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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타만 빈센트 (Chintaman Vinayak Van)
인도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인도 교회의 자립과 부흥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인도 교회의 자립을 꿈꾼 브라만 개종자, 친타만 비나약 반
서론: 서양 선교사들의 그림자 뒤, 숨겨진 거인들
19세기 기독교 선교의 황금기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윌리엄 캐리, 허드슨 테일러, 데이비드 리빙스턴과 같은 위대한 서양 선교사들의 이름을 먼저 떠올린다. 그들의 영웅적인 헌신과 희생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 기독교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서사 속에는 종종 잊히는 또 다른 주역들이 있다. 바로 복음을 받아들인 후, 자신의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현지인 지도자, 즉 원주민 사역자들이다.
친타만 비나약 반은 바로 이 숨겨진 거인들 중 한 명이다. 그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도 기독교 역사, 특히 19세기 마하라슈트라 지역의 교회 역사에서 그는 빼놓을 수 없는 선구자였다. 그는 단순히 서양 선교사들의 조력자가 아니었다. 그는 인도의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Brahmin)의 모든 특권과 지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택했으며, 인도인으로서, 인도인을 위해, 인도인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자립 교회의 선구자였다.
그의 삶은 기독교 신앙이 특정 문화나 인종에 종속된 '서양의 종교'가 아니라, 모든 민족과 계급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진리임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는 서양 선교사들과 인도인 신자들 사이의 다리가 되었고, 그의 존재 자체가 식민주의 시대의 선교가 가졌던 한계를 극복하고 미래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본 글은 이처럼 인도 교회의 자립을 위해 묵묵히 헌신했던 친타만 비나약 반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브라만이라는 최고 엘리트 계급이었던 그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는 급진적인 결단을 내렸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가 인도인 목회자로서 자신의 동족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 그의 사역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삶이 인도 교회의 자립과 성장에 어떤 깊은 초석을 놓았는지 그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브라만의 길을 떠나 그리스도를 만나다
친타만 비나약 반의 개종 이야기는 19세기 인도 사회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특히 브라만 계급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힌두교의 정점, 브라만
19세기 인도 사회는 엄격한 카스트 제도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 정점에는 브라만 계급이 있었다. 그들은 힌두교의 사제이자 학자 계급으로서, 종교 의식을 주관하고 신성한 경전을 해석하는 영적 권위를 독점했다. 그들은 '두 번 태어난 자들'로 불리며 사회적으로 최고의 존경과 특권을 누렸다.
친타만 비나약 반은 1823년경, 바로 이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힌두교의 수호자이자 지식의 계승자로서의 길이 정해져 있었다. 그가 사는 세상에서 힌두교를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 즉 사회적 자살과도 같았다.
비용을 계산한 결단
그의 삶이 바뀐 것은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ABCFM) 소속의 '미국 마라티 선교회' 선교사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아메드나가르(Ahmednagar)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 선교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브라만적 지식과 힌두교 철학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날카롭게 파고들었고, 오랜 지적, 영적 갈등 끝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1843년, 그는 마침내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다. 이 결단은 그가 자신의 삶에서 치러야 할 엄청난 대가를 이미 각오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세례를 받는 순간, 그는 브라만으로서의 모든 지위와 특권을 박탈당했다. 그는 더 이상 신성한 존재가 아닌, '더러운 자(outcast)'가 되었다. 가족들은 그를 의절했고, 친구와 친척들은 그를 저주했으며, 그가 속했던 공동체는 그를 완전히 외면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는 대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본론 2: 인도인을 위한, 인도인에 의한 목회
개종 후, 친타만 비나약 반은 곧바로 새로운 삶의 목적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동족에게 자신이 발견한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현지인 목회자 중 한 명
초기 서양 선교사들은 현지인 개종자들을 조수나 보조 교사 역할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 마라티 선교회는 현지인 지도자 양성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했고, 친타만 비나약 반의 뛰어난 재능과 신실함을 인정했다. 그는 선교회에서 신학 교육을 받은 후, 아메드나가르 지역 최초의 현지인 목사 중 한 명으로 안수받았다.
이는 인도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양 떼를 이끄는 목자가 더 이상 외국인 선교사가 아닌, 그들과 똑같은 언어와 문화, 그리고 아픔을 공유하는 인도인이 된 것이다. 그는 아메드나가르를 중심으로 수많은 마을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고, 여러 교회를 개척하고 섬겼다.
문화의 다리, 복음의 통로
친타만 비나약 반의 사역이 그토록 강력했던 이유는 그가 '내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 선교사들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몇 가지 중요한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언어와 문화에 대한 완벽한 이해였다. 그는 산스크리트어와 마라티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힌두교 경전과 철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덕분에 그는 힌두교 학자(판디트)들과 그들의 논리로 토론하며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할 수 있었다.
둘째, 공감대 형성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외국 종교를 전하는 이방인'이 아니라, '진리를 발견한 동족'으로서 다가갔다. 그는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이해했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복음을 설명했다.
셋째, 살아있는 증거였다. 브라만이라는 최고의 지위를 버린 그의 존재 자체가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설교였다. 사람들은 그의 삶을 통해 기독교가 세상의 그 어떤 특권보다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서양 선교사들과 인도인 신자들 사이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문화의 다리' 역할을 했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인도 문화의 미묘한 뉘앙스를 설명해주었고, 인도인들에게는 서구 신학의 개념을 그들의 문화적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본론 3: 자립 교회의 초석을 놓다
친타만 비나약 반의 궁극적인 유산은 그가 개종시킨 사람의 숫자를 넘어, '인도인을 위한 인도 교회'라는 자립 교회의 비전을 자신의 삶으로 실현했다는 데 있다.
선교 의존성 극복의 모델
19세기 식민주의 시대의 선교는 종종 서양 선교사들의 재정적, 행정적 통제 아래 현지 교회가 의존적인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선교사 의존증(Paternalism)'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현지인들은 주체적인 지도자가 아닌, 수동적인 복음의 수혜자로 여겨지기 쉬웠다.
친타만 비나약 반의 목회는 이러한 구조에 대한 조용한 그러나 강력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인도인 목사로서, 인도인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 나갔다. 그의 유능하고 신실한 목회는 "인도인들은 스스로 교회를 이끌 능력이 없다"는 일부 서양인들의 편견을 깨뜨리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는 인도 교회가 영원히 외국의 원조와 지도력에 의존해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서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복음을 전파하는 성숙한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미래 세대를 위한 영감
비록 그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3자 원리(자립, 자치, 자전)'와 같은 선교 이론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의 삶 자체가 그 원리의 살아있는 구현이었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을 수많은 현지인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었다. 그를 통해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자신의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완전한 인도인으로 거듭나는 길일 수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의 헌신적인 사역은 인도 서부 지역에 견고한 현지인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초석을 놓았고, 이는 20세기 인도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자립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결론: 보이지 않는 거인, 인도 교회의 뿌리
친타만 비나약 반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인물은 아니다. 그는 평생을 아메드나가르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섬겼던 지역의 목회자였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그는 인도 교회의 역사라는 거대한 나무의 보이지 않는 뿌리와 같은 존재이다.
세계 선교의 역사는 위대한 서양 선교사들의 이야기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복음이 진정으로 한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친타만 비나약 반과 같이 그 땅의 흙과 물로 자라난 현지인 지도자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외부에서 온 씨앗이 토착의 나무로 자라나게 하는 결정적인 통로이기 때문이다.
친타만 비나약 반의 삶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가장 위대한 선교적 성공은 때로 가장 이름 없는 자리에서, 가장 진실한 헌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의 이야기는 인도 교회의 살아있는 역사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교회가 자립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데 영감을 주는 영원한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