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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 페스토 키벵게레 (Bishop Festo Kivengere)
'아프리카의 빌리 그레이엄'으로 불린 우간다의 성공회 주교로, 이디 아민의 독재 정권 하에서 박해를 피해 망명하면서도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빌리 그레이엄', 페스토 키벵게레: 독재자의 칼날 앞에서 용서를 외치다
서론: 도망자, 그러나 사랑의 사도
1977년, 우간다의 잔혹한 독재자 이디 아민(Idi Amin)의 살해 위협을 피해 국경을 넘는 한 성공회 주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페스토 키벵게레. 그는 모든 것을 잃은 망명자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독재자를 향한 복수심이 아닌, 긍휼과 용서의 기도가 가득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 조국 우간다의 도망자입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사입니다."
페스토 키벵게레는 20세기 동아프리카 부흥 운동이 낳은 가장 위대한 영적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아프리카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열정과 깊은 영성으로 수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아프리카의 빌리 그레이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성공의 순간이 아닌, 가장 끔찍한 박해와 시련의 순간에 빛을 발했다. 그는 자신의 동료이자 스승이었던 야나니 루움(Janani Luwum) 대주교의 순교 앞에서, 복수 대신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십자가 복음의 진정한 능력을 증거했다.
그의 삶은 개인적인 회심을 넘어, 한 민족 전체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로 이끄는 것이 복음의 본질임을 보여주는 위대한 서사이다. 본 글은 이처럼 '용서의 사도'였던 페스토 키벵게레 주교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동아프리카 부흥 운동의 아들이 되었는지 살펴보고, 이디 아민의 폭정에 맞선 그의 용기 있는 투쟁과 순교의 위협을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삶이 오늘날까지도 아프리카 교회와 전 세계에 던지는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동아프리카 부흥 운동의 아들
페스토 키벵게레는 1919년, 우간다와 르완다의 국경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사로 일하던 평범한 젊은이였지만, 1940년대 동아프리카 전역을 휩쓸었던 '동아프리카 부흥 운동(East African Revival)'의 강력한 영향을 받으며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다.
'발로콜레(Balokole, 구원받은 자들)'라 불렸던 이 부흥 운동은, 교리적 지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죄에 대한 공개적인 회개', 그리고 '형제들과의 투명한 교제'를 강조했다. 키벵게레는 이 운동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는 구원의 기쁨을 체험했다.
이 체험은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교사직을 내려놓고, 복음 전도자가 되어 우간다와 주변 국가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프리카인 특유의 유머와 생생한 비유, 그리고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나누는 간증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이후 성공회 사제로 서품받고, 1971년 키게지(Kigezi)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본론 2: 이디 아민의 폭정과 순교의 위협
바로 그 해, 우간다에는 이디 아민이라는 잔혹한 독재자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디 아민은 자신의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으며, 그의 8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약 30만 명의 국민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을 외친 대가
초기에는 아민 정권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던 우간다의 교회 지도자들은, 정권의 폭력과 인권 유린이 극에 달하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특히 우간다 성공회의 대주교였던 야나니 루움과, 그의 동료였던 페스토 키벵게레 주교는 아민의 폭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실종된 사람들의 행방을 묻고 정의를 요구하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77년 2월, 야나니 루움 대주교는 아민에게 보내는 항의 서한을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며칠 후, 정부는 루움 대주교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모든 사람은 그가 아민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했음을 알고 있었다.
도망자,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다
루움 대주교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키벵게레 역시 다음 암살 대상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동료들의 간곡한 권유로, 그는 결국 국경을 넘어 르완다로 피신하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렸다.
망명 생활 중, 그는 자신과 자신의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독재자 이디 아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두고 깊이 고뇌했다. 그리고 그는 증오와 복수가 아닌, '용서'의 길을 택했다.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며 우간다의 참상을 알렸지만, 그의 메시지는 정치적 비난을 넘어섰다. 그는 자신의 간증을 담은 책 **『나는 아민을 사랑한다(I Love Idi Amin)』**를 통해, 자신은 아민의 '죄'는 미워하지만, 그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고 고백했다.
그의 이러한 메시지는,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신음하던 아프리카와 전 세계에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원수를 용서함으로써, 십자가 복음의 가장 깊은 진리를 살아낸 것이다.
결론: 아프리카가 낳은 화해의 사도
1979년 이디 아민 정권이 붕괴된 후, 페스토 키벵게레는 영웅이 되어 조국 우간다로 돌아왔다. 그는 내전의 상처로 분열된 조국을 치유하고, 과거의 원수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도록 돕는 '민족 화해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8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프리카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페스토 키벵게레의 유산은 '용서'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원수를 용서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독재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었다.
그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화해를 이끌었다. 그는 찢겨진 조국에 돌아와, 용서가 국가적인 치유와 재건의 유일한 길임을 선포하고 실천했다.
그는 동아프리카 부흥 운동의 가장 성숙한 열매였다. 그의 삶은 부흥이 단지 개인적인 회심 경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장 끔찍한 사회적, 정치적 악에 맞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함을 증명했다.
페스토 키벵게레는 '아프리카의 빌리 그레이엄'이었지만,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스타디움을 채운 군중의 숫자가 아니라, 독재자의 칼날 앞에서 보여준 용서의 깊이에 있었다. 그의 삶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용서하는 사랑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영원한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