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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스 앨런 (Horace N. Allen)
한국 최초의 개신교 의료 선교사이자 외교관으로,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을 설립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조선의 문을 연 의사 외교관, 호러스 앨런: 메스로 개척한 선교의 길
서론: "신의(神醫)가 나타났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의 피비린내 나는 혼돈 속에서, 칼에 맞아 죽어가던 수구파의 거물 민영익이 극적으로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열두 명의 한의사가 모두 포기했던 그의 목숨을 살린 것은, 조선에 들어온 지 불과 석 달밖에 되지 않은 푸른 눈의 젊은 서양 의사였다. 그의 이름은 호러스 뉴턴 앨런. 이 극적인 사건은, 굳게 닫혀 있던 조선의 문을 열고 서양 의학과 기독교 선교의 물꼬를 튼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호러스 앨런은 한국 땅을 밟은 최초의 개신교 '상주' 선교사였다. 그는 전통적인 선교사와는 매우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설교단이 아닌 수술실에서, 성경이 아닌 메스를 들고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고종 황제의 주치의이자 외교 고문으로서, 선교사들의 활동을 보호하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하여 근대 의료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동시에, 선교사의 정체성과 외교관으로서의 정치적 야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복합적인 인물의 초상이기도 하다. 본 글은 이처럼 한국 근대사와 선교 역사의 첫 장을 연 호러스 앨런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갑신정변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제중원의 설립과 그의 선교사-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공과(功過)에 대한 엇갈린 평가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갑신정변의 칼날, 기회의 문을 열다
1858년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난 호러스 앨런은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회 파송을 받아 1883년 중국 상하이에서 의료 선교사로 첫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더 굳게 닫힌 땅, 조선을 향하고 있었다.
1884년 9월, 그는 마침내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의 의사라는 신분으로 제물포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의 종교 활동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선교사의 신분을 감추고 의사로서 활동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기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그가 도착한 지 불과 석 달 만인 12월 4일,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개화파에 반대하던 수구파의 핵심 인물이자 명성황후의 조카였던 민영익이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당대 최고의 한의사들이 모두 치료를 포기한 상황에서, 한 관리가 "서양 의사가 용하다더라"며 앨런을 다급하게 불러들였다.
앨런은 침착하게 서양 외과술로 민영익의 상처를 봉합하고 치료했다.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민영익이 기적적으로 회복하자, 고종 황제와 조정은 서양 의술의 놀라운 효과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신의(神醫)' 앨런은 하루아침에 왕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다.
본론 2: 제중원 설립과 선교의 다리
민영익의 치료를 계기로, 앨런은 고종 황제에게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을 건의했다. 그의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인 고종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885년 4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 문을 열었다. 광혜원은 곧 **'제중원(濟衆院, 대중을 구제하는 집)'**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앨런은 초대 원장이 되었다.
의료를 통한 '문 열기' 전략
제중원은 단순한 병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앨런에게 굳게 닫힌 조선 사회에 복음의 문을 여는 '쐐기'였다.
신뢰 획득: 그는 인종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환자를 평등하게 치료함으로써, 서양인과 기독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뿌리 깊은 편견과 적대감을 허물었다.
선교의 교두보: 제중원은 이후 도착하는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같은 다른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인들과 접촉하며,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안전한 베이스캠프 역할을 했다. 앨런은 제중원의 의료 활동을 돕는 조건으로, 언더우드가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도록 주선하는 등, 의료를 통해 교육과 복음 전도의 길을 열었다.
제중원은 이후 에비슨(O. R. Avison)과 같은 후배 의료 선교사들에게 인계되어, 오늘날 연세대학교 의료원의 모태가 되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본론 3: 선교사와 외교관 사이의 갈등
1887년, 앨런은 선교사직을 공식적으로 사임하고,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이 되어 본격적인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1897년 공사(公使)로 승진하여, 1905년까지 약 20년간 조선의 외교 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고종 황제의 가장 신뢰받는 외교 고문으로서, 러시아와 일본 등 열강의 위협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한국의 철도, 광산 개발 등 이권을 미국 기업들에게 넘겨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교사에서 외교관으로 변신한 그의 삶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동료 선교사들은 그가 복음 전파라는 본래의 사명을 버리고, 세속적인 정치 권력과 부를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그의 후반기 삶은, 조선을 돕고자 했던 순수한 동기와, 미국의 국익을 대변해야 하는 외교관으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하는 모습이었다.
결론: 메스로 문을 연 논쟁적 개척자
1905년 외교관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돌아간 호러스 앨런은 1932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산은 그가 남긴 다른 어떤 선교사와도 다른,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분명 한국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연 '최초의 인물'이었다. 갑신정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서양 의술과 기독교 선교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는 결정적인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가 없었다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사역은 훨씬 더 늦고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선교사의 사명이 세속적인 권력과 만났을 때 겪게 되는 위험과 유혹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선교와 미국의 국익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호러스 앨런은 설교단이 아닌 수술대 앞에서, 성경이 아닌 메스를 들고 한국 선교의 첫 장을 열었다. 비록 그의 길은 논란으로 가득했지만, 그가 찢겨진 상처를 꿰매고 새로운 문을 열었던 최초의 개척자였다는 사실은 한국 역사 속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