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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성 안스가리오 (Anskar)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북유럽의 사도'입니다.

성 안스가리오(Saint Anskar): 북유럽의 사도, 실패를 딛고 선 희망의 개척자
서론: 바이킹의 땅으로 향한 믿음
9세기 유럽, '바이킹'이라는 이름은 공포 그 자체였다. 긴 배(Longship)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이 북방의 전사들은 유럽의 해안과 강가를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파괴했다. 그들의 급작스러운 출현과 잔혹함 앞에 수도원은 불탔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주여, 노르만족의 분노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모두가 그들을 피해 도망치던 시절, 오히려 그들의 심장부인 스칸디나비아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려 했던 한 수도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안스가리오였다.

'북유럽의 사도'라는 영예로운 칭호와는 달리, 성 안스가리오의 삶은 화려한 성공 신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선교 여정은 동시대의 보니파시오처럼 한 민족 전체를 개종시키고 유럽의 정치 지형을 바꾸는 극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사역은 오해와 반대, 폭력적인 약탈과 쓰라린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가 세운 교회는 파괴되었고, 그가 얻은 개종자들은 흩어졌으며, 그의 노력은 당대에 거의 결실을 맺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안스가리오를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한 명으로 만든다. 그의 이야기는 가시적인 성공이 아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을 붙들고 묵묵히 씨앗을 심었던 한 인간의 위대한 인내와 충성심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바이킹이라는 거친 땅을 처음으로 갈아엎은 개척자였고, 그의 실패처럼 보였던 모든 시도는 훗날 스칸디나비아 복음화라는 거대한 수확을 위한 필수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본 글은 성 안스가리오의 삶과 유산을 통해 진정한 선교적 성공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프랑크 왕국의 경건한 수도사가 어떻게 바이킹의 땅을 향한 소명을 품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그가 겪었던 험난한 선교 과정과 거듭되는 시련을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사역이 당대에는 미미해 보였을지라도 장기적으로 북유럽 기독교 역사에 어떤 결정적인 초석을 놓았는지 그 의미를 재평가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수도사의 꿈과 북방을 향한 부르심
안스가리오의 북방 선교는 개인의 돌발적인 결단이 아니라, 당시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던 카롤링거 프랑크 제국의 비전과 한 수도사의 깊은 영적 체험이 만난 결과였다.

코르비 수도원의 경건한 학자
안스가리오는 801년경, 샤를마뉴 대제가 다스리던 프랑크 제국의 아미앵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읜 후, 당대 최고의 학문과 영성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코르비(Corbie)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학생이자 경건한 수도사로 성장했으며, 이후 새로 설립된 코르비의 자매 수도원인 베스트팔렌의 코르바이(Corvey) 수도원으로 파견되어 학교를 책임지는 교장이자 설교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삶의 전기를 쓴 제자 림베르트(Rimbert)의 기록 『안스가리오의 생애(Vita Anskarii)』에 따르면, 그는 젊은 시절부터 여러 차례 신비로운 환상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는 이 환상들을 통해 순교의 영광과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깊이 내면화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수도원 담장 너머, 복음이 닿지 않은 어두운 땅을 향하고 있었다.

정치적 기회와 선교적 소명
안스가리오의 개인적인 소명이 실제적인 선교로 이어진 것은 정치적인 기회를 통해서였다. 샤를마뉴의 아들인 경건왕 루이(Louis the Pious) 황제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제국의 국경을 안정시키고 확장하는 데 기독교 선교를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826년, 덴마크에서 왕위 다툼에 밀려 망명한 하랄 클락(Harald Klak) 왕이 루이 황제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며 프랑크 제국으로 찾아왔다. 황제는 이를 덴마크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로 보고, 하랄과 그의 가족, 그리고 400여 명의 수행원들에게 마인츠에서 성대한 세례식을 베풀어주었다. 하랄이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덴마크 선교의 문이 공식적으로 열린 것이다.

황제는 하랄과 함께 덴마크로 돌아가 복음을 전할 선교사를 찾았지만, '야만적인' 덴마크인들에 대한 공포 때문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때 이 위험한 임무를 자원한 이가 바로 안스가리오였다. 그의 동료들은 그의 결정을 만류했지만, 그는 북방 민족을 향한 자신의 오랜 소명을 이룰 기회로 여기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수도사 한 명과 함께 하랄 왕을 따라 미지의 땅 덴마크로 향했다.

본론 2: 비르카의 얼음 땅과 거듭되는 시련
안스가리오의 선교 여정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그는 왕의 보호라는 불안정한 우산 아래, 이교 신앙이 깊이 뿌리내린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복음의 씨앗을 심어야 했다.

덴마크에서의 첫 시도와 스웨덴으로의 확장
안스가리오의 첫 덴마크 선교는 하랄 왕의 정치적 입지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는 헤데비(Hedeby) 지역에 작은 교회를 세우고, 노예 소년들을 사들여 교육하는 작은 학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하랄 왕이 곧 정적들에게 밀려 다시 추방당하자, 안스가리오의 선교 기반은 순식간에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바로 그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829년, 스웨덴에서 온 사절들이 루이 황제에게 자신들의 땅에도 기독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당시 스웨덴의 비르카(Birka)는 발트해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던 바이킹 도시였다. 안스가리오는 이 새로운 부르심에 응답하여 스웨덴으로 향했다. 그러나 비르카로 가는 뱃길에서부터 시련이 닥쳤다. 그들이 탄 배가 바이킹 해적의 습격을 받아, 선교를 위해 준비한 모든 책과 선물을 빼앗기고 빈손으로 겨우 육지에 상륙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안스가리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비르카에서 스웨덴 왕 비에른(Björn)의 허락을 얻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를 통해 비르카의 고위 관리였던 헤리게르(Herigar)를 포함한 소수의 사람들이 개종했고, 스칸디나비아 최초의 교회 중 하나가 세워졌다. 이 작은 성공은 북방 선교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였다.

함부르크 대주교, 그리고 모든 것을 앗아간 재앙
안스가리오의 초기 성과에 고무된 루이 황제는 북방 선교를 위한 영구적인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831년, 그를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의 초대 대주교로 임명했다. 이는 스칸디나비아와 모든 북방 민족에 대한 선교를 총괄하는 막중한 책임이었다. 안스가리오는 함부르크에 대성당과 수도원, 학교를 세우고 선교사들을 훈련하며 북방 선교의 중심지로 키워나갔다.

그러나 그의 모든 노력은 단 한 번의 습격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845년, 덴마크 바이킹 대함대가 엘베강을 거슬러 올라와 함부르크를 침공했다.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고 불탔으며, 안스가리오가 수년에 걸쳐 세운 대성당과 수도원, 그리고 소중한 책들이 모두 불길 속에 사라졌다. 그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피신해야 했다. 거의 동시에, 스웨덴의 비르카에서도 이교도들의 반란이 일어나 교회가 파괴되고 선교사들이 추방당했다. 15년 넘게 쏟아부었던 그의 모든 선교적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이 재앙 앞에서 절망에 빠져 "주여, 나의 죄 때문이니이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본론 3: 안스가리오의 유산 - 보이지 않는 씨앗
모든 것을 잃었지만 안스가리오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의 남은 생애는 실패의 잿더미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한 끈질긴 투쟁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인내의 과정 속에서 그의 진정한 유산이 만들어졌다.

불굴의 인내와 외교적 노력
함부르크가 파괴된 후, 안스가리오는 수년간 떠돌이 주교 신세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는 대신,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Louis the German) 왕의 후원을 얻어 파괴된 대주교구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덴마크와 스웨덴의 새로운 왕들을 직접 찾아가 설득하며 선교의 자유를 다시 얻어냈다.

그의 끈질긴 노력 끝에 덴마크의 헤데비와 리베(Ribe), 그리고 스웨덴의 비르카에 다시 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들은 여전히 작고 위태로웠으며, 개종자의 수도 미미했다. 그러나 적대적인 이교의 바다 한가운데 세워진 이 작은 교회들은, 기독교 신앙이 북유럽 땅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는 또한 노예들을 사서 해방시키고 교육하는 일을 계속했으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구제 활동을 통해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했다.

가시적 성공을 넘어선 개척자의 유산
안스가리오는 865년 브레멘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었을 때 스칸디나비아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이교도의 땅이었다. 그가 세운 교회들은 언제 다시 파괴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그가 꿈꾸었던 북유럽의 대대적인 복음화는 요원해 보였다. 단기적인 관점에서 그의 선교는 실패라고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유산은 당대의 가시적인 성과로 측정될 수 없다.
첫째, 그는 최초의 개척자였다. 안스가리오 이전에는 아무도 바이킹의 심장부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에 처음으로 도전함으로써, 스칸디나비아 선교의 문을 연 역사적인 인물이다.

둘째, 그는 선교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의 설립은 이후 수 세기 동안 북유럽 선교를 위한 공식적인 본부 역할을 했다. 비록 시작은 미약했지만, 그는 미래를 위한 영적, 행정적 구조를 세운 것이다.

셋째, 그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삶을 기록한 『안스가리오의 생애』는 후대의 선교사들에게 큰 영감과 용기를 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즉각적인 성공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하며 묵묵히 씨앗을 심는 것의 가치를 가르쳐주었다.

안스가리오가 심은 씨앗은 거의 200년이라는 긴 겨울을 지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싹을 틔웠다. 11세기에 이르러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들이 차례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스칸디나비아는 마침내 기독교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이 거대한 역사의 전환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얼음 땅을 처음으로 갈아엎었던 한 수도사의 잊혀진 땀과 눈물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결론: 신실함이 곧 성공이다
성 안스가리오의 삶은 우리에게 '성공'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다. 만약 성공이 눈에 보이는 결과와 즉각적인 성취로만 정의된다면, 그의 삶은 실패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그의 삶은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성공의 이야기이다. 그의 성공은 개종자의 숫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는 절망의 순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불굴의 신실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바이킹의 땅으로 두려움 없이 들어갔고, 해적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신이 세운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북방 영혼들을 향한 사랑과 사명을 놓지 않았다. 그는 화려한 기적을 행하거나 대규모 부흥을 이끌지는 못했지만, 적대적인 땅에 교회의 첫 돌을 놓고, 잊혀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일을 평생 멈추지 않았다.

안스가리오의 이야기는 오늘날 즉각적인 결과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표가 우리의 것과 다를 수 있음을, 그리고 우리의 역할은 수확이 아니라 단지 씨앗을 심는 것일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성 안스가리오는 '북유럽의 사도'라는 칭호를 넘어, '실패를 거룩하게 만든 성인', '희망을 심은 개척자'로서, 결과에 상관없이 부르심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성공인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증인으로 우리 곁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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