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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헨리 마틴 (Henry Martyn)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성경 번역 사역에 힘쓴 학자 선교사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소진된 불꽃, 헨리 마틴: 짧은 생, 영원한 헌신
서론: "나를 소진시키소서"
"주여, 제가 주님을 위해 완전히 소진되게 하소서(Let me burn out for God)." 이 짧은 기도문은 19세기 초, 혜성처럼 나타나 불꽃처럼 살다 간 한 젊은 선교사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외침이었다. 그의 이름은 헨리 마틴. 그는 광활한 아프리카를 탐험한 데이비드 리빙스턴도 아니었고, 거대한 선교 단체를 조직한 허드슨 테일러도 아니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최고의 지성이었으며, 명예로운 학자의 길을 눈앞에 두고도 그것을 모두 버린 채 낯선 땅 인도와 페르시아로 향했던 '학자 순교자'였다.

그의 삶은 31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 속에는 최고의 학문적 성취, 이룰 수 없었던 애절한 사랑, 고독한 번역 사역, 그리고 이역만리에서의 비극적인 죽음이 모두 담겨 있다. 그가 직접 세례를 준 개종자는 거의 없었고, 그가 세운 교회나 기관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가 되어, 이후 19세기 선교의 황금기에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헨리 마틴의 이야기는 가시적인 성공이나 성취로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보여준다. 그의 위대함은 그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했는가'에 있으며, 그의 영향력은 그의 사역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한 완전한 헌신의 순수성에 있다. 본 글은 이처럼 짧지만 강렬했던 '하나님을 위한 불꽃' 헨리 마틴의 생애를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케임브리지 최고의 별이었던 그가 어떻게 십자가의 빛에 사로잡혀 선교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 그 소명의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인도와 페르시아에서의 고독한 성경 번역 사역과 이슬람 학자들과의 치열한 변증을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터키의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그의 죽음이 어떻게 한 세대의 영혼을 깨우는 강력한 설교가 되었는지 그 유산을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케임브리지의 별, 십자가의 빛을 만나다
헨리 마틴의 헌신이 더욱 빛나는 이유는 그가 포기한 것들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너무나 찬란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영예, 시니어 랭글러
헨리 마틴은 1781년 영국 콘월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비범한 지적 재능을 보였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하여 수학을 전공했다. 1801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생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학문적 영예인 '시니어 랭글러(Senior Wrangler)', 즉 수학과 수석 졸업생의 자리에 올랐다. 이는 그의 앞에 탄탄대로와 같은 학자로서의 성공적인 미래가 보장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는 펠로우로 선출되어 대학에 남아 연구와 강의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그의 내면에서는 깊은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원래 명목상의 신앙인에 불과했던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케임브리지 홀리 트리니티 교회의 복음주의 지도자였던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 목사의 깊은 영향을 받으며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지적 성취가 영원한 가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두 권의 책, 인생을 바꾸다
그의 삶의 방향을 선교로 이끈 것은 두 권의 책이었다. 첫 번째는 윌리엄 캐리의 인도 사역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는 캐리의 헌신적인 삶에 큰 감동을 받으며, 자신 역시 그와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소명을 느끼기 시작했다.

두 번째 책은 그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것은 바로 북미 인디언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의 일기였다. 브레이너드는 극심한 고독과 질병, 영적 침체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었다. 마틴은 브레이너드의 고독한 투쟁과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 속에서 자신의 영적 이상을 발견했다. 그는 브레이너드처럼, 짧고 강렬하게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소진되는 삶을 갈망하게 되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희생
선교사로서의 결단은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희생을 요구했다. 바로 사랑하는 여인 리디아 그렌펠(Lydia Grenfell)과의 이별이었다. 그는 리디아를 깊이 사랑했고 청혼했지만, 그녀는 영국을 떠나 낯선 인도로 함께 가 달라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몇 년간 편지를 통해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지만, 결국 혼자 인도로 떠나야만 했다. 세상의 모든 명예와 안락한 미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을 포기한 그의 결정은,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전적인 헌신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본론 2: 인도와 페르시아에서의 고독한 투쟁
1805년, 헨리 마틴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군목(chaplain) 신분으로 인도를 향한 배에 올랐다. 군목이라는 직책은 그가 인도에 합법적으로 체류하며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는 신분적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힌두스탄의 번역가
인도에 도착한 그는 군목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자신의 본래 사명이었던 성경 번역 작업에 즉시 착수했다. 그는 천재적인 언어학적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놀라운 속도로 현지 언어들을 습득했다. 그는 인도 북부와 무굴 제국의 공용어였던 힌두스타니어(오늘날의 우르두어)로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또한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힌두스타니어로 번역했으며,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성경 번역을 감독하고 교정하는 일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의 번역 사역은 고독한 서재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거리로 나가 가난한 이들에게 설교하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이교 사원 앞에서 현지인들과 격렬한 종교 토론을 벌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변증가
그가 번역한 힌두스타니어 신약성경에 대해 일부에서 비판이 제기되자, 마틴은 더 완벽한 번역을 위해 페르시아어의 본고장인 페르시아(오늘날의 이란)로 직접 가기로 결심한다. 1811년, 이미 결핵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그는 페르시아의 시라즈(Shiraz)로 향했다.

시라즈에서의 1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치열한 지적, 영적 전투의 시간이었다. 그는 페르시아어 신약성경 번역을 완성하는 동시에, 이슬람 최고의 학자(물라, Mullah)들과 끊임없이 토론을 벌였다. 그는 코란을 아랍어 원어로 읽고 이슬람 신학을 깊이 파고들어,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리를 논리적으로 변증했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논리 정연한 변증 앞에 페르시아의 학자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페르시아의 샤(왕)에게 자신이 번역한 페르시아어 신약성경을 헌정하기도 했다.

본론 3: "하나님을 위해 소진되다" - 순교자적 삶과 유산
페르시아에서의 고된 사역으로 그의 건강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는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고, 완성된 번역본들을 전달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의 마음 한편에는 어쩌면 리디아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희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토카트에서의 외로운 죽음
1812년, 그는 페르시아를 떠나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고난의 여정을 시작했다. 극심한 열병과 탈진 속에서 그의 여정은 점점 한계에 부딪혔다. 마침내 1812년 10월 16일, 그는 오스만 제국의 외딴 도시 토카트(Tocat)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의 마지막 순간은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고독했다.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가족도, 동료 선교사도 없었다. 그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낯선 땅에서 이름 모를 이들 곁에 묻혔다. 그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남아 있다. "나는 생각했다. '오, 땅이 쉼을 줄 수 없을 때, 하늘의 안식이 있도다!'... 나는 내 주님과 함께 있다. 그분의 임재가 내 영혼을 지지해주신다."

짧은 생, 영원한 영향력
헨리 마틴의 삶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실패한 삶처럼 보일 수 있다. 그는 부와 명예를 얻지도, 사랑을 이루지도, 장수하지도 못했다. 그가 직접 세례를 준 개종자도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첫째, 그의 번역은 영원한 유산이 되었다. 그가 피와 땀으로 완성한 힌두스타니어와 페르시아어 성경은 이후 수십 년간 해당 지역의 모든 선교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수백만 명의 영혼이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둘째, 그의 삶은 19세기 선교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일기와 서신들이 출판되자 영국과 미국 전역의 젊은이들은 그의 순교자적인 삶에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케임브리지 최고의 지성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수많은 엘리트 청년들이 안락한 미래를 포기하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만드는 강력한 기폭제가 되었다. 그의 삶 자체가 그 어떤 설교보다 더 큰 설교가 된 것이다.

셋째, 그는 경건의 모델이 되었다. 그의 일기는 그의 치열한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죄성과 싸우고, 깊은 외로움과 우울감에 시달렸으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갈망했다. 그의 솔직하고 경건한 자기 성찰은 이후 세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적 울림을 주며, 경건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결론: 가장 가치 있는 삶의 척도
헨리 마틴의 삶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과 같았다. 짧았지만, 그 누구보다 강렬한 빛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소진되게 하소서"라는 자신의 기도를 온몸으로 살아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문자 그대로 들어주셨다.

그의 위대함은 그가 이룬 업적의 크기에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그가 바친 희생의 순수성과 전적인 헌신에 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것, 즉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 보장된 미래, 인간적인 사랑, 그리고 생명 그 자체를 아낌없이 드렸다.

헨리 마틴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성공적인 삶'의 척도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묻는다. 그것이 세상적인 성취와 안락함, 그리고 긴 수명이라면 그의 삶은 실패작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깊이와 그분을 위해 자신을 얼마나 온전히 내어드렸는가에 있다면, 그의 31년의 짧은 생애는 그 어떤 긴 삶보다도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삶이었다. 그는 '불타는 학자(scholar on fire)'라는 별명처럼, 자신의 지성과 마음, 영혼과 육신을 온전히 태워 드린 거룩한 번제물이었다. 그리고 그 희생의 향기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며 가장 고귀한 헌신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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