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존 기입슨 패튼 (John Gibson Paton)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식인종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위험을 극복했습니다.

식인종의 섬을 그리스도에게로: 존 G. 패튼의 용기와 눈물의 사역
서론: "당신은 식인종에게 잡아먹힐 거요!"
1857년,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스(New Hebrides, 현재의 바누아투) 제도로 떠나는 젊은 선교사 존 G. 패튼을 위한 송별 모임이 열렸다. 그때 한 노신사가 그에게 다가가 진심으로 걱정하며 만류했다. "젊은이, 그곳은 식인종의 땅이라네! 당신은 식인종에게 잡아먹히고 말 걸세!" 이 말에, 젊은 선교사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딕슨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연세가 많으시니 곧 무덤에 묻히시어 벌레들에게 먹힐 것입니다. 저는 고백합니다. 만약 제가 주 예수님을 섬기고 높이다가 죽을 수만 있다면, 식인종에게 먹히든 벌레에게 먹히든 저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무덤에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영광스럽게 부활하게 될까요?"
이 대답 속에 존 G. 패튼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불굴의 신앙과 용기가 담겨 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복음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담대한 군인이었다. 그가 향했던 뉴헤브리디스 제도는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였다. 부족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식인 풍습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으며, 그에 앞서 그 땅을 밟았던 선교사들은 예외 없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패튼의 이야기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극한의 상황을 담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을 잃는 뼈아픈 슬픔을 겪었고, 수십 번의 죽음의 위기를 넘겼으며, 4년간의 처절한 사역이 완전한 실패로 끝나는 절망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가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성경의 약속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이다.
본 글은 이처럼 맹렬한 용기의 소유자였던 존 G. 패튼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를 위험천만한 뉴헤브리디스로 이끈 소명의 과정을 살펴보고, 지옥과도 같았던 탄나 섬에서의 비극적인 사역과, 그 절망을 딛고 아니와 섬에서 일군 기적적인 부흥의 역사를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진정한 용기와 헌신의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글래스고의 사역자, 남태평양을 향하다
존 G. 패튼의 강철 같은 신앙은 스코틀랜드의 경건한 가정에서부터 단련되었다.
기도 골방의 유산
1824년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패튼은 비록 가난했지만, 그 어떤 부유한 가정보다 더 값진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하루 세 번, 작은 '기도 골방'에 들어가 자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패튼은 훗날 자서전에서, 아버지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어린 시절이 자신의 평생 신앙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고 고백했다.
청년이 된 그는 글래스고 시의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빈민가에서 도시 선교사로 10년간 헌신했다. 그는 이곳에서 사역하며 험악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인내심을 길렀고, 이는 훗날 남태평양에서의 사역을 위한 귀중한 훈련이 되었다.
순교의 땅으로
안정된 목회자의 길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패튼의 마음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미지의 땅을 향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런던 선교회의 선구자 존 윌리엄스가 순교했고, 최근에는 고든 부부 선교사가 살해당해 식인종에게 먹혔다는 소식이 들려온 뉴헤브리디스 제도였다. 그에게 그곳은 공포의 땅이 아니라, 순교의 피가 뿌려진 곳이기에 더욱 가야만 하는 사명의 땅이었다.
그가 뉴헤브리디스로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터툴리안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은 그 피의 씨앗 위에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가야 한다고 말했다. 1858년, 그는 갓 결혼한 아내 메리 앤(Mary Ann)과 함께 죽음을 각오한 선교의 여정에 올랐다.
본론 2: 탄나 섬의 비극 - 눈물로 씨앗을 심다
패튼 부부가 도착한 첫 선교지는 뉴헤브리디스에서도 가장 호전적이고 식인 풍습이 성행하던 탄나(Tanna) 섬이었다. 그곳에서의 4년은 그에게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슬픔의 무덤
탄나 섬의 환경은 끔찍했다. 말라리아와 같은 열대병이 창궐했고, 원주민들은 외부인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부족 간의 살육전이 일상처럼 벌어졌다. 도착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아내 메리가 열병으로 쓰러졌고, 갓 태어난 아들 피터마저 엄마의 뒤를 따랐다. 패튼은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의 무덤을 파야 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원주민들에게 둘러싸여, 쏟아지는 눈물과 땀으로 무덤을 파던 그 순간의 절망감을 이렇게 기록했다. "만약 예수님이 그곳에 나와 함께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그 외로운 무덤 옆에서 미쳐버렸거나 죽고 말았을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내와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그는 홀로 남아 사역을 계속했다. 그의 하루하루는 죽음과의 사투였다. 원주민들은 가뭄이나 질병과 같은 모든 재앙을 그가 몰고 온 저주 탓으로 돌렸다. 어느 날은 한 무리의 전사들이 그의 집을 에워싸고 불을 질렀고, 또 다른 날은 추장이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며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창과 몽둥이를 수없이 피해야 했다.
그는 오직 기도로 이 모든 위기를 넘겼다. 자신을 죽이려는 전사들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할 때, 그들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러가곤 했다. 4년 동안 그는 단 한 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했다. 그의 모든 노력은 실패처럼 보였다. 마침내 1862년, 부족 간의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지면서 그는 동료 선교사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탄나 섬을 탈출해야만 했다.
본론 3: 아니와 섬의 기적 - 눈물의 열매를 거두다
탄나 섬에서의 처절한 실패와 상실은 패튼을 좌절시켰지만, 그의 소명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호주와 스코틀랜드를 순회하며 뉴헤브리디스 선교의 실상을 알리고 새로운 후원자들을 모았다. 그리고 1866년, 새로운 아내 마가렛과 함께 그는 다시 뉴헤브리디스로 돌아왔다. 이번에 그가 선택한 곳은 탄나보다 훨씬 작은 아니와(Aniwa) 섬이었다.
우물에서 터져 나온 생수
아니와 섬 역시 식인 풍습이 남아있는 위험한 곳이었지만, 패튼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는 아니와 섬에 깨끗한 식수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우물을 파기로 결심했다. 원주민들은 땅에서 물이 솟아난다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땅속에는 악령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우물을 파는 패튼을 조롱하며, 그가 악령의 저주를 받아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패튼은 묵묵히 혼자서 땅을 파내려갔다. 며칠간의 고된 노동 끝에, 마침내 그의 삽 끝에서 축축한 흙이 묻어 나왔고, 곧이어 맑고 시원한 샘물이 솟아올랐다. 이 광경을 본 원주민들은 경악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추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 물을 맛본 후, "이것은 기적이다! 당신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라고 외쳤다. 이 '우물 사건'은 아니와 섬의 영적 지형을 바꾸는 분수령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던 정령들의 힘보다 패튼의 하나님의 힘이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섬 전체가 그리스도에게로
우물 기적 이후, 아니와 섬에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추장을 비롯한 섬 주민 전체가 우상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식인 풍습과 부족 전쟁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에 사랑과 용서의 공동체가 세워졌다. 패튼은 학교를 세워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곧이어 아니와 언어로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하여 그들의 손에 들려주었다.
탄나 섬에서 4년간 눈물로 뿌렸던 씨앗이, 아니와 섬에서 수십 년, 수백 배의 풍성한 열매로 돌아온 것이다. 아니와는 뉴헤브리디스 제도 전체를 위한 복음의 전초기지가 되었고, 이곳에서 훈련받은 원주민 전도자들이 다른 섬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결론: 굳건한 믿음, 위대한 유산
존 G. 패튼은 1907년 82세의 나이로 호주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의 삶은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는 시편 126편 6절 말씀의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의 유산은 다각적이다. 첫째, 그는 불굴의 용기와 인내의 상징이 되었다. 아내와 자식을 잃은 절망 속에서도, 수십 번의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후대의 모든 선교사들에게 가장 큰 영감과 위로를 주었다.
둘째, 그는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증명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야만적이고 폭력적으로 보였던 식인종 사회가, 복음 안에서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로 완전히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그는 위대한 동원가였다. 노년의 그는 호주, 캐나다, 미국, 영국 등을 순회하며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간증했다. 그의 자서전은 선교 문학의 고전이 되어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선교의 불을 지폈다. 그는 또한 당시 남태평양 섬 주민들을 노예처럼 착취하던 '블랙버딩(blackbirding)' 무역의 참상을 고발하고, 원주민의 인권을 위해 싸운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다.
존 G. 패튼은 식인종에게 잡아먹힐 것을 각오하고 미지의 섬으로 떠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죽음에서 건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한 민족 전체를 구원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다.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복음을 위해 무엇을 걸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