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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콜리지 패티슨 (John Coleridge Patteson)
멜라네시아의 성공회 초대 주교로, 현지 문화와 언어를 존중하며 사역하다 노예상인으로 오인받아 순교했습니다.

멜라네시아의 순교자, 존 콜리지 패티슨: 이해와 존중으로 다가간 비극의 사도
서론: '블랙버더'의 창에 찔린 목자
1871년 9월, 남태평양 멜라네시아(Melanesia)의 누카푸(Nukapu)라는 작은 섬. 한 척의 선교선에서 내린 주교가 평화의 손짓을 하며 해변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원주민들이 던진 무수한 창과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잠시 후, 원주민들은 그의 시신을 카누에 실어 선교선으로 돌려보냈다. 그의 가슴에는 다섯 개의 상처가 나 있었고, 야자나무 잎사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다섯 개의 상처는, 얼마 전 백인 노예상에게 살해당한 다섯 명의 원주민을 위한 복수를 의미했다.
이 비극적인 순교의 주인공이 바로, '멜라네시아의 사도'라 불리는 존 콜리지 패티슨 주교이다. 그는 19세기 선교사들 중 보기 드물게, 원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깊이 존중하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그는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보는 대신, 동등한 인격체로 사랑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자신이 그토록 보호하고자 했던 바로 그 원주민들을 착취하던 백인 노예상(blackbirders)의 만행 때문에, 그들의 오해와 복수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그의 삶은 선의와 신뢰가 어떻게 오해와 폭력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슴 아픈 비극이자, 동시에 진정한 문화 간 이해가 무엇인지를 묻는 깊은 성찰이다. 본 글은 이처럼 멜라네시아의 첫 주교이자 순교자였던 존 콜리지 패티슨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영국의 엘리트였던 그가 어떻게 멜라네시아의 선교사가 되었는지 살펴보고, 그의 혁신적인 선교 방법론과 원주민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비극적인 순교가 남긴 의미와 그의 유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이튼과 옥스퍼드의 엘리트, 멜라네시아를 택하다
존 콜리지 패티슨은 1827년, 영국의 저명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전형적인 영국의 상류층 엘리트였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재능, 특히 언어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영국에서 편안하고 명예로운 성직자로서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뉴질랜드의 주교, 조지 셀윈과의 만남
그의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은 뉴질랜드 최초의 성공회 주교였던 조지 오거스터스 셀윈(George Augustus Selwyn)과의 만남이었다. 셀윈 주교는 뉴질랜드를 넘어,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들, 특히 '어둠의 섬들'이라 불리던 멜라네시아(솔로몬 제도, 바누아투 등)에 대한 선교 비전을 품고 있었다.
셀윈 주교의 열정에 깊은 감명을 받은 패티슨은, 1855년 자신의 모든 안락한 미래를 버리고 셀윈 주교의 동역자가 되어 뉴질랜드로 향했다. 그는 곧 멜라네시아 선교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본론 2: '서던 크로스'호와 이동 학교 - 혁신적인 선교 방식
패티슨과 셀윈 주교가 고안한 멜라네시아 선교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 혁신적이었다.
바다 위의 학교
그들은 멜라네시아의 수백 개 섬들이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유럽인들이 상주하며 선교하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서던 크로스(Southern Cross, 남십자성)'**라는 이름의 선교선을 타고, 매년 섬들을 순회 방문했다.
그들은 각 섬에서 가장 총명한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그들의 동의를 얻어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세운 선교 학교로 데려왔다. 이 젊은이들은 1년 동안 학교에서 기독교 신앙과 서구 학문을 배운 뒤, 다시 자신들의 고향 섬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는 '현지인 선교사'가 되었다. 즉, 선교 기지를 섬에 짓는 대신, 배를 '움직이는 학교'로 삼아 미래의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방식이었다. 이 전략은 멜라네시아의 다양한 언어와 문화적 장벽을 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언어와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
이러한 사역의 중심에는 패티슨의 천부적인 언어적 재능과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이 있었다. 그는 20개가 넘는 멜라네시아의 언어를 습득하고, 문법을 체계화했으며, 성경과 기도서를 그들의 언어로 번역했다.
그는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가졌던 서구 우월주의적인 태도를 거부했다. 그는 원주민의 문화를 '야만적인 것'으로 파괴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삶의 방식과 사고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려 했다. 그는 원주민들과 함께 먹고 생활하며, 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훗날 문화 인류학적 선교의 중요한 선구로 평가받는다.
1861년, 그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뉴질랜드와 분리된 최초의 멜라네시아 교구 주교로 서품되었다.
본론 3: '블랙버딩'의 비극과 순교
패티슨의 평화롭고 점진적인 사역은, 19세기 후반 남태평양을 휩쓴 탐욕의 광풍, 즉 '블랙버딩(Blackbirding)'이라 불리는 노동력 착취 무역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노예상으로 오인받은 주교
'블랙버더'들은 호주 퀸즐랜드의 사탕수수 농장이나 피지의 목화 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을 구하기 위해, 남태평양 섬들을 돌며 원주민들을 납치하거나 기만적으로 유인하여 사실상의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폭력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더욱 악랄했던 것은, 일부 블랙버더들이 선교사들의 신뢰를 악용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패티슨의 선교선 '서던 크로스'호와 비슷한 배를 타고, 심지어 성직자처럼 옷을 입고 섬에 접근하여 원주민들을 안심시킨 뒤 납치했다. 이로 인해 많은 원주민들은 더 이상 어떤 백인도, 심지어 진정한 선교사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눈에 모든 백인은 자신들의 아들과 남편을 앗아간 '악마'였다.
누카푸 섬의 비극
1871년 9월 20일, 패티슨은 산타크루즈 제도의 누카푸(Nukapu) 섬을 방문했다. 그는 이 섬의 주민들이 얼마 전 블랙버더들에게 5명의 남자를 잃고 극도의 증오심에 차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평소처럼 작은 카누를 타고 평화의 상징인 야자나무 잎사귀를 흔들며 해변으로 다가갔다. 섬의 장로들이 그를 맞이하여 마을 안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잠시 후, 숲속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며 배에 남아있던 그의 동료들을 향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리고 얼마 뒤, 조류에 밀려온 작은 카누 안에는, 다섯 개의 깊은 상처를 입은 채 고요히 누워 있는 패티슨 주교의 시신이 실려 있었다. 다섯 개의 상처는, 백인들에게 잃은 다섯 명의 영혼에 대한 피의 복수였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보호하려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을 향한 오해와 증오가, 결국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결론: 오해의 벽을 넘어선 이해의 씨앗
존 콜리지 패티슨의 죽음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특히 영국 사회의 양심을 일깨웠다. 그의 순교는 남태평양에서 자행되던 '블랙버딩' 무역의 잔혹한 실상을 전 세계에 고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영국 정부가 이 비인간적인 노예 무역을 금지하고 단속하게 만드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유산은 그의 비극적인 죽음 너머에 있다.
그는 문화 인류학적 선교의 위대한 선구자였다. 그는 타문화를 존중하고, 현지인의 언어로, 현지인 지도자를 통해 복음이 뿌리내려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간 원칙을 세우고 실천했다.
그의 순교는 화해의 씨앗이 되었다. 그의 죽음은 증오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후배 선교사들은 복수 대신 용서의 메시지를 들고 다시 누카푸 섬을 찾았고, 결국 섬 주민들은 복음을 받아들였다.
존 콜리지 패티슨의 삶은, 진정한 소통과 이해가 결여될 때 선의가 얼마나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슴 아픈 교훈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의 벽을 넘어 진정한 친구가 되려는 끈질긴 노력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증거한다. 그는 자신을 죽인 이들의 마음속에 있던 깊은 상처와 슬픔을 이해했던, 진정한 '멜라네시아의 사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