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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셔우드 홀 (Rosetta Sherwood Hall)
한국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며, 한국 최초의 여성 의료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점자 교육을 도입했습니다.

조선의 아픔을 치유한 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 고난을 넘어 사랑을 실천한 위대한 개척자
서론: 개인의 비극을 시대의 희망으로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이역만리 조선 땅에서 전염병으로 잃었다. 어린 딸 루비는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고, 아들 셔우드는 맹인이 된 친구를 위해 의사가 되겠다 다짐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의대생 시절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만약 한 사람의 삶에 이 모든 비극이 닥쳤다면, 그는 절망하고 쓰러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로제타 셔우드 홀은 자신의 모든 개인적인 아픔과 상실을, 이 땅의 가장 소외된 이들을 향한 더 위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승화시켰다.
로제타 홀은 구한말 조선에 도착한 최초의 여성 의료 선교사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이 땅의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전문 의료인이 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한국 최초의 여성 의료 교육을 시작했고,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맹인과 농아들을 위해 최초의 특수 교육의 문을 열었으며,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 씰 운동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녀의 삶은 끊임없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보다 더 아픈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상처 입은 치유자'의 여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물로 조선 땅의 가장 깊은 상처를 어루만졌고, 그 자리에 치유와 교육, 그리고 희망의 씨앗을 심었다. 본 글은 이처럼 숭고한 삶을 살았던 로제타 셔우드 홀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녀가 어떻게 조선의 의료 선교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남편 윌리엄 홀과의 동역과 비극적인 사별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개인적인 슬픔을 딛고 그녀가 이 땅에서 펼친 선구적인 여성 의료 교육과 특수 교육 사역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헌신이 한국 의료 및 교육사에 어떤 불멸의 족적을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조선을 향한 부르심과 남편의 죽음
1865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로제타 셔우드는 펜실베이니아 여성의과대학을 졸업한 유능한 의사였다. 그녀는 뉴욕의 빈민가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중, 해외 선교에 대한 강렬한 부르심을 받고 1890년 미국 북감리회 파송을 받아 조선으로 향했다.
여성 전용 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유교적인 '내외법' 때문에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는 것을 극도로 꺼려, 간단한 질병으로도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여성들을 위해 메리 스크랜튼이 세운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 여성을 보호하고 구하는 집)'에, 로제타는 2대 책임 의사로 부임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수많은 조선 여성들의 생명을 구하며, 의사로서뿐만 아니라 친구이자 복음의 전달자로서 그들의 마음을 열었다.
동역자 윌리엄 홀과의 만남과 비극
1892년, 그녀는 자신보다 1년 먼저 한국에 와있던 동료 의료 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평양으로 선교지를 옮겨, 의료의 불모지였던 그곳에 병원을 세우고 복음을 전하며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그러나 행복은 길지 않았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평양은 끔찍한 전쟁터로 변했다. 윌리엄 홀은 밤낮으로 부상자들을 돌보다가, 그 자신도 발진티푸스에 걸려 34세의 젊은 나이로 순직하고 말았다. 갓 태어난 아들 셔우드와 어린 딸 이디스를 안고 남편의 죽음을 맞이한 로제타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본론 2: 슬픔을 딛고 일어선 개척자
모두가 그녀의 선교사로서의 삶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제타는 개인적인 슬픔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선을 잊을 수 없었다. 3년 후, 그녀는 두 아이와 함께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후반기 사역은 더욱 위대한 헌신으로 불타올랐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를 길러내다
조선으로 돌아온 그녀는 한 명의 의사로서 환자를 돌보는 것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녀는 "조선 여성들의 건강은 조선 여성 의사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이는 아이다 스커더와 같은 비전이었다.
그녀는 보구여관에 '의학 훈련반'을 개설하여, 총명한 조선 여성들을 선발해 본격적인 의료 교육을 시작했다. 그녀의 첫 제자 중 한 명이 바로 김점동(金點童)이었다. 로제타는 김점동의 뛰어난 재능을 발견하고, 그녀가 미국에서 정식으로 의학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유학길을 열어주었다. 마침내 1900년, 김점동은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에스더 K. 박'이라는 이름의 의사가 되어 돌아왔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로제타의 헌신적인 노력은 이렇게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그녀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1928년, 마침내 여성 의료 인력 양성을 위한 전문 교육 기관인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했고, 이는 훗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중요한 모태가 되었다.
어둠 속에 빛을: 특수 교육의 시작
로제타 홀의 사랑은 사회의 가장 낮은 곳, 아무도 돌보지 않던 장애인들에게까지 향했다. 그녀의 딸 루비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는 슬픔 속에서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저는 자를 걷게 하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했다. 그리고 그녀는 조선의 수많은 맹인들의 영혼과 육신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을 자신의 새로운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1895년, 그녀는 평양에서 만난 한 맹인 소녀를 위해, 뉴욕에서 개발된 '뉴욕 포인트' 점자법을 연구하여 최초의 한글 점자를 개발했다. 이를 통해 그녀는 한국 최초의 맹인 학교인 '평양여맹학교'를 설립하여, 맹인들에게 글을 읽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또한 그녀는 아들 셔우드의 이름을 따 '셔우드 홀 농아학교'를 세워 농아들을 위한 교육의 문도 활짝 열었다.
본론 3: 대를 이은 헌신과 크리스마스 씰
로제타의 헌신은 그녀의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평양에서 태어난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은 맹인 친구를 치료해주겠다는 어린 시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의사가 되어, 1926년 부모님의 뒤를 이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결핵 퇴치를 위한 첫걸음, 크리스마스 씰
당시 한국은 '결핵 왕국'이라 불릴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셔우드 홀은 아버지 윌리엄 홀이 순교했던 땅, 평양 근처의 해주에 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결핵 퇴치 사업에 헌신했다. 그는 결핵의 심각성을 알리고 치료 기금을 모으기 위해, 1932년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Christmas Seal)**을 발행했다. 거북선을 타고 있는 남대문을 그린 이 첫 씰은, 이후 수십 년간 한국인들의 가슴에 사랑과 나눔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어머니 로제타가 시작한 사랑의 사역이, 아들을 통해 온 민족을 위한 운동으로 확장된 것이다.
결론: 고난의 땅에 피운 치유의 꽃
로제타 셔우드 홀은 1933년까지 43년간 한국에서 사역한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8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남편 윌리엄 홀과 딸 루비의 곁,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그녀의 삶은 상실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고난을 주저앉는 이유가 아닌, 더 큰 사랑을 실천하는 동력으로 삼았다. 남편의 죽음은 그녀를 평양으로 다시 이끌었고, 딸의 죽음은 그녀의 눈을 맹인들에게로 향하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를 통해, 이 땅의 가장 아픈 이들을 치유하는 통로가 되었다.
로제타 홀은 단지 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교육을 통해 여성들에게 자존감과 가능성을 심어준 해방자였고, 점자를 통해 맹인들에게 세상의 빛을 선물한 개척자였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증거한 위대한 사도였다. 그녀가 심은 작은 씨앗들은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최초의 맹인 학교, 그리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과 크리스마스 씰 운동이라는 풍성한 열매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이 땅 위에서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희망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