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조지 휘트필드 (George Whitefield)

18세기 영국과 미국 식민지에서 대각성 운동을 이끈 위대한 설교가로, 그의 순회 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을 회심으로 이끌었습니다.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횃불, 조지 휘트필드: 눈물과 열정으로 대륙을 깨운 설교가
서론: "여러분의 심장에 불을 붙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와서 타는 것을 볼 것입니다."
18세기 중반,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교회는 형식주의에 젖어 있었고, 사람들의 마음은 세속적인 번영에 대한 관심으로 차가워져 있었다. 바로 이 시대의 심장부에 불을 지르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횃불과도 같은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지 휘트필드. 그는 당대 최고의 배우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드라마틱한 설교와 천둥 같은 목소리, 그리고 죄인을 향한 뜨거운 눈물을 가진 18세기 최고의 복음 전도자였다.

그는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1차 대각성 운동(The First Great Awakening)'을 이끈 주역이었으며, 특히 대서양을 일곱 번이나 횡단하며 영국과 미국을 하나의 거대한 부흥의 현장으로 묶은 최초의 '국제적인 부흥사'였다. 그는 교회 건물 안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광산의 노동자들과 들판의 농부들을 찾아가 수만 명의 군중 앞에서 야외 설교를 감행한 개척자였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조차 그의 설교에 매료되어, "그의 설교를 들으면 주머니를 지키기가 어렵다"고 말할 정도였다.

본 글은 이처럼 한 시대의 영적 지형을 바꾼 위대한 설교가 조지 휘트필드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선술집 아들이었던 그가 어떻게 옥스퍼드의 '홀리 클럽'을 거쳐 시대의 설교자로 거듭났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의 설교가 가진 독특한 특징과 대륙을 휩쓴 그의 사역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삶이 남긴 유산과 그가 오늘날 교회에 던지는 도전을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선술집 아들, 옥스퍼드에서 거듭나다
조지 휘트필드의 삶의 출발점은 결코 경건하거나 유복하지 않았다.

글로스터의 소년과 배우의 꿈
1714년 영국 글로스터의 한 선술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술 취한 손님들 사이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연극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그의 꿈은 위대한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가난했지만, 그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옥스퍼드 대학교 펨브로크 칼리지에 '서비터(servitor)', 즉 부유한 학생들의 시중을 들며 학비를 버는 가난한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깊은 영적 고뇌와 죄책감에 시달렸다.

'홀리 클럽'과 운명적인 만남
그의 삶을 바꾼 것은 옥스퍼드에서 만난 한 경건한 학생들의 모임, '홀리 클럽(Holy Club)'이었다.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형제가 이끌던 이 모임은, 성경 공부와 기도, 그리고 금욕적인 경건 훈련에 힘쓰며 다른 학생들로부터 '메소디스트(Methodist, 규칙쟁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고 있었다. 휘트필드는 이 모임에 합류하여, 처음으로 자신의 힘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극적인 회심을 체험했다.

1736년, 21세의 나이로 영국 국교회 사제로 서품받은 그는, 글로스터의 한 교회에서 첫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는 너무나 열정적이고 강력하여, "그의 첫 설교를 듣고 15명이 미쳐버렸다"는 불평이 주교에게 전달될 정도였다. 그의 전설적인 설교 사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본론 2: 야외 설교와 대각성 운동의 불길
휘트필드의 사역은 기존의 모든 교회적 관습을 깨뜨리는 혁신과 논란의 연속이었다.

교회 담장을 넘은 설교
당시 영국 교회들은 자신들의 교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그러나 휘트필드는 교구민이든 아니든, 복음을 들어야 할 모든 영혼에게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 그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가난한 광부와 노동자들을 위해, 교회 건물 밖, 즉 들판과 시장, 언덕과 같은 야외로 나아갔다.

1739년 2월, 브리스톨 근교 킹스우드의 탄광 지대에서, 그는 수천 명의 광부들을 앞에 두고 첫 야외 설교를 감행했다. 설교가 진행되자, 석탄 가루로 검게 변한 광부들의 얼굴 위로 하얀 눈물 자국이 흘러내리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의 야외 설교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곧 수만 명의 군중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확성기 시설이 없던 시절, 그의 천둥 같은 목소리는 3만 명의 청중을 압도했다고 전해진다.

대서양을 넘나든 횃불
휘트필드의 사역지는 영국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1738년부터 177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일곱 차례나 대서양을 횡단하며 아메리카 식민지 전역을 순회했다. 그는 조지아주에 고아원을 세우는 일에 헌신했으며, 북쪽의 뉴잉글랜드부터 남쪽의 조지아까지 모든 식민지를 방문하며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다.

그의 방문은 1차 대각성 운동을 식민지 전체의 단일한 운동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와 교류하며 부흥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나누었고, 그의 드라마틱하고 감성적인 설교는 에드워즈의 논리적인 설교와 상호 보완하며 대각성 운동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그는 영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대서양의 복음 전도자'였다.

본론 3: 논쟁적인 유산과 마지막 열정
휘트필드의 사역은 찬사만큼이나 많은 비판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웨슬리와의 신학적 결별
그의 가장 큰 아픔 중 하나는, 그의 영적 동지였던 존 웨슬리와의 신학적 결별이었다. 휘트필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선택을 강조하는 칼뱅주의 신학을 굳게 믿었던 반면, 웨슬리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행 은총을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랐다. 예정론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두 사람은 결국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평생에 걸쳐 서로를 존중하며 우정을 이어갔다.

노예제에 대한 모순적 태도
그의 유산에서 가장 비판받는 부분은 노예제에 대한 그의 모순적인 태도이다. 그는 흑인 노예들의 영혼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열정적으로 설교했으며, 많은 노예들이 그의 설교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신이 설립한 조지아 고아원의 재정적 유지를 위해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옹호했다. 그는 노예제 자체를 악으로 규탄하지는 못했던, 18세기 인물로서의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마지막 불꽃
그의 복음을 향한 열정은 죽는 순간까지 식지 않았다. 1770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의 마지막 설교에서 그는 촛불을 손에 들고 이렇게 외쳤다. "나는 설교단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타오르다가 죽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천식 발작으로 인해 5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기도처럼, 복음을 위한 불꽃으로 완전히 소진된 삶을 살았다.

결론: 한 시대의 영혼을 깨운 목소리
조지 휘트필드는 18세기 영국과 미국에 잠자고 있던 수백만 명의 영혼을 깨운 하나님의 확성기였다. 그는 교회의 낡은 관습과 경계를 뛰어넘어, 복음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그의 드라마틱한 설교는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며, 지옥의 공포와 천국의 소망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했다.

그의 유산은 실로 거대하다.

그는 '대각성 운동'이라는 거대한 영적 운동의 주역이었다. 그의 사역은 수많은 영혼을 구원으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미국 독립 혁명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도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야외 설교'와 '대중 전도'의 모델을 창시했다. 그의 방식은 훗날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과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집회로 이어지는 현대적 복음 전도의 원형이 되었다.

조지 휘트필드의 삶은, 한 사람이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이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강단 위에서, 그리고 세상의 광장에서 자신을 온전히 불태웠다. 그리고 그가 지핀 그 불꽃은 대서양을 건너 두 대륙을 밝혔고, 그 빛은 오늘날까지도 교회의 역사 속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강의 읽음 등록
mainlogo.png

SWIM世界インターネット宣教協議会は1996年に創立した宣教団体で、インターネットとITを活用して20年以上にわたり世界宣教に貢献してきました。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