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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 카마이클 (Amy Carmichael)
인도에서 성전 창녀로 팔려가는 소녀들을 구출하여 '도나부르 공동체'를 세우고 평생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인도의 어머니, 에이미 카마이클: 성전의 아이들을 구한 푸른 눈의 아일랜드 여인
서론: 꽃으로 장식된 비극, 데바다시
19세기 말 인도 남부의 한 힌두교 사원,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어린 소녀가 신상(神像) 앞으로 이끌려 나온다. 그녀는 신과 '결혼'하는 의식을 치른다. 이 의식은 겉보기에는 신성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소녀의 남은 평생을 사원 소속의 성노예, 즉 '데바다시(Devadasi, 신의 여종)'로 묶어두는 끔찍한 족쇄였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잔인한 아동 학대의 굴레 속으로, 푸른 눈의 한 아일랜드 여인이 두려움 없이 뛰어들었다. 그녀의 이름은 에이미 카마이클, 훗날 수천 명의 아이들에게 '암마(Amma, 어머니)'라 불리게 될 인물이었다.
에이미 카마이클은 전통적인 선교사의 범주를 뛰어넘는 인물이다. 그녀는 단순히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넘어, 사회의 가장 어둡고 추악한 죄악의 심장부로 들어가 가장 연약하고 무방비 상태인 어린 영혼들을 구출하는 영적 전사였다. 그녀는 인도 땅을 밟은 후 53년 동안 단 한 번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은 채(without furlough), 자신의 삶 전체를 인도에 헌신했다. 그녀는 인도 여인처럼 사리를 입고, 심지어 자신의 피부를 커피로 염색하며, 철저히 현지인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성육신적 선교'의 위대한 모델이었다.
그녀의 삶은 안락함이나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사역은 위험한 잠입과 구조 활동의 연속이었고, 말년에는 20년간 병상에 누워 고통 속에서 사역을 이어가야 했다. 본 글은 이처럼 숭고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에이미 카마이클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아일랜드의 한 경건한 소녀가 어떻게 '가장 작은 자'를 향한 특별한 소명을 품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녀가 데바다시라는 잔혹한 관습에 맞서 어떻게 싸웠으며 '도나부르 공동체'를 설립하게 되었는지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고난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영성의 열매를 맺었던 그녀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아일랜드의 소녀, '가장 작은 자'를 향한 부르심
에이미 카마이클의 소외된 이들을 향한 깊은 긍휼은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숄(Shawl)을 두른 소녀들
1867년, 북아일랜드의 독실한 장로교 가정에서 태어난 에이미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안정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마음이 처음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하게 된 것은 벨파스트의 빈민가에서였다. 그녀는 주일 아침 교회에 가는 길에, 머리에 숄을 두른 채 무거운 짐을 나르는 가난한 공장 소녀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남루한 모습 때문에 교회에 가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이미는, 그 소녀들을 위해 직접 '틴 홀(Tin Hall)'이라는 작은 예배당을 세워 그들만의 예배 공동체를 만들었다. '숄리(Shawlies)'라 불렸던 이 소녀들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훗날 인도의 버려진 아이들을 향한 거대한 사랑의 예고편이었다.
케직 사경회와 선교의 부르심
그녀의 삶이 선교를 향한 구체적인 방향으로 전환된 것은 영국 케직(Keswick)에서 열린 부흥 집회, 즉 '케직 사경회'에 참석하면서부터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더 깊은 삶(deeper life)'에 대한 메시지를 통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기로 헌신했다. 그녀는 "너는 가서(Go ye)"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렬하게 체험하고, 해외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단했다.
그녀의 첫 선교지는 일본이었지만, 건강 문제와 문화적 차이로 인해 15개월 만에 떠나야 했다. 이후 스리랑카(당시 실론)에서도 잠시 사역했지만, 그곳 역시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녀의 자리가 아니었다. 마침내 1895년, 그녀는 인도로 가는 배에 올랐고, 그곳에서 자신의 남은 53년의 생애를 모두 바치게 될 운명적인 땅, 남인도 타밀나두에 도착했다.
본론 2: '아기 밀수꾼' - 데바다시 제도와의 싸움
인도 남부에서의 초기 사역을 통해, 에이미는 인도 사회의 깊은 곳에 뿌리내린 끔찍한 어둠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아동 성착취, '데바다시(devadasi)' 제도였다.
성스러운 이름 뒤의 잔혹한 현실
'데바다시'는 '신의 여종'이라는 뜻으로, 어린 소녀들을 힌두 사원의 신과 '결혼'시켜 평생 사원의 재산으로 귀속시키는 관습이었다. 이 소녀들은 사제들을 위한 성적인 노리개이자 사원 수입을 위한 성전 창녀로 살아가야 했다. 가난한 부모들이 복을 받기 위해 딸을 사원에 바치거나, 빚 대신 팔아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들은 신의 이름으로 착취당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소망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프리나, 첫 번째 별
에이미의 삶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은 1901년에 일어났다. 어느 날 밤, 일곱 살 난 어린 소녀 프리나(Preena)가 힌두 사원에서 탈출하여 그녀에게 찾아왔다. 프리나의 손바닥에는 사원의 소유물임을 증명하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프리나의 이야기를 통해 데바다시의 끔찍한 실상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된 에이미는, 이 '가장 작은 자'들을 구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프리나를 딸로 삼았고, 그때부터 그녀는 '암마(어머니)'가 되었다.
어둠 속으로 뛰어든 밀수꾼
프리나를 시작으로, 에이미는 성전의 아이들을 구출하는 위험한 사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아기 밀수꾼'이자 '거룩한 탐정'이 되었다. 그녀는 푸른 눈을 감추기 위해 인도 여인처럼 짙은 색의 사리를 입고, 자신의 흰 피부를 커피물로 어둡게 염색했다. 그리고 힌두 순례자로 위장한 채 마을과 사원을 돌아다니며, 팔려가거나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구출 작전을 펼쳤다. 이는 사원의 사제들과 아이들을 팔아넘긴 가족들의 분노를 사는,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다.
구출된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자, 에이미는 그들을 위한 안전한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1901년, 그녀는 인도 남부의 작은 마을 도나부르(Dohnavur)에 땅을 얻어, 구출된 아이들을 위한 공동체를 세웠다. 이것이 바로 '도나부르 공동체(Dohnavur Fellowship)'의 시작이었다. 도나부르는 단순한 고아원이 아니었다. 그곳은 끔찍한 상처를 입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치유받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마을이었다.
본론 3: 도나부르의 '암마', 고난 속에서 쓴 유산
도나부르 공동체는 에이미 카마이클의 남은 생애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녀는 이 공동체의 '암마'로서 수백 명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양육했다.
안식년 없는 53년의 헌신
에이미 카마이클의 헌신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는 그녀가 1895년 인도에 도착한 이후 1951년 숨을 거둘 때까지, 53년 동안 단 한 번도 고향 아일랜드로 돌아가는 안식년(furlough)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도나부르의 아이들을 위해 바쳤고, 인도 땅에 자신의 뿌리를 완전히 내렸다. 그녀의 삶은 그녀가 사랑했던 이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고난의 침상에서 피어난 열매
1931년, 64세의 나이에 에이미는 불의의 사고로 넘어져 척추와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인해 그녀는 남은 20년의 생애를 침상에 누워 보내야 하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 이제 그녀의 사역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고통의 시간은 그녀의 사역에서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시기가 되었다. 침상에 갇힌 그녀는 기도를 통해 도나부르 공동체를 계속해서 이끌었고, 자신의 깊은 영적 묵상과 경험을 글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35권이 넘는 책과 수많은 시, 묵상집을 저술했다. 그녀의 글들은 선교 현장의 낭만적인 환상을 걷어내고, 영적 전쟁의 치열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있는 그대로(Things as They Are)』, 『만일(If)』, 『가시나무에서 핀 장미(Rose from Brier)』와 같은 그녀의 저작들은 전 세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적 도전을 주었고, 엘리자베스 엘리엇을 포함한 후대의 많은 선교사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고난은 사역의 종말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새로운 사역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결론: 이름 없는 무덤에 새겨진 위대한 사랑
1951년, 83세의 나이로 에이미 카마이클은 자신이 세운 도나부르 공동체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자신의 무덤에 어떤 비석도 세우지 말고,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새들의 목욕 터로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가장 작은 자'들을 위한 공간이 되기를 원했다.
에이미 카마이클의 삶은 한 영혼의 가치가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복음의 진리를 온몸으로 살아낸 위대한 증거이다. 그녀는 세상이 버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착취했던 가장 연약한 아이들의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안락함과 평안, 그리고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쳤다.
그녀의 유산은 그녀가 세운 도나부르 공동체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녀가 남긴 수많은 글들은 계속해서 우리의 안일한 신앙을 깨우고 있다. 에이미 카마이클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세상의 가장 어둡고 아픈 곳을 향해 나아갈 용기가 있는가? 우리는 이름도 없고, 보상도 없는 자리에서 '가장 작은 자'의 어머니가 되어줄 수 있는가? 그녀의 삶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도 강력한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