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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사무엘 아자이 크라우더 (Samuel Ajayi Crowther)

노예 출신으로, 나이지리아 최초의 아프리카인 성공회 주교가 되어 요루바어 성경 번역을 이끌었습니다.

노예 소년에서 주교로, 사무엘 아자이 크라우더: 아프리카 교회의 첫 새벽을 열다
서론: 운명의 족쇄를 끊고 역사의 주역이 되다
1821년, 서아프리카 요루바(Yoruba)족의 한 마을. 13세의 소년 아자이는 이슬람 풀라니족 노예 사냥꾼들의 습격으로 평화롭던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는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포박되어, 낯선 땅으로 끌려가며 여러 차례 노예 상인의 손에 팔려 다니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그의 미래는 절망과 어둠뿐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사는 이 이름 없는 노예 소년이, 훗날 런던의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아프리카 최초의 성공회 주교로 서품받고, 자신의 민족에게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선물하며, 아프리카 기독교의 새벽을 여는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사무엘 아자이 크라우더. 그의 삶은 한 개인의 성공 신화를 넘어, 노예 제도의 비극과 제국주의의 모순 속에서 피어난 아프리카 교회의 자립을 향한 장엄한 투쟁의 역사이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어떻게 한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을 가장 위대한 소명으로 바꾸시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본 글은 이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무엘 아자이 크라우더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노예선에서 구출되어 기독교 신앙을 만나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아프리카인을 위한, 아프리카인에 의한 선교'라는 그의 선구적인 사역과 아프리카 최초의 주교로서의 활동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위대한 업적이 말년에 인종적 편견이라는 비극적 장벽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불멸의 유산이 무엇인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족쇄에서 세례로 - 운명을 바꾼 여정
사무엘 크라우더의 삶의 첫 장은 아프리카인들이 겪었던 수백 년간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노예선 위의 구출
여러 차례 팔려 다니던 아자이는 마침내 포르투갈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갈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1822년, 그의 운명을 바꿀 기적이 일어났다. 노예 무역을 단속하던 영국 해군의 순찰함이 그가 타고 있던 노예선을 나포한 것이다. 족쇄에 묶여 있던 수백 명의 아프리카인들은 해방되었고, 영국이 해방 노예들을 위해 세운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Sierra Leone) 프리타운(Freetown)으로 보내졌다.

프리타운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구출된 다양한 부족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희망의 땅이었다. 이곳에서 아자이는 영국 성공회 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CMS)가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서구식 교육과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지적 재능을 보이며 빠르게 영어를 익혔고, 성경의 가르침에 깊이 매료되었다. 1825년, 그는 세례를 받고 CMS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던 사무엘 크라우더의 이름을 따, 자신의 새로운 이름으로 삼았다. 노예 소년 아자이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된 사무엘 크라우더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CMS가 세운 푸라베이 대학(Fourah Bay College)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교사가 되었고, 훗날 아프리카 최초의 근대 대학 중 하나가 되는 이 학교의 첫 졸업생이 되었다. 그의 비참했던 과거는, 역설적으로 그에게 아프리카의 여러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고, 서구의 지식과 신앙을 겸비한, 두 세계를 잇는 완벽한 '다리'가 될 준비를 시켜주었다.

본론 2: 니제르강의 사도 - '아프리카인을 위한 아프리카 선교'
크라우더의 재능은 곧 영국 선교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1841년, 미지의 니제르강 내륙을 탐사하는 영국 원정대에 통역관이자 문화 안내인으로 참여했다. 비록 이 원정은 말라리아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실패로 끝났지만, 크라우더는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평생의 사명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자신의 고향, 요루바족을 포함한 니제르강 유역의 부족들이었다.

아프리카인이 이끄는 선교
영국으로 건너가 1843년 성공회 사제로 서품받은 그는, 아프리카 선교에 대한 혁신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아프리카인에 의한, 아프리카인을 위한 선교'**였다. 그는 기후와 질병에 취약하고,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서양 선교사들만으로는 아프리카 복음화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대신, 프리타운에서 서구식 교육과 신앙 훈련을 받은 아프리카인 출신 사역자들로 구성된 선교단을 조직하여 내륙으로 보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비전은 CMS의 지도자 헨리 벤(Henry Venn)의 '3자 원리(자립, 자치, 자전)' 선교 정책과 맞물려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마침내 크라우더는 자신이 직접 이끄는 아프리카인 사역자들로 구성된 '니제르 선교단'을 창설했다. 그는 "성경과 쟁기(Bible and Plough)"라는 구호 아래, 복음 전파와 더불어 면화 재배와 같은 합법적인 상업을 장려하여 노예 무역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총체적인 선교를 추구했다.

아프리카 최초의 주교
크라우더가 이끄는 니제르 선교단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니제르강 유역 곳곳에 선교 거점을 세우고, 학교와 교회를 설립했다. 그의 성공적인 리더십과 아프리카인 자치 선교의 가능성에 고무된 영국 성공회는 1864년, 역사적인 결정을 내린다. 런던의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사무엘 아자이 크라우더를 **'여왕의 영토를 넘어서는 서아프리카 지역의 주교'**로 서품한 것이다.

노예 소년이 전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인 주교가 된 이 사건은, 19세기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 이는 아프리카 교회가 더 이상 서구 교회의 부속물이 아니라, 동등한 파트너로서 스스로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위대한 상징이었다.

본론 3: 비극적인 말년과 지워지지 않는 유산
주교가 된 후에도 크라우더는 20년 넘게 니제르강 유역을 오가며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바로 자신의 모국어인 요루바어 성경 번역을 완성한 것이다. 이 번역은 요루바 민족에게 처음으로 통일된 문자 체계와 문학의 기틀을 마련해주었고, 오늘날까지 나이지리아 기독교 성장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영광스러운 사역의 말년에는 비극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분할하는 '아프리카 쟁탈전'이 심화되면서, 선교계에도 오만하고 인종차별적인 젊은 세대 선교사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프리카인 주교의 권위 아래 일하는 것을 거부했고, 크라우더가 이끄는 니제르 선교단의 운영 방식과 재정 문제를 사사건건 비판했다. 일부 아프리카 사역자들의 도덕적, 재정적 비리가 실제로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젊은 유럽 선교사들은 이를 빌미로 아프리카인 자치 선교 전체를 실패로 규정하고, 선교단의 주도권을 유럽인들이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890년, 선교 본부는 크라우더의 의사와 상관없이 니제르 선교단을 해체하고 유럽인 중심의 위원회로 대체하는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평생의 업적이 인종적 편견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본 크라우더는 깊은 상심 속에서 주교직을 사임했고, 1년 후인 1891년 세상을 떠났다.

결론: 노예선에서 캔터베리까지, 그리고 그 너머
사무엘 아자이 크라우더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죄와 비극을 어떻게 선으로 바꾸시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증거이다. 노예 사냥꾼의 족쇄는 그를 복음의 빛이 있는 시에라리온으로 이끌었고, 영국 해군의 구출은 그를 아프리카 교회의 지도자로 빚는 첫걸음이 되었다.

그의 말년은 비극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했던 서구 교회 일부의 인종적 교만과 편견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무너뜨리려 했던 그의 유산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번역한 요루바어 성경은 오늘날 1억 명이 넘는 요루바족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고, 그가 꿈꾸었던 '아프리카인을 위한, 아프리카인에 의한 교회'의 비전은 20세기 아프리카의 독립과 함께 대륙 전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실현되었다.

사무엘 아자이 크라우더의 여정은 노예선의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캔터베리 대성당의 주교좌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가 앉았던 높은 자리가 아니라, 동족을 향한 그의 변함없는 사랑과, 모든 모욕과 배신 속에서도 끝까지 신실함을 잃지 않았던 그의 인격에 있다. 그는 아프리카 교회의 첫 새벽을 연 별이었으며, 그의 빛은 오늘날 아프리카 대륙을 밝히는 수많은 별들의 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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