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한국 최초의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새문안교회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초석을 놓은 거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교육과 복음으로 민족의 미래를 열다
서론: 부활절 아침, 제물포에 닿은 첫걸음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아직 '은둔의 왕국'이라 불리며 굳게 닫혀 있던 조선의 제물포 항구(현재의 인천)에 26세의 한 젊은 미국인 선교사가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이름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같은 날 도착한 그는, 이 땅에 상주하게 된 최초의 장로교 목사 선교사였다. 그의 첫 기도는 "지금은 캄캄한 밤이나, 곧 동이 트게 될 것을 믿습니다"였다. 이 기도는 그의 평생의 사역을 통해, 그리고 그가 뿌린 씨앗 위에 세워진 한국 교회의 역사를 통해 놀랍도록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언더우드는 단순히 복음을 전한 수많은 선교사 중 한 명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 개신교의 거의 모든 영역에 최초의 주춧돌을 놓은 '건축가'였다. 그는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한 교회 개척자였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위대한 교육가였으며, 한영사전을 편찬하고 성경을 번역한 선구적인 언어학자였다.
그의 사역은 '총체적 선교'의 가장 위대한 모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개인의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교육과 출판, 사회 계몽을 통해 민족 전체의 미래를 밝히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는 서양의 것을 일방적으로 이식하는 대신, 한국인 스스로가 이끌어가는 자립적인 교회를 세우고자 평생을 헌신했다. 본 글은 이처럼 한국 근대사와 기독교 역사에 지울 수 없는 거대한 족적을 남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를 미지의 땅 조선으로 이끈 소명의 과정을 살펴보고, 교회 개척과 교육, 그리고 문서 사역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선구적인 활동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헌신이 오늘날의 한국 교회와 사회에 어떤 깊고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가든지 보내든지" - 은둔의 왕국을 향한 부르심
언더우드의 한국을 향한 부르심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계 선교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청년의 결단과 한국을 향한 방향 전환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언더우드는 뉴욕 대학교와 뉴브런즈윅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목회자의 길을 준비했다. 그는 신학교 시절부터 해외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든지, 보내든지(Go, or send) 해야 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동료 학생들의 선교적 헌신을 촉구했다.
원래 그는 인도로 파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884년, 일본에서 활동하던 이수정(李樹廷)이 미국 교회에 보낸 한 통의 편지가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편지에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있는 수백만 명의 조선인들을 위해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간절한 호소가 담겨 있었다. 이 편지를 읽은 언더우드는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미지의 땅, '은둔의 왕국' 조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자리임을 확신하고, 그의 목적지를 한국으로 바꾸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깊은 상징성을 지녔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던 땅에 부활의 생명을 전하는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의 종교 활동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에, 그의 첫 사역은 조용하고 신중하게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본론 2: 복음의 씨앗을 심다 - 교회 개척, 교육, 번역
언더우드의 사역은 어느 한 분야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교회, 학교, 출판이라는 세 개의 큰 축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 전체를 변혁시키는 거대한 그림을 그렸다.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 새문안교회
언더우드는 선교 초기, 알렌 선교사가 설립한 왕립병원 제중원(濟衆院)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며 교사로 활동했다. 이는 그가 합법적으로 체류하며 사람들과 신뢰를 쌓고,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887년 9월 27일, 14명의 한국인 신자들과 함께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정동교회(새문안교회의 전신)'를 설립했다. 이는 선교사가 담임하는 교회가 아닌, 한국인 장로를 세워 당회를 조직한 자치적인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Nevius Method)'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는 선교사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대신, 현지인 스스로 복음을 전하고(자전), 스스로 교회를 다스리며(자치), 스스로 재정을 책임지는(자립)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이었다. 그는 서울에만 머무르지 않고, 조랑말을 타거나 걸어서 평안도, 황해도 등 전국의 외딴 마을까지 찾아다니는 '순회 전도(Itinerant Evangelism)'에 힘썼다. 그는 각 마을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 그룹'을 조직한 뒤, 그 그룹을 이끌 현지인 지도자(조사, helper)를 훈련시키는 방식으로 수많은 자생적인 교회가 세워지는 기틀을 마련했다.
민족의 미래를 위한 투자, 교육 사업
언더우드는 복음 전도만큼이나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미신이 아닌, 근대 학문과 이성과 조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기독교 교육을 통해 민족을 이끌어갈 미래의 지도자들을 양성하고자 했다.
그는 1886년, 한 명의 학생으로 '고아 학당'을 시작했다. 이 작은 학교는 훗날 경신학교(儆新學校)로 발전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러나 그의 교육에 대한 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도 서구의 대학과 같은 고등 교육 기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수차례 미국을 방문하여 기금을 모금했고, 마침내 1915년 YMCA와 협력하여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의 문을 열었다. 이 대학이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 사학 중 하나인 연세대학교의 전신, 연희전문학교이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서 있는 그의 동상은, 교육을 통해 민족의 미래를 밝히고자 했던 그의 위대한 헌신을 기리고 있다.
말씀의 기초를 놓다: 번역과 출판
언더우드는 한국 교회가 든든히 서기 위해서는 한국인들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과 신앙 서적이 필수적임을 깊이 인식했다. 그는 뛰어난 언어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성경 번역과 출판 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성경 번역: 그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번역위원회'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한국 개신교 최초의 공인역 성경인 『신약젼셔』(1900년)와 『구약젼셔』(1911년)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전 및 문법서 편찬: 그는 1890년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한영사전인 『한영자전』과 영문법서 『한어문법』을 출판했다. 이는 후배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데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의 문법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학문적 업적이었다.
문서 선교: 그는 '조선성교서회(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를 창립하고, 한국 최초의 기독교 주간 신문인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하는 등, 인쇄 매체를 통해 복음과 근대 지식이 널리 보급되는 길을 열었다.
결론: 한국 땅에 묻힌 거인의 유산
1916년, 과로와 오랜 풍토병으로 건강이 악화된 언더우드는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그가 평생을 사랑했던 땅,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유산은 한국 사회와 교회의 모든 영역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는 교회 개척자, 교육가, 번역가, 사회운동가 등 한 사람이 감당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다방면에 걸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가 세운 새문안교회는 '한국 교회의 어머니'가 되었고, 그가 설립한 연희전문학교는 연세대학교로 성장하여 수많은 민족의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그가 세운 건물이나 기관을 넘어, 그가 심어준 '자립 정신'에 있다. 그는 한국인들을 수동적인 선교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교회의 주인이자 복음의 주체로 세우고자 평생을 헌신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선교 대국 중 하나로 성장한 한국 교회의 저력은, 바로 언더우드와 같은 선구자들이 놓아준 '자립 교회'라는 튼튼한 주춧돌 위에 서 있다. 그는 "가든지 보내든지"라는 자신의 좌우명을 온몸으로 살아냈으며, 마침내 자신의 몸을 한국 땅에 묻음으로써 한국을 향한 그의 사랑을 영원히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