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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플로렌스 영 (Florence Young)

호주와 솔로몬 제도에서 사역하며 원주민들을 위한 교육과 복음 전도에 힘썼습니다.

호주의 사탕수수밭에서 솔로몬 제도의 사도로: 플로렌스 영의 역(逆)선교 이야기
서론: 문 앞에서 시작된 선교
19세기 후반 호주의 퀸즐랜드, 황금빛 사탕수수밭의 풍요로운 풍경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블랙버딩(blackbirding)'이라 불리는 악랄한 노동 착취 시스템을 통해 남태평양의 솔로몬 제도와 뉴헤브리디스 제도에서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수만 명의 멜라네시아 원주민, '카나카(Kanakas)'들이 노예와 다름없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착취의 현장 한복판, 부유한 사탕수수 농장주의 누이였던 한 여성이 그들의 영혼을 향한 거룩한 부담감을 품고 일어섰다. 그녀의 이름은 플로렌스 영. 그녀는 머나먼 이국땅이 아닌, 바로 자기 집 뒷마당과도 같았던 사탕수수밭에서 선교사로서의 첫걸음을 떼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사역은 호주 정부의 인종차별적인 '백호주 의(White Australia Policy)'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오히려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훈련된 원주민 개종자들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역(逆)선교'라는 놀라운 발상으로 전환되었다. 그녀의 삶은 이처럼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시작하여, 결국 남태평양에 가장 크고 역동적인 토착 교회를 탄생시킨 위대한 헌신과 지혜의 서사이다. 본 글은 이처럼 독특하고 선구적인 삶을 살았던 플로렌스 영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집 앞에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추방의 위기를 '역선교'의 기회로 전환시킨 그녀의 놀라운 비전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세운 남태평양복음선교회(SSEM)가 어떻게 솔로몬 제도의 역사를 바꾸었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사탕수수밭의 주일학교 - 예기치 못한 선교지
플로렌스 영은 1856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호주 퀸즐랜드 번다버그(Bundaberg)의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D. L. 무디와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문 앞의 '미전도 종족'
그녀는 해외 선교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녀의 눈을 먼 곳이 아닌, 바로 그녀의 집 주변으로 돌리셨다. 그녀의 오빠들이 운영하던 사탕수수 농장을 비롯한 퀸즐랜드의 모든 농장에는, '블랙버딩'을 통해 끌려온 수천 명의 멜라네시아 원주민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 아무런 영적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플로렌스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문 앞의 미전도 종족'임을 깨달았다.

1886년, 그녀는 자신의 오빠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작은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이것이 '퀸즐랜드 카나카 선교회(Queensland Kanaka Mission, QKM)'의 시작이었다.

읽고 쓰는 법, 그리고 복음
그녀의 접근 방식은 매우 단순하고 실질적이었다.

언어 습득: 그녀는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피진(pidgin) 영어를 배우고, 그들의 다양한 부족 언어에 대한 단어집을 만들었다.

문자 교육: 그녀는 성경 구절이 적힌 커다란 그림 차트를 이용하여, 글을 모르는 그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인격적인 사랑: 무엇보다, 그녀는 그들을 단순한 노동력이 아닌, 존엄한 인격체로 대하며 진심 어린 사랑과 우정을 나누었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수많은 원주민 노동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그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술과 도박, 폭력으로 얼룩졌던 노동자 막사는 찬송과 기도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본론 2: 추방의 위기, 역선교의 기회
20여 년간의 헌신으로 퀸즐랜드 카나카 선교회는 수천 명의 개종자를 둔 성공적인 사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호주 정부의 새로운 정책은 이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위기를 가져왔다.

백호주 의와 강제 추방
1901년, 호주 연방 정부는 악명 높은 '백호주 의(White Australia Policy)'를 시행했다. 이는 백인이 아닌 이민을 제한하고, 기존의 유색인종 노동자들을 추방하는 인종차별적인 정책이었다. 이 정책에 따라, 퀸즐랜드의 모든 태평양 섬 원주민 노동자들은 1906년까지 자신들의 고향 섬으로 강제 송환되어야만 했다.

플로렌스에게 이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20년간의 피땀 어린 사역의 열매였던 수천 명의 신앙이 어린 개종자들이, 아무런 영적 돌봄도 없이 다시 식인 풍습과 부족 전쟁이 남아있는 이교의 땅으로 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역은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비전
그러나 플로렌스는 절망 속에서 놀라운 비전을 보았다. 그녀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전략적 후퇴'로 해석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수천 명의 훈련된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시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그들을 '원주민 선교사'로 사용하여 그들의 동족을 복음화하시려는 계획이 아닐까?"

그녀는 이 추방의 위기를, 서양 선교사가 아닌 원주민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역(逆)선교'의 기회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1904년, 그녀는 이 귀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원하고, 그들을 통해 솔로몬 제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새로운 선교 단체, **'남태평양복음선교회(South Sea Evangelical Mission, SSEM)'**를 창설했다.

본론 3: '복음호(Evangel)'를 타고 - 솔로몬 제도에 교회를 세우다
플로렌스 영은 단지 뒤에서 후원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행동에 나섰다.

50세의 나이, 새로운 시작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복음호(Evangel)'라는 이름의 작은 선교선을 구입했다. 그리고 1905년, 50세의 나이에 이 배를 타고 직접 솔로몬 제도로 향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호주에서 돌아온 원주민 전도사들과 재회하여 그들의 사역을 돕고 격려했다.

원주민이 이끄는 교회
SSEM의 선교 전략은 플로렌스 영의 비전을 그대로 반영했다.

원주민 중심: 선교의 주체는 서양 선교사가 아닌, '피터 암부오파(Peter Ambuofa)'와 같은 현지인 전도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어떤 서양 선교사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동족에게 복음을 전했다.

서양 선교사의 역할: 플로렌스와 다른 서양 선교사들은 '지도자'가 아닌, '조력자(helper)'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성경 교육과 제자 훈련을 통해 현지인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선교선을 통해 교통과 보급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이러한 '원주민 중심'의 전략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복음은 솔로몬 제도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플로렌스가 시작한 SSEM은 훗날 솔로몬 제도의 가장 큰 개신교 교단 중 하나인 **'남태평양복음교회(South Sea Evangelical Church, SSEC)'**로 성장하게 된다.

결론: 자신의 집 앞에서 시작된 세계 선교
1926년까지 솔로몬 제도와 호주를 오가며 사역했던 플로렌스 영은 이후 캐나다와 뉴사우스웨일스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7년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은 선교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선교지는 반드시 바다 건너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바로 우리 집 문 앞에, 우리 사회의 가장 소외된 이웃 가운데 있을 수 있음을 그녀는 보여주었다.

또한 그녀의 유산은 '원주민 리더십'의 중요성을 가장 강력하게 증거한다. 그녀는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서구 교회의 복제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스스로 일어서서 자신들의 교회를 세우도록 돕고, 선교사는 기꺼이 뒤로 물러나는 것임을 깊이 이해했던 시대를 앞서간 전략가였다.

플로렌스 영의 이야기는 자신의 집 앞에서 마주한 사회적 불의와 영적 필요에 눈을 감지 않았던 한 여성의 작은 순종에서 시작되었다. 그 작은 순종은 퀸즐랜드의 사탕수수밭을 거쳐, 정치적 위기의 파도를 넘어, 마침내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운명을 바꾸는 거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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