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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찰스 스터드 (C.T. Studd)

영국의 유명 크리켓 선수였으나 모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중국, 인도, 콩고에서 헌신한 '케임브리지 7인'의 멤버입니다.

영국의 크리켓 영웅, 그리스도의 전사가 되다: C. T. 스터드의 불꽃같은 삶
서론: 가장 위대한 경기, 가장 위대한 희생
19세기 후반, 대영제국의 심장부 런던에서 그의 이름은 전설이었다. 찰스 토마스 스터드, 즉 C. T. 스터드는 당대 최고의 스포츠였던 크리켓의 슈퍼스타였다. 이튼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거친 엘리트이자,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주장이었던 그는 부와 명예, 그리고 대중의 열광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시대의 영웅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그는 리오넬 메시나 마이클 조던과 같은 반열에 있는 스포츠 아이콘이었다.

그런 그가 25세의 나이, 선수로서 최전성기에 있던 어느 날,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미지의 땅 중국으로 떠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그의 결단은 영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무엇이 이 젊은 영웅으로 하여금 보장된 성공과 안락한 미래를 내던지고, 이름 없는 선교사의 험난한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훗날 그는 자신의 결단을 이렇게 요약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그를 위해 드리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C. T. 스터드의 삶은 이 한 문장의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는 '케임브리지 7인'의 일원으로서 중국을 섬겼고,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자마자 한 푼도 남김없이 기부했으며, 50세가 넘은 나이에 다시 아프리카의 심장부로 뛰어들어 새로운 선교회를 개척했다. 그의 신앙은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였으며, 그의 삶은 타협을 모르는 불꽃같은 열정 그 자체였다.

본 글은 크리켓 경기장을 넘어 세 개의 대륙을 자신의 경기장으로 삼았던 이 위대한 '그리스도의 전사'의 삶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영국의 영웅이었던 그가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중국, 인도, 아프리카라는 세 개의 대륙에서 펼쳐진 그의 선교 사역과 그 이면에 담긴 급진적인 희생의 철학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타협 없는 신앙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영국의 영웅, 모든 것을 버리다
C. T. 스터드의 헌신이 그토록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이유는, 그가 버린 것들이 세상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켓의 왕자, 복음을 만나다
C. T. 스터드는 1860년, 인도에서 막대한 부를 쌓은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전형적인 영국의 상류층 자제로, 명문 이튼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학업보다 운동에 더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특히 크리켓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였다.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 이미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발탁되었고, 1882년 호주와의 역사적인 '애시스(The Ashes)' 경기에서 팀을 승리로 이끌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의 삶이 바뀐 것은 1877년, 미국인 부흥사 D. L. 무디(D. L. Moody)가 영국에서 집회를 열었을 때였다.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 스터드가 먼저 회심했고, 이후 아버지의 간절한 권유로 스터드 삼형제 모두가 복음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던 스터드는 다시 크리켓의 명성에 취해 영적으로 침체에 빠졌다. 그러나 1884년, 그의 형 조지가 중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회복되는 사건을 겪으며, 스터드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기로 다시 한번 헌신하게 된다.

'케임브리지 7인': 한 시대의 각성
C. T. 스터드의 새로운 헌신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허드슨 테일러가 이끄는 중국내지선교회(CIM)에 대해 듣게 되었고, 중국의 수많은 영혼을 향한 뜨거운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명예와 경력을 포기하고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의 결단은 혼자가 아니었다. 조정 챔피언이었던 스탠리 스미스, 군인 가문의 엘리트였던 몬태규 보샹 등, 그와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전도유망한 젊은이 6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들 일곱 명, 즉 **'케임브리지 7인(The Cambridge Seven)'**의 헌신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영국 최고의 젊은 엘리트들이 부와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미지의 땅 중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은, 잠자고 있던 영국 교회의 선교적 열정을 일깨우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들은 중국으로 떠나기 전 영국 전역을 순회하며 간증 집회를 열었고, 수많은 대학생들이 그들의 도전에 감동하여 선교사로 헌신했다.

막대한 유산, 남김없는 헌신
스터드의 급진적인 희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5세가 되던 해, 그는 아버지로부터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29,000 파운드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이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기도하던 중,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마태복음 19장 21절 말씀에 부딪혔다.

그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순종하기로 결심했다. 1888년, 동료 선교사였던 프리실라 스튜어트(Priscilla Stewart)와 결혼하던 날, 그는 아내가 될 프리실라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기꺼이 동의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수표를 써서 조지 뮬러, D. L. 무디, 구세군 등 여러 기독교 사역 단체에 자신의 전 재산을 남김없이 기부해버렸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낸 것이다.

본론 2: 세 개의 대륙, 하나의 사명
C. T. 스터드의 선교사로서의 삶은 중국, 인도, 아프리카라는 세 개의 대륙에서 펼쳐졌다. 각 대륙에서 그의 역할은 달랐지만, 그의 불꽃같은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중국 (1885-1894): 개척 선교사
'케임브리지 7인'의 일원으로서 중국에 도착한 스터드는 허드슨 테일러의 지도를 받으며 산시성 등 내륙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중국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헌신했다. 그러나 중국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1894년 아내 프리실라와 네 딸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인도 (1900-1906): 목회자이자 부흥사
영국과 미국에서 요양하며 사역하던 스터드는, 그의 아버지가 부를 축적했던 땅인 인도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다. 1900년, 그는 가족과 함께 인도로 건너가 남부의 오오타카문드(Ootacamund)에 있는 한 영어권 교회의 목회자로 섬겼다. 그의 열정적인 설교와 타협 없는 메시지는 침체에 빠져 있던 교회의 영적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지역 사회에 큰 부흥을 가져왔다.

아프리카 (1910-1931): 불굴의 개척자
6년간의 인도 사역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스터드는 이제 은퇴하여 안락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50세가 되던 1910년,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 하나의 문구를 마주하게 된다. "식인종에게도 선교사가 필요하다(Cannibals need missionaries)." 그는 아프리카의 심장부, 아직 복음이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미전도 종족'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을 느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의 나이와 쇠약한 건강을 이유로 만류했지만,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의사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낫다"며 홀로 아프리카 탐험길에 올랐다. 그는 벨기에령 콩고의 깊은 정글 속으로 들어가, 그곳의 끔찍한 현실을 목격하고 돌아와 **'아프리카 심장부 선교회(Heart of Africa Mission)'**를 창설했다. 건강 문제로 함께 갈 수 없었던 아내 프리실라는 영국에 남아, 기도와 후원으로 그의 가장 강력한 동역자가 되어주었다.

콩고에서의 그의 사역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강렬하고 논쟁적인 시기였다. 그는 "후퇴 없는 전진"을 외치며, 자신과 동료 선교사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붙였다. 그는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여겼고, 오직 십자가의 길만이 선교사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본론 3: "오직 한 번뿐인 인생" - 타협 없는 유산
C. T. 스터드의 모든 사역을 관통하는 하나의 철학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시의 한 구절로 요약된다. "오직 한 번뿐인 인생, 곧 지나가리니,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만 영원하리라(Only one life, 'twill soon be past, Only what's done for Christ will last)."

'전부 아니면 전무'의 신앙
스터드에게 기독교 신앙은 적당한 타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전부를 걸어야 하는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모험이었다. 그는 편안하고 안락한 '소파에 앉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D.C.D.(Don't Care a Damn -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소책자를 통해, 세상의 평판이나 개인의 안위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는 급진적인 제자도를 촉구했다.

이러한 그의 타협 없는 태도는 때로 논란을 낳았다. 그의 리더십은 독선적으로 비쳤고, 가족과의 관계조차 사역을 위해 희생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분명 흠 없는 성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삶 전체가 일관되게 가리키는 방향은 오직 하나,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완전한 헌신이었다.

세계 복음화 십자군 (WEC)
1931년, C. T. 스터드는 70세의 나이로 자신이 평생을 사랑했던 아프리카 콩고 땅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자신의 선교 현장에 묻혔다. 그가 세운 '아프리카 심장부 선교회'는 이후 '세계 복음화 십자군(Worldwide Evangelisation Crusade)', 즉 WEC International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그의 비전을 이어받아 전 세계 미전도 종족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선교 단체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결론: 영원히 타오르는 영감의 불꽃
C. T. 스터드의 삶은 세 개의 대륙에서 펼쳐진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였다. 그는 영국의 크리켓 경기장에서 만인의 환호를 받던 영웅이었지만, 자신의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유일한 관중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깨달았다. 그는 그 관중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명예와 재산, 건강, 그리고 생명까지 아낌없이 던졌다.

그의 유산은 그가 세운 기관이나 그가 얻은 개종자의 숫자에만 있지 않다. 그의 가장 큰 유산은 그의 '삶' 그 자체이다. 그는 안락하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에 안주하려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C. T. 스터드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는 때로 성급했고, 지나치게 엄격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 어떤 희생도 결코 크지 않다'는 하나의 위대한 진리를 향한 순수하고 일관된 투쟁이었다. 크리켓 경기장에서 그가 날렸던 그 어떤 홈런보다도 더 강력하게, 그의 삶은 오늘날까지 우리의 심장을 향해 날아와 깊은 울림과 도전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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