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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모리슨 (Robert Morrison)
최초의 개신교 중국 선교사로, 중국어 성경 번역과 중국어-영어 사전을 편찬하여 후대 선교사들의 길을 열었습니다.

중국의 문을 연 최초의 거인, 로버트 모리슨: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성경을 번역하다
서론: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다
19세기 초, 청(淸)나라의 중국은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 여기며 외부 세계를 향해 굳게 빗장을 걸어 잠근 '금단의 제국'이었다. 서양인들은 광저우(廣州)의 제한된 구역에만 머물러야 했고, 중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였으며, 이들의 '야만적인' 종교를 전파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문이 닫힌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 시절, 이 거대한 제국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홀로 도착한 한 젊은 영국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모리슨, 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그의 선교는 허드슨 테일러처럼 수많은 동역자와 함께 내륙으로 행진하는 역동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선교는 고독 그 자체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설교할 수도, 교회를 세울 수도 없었다. 그는 27년의 사역 기간 동안 불과 열 명 남짓한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을 뿐이다. 만약 선교의 성공을 개종자의 숫자로만 평가한다면, 그의 삶은 처참한 실패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버트 모리슨의 위대함은 눈에 보이는 열매에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쟁기를 들고 거대한 밭을 갈아엎어 다음 세대가 씨를 뿌릴 수 있도록 옥토를 만든 개척자의 헌신에 있다. 그는 후대의 모든 선교사들이 사용할 두 가지 결정적인 도구, 즉 중국어 성경과 중영(中英)사전을 만드는 데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그는 열매를 거두는 자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주춧돌을 놓는 자였다.
본 글은 이 고독한 거인의 삶과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영국의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 어떻게 중국을 향한 거대한 소명을 품게 되었는지 그의 준비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온갖 제약과 감시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남아 위대한 번역 과업을 수행했는지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사역이 비록 당대에는 미미해 보였을지라도 중국과 세계 선교 역사에 어떤 거대한 초석을 놓았는지 그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가난한 구두장이의 아들, 중국을 향한 부르심
윌리엄 캐리와 마찬가지로, 로버트 모리슨 역시 비천한 배경 속에서 위대한 비전을 싹틔웠다.
독학으로 이룬 학문과 선교의 열정
로버트 모리슨은 1782년 영국 노섬벌랜드의 가난한 구두골(last-maker)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해야 했지만, 배움에 대한 그의 갈망은 남달랐다. 그는 일하는 틈틈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 고전어와 신학을 독학으로 깨우쳤다. 그의 경건함과 학문적 재능은 주변의 인정을 받았고, 마침내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해 호xton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일찍부터 세계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LMS)에 지원했고, LMS는 당시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가장 위험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선교지, 바로 중국으로 그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비밀스러운 준비와 담대한 고백
중국으로 떠나기 전, 모리슨은 런던에서 용삼덕(Yong Sam-tak)이라는 중국인 유학생을 만나 비밀리에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인이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된 중죄였기에, 모든 수업은 극도의 보안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또한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중국어 성경 필사본(사도행전, 바울 서신 일부)을 밤을 새워가며 베끼는 등, 중국 땅을 밟기도 전에 이미 자신의 평생 과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1807년, 그는 마침내 중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당시 선교사를 혐오했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그에게 뱃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그는 미국을 경유하는 배를 타야만 했다. 배에 오르기 전, 뉴욕의 한 선주가 그에게 비꼬는 투로 물었다. "모리슨 씨, 당신은 정말로 저 위대한 중국 제국의 우상숭배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겁니까?" 젊은 모리슨은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선생님. 하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기대합니다(No sir, but I expect God will)." 이 대답은 그의 평생의 신앙을 요약하는 것이었다.
본론 2: 광저우의 그림자 속에서 - 고독한 개척자
1807년 9월 7일, 모리슨은 마침내 중국 광저우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선교의 자유가 아닌, 숨 막히는 감시와 완전한 고립이었다.
숨 막히는 고립과 생존 전략
당시 서양인들은 광저우의 '13행(行)'이라 불리는 좁은 상관(商館) 구역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여성의 거주는 금지되었기에 아내와 동행할 수도 없었고, 중국인과의 자유로운 교제는 불가능했으며,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한 신분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모리슨은 초기에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그는 지하실에 숨어 살며, 중국인 복장을 하고 변발을 길렀으며, 젓가락으로 식사하는 등 중국인과 똑같이 생활하며 자신을 위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오히려 더 많은 의심을 사자, 그는 전략을 바꾸었다.
1809년, 그는 자신의 생존과 사역을 위한 결정적인 결단을 내린다. 바로 자신을 배척했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정식 통역관으로 취직한 것이다. 이는 어떤 이들에게는 세속 권력과의 타협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모리슨에게는 가장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이 직위는 그에게 중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신분을 보장해주었고, 안정적인 수입을 통해 선교 자금을 마련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무엇보다 중국의 학자들과 문헌에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회사의 통역관이라는 가면 아래, 밤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는 비밀스러운 이중생활을 시작했다.
목숨을 건 동역
모리슨의 가장 큰 어려움은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특히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이라는 거대한 작업을 위해서는 중국인 학자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러나 중국인이 서양인과 교류하며 그들의 책을 만드는 것을 돕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고(蔡高, Cai Gao)와 같은 용감한 중국인 학자들이 비밀리에 그를 도왔다. 그들은 독이 든 약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만약 당국에 발각될 경우 음독자살할 각오로 모리슨의 작업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본론 3: 말씀의 쟁기질 -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
공개적인 활동이 불가능했던 모리슨에게 선교는 곧 '번역'이었다. 그는 후대의 선교사들이 사용할 두 가지 강력한 무기를 만드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중국 최초의 개신교 성경
모리슨의 필생의 과업은 성경 전체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인도 회사의 고된 업무를 마친 후, 밤마다 등불 아래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문을 한자 한 자와 씨름하며 번역해나갔다. 이 작업은 언어의 차원을 넘어선 문화적, 신학적 창조 작업이었다. 'God', 'Spirit', 'Sin'과 같은 기독교의 핵심 개념을 중국의 사상과 철학 속에서 가장 적절한 단어로 옮기는 것은 엄청난 학문적, 영적 통찰을 요구했다.
1813년, 그는 마침내 신약성경 번역을 완성하고 비밀리에 인쇄했다. 이후 그의 유일한 동역자로 중국에 온 윌리엄 밀른(William Milne)과 함께 구약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마침내 1823년 세계 최초의 중국어 개신교 신구약 전서인 **『신천성서(神天聖書)』**를 완간했다. 이는 중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비록 이 성경은 문어체인 문리체(文理體)로 번역되어 일반 대중이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후 모든 중국어 성경 번역의 foundational text가 되었다.
제국의 열쇠, 중영사전
성경 번역과 동시에 모리슨은 또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바로 중국어-영어 사전 편찬이었다. 이는 단순히 선교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구 세계가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명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열쇠였다. 그는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총 6권, 4,703페이지에 달하는 기념비적인 **『화영자전(華英字典, A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을 1823년에 완간했다.
이 사전은 단순한 단어 목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의 역사, 문화, 철학, 관습에 대한 해설을 담은 방대한 백과사전이었다. 이 사전은 이후 거의 100년 동안 서양인들이 중국을 연구하는 데 있어 가장 권위 있는 표준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동서 교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영국 학계에서도 인정받아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결론: 보이지 않는 주춧돌, 한 시대의 문을 열다
로버트 모리슨은 27년간의 고독한 사역 끝에 1834년, 그가 평생을 헌신했던 땅 광저우에서 눈을 감고 마카오에 묻혔다. 그가 세례를 준 중국인은 그의 조수였던 채고를 포함하여 불과 10여 명에 불과했다. 이 숫자만 본다면 그의 선교는 명백한 실패이다.
그러나 모리슨의 유산은 개종자의 숫자로 측정될 수 없다. 그는 열매를 거두는 사람이 아니라, 황무지를 개간하고 주춧돌을 놓아 다음 세대가 거대한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모든 기초 공사를 홀로 감당한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것은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데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도구, 즉 **'말씀(중국어 성경)'**과 **'언어(중영사전)'**였다.
그의 뒤를 이어 중국으로 온 허드슨 테일러와 수많은 선교사들은 바로 모리슨이 만든 이 두 가지 도구를 손에 들고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내륙으로 복음의 물결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로버트 모리슨이 굳게 닫힌 문틈으로 힘들게 흘려보낸 작은 물줄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로버트 모리슨의 삶은 인내와 충성의 전형이다. 그는 즉각적인 성공이나 대중의 환호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칠흑 같은 어둠과 완전한 고립 속에서도, 다음 세대를 위해 묵묵히 쟁기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중국 선교라는 거대한 건물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 보이지 않는 주춧돌이다. 그러나 그 주춧돌이 없었다면, 중국 교회의 장엄한 건물은 결코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삶은 진정한 위대함이란 때로 가장 외롭고 이름 없는 자리에서, 미래를 위한 헌신을 통해 이루어짐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