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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어거스틴 (Augustine of Canterbury)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파송을 받아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킨 캔터베리 초대 대주교입니다.

캔터베리의 어거스틴(Augustine of Canterbury): 잉글랜드의 사도, 로마 기독교의 주춧돌
서론: 두 명의 어거스틴, 하나의 다른 사명
기독교 역사에서 '어거스틴'이라는 이름은 거대한 산맥과도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백록』과 『신국론』을 저술한 북아프리카 히포의 위대한 신학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의 이름 앞이나 뒤에 '캔터베리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또 한 명의 어거스틴이 있다. 그는 신학자라기보다는 행동가였고, 철학자라기보다는 선교사였다. 그는 잉글랜드 땅에 로마 가톨릭 신앙의 씨앗을 심고, 오늘날까지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중심인 캔터베리 대주교좌를 설립한 '잉글랜드의 사도'이다.

그의 이야기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황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레고리오 1세(Gregory the Great)의 원대한 비전에서 시작된다. 5세기 초 로마 군단이 철수한 후, 브리튼 섬은 앵글족과 색슨족 등 게르만족 이교도들의 침입으로 암흑기에 빠져 있었다. 한때 존재했던 로마-브리튼 시대의 기독교는 웨일스와 콘월 등 서쪽 변방으로 쫓겨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바로 이 어둠의 땅에 복음의 빛을 다시 전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 로마의 한 수도원장이었던 어거스틴이었다.

그의 선교는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시작되었지만, 교황의 확고한 의지와 현지 왕국의 협력 속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단순히 설교하고 세례를 주는 것을 넘어, 로마 교회의 질서와 구조를 잉글랜드 땅에 이식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이미 섬의 북쪽에서 활동하고 있던 켈트 기독교와의 갈등이라는 복잡한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본 글은 이처럼 잉글랜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어거스틴의 삶과 사역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교황 그레고리오의 비전과 어거스틴의 소심했던 첫걸음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가 켄트 왕국에서 어떻게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고 성공을 거두었는지 추적하며, 마지막으로 로마와 켈트라는 두 기독교 전통의 만남 속에서 그가 남긴 유산과 한계를 평가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교황의 비전과 소심한 선교사
어거스틴의 잉글랜드 선교는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불타는 선교적 열망의 산물이었다. 어거스틴은 그 위대한 비전의 순종적인 도구였다.

"앵글로족이 아니라 천사로다"
전승에 따르면, 그레고리오가 아직 교황이 되기 전, 그는 로마의 노예 시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그는 유난히 희고 고운 피부와 금발을 가진 노예 소년들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들의 출신을 물었고, '앵글로족(Angli)'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자 그레고리오는 탄식하며 말했다. "Non Angli, sed angeli(논 앙글리, 세드 앙겔리)", 즉 "앵글로족이 아니라 천사로다." 그는 이어서 "이처럼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이들이 어둠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훗날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가 왜 그토록 앵글로색슨족의 복음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일화이다. 그는 잉글랜드 땅을 이교의 어둠에서 구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해야 한다는 거룩한 사명감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595년, 그는 이 원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하고, 로마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장이었던 어거스틴을 선교단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선교단
어거스틴은 학식이 깊고 경건한 수도사였지만, 용맹한 탐험가나 열정적인 선교사는 아니었다. 그는 교황의 명령에 순종하여 약 40명의 수도사들과 함께 로마를 떠나 잉글랜드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험난한 여정과 더불어 앵글로색슨족에 대한 끔찍한 소문들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은 사납고 야만적인 이교도들이며, 말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외국인들을 잔인하게 죽인다"는 이야기 앞에 선교단은 공포에 휩싸였다.

결국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어거스틴을 로마로 돌려보내 교황에게 이 선교 계획을 철회해달라고 간청하기로 결정했다. 이 장면은 어거스틴과 그의 동료들이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두려움을 느끼는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는 두려워하는 어거스틴을 꾸짖는 대신, 따뜻한 격려와 함께 그의 권위를 재확인하는 편지를 써주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들아, 시작한 선한 일을 완수하라... 여정의 노고나 사람들의 악한 혀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며, 그들이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상급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교황의 확신에 찬 격려에 힘입어, 어거스틴과 선교단은 다시 용기를 내어 잉글랜드를 향한 여정을 재개했다.

본론 2: 켄트 왕국의 십자가
어거스틴의 선교단이 597년 마침내 잉글랜드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첫 번째 선교지는 치밀한 전략적 고려의 결과였다. 그곳은 바로 잉글랜드 남동부의 켄트 왕국이었다.

준비된 땅, 켄트 왕국
켄트를 선택한 데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켄트의 왕이었던 에델버트(Æthelberht)는 앵글로색슨의 여러 왕들 중 가장 강력한 군주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가 이미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왕비 베르타(Bertha)는 프랑크 왕국의 공주로서, 켄트로 시집올 때 개인 사제와 함께 와서 켄트의 수도인 캔터베리 성벽 밖에 있는 고대 로마 시대의 성 마르틴 교회를 개인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즉, 켄트 왕국에는 이미 기독교 신앙의 작은 불씨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과의 첫 만남
어거스틴과 그의 선교단은 켄트의 새닛(Thanet) 섬에 상륙한 후, 에델버트 왕에게 자신들이 로마에서 왔으며 "인류에게 가장 기쁘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소식"을 가져왔다고 전했다. 이교도였던 왕은 낯선 종교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혹시 모를 마법을 피하기 위해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그들을 만나겠다고 했다.

역사가 베다(Bede)의 기록에 따르면, 이 첫 만남은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어거스틴과 수도사들은 은으로 만든 커다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icon)를 앞세우고, 장엄한 성가(litany)를 부르며 왕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력이 아닌, 로마 교회의 아름답고 질서 있는 예배의 힘으로 왕에게 다가갔다. 어거스틴은 왕에게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설명했고, 왕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즉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당신들의 말과 약속은 훌륭하오"라고 말하며 그들이 수도인 캔터베리에 머물며 자유롭게 설교하는 것을 허락했다.

왕의 세례와 교회의 설립
캔터베리에 거점을 마련한 어거스틴과 수도사들은 검소하고 경건한 삶,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켄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들의 진실된 모습과 복음의 메시지, 그리고 왕비 베르타의 영향력 속에서 마침내 에델버트 왕은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다. 전승에 따르면 왕의 세례는 597년 오순절에 이루어졌다.

왕의 개종은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왕은 누구에게도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모범을 따라 수많은 백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베다는 그해 크리스마스에만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교황 그레고리오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어거스틴에게 더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다. 또한 그는 매우 지혜로운 선교 지침을 내렸다. "이교도들의 신전을 파괴하지 말고, 그 안의 우상들만 제거한 뒤 성수를 뿌려 정화하여 교회를 위한 제단으로 축성하라. 또한 그들이 희생 제물을 바치던 날에는, 그 대신 성인들의 축일을 기념하여 음식을 나누며 축제를 열게 하라." 이는 기존의 문화와 관습을 급진적으로 파괴하는 대신, 기독교적으로 변혁하고 수용하는 '토착화'의 지혜였다.

어거스틴은 갈리아의 아를(Arles)에서 주교로 서품받은 후 캔터베리로 돌아와, 왕이 하사한 땅에 잉글랜드 최초의 대성당, 즉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의 초석을 놓았다. 이로써 캔터베리는 잉글랜드 교회의 영원한 중심지가 되었다.

본론 3: 로마와 켈트, 두 교회의 만남
어거스틴의 선교는 잉글랜드 남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가 마주한 브리튼 섬에는 이미 또 다른 형태의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로마와는 다른 독자적인 전통을 가진 켈트 기독교였다.

또 하나의 기독교, 켈트 교회
로마 군단이 브리튼을 지배하던 시절, 이미 기독교는 브리튼 원주민인 켈트족(브리튼족)에게 전파되어 있었다. 그러나 5세기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으로 이들 켈트 교회는 웨일스, 콘월, 스코틀랜드 등 서부와 북부 지역으로 밀려나 고립되었다. 한편, 아일랜드에서는 성 패트릭과 그의 후예들이 세운 수도원을 중심으로 독특하고 활기찬 켈트 기독교 문화가 꽃피고 있었다. 그리고 성 콜룸바가 스코틀랜드 아이오나 섬에 세운 수도원은 잉글랜드 북부 앵글로색슨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선교 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거스틴이 켄트에 도착했을 때,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이미 아이오나 출신의 켈트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습의 차이와 권위의 충돌
로마에서 온 어거스틴의 교회와 아일랜드-스코틀랜드에서 온 켈트 교회는 핵심적인 신앙은 공유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관습에서 차이를 보였다.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는 방식, 수도사들의 머리를 깎는 방식(톤зу라), 세례 의식 등에서 각자의 전통을 고수했다.

어거스틴에게 이러한 차이는 교회의 보편적 통일성을 해치는 무질서로 보였다. 교황으로부터 잉글랜드 전체 교회의 수장으로 임명받은 그는 켈트 교회 주교들을 만나 자신들의 방식을 버리고 로마의 관습과 교황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요구했다.

전승에 따르면, 어거스틴은 웨일스 국경 근처의 한 참나무 아래에서 켈트 주교들과 두 차례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이 만남은 실패로 끝났다. 베다는 켈트 주교들이 어거스틴을 만나러 가기 전 한 은자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기록한다. 은자는 "만약 그가 여러분이 다가갈 때 겸손하게 일어선다면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말을 들으시오. 그러나 만약 그가 교만하게 앉아 있는다면 그의 말을 듣지 마시오"라고 조언했다. 어거스틴은 그들이 도착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이를 그의 교만함의 증거로 본 켈트 주교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어거스틴의 경직되고 권위적인 태도는 자신들만의 오랜 신앙 전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켈트 교회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이다.

결국 어거스틴은 잉글랜드 교회를 하나로 통일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로마와 켈트 전통의 통합은 그가 죽은 지 수십 년 후인 664년, 휘트비 공의회(Synod of Whitby)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다.

결론: 잉글랜드 교회의 주춧돌
캔터베리의 어거스틴은 604년경 세상을 떠나 그가 세운 캔터베리 수도원에 묻혔다. 그는 성 패트릭이나 성 콜룸바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때로 소심했고, 융통성 없는 로마의 행정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성공적인 선교는 교황 그레고리오의 원대한 비전, 에델버트 왕의 정치적 결단, 그리고 베르타 여왕의 조용한 영향력이라는 여러 요인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그러나 그의 역사적 중요성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라는 이교의 땅에 기독교 신앙을 다시 심은 '잉글랜드의 사도'였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심은 신앙이 로마와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진 '제도적' 기독교였다는 점이다. 그는 잉글랜드 교회의 심장이 될 캔터베리 대주교좌를 설립했고, 로체스터와 런던에 주교좌를 세웠으며, 교회의 조직과 질서의 기틀을 마련했다.

북쪽의 켈트 선교사들이 개인적인 경건과 헌신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남쪽의 어거스틴은 보편 교회와의 일치와 제도적 안정성이라는 주춧돌을 놓았다. 비록 두 전통은 초기에 갈등을 겪었지만, 결국 이 두 흐름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활기찬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로 발전할 수 있었다.

어거스틴의 진정한 유산은 오늘날 전 세계 8천만 성공회 신자들의 정신적 고향인 캔터베리 대성당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순종했던 한 수도사의 발걸음이 어떻게 한 나라의 영적 지도를 바꾸고, 천 년이 넘는 교회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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