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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존 웨슬리 (John Wesley)

감리교의 창시자로, 영국 전역을 말을 타고 누비며 복음을 전하고 사회 개혁을 이끈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입니다.

세계를 나의 교구로 삼은 열정의 순회자, 존 웨슬리: 감리교 운동과 사회적 성화
서론: "세계는 나의 교구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The world is my parish)." 이 담대한 선언은, 18세기 영국 국교회의 낡은 관습과 지리적 경계에 얽매이기를 거부했던 한 작은 체구의 사제가 던진 출사표였다. 그의 이름은 존 웨슬리.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지만 기꺼이 광부와 공장 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갔고, 평생 40만 킬로미터(지구 10바퀴)가 넘는 거리를 말을 타고 달리며 4만 번 이상 설교했던 불굴의 순회 전도자였다.

그는 새로운 교단을 만들 의도는 없었지만, 그가 지핀 부흥의 불길은 결국 전 세계 수천만 명의 신자를 거느린 감리교(Methodist Church)라는 거대한 운동으로 타올랐다. 그의 삶은 실패한 선교사의 차가운 심장이 어떻게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체험을 통해 한 시대의 영적 동력이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여정이다. 그는 개인의 경건을 넘어,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노예제를 반대하며 사회 전체를 거룩하게 만드는 '사회적 성화'를 외쳤던 예언자적 개혁가이기도 했다.

본 글은 이처럼 18세기 영국 사회와 교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존 웨슬리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의 삶을 결정지은 '올더스게이트 체험'과 그 이전의 실패를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야외 설교'와 '속회'라는 그의 혁신적인 부흥 전략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삶이 오늘날 교회와 사회에 남긴 깊은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실패한 선교사, 마음이 뜨거워지다
존 웨슬리의 뜨거운 사역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가장 차갑고 실패했던 시절을 통과한 뒤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옥스퍼드 '홀리 클럽'과 조지아에서의 실패
1703년 영국 국교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의 엄격하고 경건한 신앙 교육 속에서 성장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재학 시절, 그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성경 공부, 기도, 금욕, 그리고 구제 활동에 힘쓰는 경건 모임 '홀리 클럽(Holy Club)'을 이끌었다. 그들의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신앙생활 방식 때문에, 다른 학생들은 그들에게 '메소디스트(Methodist)', 즉 '규칙쟁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1735년, 아메리카 식민지 조지아에 인디언 선교사로 떠났다. 그러나 그의 선교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당시 그는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율법적이고 경직된 신앙인이었다. 그는 원주민을 복음화하기는커녕, 엄격한 규칙을 강요하다가 영국인 정착민들과 심각한 갈등만 빚은 채, 2년 만에 빈손으로 영국에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인디언을 개종시키러 미국에 갔다. 그러나 아! 누가 나를 개종시킬 것인가?"

올더스게이트에서의 체험: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실패와 영적 공허함 속에서 방황하던 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는 영국에서 만난 모라비안 교도들을 통해, 율법적인 노력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의 확신과 '마음의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그는 마지못해 런던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 있는 한 작은 신도회 모임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웨슬리는 훗날 자신의 일기에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저녁 8시 45분경,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나는 내가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음을 느꼈고, 그분이 나의 모든 죄를 가져가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머리로만 알던 복음이, 그의 가슴속에서 살아있는 능력으로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차가운 '규칙쟁이'는, 이제 뜨거운 심장을 가진 복음의 전사가 되었다.

본론 2: 야외 설교와 속회 - 부흥의 두 엔진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후, 웨슬리의 사역은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폭발했다. 그는 두 개의 강력한 엔진을 통해 영국 전역에 부흥의 불을 지폈다.

엔진 1: 야외 설교 - 세상 속으로 나아간 복음
당시 영국 국교회는 교구 사제가 자신의 교구 교회 안에서만 설교할 수 있다는 엄격한 관습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의 동역자 조지 휘트필드의 선례를 따라, 이 모든 관습을 깨뜨리고 교회 밖,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그의 주된 청중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도시로 몰려들었지만, 기존 교회로부터는 외면당하고 있던 가난한 광부, 공장 노동자, 그리고 하층민들이었다. 그는 탄광 입구에서, 시장 광장에서, 들판에서, 수만 명의 군중을 향해 설교했다. 그는 자신의 교구가 영국 국교회가 정해준 작은 지역이 아니라, "세계 전체"라고 선언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말을 타고 영국 전역을 구석구석 누비며, 가는 곳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엔진 2: 속회(Class Meeting) - 부흥을 지속시키는 시스템
웨슬리의 천재성은 단지 위대한 설교가였다는 데 있지 않다. 그의 진짜 위대함은, 부흥의 불길이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지도록 만든 그의 조직적인 능력에 있었다.

그는 설교를 통해 회심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약 12명 단위의 작은 그룹, 즉 **'속회(Class Meeting)'**로 조직했다. 속회는 매주 한 번씩 모여, 한 주간의 신앙생활을 솔직하게 나누고, 서로의 죄를 고백하며,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는 '영적 상호 책임'의 공동체였다. 속회의 리더는 신학자가 아닌, 신앙이 신실한 평신도(속장, Class Leader)가 맡았다.

이 '속회'라는 시스템은 감리교 운동의 심장이자 척추였다. 그것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서로를 돌보며, 작은 목회자로서 훈련받는 가장 효과적인 제자 훈련의 장이었다. 웨슬리는 대규모 집회를 통한 '바람'과, 속회를 통한 '뿌리'를 결합함으로써, 감리교 운동을 일시적인 부흥이 아닌, 견고하고 지속 가능한 운동으로 만들었다.

본론 3: '사회적 성화' - 개인을 넘어 사회를 향한 사랑
존 웨슬리 신학의 핵심에는 '성화(holiness)'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성화는 개인적인 경건 생활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성경은 사회적 종교 외에는 어떤 종교도 알지 못하며, 사회적 성화 외에는 어떤 성화도 알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그에게 진정한 성화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반드시 이웃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념 아래, 그는 감리교인들에게 사회의 가장 어둡고 아픈 곳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역: 그는 잉글랜드 최초의 무료 진료소를 세웠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대출 기금과 직업 훈련소를 만들었다.

교육 운동: 그는 글을 모르는 노동자들을 위해 주일학교 운동을 확산시켰고, 수많은 책과 소책자를 저렴한 가격에 보급했다.

사회 개혁 운동: 그는 당시 만연했던 노예 무역에 대해 "인간사에 존재했던 가장 가증스러운 악"이라고 맹렬히 비판하며, 윌리엄 윌버포스와 같은 이들의 노예제 폐지 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또한 그는 비인간적인 교도소 환경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개인의 영혼 구원과 사회의 구조적 변혁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믿었고, 그의 이러한 가르침은 19세기 영국의 수많은 사회 개혁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론: 영국을 바꾼 작은 거인
1791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존 웨슬리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말을 타고 달리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역사(役事)하시도록 기도하고, 당신이 그 역사의 주인인 것처럼 일하라"는 자신의 말을 평생에 걸쳐 실천했다.

그의 유산은 실로 거대하다.

그는 18세기 영국의 영적, 도덕적 지형을 바꾸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웨슬리가 이끈 감리교 부흥 운동이 아니었다면, 당시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겪던 영국 역시 프랑스와 같은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세계적인 감리교 운동을 창시했다. 그가 시작한 작은 '속회' 모임은, 오늘날 전 세계 8천만 명 이상의 신자를 거느린 세계적인 교단으로 성장했다.

그는 '사회적 복음'의 위대한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개인 경건과 사회적 책임을 통합한 '사회적 성화'의 비전을 통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예언자적 사명을 일깨웠다.

존 웨슬리의 여정은 실패한 선교사의 차가운 심장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올더스게이트에서 지펴진 그 작은 불씨는, 영국 전역을 휩쓰는 거대한 부흥의 불길이 되었다. 그는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사회 개혁의 깃발을 들고, 한 시대를 깨운 위대한 '하나님의 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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