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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존 엘리엇 (John Eliot)

'인디언의 사도'로, 북미 알공퀸 인디언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인디언의 사도, 존 엘리엇: 아메리카 최초의 성경을 번역한 청교도
서론: 아메리카 최초의 성경, 그 놀라운 진실
1663년,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역사상 최초로 성경전서가 인쇄되었다. 신대륙의 인쇄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 기념비적인 사건에서, 사람들은 당연히 그 성경이 영어나 라틴어로 되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메리카 땅에서 처음으로 인쇄된 성경은 유럽의 언어가 아닌, 매사추세츠 알공퀸(Algonquian) 부족이 사용하던 토착 언어, 즉 '마사추세트어'로 번역된 것이었다. 이 불가능해 보였던 위업의 중심에 바로 '인디언의 사도'라 불리는 청교도 목사, 존 엘리엇이 있었다.

존 엘리엇은 17세기 뉴잉글랜드의 거친 황무지에서, 당시 대부분의 영국인 정착민들이 위협적인 이교도나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향한 뜨거운 사명감을 품었던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설교를 통해 그들을 개종시키는 것을 넘어,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문법을 체계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 자신의 언어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그의 사역은 성경 번역과 더불어, 원주민 개종자들을 위한 자치 공동체인 '기도 마을(Praying Towns)'을 설립하는 독창적인 선교 전략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그의 평생에 걸친 헌신은 '필립 왕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의 파괴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본 글은 이처럼 영광과 비극이 교차하는 삶을 살았던 존 엘리엇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잉글랜드 출신의 평범한 목회자가 어떻게 아메리카 원주민을 향한 특별한 소명을 품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의 기념비적인 성경 번역 사업과 '기도 마을'이라는 독특한 선교 모델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양 떼를 지키려 했던 그의 꺾이지 않는 사랑과 그의 복합적인 유산을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록스베리의 목회자, 인디언을 향한 소명
존 엘리엇의 선교 사역은 젊은 시절의 급진적인 결단이 아니라, 안정된 목회지에서 수년간의 사역을 통해 서서히 무르익은 깊은 소명의 결과였다.

청교도의 아메리카 이주
1604년 영국에서 태어난 존 엘리엇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받은 전형적인 청교도 지식인이었다. 영국 국교회의 종교적 압제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그는 1631년 '위대한 이주(Great Migration)'의 물결을 타고 아메리카의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로 건너왔다. 이듬해인 1632년, 그는 보스턴 근교 록스베리(Roxbury)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죽을 때까지 거의 60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초기 15년간, 그는 영국인 회중을 섬기는 충실하고 존경받는 목회자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교회 주변에 살고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 즉 알공퀸 부족에 대한 영적 부담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정착민들은 원주민들을 잠재적인 적이나 자신들의 토지를 차지하는 방해물로 여겼지만, 엘리엇은 청교도 신학에 입각하여 그들을 구원받아야 할 잃어버린 영혼으로 보았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엘리엇은 원주민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신앙은 들음에서 난다"는 로마서의 말씀처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언어로 듣고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640년대 초, 이미 40대가 넘은 나이에 그는 이전에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문법도 문자도 없는 알공퀸 언어를 배우는 험난한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코케노에(Cockenoe)라는 젊은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수년간 끈질기게 언어를 연구했다. 그는 단순히 단어를 암기하는 것을 넘어, 언어의 구조와 문법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이 고된 노력 끝에 그는 마침내 1646년, 역사상 처음으로 알공퀸 언어로 기독교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본론 2: '기도 마을'과 아메리카 최초의 성경
언어의 장벽을 넘은 엘리엇은 이제 원주민 개종자들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선교 전략의 핵심이자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었다.

기도 마을(Praying Towns)의 설립
엘리엇은 원주민 개종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부정적인 영향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그들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부족의 전통적인 이교 문화였고, 다른 하나는 술과 사기, 폭력으로 가득 찬 영국 정착민 사회의 타락한 모습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가 고안한 것이 바로 '기도 마을(Praying Towns)'이었다. 이곳은 원주민 개종자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자치적인 기독교 마을이었다. 1651년, 찰스 강변에 최초의 기도 마을인 '네이틱(Natick)'이 세워졌다. 네이틱의 주민들은 성경, 특히 출애굽기의 율법을 기반으로 한 자신들의 법을 만들고, '백부장', '오십부장'과 같은 지도자들을 직접 선출했다. 마을 중심에는 교회와 학교가 세워졌고, 남자들은 농업을, 여자들은 방적을 배우는 등 영국식 생활 방식을 받아들였다. 엘리엇의 비전은 이곳을 원주민들을 위한 신학 교육의 중심지로 삼아,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동족을 복음화할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네이틱의 성공에 힘입어, 1675년까지 매사추세츠에는 14개의 기도 마을이 세워져 약 1,100명의 '기도하는 인디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기념비적 위업, 알공퀸어 성경
'기도 마을'이 엘리엇의 선교적 '몸'이었다면, 그의 사역의 '영혼'은 단연 성경 번역이었다. 그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갖는 것이 신앙의 성숙과 자립에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수년간의 고된 노력 끝에, 마침내 신구약 성경 전체를 마사추세트-알공퀸 언어로 번역하는 기념비적인 위업을 달성했다.

이 작업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단어를 옮기는 것을 넘어, '하나님', '죄', '은혜', '구원'과 같은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들을 원주민들의 세계관과 언어 속에서 표현해낼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의 번역 과정은 곧 하나의 언어를 창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661년 신약성경이, 그리고 1663년에는 구약과 신약이 합본된 성경전서 **'마무세 우니투파나탐웨 움 비블룸 갓(Mamusse Wunneetupanatamwe Um Biblum God)'**이 케임브리지에서 인쇄되었다. 이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인쇄된 최초의 성경이었다. 영국에서 건너온 인쇄기로, 영국에서 온 선교사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로 번역하여 출판한 이 성경은 세 문화가 만난 위대한 결실이었다. 엘리엇은 이후에도 평생에 걸쳐 이 성경을 개정하고, 시편과 교리문답 등 다양한 신앙 서적들을 알공퀸어로 번역, 출판했다.

본론 3: 필립 왕 전쟁의 비극과 꺾이지 않는 사랑
엘리엇의 30년에 걸친 헌신으로 세워진 기도 마을의 평화는 1675년, '필립 왕 전쟁(King Philip's War)'이라는 거대한 폭풍 앞에서 무참히 파괴되었다.

두 세계 사이의 희생양
'필립 왕'이라는 영어 이름으로 알려진 왐파노아그(Wampanoag) 부족의 추장 메타코멧(Metacomet)이 주도한 이 전쟁은, 계속되는 영국의 영토 잠식에 대한 원주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이었다. 뉴잉글랜드 전역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변하면서, '기도하는 인디언'들은 비극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영국 정착민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야만인'으로 의심받았고, 동족인 비기독교 원주민들에게는 '민족을 배신한 변절자'로 미움을 받았다. 그들은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양쪽 모두로부터 공격받는 희생양이 되었다.

디어 아일랜드의 참상과 엘리엇의 투쟁
전쟁의 공포에 휩싸인 매사추세츠 식민지 정부는 히스테릭한 결정을 내렸다. 아직 전투에 가담하지도 않은 네이틱을 비롯한 여러 기도 마을의 주민들을 모두 강제로 무장 해제시키고, 보스턴 항구의 황량한 섬인 '디어 아일랜드(Deer Island)'에 강제 수용한 것이다.

1675년 혹독한 겨울, 수백 명의 '기도하는 인디언'들은 제대로 된 음식이나 피난처도 없이 이 섬에 버려졌다. 많은 노인과 어린이들이 굶주림과 추위, 질병으로 죽어갔다. 이는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영국을 위해 싸우고자 했던 이들에 대한 끔찍한 배신이었다.

이 비극 속에서, 70세가 넘은 노령의 존 엘리엇은 자신의 양 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는 식민지 정부의 부당한 조치에 격렬하게 항의했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작은 배를 타고 디어 아일랜드를 오가며 음식과 땔감을 전달하고 그들을 위로했다. 그는 당시 원주민들을 옹호하는 거의 유일한 영국인의 목소리였다.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소수의 인디언들은 섬에서 풀려났지만, 그들의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가족들은 흩어졌다. 엘리엇은 남은 생애 동안 이 기도 마을들을 재건하기 위해 애썼지만, 전쟁이 남긴 깊은 상처와 불신은 너무나 컸다. 그의 평생의 사역은 사실상 폐허가 된 것이다.

결론: 시대를 초월한 개척자의 유산
1690년, 85세의 나이로 눈을 감으며 "오라, 영광이여. 모든 것이 어둡고, 슬프고, 혼란스럽구나. 자, 가자"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존 엘리엇의 삶은 성공과 실패, 영광과 비극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초상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의 '기도 마을'은 원주민들에게 영국식 생활 방식을 강요한 문화적 동화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는 "문명화"와 "기독교화"를 동일시했던 17세기 청교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산은 시대를 초월하여 빛난다. 첫째, 그는 당시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가졌던 인종적 편견을 넘어, 원주민들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지성을 존중했다. 그는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데 평생을 바쳤고, 전쟁의 광기 속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둘째, 그의 성경 번역은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비록 마사추세트어가 사어(死語)가 되어 오늘날 그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의 번역은 복음이 모든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며 그 안에서 뿌리내려야 한다는 선교의 보편적 원리를 보여주는 영원한 기념비이다.

존 엘리엇의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선교란 무엇인지, 그리고 거대한 역사의 비극 앞에서 한 인간의 신실한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게 빛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비록 그가 세운 마을들은 무너졌지만, 그가 번역한 말씀과 그가 보여준 꺾이지 않는 헌신은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 속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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