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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왕밍다오 (Wang Ming-Dao)

중국의 신사참배와 공산당의 통제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다 20년 이상 투옥되었으나, 굴하지 않는 믿음으로 중국 가정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타협 없는 신앙'의 파수꾼, 왕밍다오: 중국 교회의 양심, 20년의 감옥을 이기다
서론: "나는 이미 죽었소"
1955년 베이징, 공산당 간부들이 한 완고한 설교자를 찾아와 정부가 통제하는 '삼자애국운동'에 협력할 것을 종용했다. 그들은 회유와 협박을 번갈아 가며 물었다.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소?" 그러자 이 작은 체구의 설교자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35년 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죽은 사람이오. 죽은 사람을 다시 죽이겠다고 위협할 수는 없소."

이 담대한 고백의 주인공이 바로, 20세기 중국 교회의 가장 강직한 양심으로 불리는 왕밍다오이다. 그는 와치만 니, 존 송과 함께 20세기 전반 중국 기독교의 황금기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시련의 불길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났다. 그는 신앙과 정치의 야합을 거부하고, 교회의 유일한 주인은 그리스도뿐임을 외치다가, 인생의 황금기 22년을 꼬박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의 삶은 '타협 없는 순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그는 한때의 연약함으로 신앙을 부인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곧바로 자신의 배교를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더 굳건한 믿음의 길을 걸었던 정직한 신앙인이었다. 본 글은 이처럼 불의한 시대 속에서 진리의 파수꾼이 되고자 했던 왕밍다오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중국 교회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성장했는지 살펴보고, 공산 정권에 맞선 그의 투쟁과 22년간의 수감 생활을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타협 없는 신앙이 오늘날 중국 교회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의화단의 잿더미 속에서 태어난 '빛의 아들'
왕밍다오의 출생은 그의 삶 전체를 예고하는 듯한 극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본명은 '철(鐵)'이었다. 그는 1900년, 의화단 운동의 광기가 베이징을 휩쓸던 바로 그 시기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서양 병원에서 일하던 기독교인으로, 의화단의 박해를 피해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아버지가 죽은 지 몇 달 후 태어난 그는, 이처럼 순교의 피와 고난 속에서 삶을 시작했다.

청년 시절, 그는 자신의 이름 '철'이 너무 강하다고 느껴, "어둠 속에서 빛을 외친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에 근거하여 스스로에게 '밝은 도리'라는 의미의 '밍다오(明道)'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는 어떤 교파나 선교 단체에도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오직 성경만을 유일한 권위로 삼는 독립적인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1925년, 그는 베이징에 '그리스도인 회당'을 세우고, 강력하고 직설적인 설교를 통해 당대 중국 지성계와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와 '거룩한 삶'이었다. 그는 당시 중국 교회에 스며들고 있던 자유주의 신학의 도덕적 상대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타협 없는 메시지는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지만, 동시에 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다.

본론 2: 삼자애국운동과의 투쟁, 그리고 22년의 옥고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왕밍다오와 그가 이끌던 교회는 정면으로 시대의 폭풍과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삼자(三自) 교회다"
공산 정권은 모든 종교를 통제하기 위해, '자치(自治), 자전(自傳), 자양(自養)'이라는 '3자(三自) 원리'를 내세우며, 정부의 지도 아래 모든 교회가 하나로 통합된 '삼자애국운동(三自愛國運動)'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왕밍다오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의 논리는 명확했다. "우리 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외국 선교사의 도움 없이 우리 스스로 다스리고, 우리 스스로 복음을 전하며, 우리 스스로 재정을 책임져 온 진정한 '삼자 교회'다. 우리는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어용 교회가 될 수 없다. 교회의 머리는 마오쩌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그는 "우리는 신앙을 위해 순종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며, 정부의 부당한 간섭에 대한 불복종 운동을 이끌었다.

배교의 아픔과 회복
1955년 8월, 정권은 마침내 그와 그의 아내를 체포했다. 그는 감옥에서 계속되는 심문과 고문, 그리고 동료들의 배교 소식 앞에서 극심한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1년여의 수감 생활 끝에, 석방을 대가로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고 삼자애국운동에 협력하겠다는 '배교' 선언문에 서명하고 만다.

석방된 후, 그는 자신의 연약함과 죄로 인해 깊은 영적 고통에 빠졌다. 그는 사도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했던 것처럼, 자신 역시 주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절망 속에 머무르지 않았다. 1957년, 그는 강단에 올라 눈물로 자신의 배교를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결단했다. 이 정직한 회개 이후, 그는 이전보다 더 큰 담대함과 평안을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기나긴 감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1980년 석방될 때까지, 총 22년 7개월을 감옥과 노동 수용소에서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강제 노동과 굶주림, 질병 속에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동료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결론: 타협 없는 신앙의 등불
1980년, 80세의 노인이 되어 석방된 왕밍다오는, 그를 핍박했던 마오쩌둥 정권이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이후 1991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상하이의 작은 자택에서 수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며 중국 교회의 살아있는 양심이자 정신적 지주로서의 삶을 살았다.

왕밍다오의 유산은 그가 세운 교회의 크기나 저서의 숫자에 있지 않다. 그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그가 보여준 '타협 없는 신앙' 그 자체이다.

그는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했다. 그는 교회가 세상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거룩한 공동체임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증거했다.

그는 죄와 연약함 앞에서의 정직함의 본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치명적인 실패(배교)를 감추지 않고 공개적으로 회개함으로써, 넘어질 수 있는 인간의 연약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증거했다.

왕밍다오의 삶은 20세기 중국 교회가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 '밍다오(밝은 도리)'처럼, 공산주의라는 가장 깊은 이념의 어둠 속에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진리의 빛임을 온몸으로 외쳤던 시대의 파수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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