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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미쓰오 후치다 (Mitsuo Fuchida)

진주만 공습을 이끈 일본 해군 비행사였으나, 드셰이저의 간증에 감화받아 기독교인이 된 후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진주만 공습의 영웅, 십자가의 증인이 되다: 미쓰오 후치다의 놀라운 회심
서론: "도라! 도라! 도라!" - 승리의 함성에서 회개의 외침으로
1941년 12월 7일 아침, 하와이 진주만 상공. 일본 제국 해군의 전투기 편대장 미쓰오 후치다 중좌는 기습 공격의 성공을 알리는 암호, "도라! 도라! 도라!(Tora! Tora! Tora!)"를 타전했다. 이 세 단어는 태평양 전쟁의 서막을 연 승리의 함성이었고, 그를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는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한 충성스러운 군인이었으며, 미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는 애국자였다.

그러나 그는 10년 후, 미국과 일본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나는 진주만을 공격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라고 간증하는 복음 전도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의 삶은 20세기 역사상 가장 놀라운 회심 이야기 중 하나로, 전쟁의 증오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서 평화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적과도 같은 증거이다.

그의 변화의 중심에는, 자신이 폭격했던 바로 그 미국의 폭격기 승무원이었던 제이콥 드셰이저의 용서의 간증이 있었다. 한때 서로를 죽이고자 했던 두 원수가, 십자가 안에서 화해하고 형제가 된 것이다. 본 글은 일본의 전쟁 영웅 미쓰오 후치다의 드라마틱한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를 태평양 전쟁의 선봉에 서게 했던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펴보고, 패전 후의 공허함 속에서 그를 회심으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들을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그의 후반기 삶이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던 두 나라에 어떤 화해의 메시지를 던졌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제국의 칼, 진주만을 향하다
미쓰오 후치다는 1902년 나라현의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군인으로서, 뛰어난 조종 실력과 대담한 리더십으로 명성을 쌓았다.

"도라! 도라! 도라!"
그의 군인 인생의 정점은 1941년 12월 7일 찾아왔다. 항공모함 아카기(赤城)에서 발진한 제1차 공격대의 총지휘관으로서, 그는 183대의 전투기를 이끌고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그는 상공에서 전투 전체를 지휘하며, 공격 성공을 알리는 "도라! 도라! 도라!" 암호를 타전했다. 이 공격으로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그는 일본으로 귀환하여 히로히토 천황을 직접 만나는 등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이후 태평양 전쟁의 여러 주요 해전에 참가했지만, 놀라운 우연의 연속으로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출격 직전 맹장염에 걸려 참가를 못 함으로써 항공모함의 침몰을 피했고,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바로 전날에는 임무 때문에 도시를 떠나 목숨을 건졌다. 그는 자신이 신들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다.

본론 2: 패전의 공허함, 그리고 십자가의 빛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다. 후치다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목숨 바쳐 충성했던 제국은 무너졌고, 그가 믿었던 신들의 가호는 사라졌으며, 그는 전범으로 재판받을 위기에 처했다. 그는 깊은 공허함과 분노 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둔했다.

두 번의 만남: 성경과 드셰이저
그의 삶을 바꾼 것은 두 번의 예기치 않은 만남이었다. 첫 번째 만남은, 도쿄 시부야역에서였다. 그는 미군이 배포하는 기독교 전도지를 경멸하며 지나치려다, 그 전도지를 나누어 주던 사람이 바로 전쟁 중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옛 부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부하가 어떻게 원수였던 미국인들의 종교를 전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부하는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한 젊은 미국인 여선교사 페기 코벨(Peggy Covell)의 조건 없는 사랑과 친절에 감동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간증했다. 코벨의 부모는 필리핀에서 일본군에게 참수당했지만, 그녀는 일본인들을 용서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는 것이었다. 후치다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용서'라는 개념에 처음으로 부딪혔다.

두 번째 결정적인 만남은 한 권의 책을 통해서였다. 1948년, 그는 시부야역 근처에서 제이콥 드셰이저가 쓴 **"나는 일본의 포로였다(I Was a Prisoner of Japan)"**라는 간증 소책자를 우연히 발견했다. 자신들이 그토록 증오했던 둘리틀 특공대원 중 한 명이, 포로수용소에서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어, 자신을 학대했던 일본인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는 드셰이저를 변화시킨 그 '성경'이라는 책을 직접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신약성경을 읽던 중, 누가복음 23장 34절의 말씀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그는 드디어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용서의 근원을 발견했다. 1950년, 진주만 공습의 영웅 미쓰오 후치다는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다.

본론 3: 원수에서 형제로, 평화의 사도가 되다
회심 이후, 미쓰오 후치다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그는 더 이상 제국의 군인이 아니라, 십자가의 군병이 되었다.

원수와의 화해
1950년, 후치다는 자신을 회심으로 이끈 장본인, 제이콥 드셰이저를 직접 찾아갔다. 한때 하늘과 땅에서 서로를 죽이고자 했던 두 명의 원수가,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마주 앉아 손을 잡고 함께 기도했다. 이 역사적인 만남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평화의 사도로서의 삶
후치다는 이후 전도자가 되어, 자신의 남은 생애를 복음을 전하는 데 바쳤다. 그는 '하늘의 영광(Air Versus Heaven)'이라는 단체의 일원으로, 자신의 동료였던 제이콥 드셰이저와 함께 일본과 미국, 그리고 아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간증 집회를 열었다.

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동일했다. "나는 진주만 공격을 이끌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는 한때 당신들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나를 변화시킨 그리스도의 사랑은, 당신들 역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진주만 공습의 영웅이 전하는 이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에 초청받아 간증하기도 했다.

결론: 진주만보다 위대한 기적
1976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미쓰오 후치다의 삶은 전쟁의 증오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적의 증거였다. 그는 진주만 기습이라는 역사적인 성공을 이끌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는 포로수용소에서 성경을 읽고 원수를 용서한 한 미군 병사의 간증 앞에 무릎을 꿇은 순간이었다.

그의 삶은 제이콥 드셰이저의 이야기와 함께, 20세기 전쟁사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화해의 서사시를 이룬다. 폭탄을 떨어뜨린 자와 공습을 지휘한 자,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원수였던 두 사람이 십자가 아래서 형제가 되어 평화의 복음을 함께 전하게 된 것이다.

미쓰오 후치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인간의 가장 깊은 증오와 민족적 적대감조차도, 십자가의 용서하는 사랑 앞에서는 녹아내릴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삶은 진주만의 포화보다 더 강력한, 그리고 원자폭탄의 섬광보다 더 밝은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는 영원한 메시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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