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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데미안 신부 (Father Damien)

벨기에 출신 가톨릭 사제로, 하와이 몰로카이섬에 격리된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돌보다 자신도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몰로카이의 성자, 데미안 신부: 살아있는 지옥에서 피어난 사랑의 기적
서론: "우리 한센병자들"
1873년 하와이 몰로카이(Molokai)섬. 수백 명의 한센병(나병) 환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죽음만을 기다리던 그 절망의 땅에, 33세의 한 벨기에 출신 사제가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몇 주 후, 섬에 세워진 작은 성당의 강론대에서 이렇게 첫 설교를 시작했다. "우리 한센병자들은… (We lepers…)" 이 두 단어는 그의 남은 생애 전부를 요약하는 선언이었다. 그는 더 이상 외부에서 온 방문객이나 사제가 아니었다. 그는 기꺼이 그들의 고통과 운명에 동참하여, 스스로 '한센병자'가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데미안, 본명은 요제프 드 베스테르(Jozef de Veuster). 그는 의사도, 사회 개혁가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버림받은 영혼들을 향한 연민으로, 살아있는 지옥이라 불리던 몰로카이로 자원하여 들어간 평범한 사제였다. 그러나 그의 헌신적인 삶은 한 섬의 운명을 바꾸었고, 전 세계의 양심을 일깨웠으며, 2009년 가톨릭 교회에 의해 마침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조건 없는 사랑이 가장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어떻게 기적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이다. 그는 환자들의 썩어가는 상처를 직접 싸매주었고, 그들을 위해 관을 짰으며, 무법천지였던 섬에 질서와 희망을 세웠다. 본 글은 이처럼 '몰로카이의 성자'로 불리는 데미안 신부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고립된 섬으로 향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절망의 땅을 희망의 공동체로 바꾸어 나간 그의 헌신적인 사역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자신도 한센병 환자가 되어 맞이한 그의 숭고한 죽음과 그가 남긴 유산의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약속의 땅, 절망의 섬으로
데미안 신부는 1840년 벨기에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형을 따라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회(Congregation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에 입회하여 선교사를 꿈꾸었다.

형을 대신한 부르심
원래 하와이 선교사로 파송될 예정이었던 것은 그의 형 팜필레(Pamphile)였다. 그러나 형이 발진티푸스에 걸려 떠날 수 없게 되자, 아직 사제 서품도 받지 않았던 동생 데미안이 형을 대신하여 가겠다고 자원했다. 1864년,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사제 서품을 받고, 하와이의 여러 섬을 오가며 원주민들을 위한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자원하여 들어간 살아있는 지옥
당시 하와이 왕국은 서양에서 들어온 한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면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1865년, 카메하메하 5세 국왕은 전염을 막기 위해, 모든 한센병 환자들을 마우이섬과 몰로카이섬 사이에 있는 칼라우파파(Kalaupapa) 반도로 강제 이주시키는 법령을 공포했다.

몰로카이는 사실상의 사형 선고와 같았다. 그곳에는 어떤 법도, 의료 시설도, 제대로 된 거처도 없었다. 환자들은 가족과 생이별하여 이 절망의 섬으로 보내졌고, 술과 폭력, 그리고 도덕적 타락 속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1873년, 하와이의 주교는 사제들에게 이 버림받은 영혼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그 죽음의 땅에 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젊은 데미안 신부가 조용히 자원하고 나섰다. 그는 처음에는 몇 달만 머물 예정이었지만, 섬의 끔찍한 참상을 목격한 후, 자신의 남은 생애 전부를 그곳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본론 2: 목수, 의사, 그리고 영혼의 아버지
데미안 신부가 도착했을 때, 몰로카이는 무질서와 절망 그 자체였다. 그는 이 땅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제이자 동시에 목수, 의사, 교사, 그리고 법관이 되어야 했다.

공동체를 건설하다
물리적 재건: 그는 가장 먼저 환자들을 위한 깨끗한 집을 지어주었다. 그는 직접 톱과 망치를 들고 나무를 잘라 오두막을 짓고,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로를 건설했다. 그는 죽은 이들을 위해 손수 관을 짜고 무덤을 파주어, 그들이 마지막 길이라도 인간다운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왔다.

사회적 재건: 그는 무법천지였던 섬에 법과 질서를 세웠다. 그는 밴드를 조직하고, 합창단을 만들었으며, 경작지를 일구어 공동체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노력으로, 절망의 섬은 점차 희망과 질서를 가진 공동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상처를 어루만지다
영혼의 치유자: 그는 매일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를 주며, 죽어가는 이들의 임종을 지켰다. 그는 환자들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어, 그들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었다.

육신의 치유자: 의학 지식은 없었지만, 그는 환자들의 썩어가는 상처를 두려움 없이 직접 씻기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한센병 환자와의 신체 접촉을 극도로 꺼렸던 시대에 엄청난 충격이자, 가장 강력한 사랑의 증거였다. 그는 환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같은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며, 스스로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본론 3: "우리 한센병자들" - 십자가의 영광
1884년 12월, 11년간의 헌신적인 사역 끝에, 데미안 신부 자신도 마침내 한센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뜨거운 물에 발을 담갔는데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던 것이다.

고통 속에서 피어난 기쁨
이 소식은 그에게 절망이 아닌, 오히려 기쁨과 감사였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환자들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는 이제 외부인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우리 한센병자들'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병든 몸을 이끌고, 죽기 전까지 남은 5년 동안 이전보다 더욱 정력적으로 사역했다. 그는 자신의 병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십자가로 받아들였다.

그의 병과 헌신적인 삶에 대한 소식이 점차 외부 세계에 알려지면서, 몰로카이를 향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들이 섬으로 들어왔고, 후원금이 모였으며, 하와이 정부도 마침내 섬의 환경 개선에 나서게 되었다.

죽음과 영원한 유산
1889년 4월 15일, 16년간의 몰로카이 사역 끝에 데미안 신부는 49세의 나이로 섬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돌보던 양 떼의 곁에 묻혔다.

그가 죽은 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같은 저명한 작가들이 그의 숭고한 삶을 알리면서, 그는 전 세계적인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의 삶은 마하트마 간디에게도 깊은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를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공식 선포했다. 그의 고향 벨기에는 그의 유해를 고국으로 송환하여 국가적 영웅으로 예우했으며, 미국 하와이주는 그의 동상을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의 '내셔널 스태츄어리 홀'에 주를 대표하는 위인으로 세웠다.

결론: 가장 낮은 곳에 임한 하나님 나라
데미안 신부의 삶은, 한 사람이 자신을 온전히 비울 때 얼마나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증거이다. 그는 신학 논쟁이나 웅변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상처를 만지고, 환자들과 함께 먹고, 마침내 그들과 똑같은 병을 앓음으로써,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성육신의 신비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그는 살아있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 그곳을 희망과 존엄성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놓았다. 그의 삶은, 교회의 진정한 사명이 세상의 가장 어둡고 고통받는 곳, 모두가 외면하고 두려워하는 바로 그곳에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데미안 신부는 오늘날까지도 자신의 안락함을 버리고 기꺼이 '우리 한센병자들'이라고 말할 용기가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순수하고도 강력한 영감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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