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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프로카노프 (Ivan Prokhanov)
'러시아의 마르틴 루터'로 불리며, 20세기 초 러시아 복음주의 기독교 운동을 이끈 지도자입니다.

'러시아의 마르틴 루터', 이반 프로카노프: 혁명의 시대, 복음의 깃발을 들다
서론: 폭풍의 시대, 러시아 교회의 지도자
20세기 초 러시아는 혁명과 전쟁, 그리고 무신론적 공산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오랜 지배와 차르 체제의 억압 속에서, 새롭게 태동하던 러시아 복음주의 기독교(Evangelical Christians)는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바로 이 혼돈의 한복판에서, 분열되어 있던 복음주의 그룹들을 하나로 묶고, 러시아 교회의 자립과 부흥을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반 프로카노프.
그는 뛰어난 엔지니어였지만, 자신의 삶을 러시아 복음주의 교회를 위한 조직가이자, 신학자, 찬송가 작가, 그리고 정치적 옹호자로 바쳤다. 그는 레닌과 스탈린의 시대 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싸우며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저항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그는 러시아 복음주의 기독교의 '마르틴 루터'이자 '존 웨슬리'로 불린다. 본 글은 이처럼 러시아 교회의 험난한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이반 프로카노프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본론: 엔지니어에서 복음주의 연맹의 창설자로
1869년 러시아 북코카서스 지방의 경건한 몰로칸(Molokan, 러시아 정교회에서 분리된 영적 기독교 그룹) 가정에서 태어난 프로카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술 연구소에서 공학을 공부한 엘리트 엔지니어였다. 그는 유럽 유학 중에 영국의 침례교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복음주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전 러시아 복음주의 기독교 연맹(VSEKh)'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당시 '슈툰디스트(Stundist)' 등으로 불리며 흩어져 있던 다양한 복음주의 그룹들을 하나로 묶는 일에 헌신했다. 그의 노력은 1909년, **'전 러시아 복음주의 기독교 연맹(All-Russian Union of Evangelical Christians)'**의 창설로 결실을 맺었다. 그는 이 연맹의 지도자로서, 다음과 같은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통해 러시아 복음주의 교회의 기틀을 닦았다.
신학 교육: 그는 성경 학교를 설립하여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했다.
문서 사역: 그는 '베세다(Beseda)'와 '흐리스티아닌(Khristianin)'과 같은 기독교 잡지를 창간하고, 수많은 신학 서적과 문서를 출판했다.
찬송가: 그는 1,000곡이 넘는 러시아어 찬송가를 직접 작사하거나 번역하여, 러시아 복음주의 교회가 자신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했다.
소비에트 시대의 생존 투쟁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그의 사역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그는 초기에는 소비에트 정권이 약속한 '종교의 자유'를 믿고, 기독교 신앙이 사회주의 이상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정권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 코뮌'을 조직하는 등 새로운 시대에 맞는 기독교 공동체를 실험했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에 이르러 종교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자, 그는 결국 1928년 해외 출장 중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후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러시아의 핍박받는 교회를 위한 국제적인 지원을 호소하다가, 1935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결론: 러시아 교회의 꺼지지 않는 불씨
이반 프로카노프의 삶은 러시아 근현대사만큼이나 극적이고 복합적이었다. 그의 대(對)정권 협력 노선은 훗날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무신론적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폭풍 속에서 어떻게든 교회의 생존과 신앙의 자유를 지켜내려 했던 한 지도자의 고뇌에 찬 선택이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그가 분열되어 있던 작은 그룹들을 하나의 '연맹'으로 묶어내어, 러시아 복음주의 교회가 20세기 최악의 박해를 견뎌내고 살아남을 수 있는 조직적, 신학적 구심점을 마련해주었다는 데 있다. 그가 피운 불씨는, 수십 년간의 억압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살아남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러시아 교회가 다시 부흥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