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프랑수아 콜리야르 (François Coillard)
프랑스 개신교 선교사로, 아프리카 남부 잠베지 강 유역에서 로지족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잠베지강의 사도, 프랑수아 콜리야르: 로지 제국의 문을 연 프랑스 선교사
서론: 잠베지강의 물결을 따라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미지의 아프리카 대륙을 탐험하며 잠베지(Zambezi)강의 거대한 물줄기를 세상에 알렸다면, 프랑수아 콜리야르는 그 물결을 따라 아프리카의 심장부로 들어가, 한 왕국의 마음을 얻고 교회의 영구적인 터를 닦은 선교사였다. 그는 19세기 선교의 황금기에, 영국과 미국이 아닌 프랑스 개신교(위그노)의 후예로서 아프리카 남부 내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위대한 개척자였다.
그의 사역지는 오늘날의 잠비아(Zambia) 지역에 위치했던 강력하지만 고립된 왕국, 바로첼란드(Barotseland), 즉 로지(Lozi) 제국이었다. 그의 선교는 단순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넘어, 의심 많고 교활한 왕의 마음을 얻기 위한 끈질긴 외교적 노력과 인내의 과정이었다. 그는 선교사이자 외교관이었고, 목회자이자 음악 교사였으며, 한 왕국의 문명화 과정에 깊이 관여한 조언자였다.
그의 삶은 화려한 성공보다는 묵묵한 인내와 깊은 고난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첫 번째 선교 시도에서 적으로 오인받아 감옥에 갇히는 실패를 겪었고, 사랑하는 아내를 머나먼 선교지에 묻어야 했으며, 수년간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인 열매가 보이지 않는 깊은 낙심과 싸워야 했다. 본 글은 이처럼 '인내의 사도'였던 프랑수아 콜리야르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아프리카 내륙 깊숙한 곳을 향한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로지 제국의 레와니카 왕과 맺었던 그의 복합적인 관계와, 그 속에서 교회의 기초를 놓아간 그의 지혜로운 사역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잠베지강가에 묻힌 그의 삶이 오늘날 잠비아에 어떤 깊은 유산을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위그노의 후예, 아프리카를 향한 부르심
프랑수아 콜리야르의 불굴의 정신은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온 프랑스 개신교, 즉 위그노(Huguenot)의 영적 유산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1834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 복음주의 선교회(Paris Evangelical Missionary Society, PEMS)에서 훈련을 받고 1857년, 23세의 나이로 남아프리카로 파송되었다. 그의 첫 사역지는 오늘날의 레소토(Lesotho)인 바수톨란드(Basutoland)였다. 그는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사역하며, 현지 언어인 소토(Sotho)어를 완벽하게 익히고,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을 키웠다. 이 시기는 그가 훗날 더 험난한 내륙 선교를 감당하기 위한 귀중한 훈련의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평생의 동역자이자 아내가 될 스코틀랜드 출신의 크리스티나 맥킨토시(Christina Mackintosh)를 만났다.
리빙스턴의 탐험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콜리야르 부부는, 바수톨란드 너머,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북쪽의 잠베지강 유역을 향한 뜨거운 비전을 품게 되었다.
본론 2: 바로첼란드를 향한 고난의 여정
1877년, 콜리야르는 마침내 북쪽을 향한 첫 번째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첫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실패와 새로운 만남
그의 탐험대는 잠베지강으로 가는 길목에서, 당시 그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던 마타벨레(Matabele) 왕국의 로벵굴라(Lobengula) 왕에게 붙잡혔다. 로벵굴라 왕은 그들을 적으로 오인하여 4개월간 억류했다가 추방했다. 콜리야르는 깊은 좌절 속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바로 이 실패의 여정 속에서, 그는 로지 제국에서 온 상인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콜리야르에게 자신들의 왕국으로 와달라고 간청했다. 콜리야르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새로운 길임을 깨달았다.
레와니카 왕과의 운명적인 만남
수년간의 준비 끝에, 1884년 콜리야르 부부는 마침내 로지 제국을 향한 두 번째 여정을 시작했다. 1년이 넘는 험난한 우마차 여행 끝에, 그들은 잠베지강 상류에 위치한 로지 제국의 수도에 도착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로지 제국의 통치자 레와니카(Lewanika) 왕이었다. 레와니카 왕은 강력하지만 불안정한 권력 기반 위에 서 있는, 의심 많고 교활한 군주였다. 그는 남쪽의 마타벨레족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동맹을 찾고 있었고, 콜리야르라는 백인 선교사가 바로 유럽 세력, 특히 영국과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순수한 신앙적 동기가 아닌, 철저히 정치적인 계산으로 콜리야르를 자신의 왕국에 머물도록 허락했다. 콜리야르의 선교는 이처럼 복잡하고 위태로운 정치적 줄타기 속에서 시작되어야 했다.
본론 3: 왕의 마음을 얻다 - 잠베지강의 선교
콜리야르는 레와니카 왕의 속셈을 알면서도, 인내하며 신뢰를 쌓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는 왕에게 복음을 직접적으로 강요하는 대신, 교육과 음악, 그리고 실질적인 도움을 통해 그의 마음을 열고자 했다.
외교관이자 스승으로서의 삶
콜리야르는 레와니카 왕의 비공식적인 조언자이자 외교관 역할을 했다. 그는 왕에게 외부 세계의 소식을 전해주고, 다른 부족 및 유럽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조언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왕궁에 학교를 열어 왕자들과 귀족 자제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글을 배우게 된 레와니카 왕은 콜리야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뛰어난 음악가였던 콜리야르는 또한 찬송가를 선교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했다. 그는 소토어로 번역했던 찬송가들을 로지어로 다시 번역했고, 아내 크리스티나가 연주하는 휴대용 오르간(harmonium)의 선율에 맞추어 사람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아름다운 찬송가의 멜로디는 로지족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고난 속에서 지킨 약속
그의 사역은 순탄치 않았다. 왕은 변덕스러웠고, 전통 신앙을 고수하는 보수파 귀족들과 주술사들의 반대는 거셌다. 무엇보다 1891년, 평생의 동역자였던 아내 크리스티나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그에게 가장 큰 시련이었다. 그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나는 내가 묻힐 자리를 발견했다"고 말하며, 결코 로지 제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아내를 그 땅에 묻은 그의 모습은, 그가 이 땅에 잠시 머무는 이방인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과 운명을 함께하는 진정한 친구임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수년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마침내 로지족 사람들 가운데서 첫 세례 신자가 나왔고, 작은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레와니카 왕 자신은 평생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말년에는 기독교의 가장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결론: 잠베지강에 묻힌 프랑스인, 잠비아의 영적 아버지
1904년, 프랑수아 콜리야르는 70세의 나이로, 47년간의 아프리카 사역을 마감하고 그가 평생을 섬겼던 땅 잠베지강가에 묻혔다. 그의 무덤은 몇 해 전 먼저 잠든 아내 크리스티나의 곁에 마련되었다.
그는 리빙스턴처럼 위대한 지리적 발견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한곳에 끈질기게 머물며, 한 왕국의 마음을 얻고, 교회의 영구적인 초석을 놓았다. 그는 폭력적인 정복이 아닌, 평화적인 외교와 인내, 그리고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을 통해 복음의 문을 연 위대한 '선교 외교관'이었다.
그의 가장 큰 유산은 그가 세운 교회와 학교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가 처음 복음의 씨앗을 심었던 로지 제국은 오늘날 잠비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고, 그가 세운 작은 교회는 잠비아 연합교회(United Church of Zambia)라는 잠비아 최대의 개신교 교단 중 하나로 성장했다.
프랑수아 콜리야르의 삶은 선교에 있어 '인내'라는 덕목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준다. 그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수년을 기다리고, 실패하고, 상실의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한 왕의 변덕스러운 마음과 한 민족의 깊은 불신 속에서,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인내의 씨앗은, 잠베지강의 물결처럼 잠비아 땅을 적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