 때가 많았다. 나는 부목사 시절 설교 준비 목사였다. 담임 목사의 설교를 준비하는 목사였다. 그때는 설교 자료들이 별로 없었든 때였다. 주일 설교 수요일 설교 준비하느냐고 정신이 없었든 때가 있었고, 담임 목사의 의중에 맞는 설교를 준비하느냐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왜 이런 것을 하지? 이것이 부교역자의 사명 인줄 알았다. 담임 목사는 왜 내게 설교 대필을 시켰을까? 바쁘니까? 요즘은 수많은 설교 자료를 제공받고 설교 자체도 공급을 받는다. 그래서 전국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 내용이 비슷하다.

이중직은 바쁘다 안 바쁘다. 라는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이중직을 수행하는 이유는 삶의 팍팍함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삶의 재정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중직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바로 이것이다. 바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이 문제다.


6. 이중직 하는 목사의 정체성

나는 이중직을 하면서 이렇게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에게 목회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이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고민하고 울부짖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중직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할까요? 말까요? 이런 기도였을까? 이런 기도를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이중직을 수행하면서 선교지에서 목회를 이제는 한국에서 목회를 “무엇을” “어떻게” “왜” 하여야 하는가요? 이렇게 물었다.

이중직을 수행한다고 나의 목회의 정체성이 바꾸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중직을 수행한다고 해서 나의 목회가 어려워지거나, 목회가 힘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목회의 정체성이 더 확실해진다는 것을 확증 받았다. 4년 전에 익산시에 있는 여려 교회 집회를 마치고 10여 명의 목사와 교제하며 잠시 쉼을 내서 여행할 시간이 있었다. 여행하면서 식사도 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신묘막측(神妙莫測)함을 보면서 즐거운 쉼의 시간을 가졌다. 그때 한 목사가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 참 대단하네요. 설교도 잘하고 강의도 기가 막히게 하고 사업도 잘하는데 어떻게 다 합니까? 무슨 뾰쪽한 방법이 있습니까?
나의 대답이 궁금한 것이다. 한 목사가 질문했지만, 답을 들으려는 사람은 같이 모인 모두였다. 모두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목사 일도 힘든데 어떻게 3가지를 다 하면서 그렇게 여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나의 답은 이랬다. 3가지 모두 모델이 있다. 각각의 역할에 맞는 모델을 가지고 수행한다. 그래서 가능하다. 그렇다. 목회는 바로 모델이 있는 것이다. 모델이 없는 목사는 항상 바쁘다. 항상 모델을 찾아야 하니까. 하지만 모델이 있으면 모델대로 하면 된다. 그렇다. 바쁘기는 무척 바쁜데 실속은 적은 자들이 있다. 모델이란 바로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3가지를 역할을 한다. 하지만 한 번도 힘들다고 한 적이 없다. 물론 처음에는 실패도 많이 했다. 선교지에서 사업을 하면서 무려 170번 이상 실패했다. 눈물겨운 실패의 스토리가 있다. 오늘의 최웅섭 회장이 있기까지 눈물겨운 시절이 있었다. 수많은 실패 뒤 성공의 길을 가게 되는데 그 원천이 바로 사업의 모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업의 모델을 목회와 선교에 적용했다.

이 모델 때문에 나의 목회의 정체성이 더욱 투철하고 철저하게 정립되었다. 이중직을 한다고 해서 절대로 목회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는다. 더 철저하게 관리하면 된다. 이중직을 수행하기 전에는 목사 중심이었지만, 이중직을 수행하면서 세상을 향하는 마음이 더 넓어졌고 성도들을 대하는 마음이 넓어졌다. 성도들에 대한 사고를 바꾸었고, 성도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이중직을 수행하면서 느낀 것은 성도들이 믿음이 깊어졌고, 영적, 육체적으로 더 성장하였다.

이중직을 수행하면 목회에 엄청나게 리스크가 발생한다는 일부 목사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우리는 수많은 가설 속에서 살아간다.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세요?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나요? 물론 하나님의 특별 은혜로 해결될 수도 있지요? 가설에 능숙한 성도들을 양성하는 것보다 미리미리 기도를 준비하는 성도들을 양성하는 것이 어떨지요? 목사의 모델이 만들어지면 성도들이 목사를 따라서 모델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부전자전이라고 할까? 목사가 일일이 잔소리하듯이 하지 않아도 모델대로 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중직도 마찬가지이다. 모델이 있으므로 목회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세요. 왜 무엇 때문에 미리 가불해서 걱정합니까?

분당의 우리 교회 이찬수 목사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하세요? 명령형 메시지가 아니라 삶의 모델, 신앙의 모델을 제시하는 목사이다. 그래서 보기 좋다. 모델이 있으니 성도들이 목사를 닮아 간다. 그래서 이찬수 목사가 보기 좋다. 한국 교회의 좋은 모델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목사가 목회와 이중직도 모델이 있으면 훌륭한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매주 월요일에는 택시를 운전을 한다는 소식도 듣고 있다. 당신이 이중직을 하든 아니면 이중직을 안 하든 상관없다. 목회에 모델이 없다면 지금 당장 모델을 만들어라. 여기서 판을 바꾸어 잠시 다른 항목을 통하여 모델을 어떻게 활용하는 보기로 하자.

모든 영역에서 모델이 중요한 이유
비즈니스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다. 삶이 바르지 못하면 비즈니스는 허공을 때리고 만다. 이렇게 비즈니스 하는 사람 수없이 만났다. 그 가운데 대부분 크리스천이었다. 비즈니스에서 모델이 중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무작정 비즈니스 하는 것은 무작정 망한다. 그리고 무작정한 삶도 무작정 망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어떤가? 여러분의 삶은 무작정인가? 아니면 모델이 있는가? 사업도 마찬가지 무작정한 사업은 오래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돌고 돌아 원래의 위치로 가고 만다. 선진국을 보라! 국가의 시스템으로 하지 않는가? 시스템이 없으니까 즉흥적이고 마음대로 한다. 그것이 법이고 그리고 정의라고 생각하는데 바로 한국이 그렇다.

모델이 없으면 개인과 국가, 그리고 사회도 다 무너지고 만다. 그만큼 모델은 중요하다. 법은 지킬 때 편한 것이다. 하지만 지키지 않은 사람한테는 법은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변호사를 찾는데 한국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벌써 경찰이나 검찰에 누구 아는 사람 있는가를 찾는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촌의 사촌, 그 이상의 인적 네트워크를 총동원 한다. 그래서 동원하지 못 한 사람은 사람 축에 들지도 못하는 것이 한국이다. 왜 이런 일이 나타나는 것일까? 법대로 하지 않고, 모델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즈니스도 법대로 하면 편한 것을 나중에 알았다. 처음에는 물건을 팔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중간 이윤이 없어도 팔아야 했고, 구매자가 원하지 않아도 우기면서 사라고 강요하였다. 비즈니스는 작든지, 크든지 상호 신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계약을 강요하면서, 고객의 가치를 추구해 주기보다는 나만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강요적인 모델이 나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모델을 만들고 연습하고 훈련되니까 그때부터는 사업에 날개를 단 것 같았다.

대기업이든 작은 기업이든 모델이 있으면 어떠한 환경이 와도 모델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이 없으면 기업이 소유주의 눈치만 보게 되고, 개인 회사도 모델이 없으니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한다. 그 결과는 뻔하다.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만 빙빙 도는 것이다. 모델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지속 가능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성공하려면 성공한 사람 옆에 서라는 말이 있듯이, 모델이 있으면 성공을 만들 수 있다. 성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성공하려는 모델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다른 기업의 모델을 모방하라! 모방은 제2의 성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본의 동경을 가보라. 도시의 구조가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미국의 뉴욕을 본떠 만든 것이다. 그래서 한때 일본은 모방의 천재 국가라는 말이 있었다. 내가 모델을 만들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이루어 놓은 모델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기술이다. 이 세상에 어디를 보아도 창조는 없다. 창조된 것에서 모방하여 수많은 제품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고, 재생산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보라. 무엇인가? 이미 만들어지고 구축된 결과와 클라우드가 모여서 4차 산업혁명의 모델을 만들었다. 독일 인더스트리 4.0도 그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만들어지는 모델, 그 모델을 서로가 카피해서 사용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블록체인의 기술이다. 모든 콘셉트를 하나의 클라우드에 넣고, 체인으로 묶어서 서로가 연결되도록 한다. 그렇다면 대기업이면 어떻고 소기업이면 어떤가? 당신에게 맞는 삶의 모델, 그리고 이중직에 맞는 모델을 만들어라! 이중직하는 사람에게 모델이 없으면 흔들리는 추와 같아 중심을 잡기 어렵다. 이 문제는 뒤에서 깊이 다루기로 한다.


7. 목회자가 이중직 한다고?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이중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먼저 다가온 딜레마가 나의 목회 선교 이중직 사명이었나? 소명이었나? 이었다. 내가 이중직을 수행할 때 나 자신의 문제에 직면할 것인데 거기에 대하여 답변할 근거가 있느냐는 것이다. 목사로서 이중직, 선교사로서 이중직 과연 사명인가 소명인가. 이중직이 사실 순탄한 과정이면 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중직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중직을 수행하려고 할 때 가장 고민이 이것이었다. 이중직 일이 사명인가? 하나님! 내가 이중직을 하여야 할까요? 이런 질문에는 이런 고통이 있었다. 하나님 내가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내가 왜 목회하면서 또 하나의 일을 하여야 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 나 자신의 무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자립하고도 아 통 크게 목회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느냐는 얍복강 강가의 야곱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나님과 수많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이중직에 대한 부담감, 두려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 고통의 문제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더 고통이다. 가족에게, 성도들에게, 동료들에게 과연 쉽게 말할 수 있는 목사가 얼마나 될까? 나 자신도 과부하 상태이었다. 한마디로 철저한 자기와의 싸움이 시작된 것 같았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과연 이길 수 있을지 몰랐다.

이중직에 대한 사명과 소명이라는 것에 직면하여 이 아픔과 고통을 체험하지 못한 목사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고통이 얼마나 쓰라린 고통인지. 아마도 예수님이 짚어지고 가신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는지, 이런 고통이었다. 이중직을 수행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 겪었든 고통이다. 이런 고통이 있는데 같은 소속의 동료와 목사가 말로 죽이는 고통이 있다.
목사가 이중직을 해!
돈밖에 모르는구먼!
은혜가 떨어졌구먼!
세상이 변했네!
목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그래서 천국에 갈 수 있겠어!

이런 질타 속에서 현 상황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고민의 연속이다. 그저 주여! 주여! 만 부를 뿐이다. 지금까지 함께한 성도은 어떻게 되는가? 지금까지 나를 격려해 준 사모의 입장은? 이중직에 앞서 나에게 있어 성도가 우선인가? 가족이 우선인가? 고민이 없을 수 있을까?

이때 다시 자신을 향한 질문이 다가온다. 나는 열정을 다하여 목회를 했는가? 이와 같이 이중직을 수행하는데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으며, 한 겨울 살을 파고드는 추위가 다가옴을 느끼게 된다. 이중직을 수행하는 수많은 목사가 이 고통의 강을 건너고 있다. 누가 이중직을 수행하는 목사들에게 돈을 든질 수 있을까?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중직도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가능함을 배웠다.


8. 성도들과의 공감대 형성

수십 년 목회하고도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 목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다. 무덤에 묻힌 주검이 이유가 없을까?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다양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이유가 많았다. 변명 같기도 하고, 핑계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중직을 수행하려는 목사, 이중직을 수행하고 있는 목사들과 대담에서 가장 염려하는 부분이 성도을 이해시키는 부분이었다. 과연 성도들이 이해를 하고 같이해 줄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

나는 이중직을 수행하는 목사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다.
왜 대형 교회를 만들지 못했나요?
대형 교회 목사들과 같이 교단도 같고 동기도 많으며 무엇이 부족하여 왜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했나요? 이 질문을 할 때 나도 힘들었다. 그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거와 같으니까? 하지만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도.

나에게 왜 대형 교회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는 무엇이 부족해서 이중고에 시달리게 하나?
하나님 어찌하오리까?
많은 목사들이 나도 이같이 말했다. 능력 부족이지요. 무슨 능력이 부족했을까? 사람을 모으는 능력, 설교의 능력, 운영의 능력, 관리 능력, 등 많은 것에 대한 부족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했다. 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는 줄 알지만, 추가적인 질문을 하고 싶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교회는 성장할 수 있는가? 성도들에게 풍성함을 제공할 수 있는가? 내 교회가 주변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지역에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은 있는가? 이런 질문에 이런 답을 들었다. 아! 이제 가능하겠습니까? 너무 지쳤습니다. 현재 있는 성도들을 이해시키고 이중직의 참모습을 보여 주면 성도들이 이해하겠지요. 라는 답이다. 이중직을 하려는 목사의 경유 목회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교회에 대하여, 성도들에 대하여 에너지가 소갈 되었다. 교회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식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생각 없이 이중직을 수행하는 목사들도 많았다. 이중직 목회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고 정기적인 수입이 발생하는 목사이다. 예를 들어 대학교에서 교수를 한다든지 강의를 통해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목사이다. 이런 목사들은 이중직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다른 견해란 이중직에 대한 직업관이다. 이들은 목사이면서 목회는 하지 않지만,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므로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 그러므로 이중직에 대하여 자유롭다. 이중직에 자유로운 이들이 이중직의 이론을 거들먹거리며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이론도 존중하고 싶다. 하지만...


9. 이중직 목회 시대적 요청인가?

요즘 목회의 본직과 더불어 다른 일을 하는 목회자들이 너무도 많다.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이중직 목회, 또는 이중직 목회자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탈도 많고, 말도 많다. 각 교단에 따라 허락해야 한다, 안 된다고 두 분류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신학자들과 일부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바울도 텐트를 만들면서 사역했는데 시대적 요구에 따라 겸해도 된다는 교단도 있다. 나는 목회자 이중직 또는 이중직이라는 용어를 앞으로는 이중직 목회라고 사용하기로 한다. 이유는 바울이 천막을 만들면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을 21세기 용어로 각색하면 이중직 목회라고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이다.

성경에서는 이중직 목회를 어떻게 말하는지 찾아보자. 사실 성경 어디에도 이중직 목회에 대하여 말하는 데가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의 천막 만드는 일 외에는 마땅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신학자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먼저 루터의 경우를 보자. 루터. “종교 개혁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지만, '이중직 목회자' 또한 루터를 설명하는 단어 중 하나다. 김승호 교수(영남신학대학교)는 목회 윤리 연구소가 개최한 포럼에서 루터를 자비량 목회의 전형으로 언급한 부펠(Olehile Buffel)의 말을 인용, “다양한 일들로 생계를 위한 재정 수입을 얻었다.” 면서 루터 역시 이중직 목회자였고, 이중직 목회는 이제 미래 목회의 한 유형이라고 규정했다.

이중직 목회의 대표적인 사람인 도르(Dorr)는 바울을 “이중직 목회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세상일에서 얻는 수입과 청중들이 제공하는 재정 후원, 그리고 때때로 교회나 부유한 후원자가 보내 준 사랑의 선물 등을 모두 경험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라면서, 바울은 자신과 전임 사역자들의 생계와 관련하여 어느 한 가지 방법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방법을 극단적으로 배척한 것이 아니라, 여건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채택하는 유연성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목회자가 목회 활동과 경제활동을 겸하는 전통은 사도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초대교회 당시 바울은 선교 여정 가운데서 경제적 자립을 위해 천막 만드는 일을 지속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물론 당시의 특수한 상황 에 있든 바울의 사역을 오늘날 목회자의 사역과 같이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김승호 교수(영남신학대학교)는 목회 윤리 연구소가 개최한 포럼 참고)

목회자가 목회 사역과 다른 세속적인 일을 동시에 감당하는 모습도 목회자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사역 유형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미자립 교회의 수는 지속해서 늘어났다. 이것은 곧 많은 수의 목회자들이 생활비를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목회 활동에 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해야 할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목회자는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까?

교회 성장 시대에는 미자립 교회라 하더라도 짧은 기간 내에 자립 교회로 전환되어 경제적 어려움의 상태를 단기간에 전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성도 수가 정체하고 감소하는 시대에는 미자립 교회가 자립 교회로 전환하는 비율이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 내에는 목회자가 목회 활동 이외의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목사는 목회로 부름을 받았지, 돈벌이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만성적인 경제적 미자립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후원 교회로 부터의 재정 지원은 받을지언정 목회자가 경제활동에 종사하면 안 되는 것일까? 여기에 오늘날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의 딜레마가 있다. 특히 이러한 목회자의 “경제활동 불가론”은 목회자가 목회에 전념하면 목회자의 생활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과도 연결되어 있다. 일리 있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교회 성장 시대를 거쳐 온 한국 교회 목회자들 대부분은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한 바 있다. 그들은 옆이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목회에만 전념함으로 맨손으로 기적을 일군 한국 교회 성장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사고 속에는 더더욱 목회자는 목회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만성적인 미자립 상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가족의 경제적 부양의 책임을 지속해서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목회자는 다른 교회나 기관으로부터의 경제적 후원만을 바라는 일 이외에는 다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 과연 목회자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자존감과 긍지를 지켜 줄 수 있는가? 단언컨대 목회자는 목회 활동에 전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목회 활동”이라는 것이 단지 교회 안의 성도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영적 활동이라는 전통적 의미에서 목회 개념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목회자의 경제적 자립이라는 목적 이외에도, 목회자 이중직 목회 금지만을 고수하면서 경제 활동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가오는 사역의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것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날이 갈수록 전도가 힘들어 지는 현실 가운데서 경제활동은 전도의 접촉점 마련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미자립 교회 목회자 중에는 동시에 목회 활동과 경제활동에 종사하면서 사역의 비전을 구체화시켜 나가고 있다. 상황과 여건은 고려하지 않고, 단지 목회자가 경제활동에 종사한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탐닉하는 목회자'라는 낙인을 찍어 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이 시대 바리새인의 모습이 아닐까? 특별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는 목회자에게 경제적 자립의 의지를 높여 주고, 경제활동을 통해 새로운 사역의 비전과 소명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해도, “목회자 이중직 목회 불가론” 을 불변의 진리인 양 고수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목회자 이중직 목회 불가론만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이중직을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지원방법 그리고 하려고 준비하는 사람에 대한 지원(교육)이 필요하다. 이중직이 필요하다 불필요하다 신학적 논쟁은 필요 없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병원에 왔는데 의사가 두고 보자, 검토해 보자는 의사는 세상에 없다.

사랑을 베푸는 것 목회자는 사랑의 마음을 기본으로 갖고 있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목회자의 근본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목회를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성도들의 영혼을 책임지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오랫동안 목회의 경륜을 통해 말해 주듯이 다양한 지식을 소유하여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 까지 사랑하고 섬기면서 가르치는 은사와 더불어 대중성의 가치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열정적으로 자신의 혼을 바쳐서 목회하는 등 다양한 장점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세상에 대하여 단절되었거나, 교회 즉 우물 안에 같은 개구리처럼 종교적인 네트워크는 강할지 몰라도 세상의 모든 것 과는 단절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목사의 이중직이 장밋빛? 인가는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목사의 이중직 목회에 대하여 모두가 긍정적이지 않고 즉 같은 동료, 아내, 성도, 교단, 노회 반신반의와 불신 세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염려, 세속화에 대한 염려 그리고 물질 만능 주의 타협에서 견뎌 낼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중직 목회는 행복한 여건을 만들 수 있고, 이중직 목회는 선교이며, 이중직 목회는 모든 교회를 건강하게 할 수 있고, 이중직 목회는 사회를 건강하게 하며, 이중직 목회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영토 확장을 위해 봉사와 섬김의 역할을 통해 정적이며 동적인 목회를 할 수 있다.


10. 왜 ! 이중직 목회까지 왔는가?

나는 여기에서 목회자들이 목회와 더불어 이중직 일을 않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왔는지를 먼저 점검해ㅠ보고자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신학자가 아니다. 나는 목사이자 선교사 그리고 글로벌 사업가 입장에서 목회자 이중직 목회를 강의하는 처지에서 나의 의견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목회자의 의무는 설교를 준비하고,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기도하는 일, 교회의 모든 일 행정, 정책 등등 다시 말하면 목양을 하는 일이 목회자의 의무이다. 하지만 지금의 목회자는 엄청나게 바쁘게 산다. 설교 준비, 기도, 심방, 노회 각종의 모임, 설교를 위한 연구 모임, 교회 성장을 위한 모임, 상담학을 배우고, 각종의 교회 성장과 부흥에 대한 온갖 모임에 참석하여 어떻게 하면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킬 것이냐는 라는 것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이러다 보니 목회자는 매일 바쁘다.

목회자는 월요일이 쉬는 날이지만, 작금의 목회자 중에서 월요일 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아니 월요일이 더 바쁘다. 글쎄 왜? 그런가? 많은 목회자에게 물었다. 왜 이리 바쁘냐고? 결과는 바쁘지 않으면 즉 하루라도 쉬면 목회에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요즘 성도들의 머리가 커져서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배우고 읽히지 않으면 성도들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왜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가 성장하지 않고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이런 이유가 과연 목회자가 바쁘지 않아서 목회자가 소양이 부족해서 목회자가 성도보다 학력이나 경력, 이력이 부족해서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현상은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욕구를 모르는 이유에서 발생한다.

어려운 경제 현실 속에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경제의 현장에서 피눈물 흘리며 일하고 있다. 한국에 법인 사업자 400만 명, 자영업자 650만 명이 있는데 이 중에 상당수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전 세계의 경제 불황의 여파가 한국에 밀려왔고 그 여파로 인해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전쟁터와 같은 양육 강식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교회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없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싶으나 재정적 부족으로 인해 한계를 느끼고 있다. 자신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부담이 없는 대형 교회로 몰려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교회에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성도들은 가나안 성도으로 돌아가는 현상들이 교회 현실이라고 본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교회의 성장은 더디고 성도은 떠나가고 교회의 재정은 부족하고 개척 교회는 더 힘들어지고 중소형 교회 역시 힘들어 교회 관리는 물론 목회자 사례까지 지급하지 못하는 교회가 속출하는 현상들이 나타고 있다. 이에 따라 목회자들이 일터의 현장으로 가고 있다. 목회자 이중직에 대하여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코로라19라는 문제까지 터져 1만여 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여기서 활동하는 목사들은 이중직 현장으로 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중직 일은 무엇인가를 먼저 짚고 가자. 일을 통하여 수익을 창출하여 삶의 근간을 만들고 자립형 목회를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수익을 통해 목회와 일을 동시 수행함으로서 일자리 창출 그리고 부의 창출 통해 나눔을 실천하면서 교회와 사람을 세우는 것으로 성도의 심정을 이해하는 목회자 그리고 목회자를 이해하는 성도을 만드는 것, 이것이 이중직의 근본이다. 여기에 성경의 이론이 어떻고 신학적 근거가 이렇고 할 필요가 없다. 신학적 근거를 위하여 연구하고 노력하는 대신 이중직 목사를 위한 위로회를 열어주는 것이 더 좋은 이중직 전략이 아닐까?


11. 이중직 목회자의 특징

세상 속에서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에 대해 부르심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일을 함으로써 이윤보다 하나님 나라 확장에 힘쓴다. 더불어 사람을 행복하게 하며 사람을 섬기는 목회자로서의 영향을 주는 것이 이중직 목회자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꼭 교회 안에서만 일해야만 하는 것인가? 목회자도 세상 속에서 세상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어 전도의 기회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전도는 목회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는 것으로 법례와 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형 교회는 몰라도 중소형 미자립 교회나 개척 교회는 목사가 전도 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교회 숫자를 늘릴 형편은 못 된다.

목회의 관점에서 보면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 건설과 이웃을 향한 영혼 구원, 나를 향한 충만의 삶을 통해 성도들에게 풍성한 삶을 제공하는 것이다. 목회자 자기 관리를 통해 영적? 육체적? 싸움터에서 승리하여 성도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은혜를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중직 목회를 통해서 바울이 그랬듯이 재정에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으며, 노동의 신성함을 만끽하고, 성도들에게 자신만만함을 보여주고, 가족에게 인정받음(자녀들에게)으로써 이중직 목회자의 책임을 다할 수 있다.
이중직 목사의 가장 중요한 것
첫째로 초심을 잃지 않을 자신감
둘째로 목회자 본분 망각하지 않을 자신감
셋째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넷째로 가정에 충실하여 성도과 가족으로부터 인정받고 자신 있는 목회를 할 수 있다.

목회자의 4가지 성품은 사람, 정직, 열정 그리고 나눔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첫째 사람의 성품 중에서 목회자는 기도하는 사람, 목회자는 자신을 헌신한 사람, 목회자는 성경을 따라 사는 사람, 목회자는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사람, 목회자는 겸손한 사람, 목회자는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두 번째 성품 중에는 자신에게 정직하고 성도들에게 정직하며, 가족에게 정직하고 이웃에게 정직한 목회자들이다.
세 번째 성품 중에는 남다른 열정으로 달려온 사람, 자신을 희생하며 달려온 사람, 물불 가리지 않고 희생한 사람, 남은 건 열정뿐인 사람이다.
네 번째 성품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성도에게 돌리며, 가족에게 돌리는 성품의 목회자이다. 이러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이중직 목회를 하는 것 있어 부정적인 모습을 생각하는 교단이나 목사에게 이중직 목사의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이중직 목회를 통해 하나님이 한국 교회를 향하는 마음이 있다고 본다. 지금의 한국 교회는 막장 터널 같은 상황이 아닐까 싶다. 이중직 목회를 통해서 한국 교회가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중직 목회가 성도들에게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다음과 같은 영향을 준다.

첫째 이중직 목회는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이다.
둘째 이중직 목회는 선교이다.
셋째 이중직 목회는 모든 교회를 건강하게 한다.
넷째 이중직 목회는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
다섯째 이중직 목회는 사회를 통합하게 한다.
여섯째 이중직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의 영토 확장이다.
현재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목회자들이 이중직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인 현상이고 목회자들이 이중직에 관심을 가진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제5의 물결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경에는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로 가라고 않고 교회를 향하여 세상으로 가라는 암묵적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목회자가 세상을 향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생각하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이 된다. 우리는 목회에 대한 부르심도 받았지만, 세상을 책임지고 세상을 위해 일하라는 부르심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내가 경험한 택시 운전사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12. 움직이는 택시 교회

나는 좀 지난 일이지만 서울 강남 선릉 역에서 여의도에 가려고 오후 시간 상당히 무더운 날씨에 택시를 탔다. 길가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지만, 택시를 잡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차를 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주차장이 부족하니 지하철을 타고 오라는 말에 지하철을 타본 경험이 없으므로 택시를 타기로 했다. 한참 지난 후 택시가 내 앞에 급정거하며 섰다. 그것도 감사했다. 택시를 타고서 목적지를 예기도 하기 전인데 택시 미터기가 상당히 올라가 있는 것을 목격했다. 택시 탄 자체가 짜증이었고 불편했다. 내가 태어난 고국이 수준이 이정도 밖에 안 되는가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여의도로 가자고 하고 기사 한 데(나는 사장이라고 불렀다) 창문 좀 올리고 에어컨을 틀어 달라고 하자 뒤를 바라보면서 짜증 난 소리로 온종일 에어컨을 켜고 다니니까 열어 놓고 다닌다고 하면서 뒤를 돌아보더니 짜증을 내면서 뭐라고 하더니 에어컨을 켜 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보니까 한 여름인데 모자를 쓰고 있어서 날씨도 더운데 왜 모자를 쓰고 운전하시라고 하고 물었더니 별것 다 묻느냐고 하면서 역시 짜증 섞인 말로 불쾌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시켰고 그러든 중 한국에서 많은 목사가 택시를 한다는 소리를 늦었든 기억이나 이분도 혹시 목사가 아니겠냐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기사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면서 한동안 앞을 보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는 기사에게 차 조심 하세요. 라고 말하자 그때야 앞을 보면서 뭐 하는 분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목사이고 선교사이고 글로벌 사업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니까 기사가 하는 말이 나도 목사라고 하면서 자기를 소개했다. 그런데 목사가 이런 식으로 운전하고 양심을 속이고 하는 것에 분통이 났지만, 같은 목사라는 말에 동지 의식을 느끼고 잠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아무 데나 택시를 멈출 수 없고 여의도 가는 길에 차를 세울 수 있는 곳이 있다면서 그곳에서 일어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목사 기사에게 왜 택시를 하게 되었는가 화두로 시작해서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 목사 택시기사는 목회한 지 30여 년 됐고 대형 교회 목회자도 했고 지금의 교회는 10여 년 전에 개척했지만 능력 부족으로 현재 지하에서 40여명의 성도들과 힘들게 목회를 하고 있으며, 사모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러한 모든 것은 성도들은 모르고 있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많은 고민도 있고 목회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주변의 소형 교회 목사들도 요즘은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다고도 알려주었다. 한 달 수입은 보통 250~280만 정도 된다고 하였고, 주로 아침 일찍 나와 부지런히 피곤도 모르고 다닌다고 하였으며 주로 장거리 손님을 많이 태운다고 하였다. 그래야 매출이 더 오르기 때문이라고,

나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서 나도 목사이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자 대화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었다. 같은 목회자이자 사업을 한다고 하니까 분위기가 달라져 대화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나도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목사 기사를 웃겨야 했다. 그래서 아침의 키스가 연봉을 높이는데 아침에 사모님하고 키스 하냐고 물었더니 잠자리 한 지가 언제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기에 앞으로 매일 아침 키스하면 수입이 오를 것이다. 라고 말하자 한바탕 웃고 나니까 대화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나는 사업적인 측면에서 택시 기사가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것을 말하면서 목회적 택시기사를 하라고 알려주었다.

손님이 앞에서 기다리면 갑자기 달려가서 멈추지 말고 부드럽게 멈추어서 창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어서 타시라고 인사를 하라고 하였다. 손님이 차에 완전히 승차한 후에는 지금 출발해도 될까요? 라고 물어보고 손님이 승낙하면 출발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출발하라고 했다. 그리고 출발하면서 어느 방향으로 가면 좋은지 알려주라고 묻고 손님이 가라는 방향으로 가고 그렇지 않고 알아서 가라고 하면 내비게이션을 켜서 내비게이션의 방향대로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차 안에서 손님이 말을 시키지 않으면 하지 말고 손님을 향해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모셔다 드릴 테니 평안히 쉬시라고 말해 주라고 했다. 그리고 손님이 질문을 하면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알면 간단히 말해 주고 자기의 의견을 말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손님에게 곧 목적지에 오는데 물건을 챙기시고 결재 준비를 하십시오. 라고 말하라고 했다. 그리고 차를 부드럽게 정지시키고 편히 오셨는지 질문하고 요금이 얼마 나왔는데 결재를 어떻게 해주실까요? 물어보라고 했다. 결재 받고 영수증을 꼭 챙겨 주고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고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정중히 인사를 하라고 예기해 주었다.

이렇게 예기해 줄 수 있었든 것은 나는 아제르바이잔에서 기사를 두고 생활했다. 그때 기사에게 운전하는 요령부터 차 관리하는 요령 등 교육을 시킨 경험이 있어 그것을 목사 택시기사에게 가르친 것이다. 내가 왜 이 아주 사소한 것을 목사 기사에게 주문한 것일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택시 사건이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택시 타기가 겁이 나서 택시를 피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친절을 베푼 다면, 목사 택시기사의 택시를 탄 손님은 최고의 서비스를 받았기 때문에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예기할 것이고, 다른 목사 택시기사의 택시를 탄 사람들도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내가 택시를 탔는데 요즘 택시 기사들이 달라졌어! 너무 친절하고 자상하고 전에는 택시 타기가 두려웠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목사 기사래! 아 그랬구나! 나도 놀랬어 너무 친절해서!

자! 여러분 이러한 소리가 한사람을 통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때 모든 택시 기사가 달라질 수 있고 국민은 택시를 안전하게 탈 수 있다. 누구 때문에! 바로 목사 택시 기사 때문에!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목사 택시 기사의 선한 영향력이다. 비록 목사가 택시 기사가 되어 삶을 유지 하고 있지만 목회 이상의 영향력으로 한국의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으며, 전도가 되지 않는다고 아우성치는 수많은 목사 택시기사를 통하여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중직 목회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나는 제주에서 모 교단 수련회에 강사로 간적이 있는데 강의 중에 목회자 이중직을 언급을 하면서 목사 250명이 택시 운전을 하는데 그것은 250개의 택시 교회가 움직이고 있다고 하였다. 모두가 놀라는 상황이었다. 강의하는 데 목사님 한 분이 갑자기 “250명이 아니고 5천 명이 넘습니다.” 라고 하여서 나는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5천 명이라는 인원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다. 택시교회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어쩌면 전국에 5천 개 아니 그 이상의 택시 교회가 움직일 수 있다는 가슴 벅찬 희열 때문이었다. 5천 개의 택시 교회가 돌아다니면 하루에 10명씩만 태워도 5만 명을 태워 주는 놀라운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5만 명의 손님에게 복음을 제시 할 수 없지만, 목사 택시기사를 통해서 손님들은 친절함과 안전함 그리고 평안함을 맛볼 수 있다면 그 많은 손님은 이미 전도의 그물 안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 이중직의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찌 이분일까 지금 수많은 비즈니스 현장에서 목회자들이 이중직에 종사하고 있다. 카페 교회. 식당 운영, 협동조합 운영, 문화 마을 가꾸기, 사업가, 기업 운영 등 다양한 방면에서 엄청나게 영향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목회든 선교든 선한 영향력을 주고 그 영향력 속에서 하나님의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목회의 영토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선교사적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회라고 말한다. 오늘도 수많은 목회자들이 교단 몰래 노회 몰래 또는 교회와 성도들 몰래 이중직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토 확장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한 부르심 속에서 일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13. 이중직 목회자의 특징

이중직 목사는 많은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준다. 교회라는 우물에 빠진 목회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목사가 전도하는 교회는 이미 끝장난 교회이다. 아마도 대형 교회 목사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목사가 전도하면 안 된다는 논리는 어디에서 나오는 말일까? 성경의 어디에도 이런 문장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수없이 듣는다. 대형 교회 목사의 교만의 극치라고 하고 싶다. 왜 이런 말이 나온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성도들을 교육하고 훈련할 책임이 있으므로 전도할 시간이 없다. 라고 표현한 것이라 이해하고 싶다.

한국 교회가 한 때 제자 양육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을 가진 시기가 있었다. 모든 교회가 제자훈련 많이 살길이다. 라도 외쳐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들은 과연 누구의 제자들인가? 그렇게 많은 제자들이 양성되었는데 그 제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그 많은 제자들은 왜 한국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늘 날 교회는 사회에서 천덕꾸러기가 됐을까? 감옥에 가면 65% 이상이 성도, 국회의원 60% 성도, 가는데 마다 성도 성도들이 넘쳐 난다. 4명중 1명이 성도라는데 이단은 늘어나도 진정한 교회의 성도는 늘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의 패러다임이 바꾸어야 하기에 이중직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이중직 목사는 직업이라는 현장에 있으므로 수많은 불신자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도 제자 훈련 덕분에 신실한 성도들이 있다. 라고 이야기를 들을 때 한국 교회의 현실의 수준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중직을 수행하는 목사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한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얼마 전에 잘 아는 목사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만남의 이유를 물었더니 꼭 만나서 사업에 대한 컨설팅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디 만나 달라는 것이다. 나는 거절할 수 없어 내 사무소에 방문을 요청했다.
목사님 요즘 무슨 일을 하십니까?
예, 좋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잘 되었습니다. 대화가 이어지면서 이 목사는 다단계 회사에 다니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단계 회사라고 해서 나쁜 것은 없다. 대화하는 가운데 다단계 회사에서 건강식품에 대한 제품 파는 일을 하는 것을 들었다. 이 외에도 내 주변에 있는 많은 목사 전도사들이 타를 만나기를 원한다. 이유는 자신들의 일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나쁜 이중직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중직이 목적에 부합하려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이런 유형의 다단계 회사에 많은 목사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카톡이나 페이스 북을 통해서도 목사들이 경제적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유혹하는 내용이 수없이 올라온다. 내가 운영하는 하베스트 대학원 4 융복합 과정에도 하루에 몇 번씩 비트코인 투자, 부동산 투자, 주식 투자 등 정보들이 올라온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데도 카톡에 올라왔다. 내 열린 카톡 오픈 방에 있는 목사와 선교사들에게 이러한 사기 글에 속지 말라고 늘 당부하고 있다.

이중직은 이윤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 확장의 도구로 활용될 때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경제적 자유로 가는 길은 돈을 통하여 오는 것이다. 돈은 잡으려고 하면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경제적 자유로움을 얻으려면 이윤보다 하나님 나라 확장 도구로 활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중직을 통하여 주변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에 목적을 맞추면 좋다. 그렇게 되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당신이 목사라 할지라도 배려하며 존경을 할 것이다. 나는 사업을 하면서 고객을 섬기는 목회자로서 사업을 한다. 어떤 때는 고객에게 이런 말도 한다. 당신을 하나님처럼 대하겠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 나의 고객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내가 누구라는 것을 미리 선포해 놓으면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존경받는다.

이중직은 어딘가에는 소속이 되어 일하기 때문에 속한 기업에 영향력을 주며 하나님의 말씀과 목적에 부합한 행동을 하여야 한다. 그럴 때 기업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 세속의 사람에게 영향력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직을 통해서 사람과 기업에 영향력을 주는 것이 바로 이중직의 강력한 힘이다. 이중직은 하나의 먹고 살기 위한 도구로 전략시키지 마라. 당신이 하는 일을 통하여 목회할 때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구원의 역사를 전할 수 있으며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중직의 놀라운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이 없는 자들이 이중직을 비하하고 이중직에 대하여 부정적적인 논리를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일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일터이다.

수많은 일터는 당신이 어떤 이중직을 하든 상관없다. 당신이 택배를 하든, 택시를 하든, 노동의 현장에서 일을 하든, 소화물 배달을 하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당신이 있는 그 현장이 바로 지성소이며, 교회이다. 이것이 바로 건물 없는 교회라는 것이다. 꼭 교회가 건물이 있어야 하는가? 건물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내가 지금까지 선교지 우리 방에서 예배를 드린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후원하는 교회 장로에게 국제 전화가 왔다. 아이고! 장로님 전화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최 선교사! 당신에 대하여 중아일보 신문 전면에 기사가 났어요? 아니 선교사가 이래도 되는 거요?
무슨 기사요?
모른다는 말인가요?
글쎄요?...

한국에 국제 행사가 있어 방문을 했는데 그 때 중앙일보 대기자라는 분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때는 사업이 줄줄이 성공하고 있을 때이다. 아마 그 기사가 신문 전면에 나온 모양이다. 그것을 보신 장로님이 괘씸하다고 생각하여 전화한 것이다. 선교비를 보내주었더니 선교는 안하고 사업한다는 것이다. 기도 편지를 보내면 교회도 없이 집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교회냐고 늘 불만이셨다. 십자가가 있어야 하는데 십자가 없이 예배를 드린다고 야단맞은 적이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교회 건물 중심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한국형 성도의 모습이다. 세상이 교회로 들어와야지 어떻게 거룩한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냐 하느냐는 논리인 것이다.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교회는 망하게 되어 있다. 이중직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들은 황금 어장으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이다.


14. 이중직 누구의 책임?

서울 택시 기사 16만 명 시대, 부산 택시 기사 8만 명, 전국에서 택시운전 하는 목회자 만 명 이상이라는 말이 있다. 어디 택시뿐이겠는가? 수많은 택배 회사의 물류 창고에 가면 목사들이 넘쳐 난다. 다단계 회사에 양복 입고 자리에 앉아 능수능란하게 사업의 설명을 하는 사람 대부분 목사다. 지하철 택배 하는 목사들이 많다. 이러한 경우는 주로 도시형 이중직을 하는 목사들이다. 현직 목사도 많지만 은퇴한 목사들도 이러한 현장에 넘쳐난다.

종로 5가의 모 다단계 단체에서는 주로 은퇴 목회자를 기업의 세력 확장 도구로 활용한다, 이유는 네트워크가 강하고 인적 역량이 강하다는 이유이다. 여기의 다단계 현장은 코로나 이전도 이후도 상관없다. 주간 단위로 모임이 있는데 어떤 날은 센터에서 마치면 종로 5가 지하철역까지 다단계 회사의 봉투의 물결이 넘쳐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목사의 이중직은 교단과 노회의 문제도 있다. 교단과 노회가 모든 목회자의 생업과 삶을 책임질 수 없다. 여기서 책임 소지를 말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목회자 이중직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없다는 것이다. 노동의 현장은 은혜의 공간하고는 다르다. 주어진 시간과 일의 공간에서 치열하게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세상적인 방법이 존재하는 곳이다. 목사로 부름을 받고 세상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목사가 노동의 현장에서 일할 때 시행착오가 너무도 많이 발생한다. 그로 인하여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의 반목과 다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노동의 현장에서 일할 때 목사의 신분이 노출도기도 하고 대접만 받아 오든 습관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따라 서로의 거부감이 발생하고 다른 사람이 같이 일하는 것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목사로서 목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회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를 사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나의 지론에 대하여 왈가불가 하지 말기를 바란다. 또 하나 이중직을 양산하는 이유는 구시대적 교회 개척이 만든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척교회 남발의 현상이다. 물론 교회가 많아야 영혼구원의 숫자도 늘어 날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지금의 개척교회는 10년 전의 개척 교회 상황과 아주 다르다. 솔직히 10년 전만 해도 교회 간판만 달면 사람들이 모이는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대형 교회가 있으면 암묵적으로 개척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교회가 성장하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뜻? 이렇게 생각하는 목사도 있다. 목회를 하다가 생각대로 되지 못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목사가 있다는 사실이다. 목사로서 면책이 된 상황이다. 이러한 경우가 너무도 많다. 목회를 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목사가 어디 한두 명인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길거리에 넘쳐 나는 것이 목사라고! 노회에서 수많은 목사에게 안수를 남발하는 것도 이중직 목사를 양성하는 하나의 동기가 된다. 물론 목사가 되어 충성을 다하며 한 명의 성도가도 붙잡고 최선을 다하는 목사도 있다. 시골의 노인들과 함께 삶을 함께하는 존경하는 친구 목사가 있어 늘 행복함을 느낀다.

목사가 이중직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중직에 대한 책임감이다. 수많은 이중직하는 목사를 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낀다. 불쌍함, 가련함, 안타까움을 느낀다. 왜 그럴까? 차라리 이중직을 안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하게 하는 목사들을 많이 만났다.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 한다.” 이런 목사가 이중직을 수행하면 어떻게 될까? 책임감 없는 목사는 이중직을 수행하면 안 된다.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할 수 있다. 이중직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초심을 잊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중직 하는 목사들을 만나 보면 초심을 잃은 사람이 많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목회를 안 하고 주어진 환경에 몰입되다 보니 초심을 상실한 것이다. 누군들 이러고 싶겠는가? 모두는 아니지만, 초심을 잃어버린 이중직을 수행하는 목사들, 참으로 난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잃어버린 영성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세상 사람과 다름이 없음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초심을 잃어버린 이중직 목사들 과연 그들이 언제 초심을 회복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이중직 목회자가 본분을 망각하지 않을 자신감이 필요하다. 이중직을 수행해도 목사이다. 목사를 사직하지 않은 이상 노동의 현장 속에 있어도 목사이다. 나는 선교지에서 사업을 하면서 이와 같은 딜레마에 빠진 적이 있다. 너무 힘들어 교단과 노회에 목사를 사임하겠다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아내와 주변의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제출했고 사직서를 받아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하지만 결과는 사직을 받아 주지 않았다.

이중직 목회자는 자신이 어떠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목사라는 신분을 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이유는 그래야 현장에서 같이 일하는 불신자들부터 존경받을 수 있다. 또 하나는 노동의 현장에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목사가 현장에 있는 것을 보면 상대의 신분을 밝히든 밝히지 않아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당신의 책임감이 크리스천에게 도전을 주든지 아니면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이중직 목회자는 일반 목회지보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일하는 자체가 모범을 보여줄 수 있다.

성도들에게 당당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므로 성도들이 하는 일을 더 열성적으로 할 수 있는 동기 부여가 된다. 더불어 가정에 충실하여야 한다. 일을 한다고 해서 목사의 자세와 책임이 흐트러진다면 가족에게도 존경받을 수 없다. 이중직하는 목사의 책임감은 목회만 하는 목사의 책임감보다 더 무거운 이유이다. 이중직하는 목사는 양 날개의 무게가 항상 존재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15. 목회와 이중직 동역with 가능한가?

목사와 이중직의 조화를 잘 맞추려면 목사의 장점을 먼저 보아야 한다. 대부분 목사가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목사의 장점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이것은 근간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목사도 부전자전이랄까 싶다. 사랑을 베푸는 것 자신의 헌신을 통해서 베푸는 사랑 이것이야말로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장점이라 생각한다.

목사에게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은 섬기는 것이다. 목사의 사명 가운데 가장 강력한 부르심이 바로 섬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목사의 중요한 역할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 애당초 목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목사는 사람을 좋아하는 천성이 있다.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실망하는 때도 많다.

목사는 말을 잘한다.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수많은 설교를 통해 말을 배워 간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특권이다. 말을 잘하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논리 정연 하게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는 것이다. 말은 누구나 하지만 영향력 있는 말은 누구나 하지 못한다. 이러한 특권을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주신 것이다.

목사는 다양한 지식을 찾아 발견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목사는 세상의 박물관과 같다. 즉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과 같다. 다양한 사람에게 다양한 종류의 메시지를 전달하여 그들이 복음 안에서 살도록 하는 특권이 있다. 이것이 바로 말이 주는 영향력이다. 목사에게는 대중성(아이~노인까지)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아이면 아이, 노인이면 노인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에게 복음을 제시하고 구원의 반열에 들어오게 할 수 있는 언어의 마술사들이며 더불어 열정의 소유자들이다.

목사는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못 한다. 자신의 속내를 숨김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짓말 못하는 천성으로 인하여 성도들로부터 당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안양의 S교회 원로 목사는 인물이 잘생기고 사업을 잘한다는 사장이 찾아왔다. 목사는 성공적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말에 속아 사기를 당했다는 말을 수차에 걸쳐 하는 소리를 들었다. 상대방이 목사의 수를 알고 이용한 사례이다.

목사가 사기를 치는 예는 없다. 목사가 도둑질하는 경우는 없다. 목사가 상대방을 비방하는 일은 없다. 이러한 것들이 목사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물론 목사도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한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한국에서 한 때 잘 나가든 이중직 목사가 있다. 그는 가족을 동반하여 나에게 엄청나게 사기를 치고 결국에는 도적질까지 하는 행동을 보였다. 지금도 어디선가는 사기를 치고 도적질하는 목사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누구누구 목사 사기꾼이에요. 그런 목사 만나지 마세요. 세상에 어쩌면!

목사는 자신을 관리하는데 허술하다. 오로지 일편단심 목회, 교회, 성도이다. 자신을 관리하는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제는 자신을 관리하는데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목사가 자신 관리도 못 하면서 어떻게 교회와 성도들을 관리하겠는가! 목사는 성도들에게 누구보다도 자기 관리를 잘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것이 습관의 대표적인 행동이다.

목사는 돈 버는 일에는 관심과 방법도 모른다. 사실 나도 이랬다. 오로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사는 것이다. 바울 선교회 이동휘 목사는 목회 기간 동안 교회에서 주는 아주 작은 사례 외에는 일체 받지 않았다. 돈 버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 그랬을까? 이동휘 목사는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능력을 알고 있는 것이다. 정기 사례 외에는 어느 것도 받아 본 적이 없다. 오늘의 목사는 교회에서 모든 것을 공급해 준다. 즉 천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라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목사다. 아마도 일부 대형 교회의 목사를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목사는 가난하다.

목사는 세상에 대하여 모른다. 아니 관심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 외에는 관심이 필요 없다는 사고이다. 성경 외에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모든 것이 성경으로부터 나오는데 성경이면 만족하지, 무엇을 더 알아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세상을 알아야 교회를 경영할 수 있다. 성도들이 교회에 사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사는 사람들 아닌가? 그러므로 세상을 알아야 세상을 이기는 데 목사는 세상에 관심이 없다. 아니 세상을 몰라도 너무도 모른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목사 어디 한둘일까?

세상의 물정을 모르는 목사들이 너무도 많다. 목사들하고 대화하면 대화의 한계를 느낄 때가 너무도 많다.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목사는 세상에 나가는 것도, 세상을 아는 것도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산다.


16. 목회자의 이중직 정착 가능성

목사가 이중직을 하려면 자기 의지가 분명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의 현장에서 바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런 경우의 목사를 많이 보았다. 의지 약함으로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자신도 피해, 성도들도 피해를 본다. 목사가 이중직에 도전하려면 자신의 의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이 어떠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이 일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세상에서의 일은 목회와는 하늘과 땅 차이의 간격이 있다. 목회는 정신적 노동이지만, 일은 육체적 일이 필요하다(물론 정신적 이중직을 할 수 있다). 노력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정신적 각고의 노력과 체력도 필요하다. 목사들이 하는 이중직의 현장을 보았는데 환경이 열악한 곳이 많았다. 이러한 것을 이겨낼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남다른 열정이 필요하다. 이중직을 각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목사들이 있다. 카페를 운영하는 목사, 목수 학교를 운영하는 목사, 학교에서 교수, 다양한 분야에서 이중직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목사들이 있어 행복하다. 나 역시 사업을 통해 이중직의 참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중직은 성공적으로 잘하려면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 물론 혼자서 이중직을 수행할 수 있다. 주변의 사람들이 도움을 주면 이중직 수행하는 데 한결 쉬어진다. 내가 사업을 성공시키는 이유는 나의 능력이 아니다. 주변에서 사업을 도와주는 많은 파트너들이 있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함이 성공의 비결이다. 이중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주변의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목사가 이중직을 수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원은 사모의 지원이다. 사모의 말 한마디가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목사가 이중직을 하려고 할 때 그 마음의 고통과 아픔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주변의 모두는 비판이고 부정적인데 과연 누구로부터 용기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가장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사모이며 사모의 말 한마디가 목사에게 가장 위로의 말이요, 용기 100배가 된다.

목사가 이중직을 수행하려면 자신감이 넘쳐야 한다. 이중직을 하는 것이 피해의식이 있으면 안 된다. 이중직에 대한 통 큰 포부를 가져야 한다. 세상에 나의 교구(일터 사역의 교구)를 만드는 것이다. 세상에 나의 일터 교회를 만든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세상에 처음으로 누구도 도전하지 못한 일터 교회를 시작하는 자신감 얼마나 멋진 일인가? 왜 이중직을 두려워하는가? 꼭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필요도 없다. 당신이 가능하기에 당신에게 이중직을 하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것 아닌가? “두려워하지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라는 말씀이 이중직을 수행하는 당신을 위한 말씀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목사 이중직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기를 바란다. 나는 처음에 선교지에서 어쩔 수없이 이중직을 했다. 그때 나의 심정은 내가 왜 이것을 하여야 하지? 생각했다. 불평이 가득했고, 답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감사가 넘쳐 났다. 그 결과 수많은 사업을 성공시켰다. 감사의 마음은 당신의 이중직에 날개를 달아 줄 것이다.

더불어 일터의 현장에서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노동의 현장은 각자의 역량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돌보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건강관리도 중요하다. 노동의 현장에서 모범된 행동도 필요하다. 현장에 같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도 중요한 부분이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돌보는 능력이 된다. 자신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은 남을 배려할 줄 안다는 것이다. 내가 풍성할 때 남에게 베풀 수 있다. 내가 없는데 남에게 베풀 수 없다.


17. 목사의 이중직 장밋빛인가?

목사의 이중직에 대하여 모두에게 물어보라. 아마도 대부분은 부정적이다. 내가 목회자 연수회에 가서 강의할 때 강의 중 질문을 통해 이중직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대부분이 반대하는 성향이 강했다. 다만 일부만 이중직을 하는 목사를 보았다. 그들은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 목사들이었다. 그러므로 모두가 긍정적이지 않다. 신대원의 교수나 공공 기관에 근무하는 목사들에게 물었다. 이중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반대의 답이 나왔다. 교수형 이중직하는 목사는 100% 환영이었다. 목회를 하는 교수와 목회는 하지 않고 교회에 소속되어 일하는 교수는 100% 환영이었다.

이중직에 대하여 같은 동료, 아내, 성도, 교단, 노회에서도 반신반의한다. 왜 그럴까? 물론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노동직이 아닌 이중직이면 모두가 찬성을 할 것이다. 모두가 참 잘 되었네! 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노동의 현장에서 이중직을 한다면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신의 이중직에 대하여 반신반의한다는 것이다.

이중직에 대한 불신이 너무도 크다. 내가 만난 이중직하고 있는 목사 자체가 이중직에 대하여 불신이 너무도 큼을 보았다. A목사는 대전에서 목회하면서 이중직을 하고 있다. 얼마 안 되는 성도, 월세 등 지출이 너무 많아 매달 들어오는 헌금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사모도 일은 하지만 자녀들 학비도 빠듯한 상황이다. 이중직을 하고 있는 목사, 이중직을 하려는 목사들의 상황이 전부 같은 상황이다. 분당 근처의 도시에 이중직 하는 목사들 모임이 있다. 대부분 미자립 교회 월세 교회 목사들이다.

나는 이 교회와 목사들에게 유명제과 회사에서 제공하는 제과를 전달해주는 단체와 일을 한 경험이 있다. 이들의 형편은 제과보다는 재정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내가 장학재단을 운영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지원을 요청하는 목사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이중직을 하는 목사들이 당장 필요한 것이 재정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월세가 밀리고 전기세. 공과금이 밀리고, 주인을 피해 다닌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을 한 듯 과연 무슨 은혜가 되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아픔보다 더 큰 상처가 있다는 것이다. 동료 목사의 말 한마디, 동기 목사의 말 한마디가 깊은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공급해 줄 것인데 그걸 못 참고 일하러 가고 있어!
참 목사 믿음이 없네그려!
그래 가지고 목사라고 할 수 있어!
아! 그러려면 노회에 나오지 마소!
이중직을 하는 상황을 이해해주고 격려해 줘도 모자랄 판인데 이렇게 비판하는 목사가 있으니 노회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 이중직에 대한 말은 하지만 이중직에 대한 불신이 너무도 크다. 누구를 만나고 싶을까?

이중직을 하면서 세상에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많다. 나도 이런 경험이 많다.
목사님 사업하면서 돈 문제 해결할 수 있겠어요?
목사님 사업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세상은요. 돈밖에 몰라요!
그렇다. 이중직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어떻게' 가 중요하다. 목사 이중직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려 우니까 한다는 이중직
힘이 드니까 한다는 이중직
이런 경우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의 주변에는 세속화, 물질 만능주의, 타협이 기본이다. 이러한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목사가 세상에 들어가 이중직을 수행하려면 속이 터지고 만다. 이중직을 수행하려면 이러한 것에 대한 마음가짐과 점검이 필요하다. 나는 늘 이야기 한다.

무작정 이중직 무작정 망한다. 누군들 무작정 이중직 하겠는가? 하지만 대부분이 무작정으로 이중직을 수행한다. 그러다 보니 노동의 현장에서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일한 데라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 것이다. 이중직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절대 목사의 이중직은 장밋빛이 아니다.


18. 목사의 이중직 행복과 불행

나는 단언컨대 이중직을 성공시킨 장본인이다. 그러므로 이중직을 하니까 목사가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세 가지(목회, 선교, 사업) 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한다. 늘 만나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래서 이중직을 자신 있게 하라고 한다.

목사가 이중직을 하면 사모가 행복하다. 사모는 늘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치이고, 성도들 뒷바라지나 하고 항상 그늘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모들도 당당하게 일하는 시대이다. 목사가 이중직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모가 당당함을 볼 수 있다. 더불어 가정이 행복하고 자녀들도 학업에 열중하는 것을 보았다. 이중직을 하는 목사의 교회가 행복한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보았다. 청량리에 가면 이중직을 수행하는 A목사가 있다. 그곳에 가서 강의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이중직을 수행하는 목사의 행복한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사모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에서 이중직의 가능성, 이중직의 성공 모델을 보았다.

목사가 이중직을 잘하면 교회가 행복하다. 같은 단체에서 일하는 Y목사는 한국에서 이중직을 하는 목사로 잘 알려져 있다. Y목사와 같이 있으면 항상 신바람이 난다. A목사의 공동체는 정겹고 기쁨이 가득하다. 목사의 이중직으로 인하여 성도와 공동체 모두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본다. 더불어 주변이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 이래서 이중직을 하는 것이다.

이중직을 수행하려면 철저하게 나를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중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목사의 자존심이 목사의 이중직에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 목사가 세상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을 모르는 목사를 세상이 반겨줄리 만무하다. 교회 안에서는 목사가 세상을 몰라도 자기의 왕국을 구축할 수 있지만, 세상은 당신의 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중직 목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교회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 좀 빈정거리는 말이지만 목사가 하나님 아닌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목사 아닌가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목사의 막강한 권력.

나도 대형 교회 할 수 있다는 꿈을 깨라고 말하고 싶다. 대형 교회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대형 교회 목사들이라고 행복할까? 당신이 잘 알겠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건물 지상주의를 꿈꾸는 목사들의 교회를 보라. 대형 교회 환상에서 벗어나라. 교회를 버려라. 그러면 당신은 살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라. 건물 없이도 얼마든지 교회를 할 수 있다. 코로나 덕분에 빈 공간이 넘쳐 난다. 당신이 잘하면 당신에게 공간을 주려고 기다리고 있다.

요즘은 신학교를 입학하면서 진로가 결정이 난다고 한다. 이미 결정이 된 채로 신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이다. 아직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두 가지 타입 중 하나이다. 진짜로 순수하거나 멍청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B신대원에 있는 학생이 나에게 6개월 정도 비즈니스 훈련을 받았다. 어느 날 K전도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제가 목사님을 비즈니스 스승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승낙해 주세요.
나를 어떻게 알고요?
저희 신대원에서는 대부분 목사님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요? 욕하는 것은 아니지요?
아니요.
사업을 잘하시는 목사님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요?
비즈니스 훈련을 받고 싶습니다.
아! 그래요?
그래요 한 번 찾아오세요.
만나서 대화를 하면서 들은 이야기이다. K전도사는 자기 힘으로 졸업 후 교회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가 이미 전부 목양지가 있어요. 대부분 대형 교회 목사 자녀, 돈 있는 장로 자녀, 같이 공부는 하지만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신대원의 현실인지를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 가운데는 순순한 사명감에 불타는 신대원생도 있으리라고 본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나는 가끔 주례해 준다. 이때 콩깍지 이야기를 해준다. 연애할 때 눈에 낀 콩 깍지를 절대로 벗겨내지 마라고 신신당부한다. 연애할 때의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 결혼의 행복은 천로 역정의 험한 경로를 겪게 되는 것이다. 공자가 죽어야 공자가 산다는 책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살고, 성도가 산다는 말을 실감할 때가 많다. 목사가 죽는다고 성도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아마 이런 일은 천지개벽이 일어나야 가능할 것이다.

19. 목회자 이중직으로 가는 과정

목사가 이중직으로 가려면 과정과 절차가 필요하다. 하지만 상황이 급하다 보니 바로 노동의 현장으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 가게 된다.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 하는 처지를 누가 알리요. 이중직을 수행하는 곳이 기독교적 현장이라 해도 준비가 필요하고, 더욱 기독교적 상황이 아닌 곳에도 준비가 필요하다.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목사가 이중직을 하기 위해서 점검해야 하는 항목들이 있다. 목사가 이중직을 하는데 성경적 이론, 신학적 이론이 필요한가 여러분이 판단 할 수 있다. 인터넷에 목사 이중직을 검색해 보라. 신학자들이 수많은 이론적 가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본인들이 현재 이중직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면 이렇게 이론을 예기할 수 있을까? 물론 이론도 중요하다. 이론을 이야기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좋은 자리와 삶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이중직을 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무슨 이중직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인가? 목사가 당장 노동의 현장에 가야 하는 상황인데 신학적 이론이 이렇고 신학적 배경이 저렇고 라고 말하면 되는가 묻고 싶다. 신학의 논리에 빠져 버리면 한국 교회는 신학 때문에 망하게 될 것이다. 물론 신학이 바로 서야 교회가 살고 신앙의 토대가 바로 설 수 있다. 이중직은 신학 이론이 바탕이 아니라 삶이다.

목사 이중직에서 신학 이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적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창업 훈련을 시킬 때 가장 중요시 하는 게 있다. 비즈니스 MBTI다. 이것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창업을 못하게 한다. 하지만 무시하고 창업을 한다. 그 결과는 뻔하다. 수없이 망한 기독 청년, 일반 청년을 보았다. 자신의 적성을 철저하게 점검하고 확인하라.

두 번째는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체력 점검이다. 목회는 운동량이 적어도 적당한 체력이면 할 수 있다. 이중직의 현장은 적당한 체력으로 한계가 있다. 내가 아는 목사가 물류 회사에서 하루에 12시간씩 일한다. 엄청나게 체력이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가 한 말이 있다. 내가 왜 이럴까? 노래가 생각이 났단다.
더 열심히 목회를 할 걸
더 열심히 기도를 할 걸
이제는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다 지나간 이야기

세 번째는 자신의 달란트를 점검하는 것이다. 자신의 달란트를 점검하면 달란트에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다. 요즘은 정부에서 배움 카드라는 것을 통하여 얼마든지 일자리를 찾을 수 있고 자신의 소양도 넓힐 수 있다. 이중직을 하고자 하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곳이 너무도 많다. 이중직을 통하여 당신만의 새로운 일터 교회를 만들 수 있다. 이래서 이중직이 멋진 것이다.

네 번째는 자신의 이중직을 통해 사회기여와 자부심을 확인하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자신의 달란트에 맞는 일을 찾아 그 일을 통해서 사회기여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금상첨화 아닌가? 왜 이중직에 대하여 고민을 하는가? 여기 방법이 있지 않은가? 당신만을 위한 이중직이 기다리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당신의 자부심이 넘치는 현장이 준비되어 있다. 그곳을 찾으면 된다. 바로 그곳이 당신의 새로운 목양지이고 새로운 교회이다.

당신을 위한 새로운 목양지 일터 사역 목사이다. 지금 이 시간도 이중직의 일터 리그에서 리그전을 펼치고 있는 모든 목사들을 응원한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고 있다.


20. 이중직을 하여야 하는 상황인가?

이중직의 최고의 가치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토 확장이다. 세상에 소한 새로운 모든 영역에서 영토 확장이다. 무너진 교회의 영토 확장, 잃어버린 성도들을 찾아오는 영토 확장, 교회를 등진 청년들을 찾아오는 영토 확장이 바로 이중직을 통하여 가능하다. 왜! 가나안 성도들, 교회에 중단한 자들이 가장 많이 있는 곳이 노동의 현장이 아닌가? 그곳에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중직을 안 하는 목사가 그곳에 갈수 있는가? 천만에 절대로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중직을 수행하는 당신은 갈 수 있다. 그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아픔이 그들을 보살필 수 있으며, 안아 줄 수 있다. 그리고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이 당신에게 있지 않은가?

둘째 왜 이중직이어야 하는가? 한국 교회의 목사 이미지 실추, 가장 영향력 없는 사람이 목사이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자기들의 리그에만 존재하는 목사들, 세상의 리그에는 절대 관심 없는 목사들, 오로지 정치 권력에만 관심 있는 목사들, 이단 삼단이 춤추도록 도와주고 무속이 날뛰도록 도와주는 목사들, 교회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는 목사들 이것이 오늘의 목사들의 현실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단 삼단이 날뛰어도 한마디 못 하는 권력을 가진 목사들 집단, 하나님은 아시겠지요.
그래서 당신의 이중직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라.
자신을 원망하지 마라.
세상을 원망하지 마라.

전부 다 하나님의 뜻이다. 당신을 통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위함이다. 용기를 가져라. 모세의 용기와 다니엘의 용기가 당신에게 있지 않은가? 그리고 당신을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것이 바로 당신을 통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셋째 이중직은 사람과 성도들에게 존경받는다.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의 존경은 가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중직의 현장은 인간미가 넘쳐나는 곳이다. 넥타이를 풀고 현장으로 가라. 수많은 가나안 성도들이, 세상 속의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넷째 가족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다. 목회자들이 가족으로 존경받는 것은 쉽지 않다. 목회자 자녀들이 자녀가 아니라 원수가 된 것을 자주 보았다. 한국의 초대형 교회 자녀들을 보라. 그들이 어떤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말이다. 물론 잘 된 자녀들도 있다. 하지만 물고기 한 마리가 시궁창을 만들 듯이 이런 작자들이 버젓이 주님의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당신의 이중직을 바라보는 자녀들은 당신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다섯째 건물 중심의 교회는 오래가지 못한다. 당신의 주변 동료 목사, 신학교 동기들을 보라. 혹시 교회 건물 짖고 혼비백산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가? 목사 이중직은 하나님 나라 확장(무형의 교회)을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당신이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의 대형교회를 보라 문을 닫고 있지 않는가? 한국의 몇 대형교회도 이단에 넘어가고 있다.

21. 성도들의 일터 안녕하십니까?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한다. “에클레시아”는 헬라어로 본래 “일반적인 모임” 을 뜻했다. 이 말은 기독교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공동체”라는 뜻으로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 주님의 교회” 등으로 말을 붙여서 종교적인 전문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것이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어떻게 보면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믿음의 과정을 거쳐 교회의 일원이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치고, 성도가라 불리어지는 사람들이 모임 공동체이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였다. 물론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사리사욕에 빠져서 오는 사람도 있고,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오는 사람도 있으며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에 온다. 하지만 교회는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이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교회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성도가 성도로서의 삶을 살도록 양육하고 훈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훈련된 성도는 사회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작금의 교회는 영향력은 고사하고 자기의 앞가림도 못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교회가 영향력이 없다는 것은 바로 교회가 안녕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또한 교회가 안녕하지 못하다는 것은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성도가 건강하지 못하면 교회가 건강할 수 없다. 성도가 건강하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성도에게 주어진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회의 일터에서 하나님이 주신 일을 거룩한 일이라 생각하고 영향력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교회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가나을 향하여 가라는 명령을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깨닫고 어떻게 어디로 갈지를 모르지만, 식솔들을 데리고 가나안을 향하여 떠났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함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첫째는, 당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따름이 필요한 시대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는 성도와 교회는 절대 안녕할 수 없다.
둘째는, 그 부르심에 입각하여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일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일이란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며 천한 것도 아니다. 일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도록 하여야 한다. 아브라함은 가나안까지 가는 길이 험난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갈 바를 모르면서도 나아갈 수 있었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는 소명감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부르시고 각자에게 주신 일을 깨닫는 것이 건강한 교회라 할 수 있다.

셋째는, 하나님이 부르셨고, 부르신 성도에게 일을 주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일터를 각자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일터에서 성도로서의 삶을 가지고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훈련을 하여야 한다. 건강한 교회는 성도들이 주어진 일을 가지고 일터에서 선교사적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도록 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 그럴 때 건강한 교회가 되고 교회가 안녕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도 전도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일터에서만큼은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교회 안의 수많은 성도가 일을 하고 있는 그곳은 선교의 현장이면서 일터 사역의 현장이다. 이제는 한국 교회가 안녕하려면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부르시고 부르신 성도에게 일을 주시고 일을 할 수 일터를 주셨다는 사실을 교육을 통해 깨닫게 하여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교회는 일터를 통해서 부흥의 원년을 맞이할 수 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성도들이 안녕하신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할 때이다. 한국 교회가 현재와 미래에 안녕하려면, 성도들이 일터에서 선교사적 삶을 살도록 훈련하고 양육을 시켜야 한다. 이 일만이 한국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교회부흥의 원년을 맞을 수 있다. 나의 출간 책 “한국교회 안녕하십니까?” 를 참고하면 좋겠다. (교보문고)

나는 성도들의 사업이 성공하여야 한다고 늘 주장한다. 사업하는 성도들을 보면 사고방식 나약하기 그지없다. 하나남께서 맡겨주신 사업에 대하여 성공시키려는 의지가 약하다. 이유는 사업에 대하여 교육이나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사업의 성공방식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의 사업의 현장 즉 일터는 불확실성이 넘치고 불안하다. 그들에게 신앙요육도 필요하지만 사업 교육 즉 비즈니스 교육이 필요하다.


22. 성공하는 비즈니스 무엇이 다른가?

나는 한국과 세계를 대상으로 비즈니스 하면서 성공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하는 기업을 수없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다른 점이 있었다. 무언가 남다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집중적으로 하는 일을 보면서 성공한 사람은 그들만의 사고방식이 있고, 고집과 열정 그리고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모습을 보았다. 한국의 문화에서 보지 못하는 여러 요소를 보았다. 한국의 기업들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것, 다시 말하면 자산을 절대 타인이 아무리 똑똑하다 할지라도 물려주지 않는다. 이유는 언젠가는 배반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배반에 대한 회의가 크다는 것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경영 능력과 비즈니스 능력이 없는데도 자식한테 물려주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 사업이 망해도 부자는 3년은 먹고 산다고 하는 것처럼, 망해도 자식이 망하면 서운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타인으로 인해서 망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로 인해 한국의 기업은 국민의 신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창업자의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는 여건도 없다.
인재 양성 창업자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양성해도 하나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크다. 일본 기업가들은 사업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자기의 기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2세이든지 기업에서 성장한 인재이든지 상관없이 기업을 이양한다. 이러한 모습은 선진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기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재적소에 인재를 양성하여 배치하는 것이다.
인재의 양성이 중요한 이유는 회사의 맥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데서 수혈해서 쓰는 인재보다 더 충성스럽고 헌신적이다. 인재를 양성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충성도라고 본다. 한 사람에 대한 일편단심의 마음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 찾기 쉽지 않지만, 위대한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재를 키우는 일이다.

지도자의 헌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선발부터 인재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투자가 되어야 하고,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 인재양성은 포효하는 사자를 키우는 것과 같다. 언젠가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덤벼들 것이다. 양성하는 인재들에게 헌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헌신하는 인재, 그리고 두 번째로 사람에게 헌신하고,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가는 지도자를 키울 필요가 있다.

기업 성장의 비밀은 인재가 얼마나 많이 있느냐에 따라 비례한다. 인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위대한 기업을 만들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충성스럽게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상관에게 충성을 다하고,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헌신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공 지향적인 문화 어떤 회사는 가보면 움직이는 것 같은데 전혀 활기가 없다. 어떤 회사는 활기가 넘치고 일하는 의욕들이 보인다. 왜 그런 일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회사의 문화 형성에 따른 것이다. 기업의 문화를 만드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대기업이든 소기업이든 자영업이든 상관없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일하는 모습의 기업문화가 만들어질 때 기업의 문화는 배타적이지 않다. 하지만 기업의 문화가 순리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배타적이 되고, 일은 하지만 능률적이지 못하다.

수평으로 조직 문화 기업은 상하 복종의 관계에서 이제는 수평으로 조직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수평 조직의 문화는 기업의 칸막이를 없애고,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융합하는 모습이 만들어질 때 성공 지향적인 문화 속에서 위대한 기업을 만들 수 있다. 성공 지향적인 문화는 기업이 추구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인데, 기업의 비전을 성취시키는 문화가 바로 융합 지향적인 문화이다.

유연한 수평 구조 지금의 시대는 직원들의 개개인의 사고방식도 다양하고, 추구하는 바도 다양하다. 이 다양한 직원들의 구조를 단순히 소유주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려고 무리하게 추구한다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 것이다. 기업의 구조를 유연한 수평 구조로 만들면,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가 생성되고,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생산력과 직결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치가 회사의 문화를 만들고, 문화는 고객과 사회에 영향을 주게 된다. 유연한 수평 구조는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구조로서, 명령의 체계가 아니라 기업의 비전을 향하여 일을 추구하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고객을 만족시키는 프로그램 기업의 최고의 가치는 고객이다. 그러므로 고객은 어떠한 경우에도 존경을 받아야 하고, 고객을 통해서 회사의 가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기업은 고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있다. 물론 대기업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여력이 있기 때문에 고객 서비스 센터를 통해서 고객의 가치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소기업과 일인 기업은 그런 여력이 없더라도 고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못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사업을 해오면서 고객 관리는 주로 메일로 한다. 고객의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월 2회 메일링을 한다. 나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제품에 대한 소식과 고객을 잘 관리하려면 다음과 같이 하면 된다.
첫째, 정직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둘째, 고객에게 늘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
셋째, 고객과의 인간관계를 중시하여야 한다.
넷째, 고객에게 향한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고객에게 가치를 높여주어야 한다.
나의 진정성이 고객에게 전달될 때 고객은 나의 진정성을 고객의 고귀한 가치로 여기게 된다.

직원의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기 어떤 회사는 직원들에게 회사의 수익을 돌려주는 모습을 보았다. 팍팍한 기업문화에서 훈훈하고 마음에 폭포수 같은 단비를 주는 것 같다. 직원이 소중한 것처럼 직원의 가족도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좋겠다. 나는 내 회사의 직원들과 함께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선이라고 늘 생각했다. 수시로 직원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관계를 만들어 갔다.

내가 직원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이유는 가정의 형편과 상황을 이해하고자 함이고, 직원의 가족도 회사의 일원이라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하였다. 직원의 가정이 평안할 때 직원의 근무 태도도 좋아지고, 회사에 충성도가 높아졌다. 가정에 각종의 우환이 겹치면 직원의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가정에 가 있는 상태이므로 근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직원들의 가정까지 배려하고 생각하는 기업, 기업의 지도자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 이런 프로그램은 엄청나게 예산을 투입하여서 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경영에 포함하여 직원의 가족도 회사의 경영 콘텐츠에 넣어서 관리하는 것이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로마서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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Дэлхийн Интернэт Номлолын Нийгэмлэг (SWIM) нь 1996 онд байгуулагдсан номлогчийн байгууллага бөгөөд 20 гаруй жилийн турш интернет болон мэдээллийн технологийн тусламжтайгаар дэлхийн номлолд хувь нэмрээ оруулсаар ирсэ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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