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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마즈웸버 (Samuel Zwemer)
'이슬람의 사도'라 불리며, 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이슬람권 선교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이슬람의 사도, 사무엘 즈웨머: 불가능의 땅을 향한 꺾이지 않는 사랑
서론: 견고한 성채의 문을 두드리다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이슬람 세계는 오랫동안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여겨졌다. 십자군 전쟁의 깊은 상흔, 견고한 신학 체계, 그리고 기독교 개종을 배교로 간주하여 사형에 처하는 엄격한 사회 구조는 이슬람권 선교를 거의 불가능한 도전으로 만들었다. 모두가 그 땅을 외면하거나 포기할 때, 오히려 그 성채의 가장 단단한 문을 향해 자신의 전 생애를 던져 끈질기게 문을 두드렸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사무엘 즈웨머, '이슬람의 사도'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삶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수만 명을 회심시킨 부흥사도 아니었고, 거대한 교회를 세운 조직가도 아니었다. 그가 50년 가까운 사역 기간 동안 직접 세례를 준 사람의 숫자는 극히 미미했다. 그는 오히려 '영광스러운 실패자'라는 역설적인 칭호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는 아라비아의 모래바람 속에서 사랑하는 두 딸을 잃고 묻었으며, 동역자들의 죽음과 수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즈웨머의 위대함은 결코 숫자로 측정될 수 없다. 그의 위대함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그의 담대한 용기, 모든 것을 잃는 고통 속에서도 결코 식지 않았던 그의 불굴의 인내, 그리고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무슬림들을 향한 그의 깊고 지적인 사랑에 있다. 그는 이슬람 선교의 황무지를 처음으로 갈아엎은 위대한 개척자였으며, 잠들어 있던 서구 교회를 향해 이슬람 세계의 영적 필요를 외쳤던 예언자적 동원가였다.
본 글은 이 고독한 개척자의 삶과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미국의 젊은 신학생이었던 그가 어떻게 이슬람이라는 가장 어려운 선교지를 향한 소명을 품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그의 선구적인 사역과 개인적인 비극, 그리고 '지성의 사도'로서 그가 펼쳤던 문서 사역과 변증 활동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실패'처럼 보였던 사역이 어떻게 다음 세대를 위한 거대한 초석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슬람 선교에 어떤 깊은 영감을 주고 있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젊은 사자, 이슬람의 심장을 향하다
사무엘 즈웨머의 이슬람을 향한 소명은 청년 시절의 뜨거운 복음주의 열정과 개척 정신의 산물이었다.
학생 선교 운동의 아들
1867년, 미국 미시간주의 네덜란드계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즈웨머는 보수적이고 경건한 신앙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호프 칼리지와 뉴브런즈윅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당시 미국 대학가를 휩쓸고 있던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SVM)'에 깊이 빠져들었다. "우리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라는 SVM의 구호는 그의 젊은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미 선교의 문이 열린 지역이 아니었다. 그는 지도 위에 표시된,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미점령지(unoccupied fields)'에 대한 강렬한 부담감을 느꼈다. 특히 그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고향이자 이슬람의 심장부인 아라비아 반도가 단 한 명의 개신교 선교사도 없는 완전한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가장 어렵고, 가장 도전적이며, 가장 위험한 그곳을 자신의 사명지로 선택했다.
"아라비아 선교회"의 창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즈웨머는 친구 제임스 캔타인(James Cantine)과 함께 여러 선교 단체의 문을 두드렸지만, 아라비아 선교는 너무나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모두 거절당했다. 기존의 어떤 단체도 이 젊은이들의 위험한 꿈을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보내주는 단체가 없다면, 직접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1889년, 그들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아라비아 선교회(The Arabian Mission)'라는 이름의 독립 선교 단체를 자체적으로 조직했다. 그들은 직접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아라비아 선교의 비전을 나누고, 스스로 선교비를 모금했다. 이들의 꺾이지 않는 열정은 마침내 미국 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의 마음을 움직여, '아라비아 선교회'를 교단의 공식적인 선교부로 받아들이게 했다. 1890년, 즈웨머는 마침내 그토록 꿈에 그리던 아라비아를 향한 배에 올랐다.
본론 2: 아라비아의 모래바람 속에서 - 개척과 상실
즈웨머가 마주한 아라비아는 살인적인 더위와 풍토병, 그리고 외부 세계에 대한 극도의 적대감으로 가득 찬 땅이었다. 그의 초기 사역은 끊임없는 고난과 비극의 연속이었다.
성경 판매, 의료, 그리고 변증
즈웨머는 이라크의 바스라, 바레인, 오만의 무스카트 등 페르시아만 연안의 주요 도시에 선교 거점을 마련했다. 공개적인 설교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의 선교 전략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성경 상점(Bible shop)'을 열어 아랍어 성경과 기독교 문서를 판매하고 배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조용하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의 씨앗을 심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둘째는 간단한 의약품을 제공하는 의료 사역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사람들의 경계심을 허물고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셋째는 '개인 전도'와 '변증'이었다. 그는 시장의 찻집과 상점, 바자르를 누비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아랍어를 완벽하게 습득했으며, 코란과 이슬람 신학을 당대의 이슬람 학자들보다 더 깊이 연구했다. 그는 무슬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진 오해를 풀어주고,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신성,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논리적으로 변증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때로 직설적이고 도전적이었지만, 이슬람에 대한 그의 깊은 지식과 무슬림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은 많은 이들에게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개인적 비극의 십자가
아라비아의 가혹한 환경은 그의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당시 페르시아만 지역은 '아이들의 무덤'이라 불릴 만큼 유아 사망률이 높은 곳이었다. 1904년, 바레인에서 사역하던 중 그의 어린 두 딸, 에이미와 릴리가 이질에 걸려 며칠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두 딸의 작은 관을 만들어 묻으며,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만약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저 아이들을 다시 이 세상으로 데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있으니." 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그의 신앙은 그의 삶이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깊은 신학적 반석 위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그는 다른 자녀들과 아내 아미 노크스(Amy Wilkes)마저 잃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본론 3: 펜과 강단 - 세계를 깨운 동원가
아라비아에서의 15년이 넘는 개척 사역 이후, 즈웨머의 역할은 현장 선교사에서 이슬람 선교를 위한 세계적인 전략가이자 동원가로 전환되었다.
펜의 힘: 문서 사역과 학문적 기여
즈웨머는 "인쇄된 페이지의 웅변(the eloquence of the printed page)"을 굳게 믿었다. 그는 선교사가 들어갈 수 없는 곳까지 책과 소책자는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50권이 넘는 영어 서적과 수많은 아랍어 문서들을 저술했다. 그의 책들, 예를 들어 『이슬람: 믿음에의 도전(Islam: A Challenge to Faith)』, 『십자가의 우월성(The Glory of the Cross)』 등은 이슬람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선교적 도전을 담고 있어, 이후 한 세기 동안 이슬람 선교를 위한 필독서가 되었다.
1911년, 그는 **'무슬림 세계(The Moslem World)'**라는 전문 학술지를 창간하여 35년 넘게 편집장으로 섬겼다. 이 저널은 전 세계 선교사들이 이슬람에 대한 이해와 선교 전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플랫폼이 되었다. 그는 이슬람 선교를 단순한 열정의 차원에서 벗어나, 깊이 있는 학문적 연구 위에 세우고자 했던 '학자 선교사'였다.
예언자의 목소리: 선교 동원가
즈웨머는 또한 강력한 연설가였다. 그는 전 세계를 순회하며, 특히 학생자원운동(SVM) 대회와 같은 청년 집회에서 이슬람 세계의 영적 필요를 절절하게 외쳤다. 그의 풍부한 현장 경험과 학문적 깊이, 그리고 불타는 열정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는 잠자고 있던 서구 교회를 향해, 10억 무슬림 영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고 외쳤던 예언자의 목소리였다.
그의 리더십은 1906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제1차 이슬람권 선교사 대회'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이 대회를 조직하고 주도하며, 전 세계에서 흩어져 사역하던 선교사들을 하나로 모아 공동의 비전과 전략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론: 실패한 성공가, 영원한 사도
사무엘 즈웨머는 1952년 뉴욕에서 8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가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무슬림들 가운데서 그가 직접 거둔 열매는 극히 적었다. 만약 선교의 성공이 개종자의 숫자에 있다면, 그의 사역은 '영광스러운 실패'였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유산은 숫자로 측정될 수 없다.
첫째, 그는 불가능의 문을 연 개척자였다. 그는 이슬람의 심장부 아라비아 반도에 처음으로 깃발을 꽂았고, 후대의 선교사들이 따라올 길을 열었다. 그는 이슬람 선교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둘째, 그는 이슬람 선교의 지적 토대를 놓은 학자였다. 그는 이슬람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기독교 변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셋째, 그는 수많은 헌신자들을 일으킨 동원가였다. 그가 직접 거둔 열매는 적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외침에 감동하여 전 세계 이슬람권으로 흩어져 나간 수많은 선교사들을 통해 그는 수천, 수만 배의 열매를 거두었다. 그의 가장 큰 수확은 아라비아의 모래밭이 아니라, 그가 깨운 서구 젊은이들의 마음밭이었다.
사무엘 즈웨머의 삶은 우리에게 성공의 척도는 결과가 아닌 신실함에 있음을 가르쳐준다.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대추수를 보지 못했지만, 가장 단단하고 척박한 땅을 갈아엎고 씨앗을 심는 일을 평생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슬람의 사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오늘날까지도 가장 어려운 곳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선교사들의 마음에 살아있는 용기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