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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폰 진젠도르프 (Nikolaus von Zinzendorf)
18세기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끌며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개신교 최초의 조직적인 선교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파수꾼' 진젠도르프 백작: 모라비안 공동체와 최초의 개신교 선교 운동
서론: "나는 오직 하나의 열정만을 갖기를 원한다. 그것은 예수, 오직 예수이다."
18세기 초,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의 뜨거운 열정이 식고, 차가운 교리 논쟁과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다. '세계 선교'라는 개념은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에게 낯설거나 심지어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바로 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던 시대에, 독일의 한 젊은 귀족 백작이 자신의 모든 부와 명예, 그리고 생애를 바쳐 세계 선교의 불을 지폈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진젠도르프,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단 하나의 열정으로 살았던 위대한 선교의 비전가였다.
그는 박해받던 신앙의 난민들을 위해 자신의 영지를 피난처로 내어주었고, 그곳에 '헤른후트(Herrnhut, 주님의 파수꾼)'라는 이름의 경건 공동체를 세웠다. 그리고 이 작은 공동체는, 이후 150년 동안 로마 가톨릭 전체가 보낸 선교사보다 더 많은 선교사를 전 세계에 파송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의 신앙은 '가슴의 종교'였다. 그는 차가운 교리가 아닌,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이고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강조했다. 본 글은 이처럼 개신교 선교의 역사를 새로 쓴 진젠도르프 백작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경건주의의 후예로 성장하여 '헤른후트' 공동체를 세우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24시간 연속 기도회'와 '제비뽑기'로 대표되는 모라비안 공동체의 독특한 영성과, 그것이 어떻게 세계 선교의 동력이 되었는지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유산이 오늘날 교회에 던지는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경건주의의 아들, 신앙 난민들의 보호자가 되다
진젠도르프의 뜨거운 신앙은 독일 경건주의(Pietism)의 창시자였던 그의 대부(代父) 필립 야코프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마음의 교단'을 꿈꾼 소년
1700년, 오스트리아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신앙심을 보였다. 그는 경건주의 교육의 중심지였던 할레(Halle)의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며, "상처 입은 구주를 향한 사랑"을 자신의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그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겨자씨 교단(The Order of the Grain of the Mustard Seed)'이라는 비밀 신앙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법학을 공부하고 작센 궁정에서 관료로 일하며 세속적인 성공의 길을 걸었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향해 있었다.
헤른후트: '주님의 파수꾼' 공동체의 탄생
1722년, 그의 삶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종교개혁 이전부터 순수한 신앙의 명맥을 이어오다 가톨릭의 극심한 박해를 피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을 떠돌던 '형제 연합(Unitas Fratrum)'의 후예들이 그의 영지 베르텔스도르프(Berthelsdorf)로 피난을 온 것이다. 진젠도르프는 기꺼이 그들에게 자신의 땅을 내어주었고, 그들이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도록 도왔다. 그는 이 마을의 이름을 '헤른후트(Herrnhut)', 즉 '주님의 보호 아래' 또는 '주님을 위한 파수'라는 의미로 지었다.
초기 헤른후트 공동체는 서로 다른 신학적 배경을 가진 난민들이 모이면서 극심한 갈등과 분열의 위기를 겪었다. 이때 진젠도르프는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교리적 차이를 넘어, '피 흘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을 호소하며, 공동체 규약을 만들고 질서를 세웠다.
본론 2: 100년간 이어진 기도와 제비뽑기 선교사
헤른후트 공동체를 하나로 묶고, 그들을 세계를 향한 선교의 군대로 만든 것은 두 가지 독특한 영적 실천이었다.
100년간 꺼지지 않은 기도의 불
1727년 8월 13일, 헤른후트 공동체는 성찬식 중에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가 되는 '모라비안의 오순절'을 경험했다. 이 영적 각성 이후, 그들은 공동체의 영적 파수를 위해 **'24시간 연속 기도회(24-hour prayer watch)'**를 시작했다. 공동체의 남녀 성도들이 조를 짜서,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단 한 시간도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도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 24시간 연속 기도회는 이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중단되지 않았다.
이 끊임없는 기도는 헤른후트 공동체를 영적으로 무장시켰고, 곧이어 터져 나온 세계 선교의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제비뽑기로 떠나는 선교사
헤른후트의 선교는 한 사람의 비전에서 시작되었다. 1731년, 덴마크 국왕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진젠도르프는 그곳에서 서인도제도에서 온 흑인 노예 안토니를 만났다. 안토니는 카리브해의 흑인 노예들이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헤른후트로 돌아온 진젠도르프가 이 소식을 전했을 때, 공동체의 두 젊은이, 레온하르트 도버(Leonhard Dober)와 다비트 니치만(David Nitschmann)이 즉시 그곳의 선교사로 자원했다. 그들은 "만약 다른 방법이 없다면, 우리 자신이 노예가 되어서라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파송은 **'제비뽑기(casting lots)'**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그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성경의 용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선교사로 자원한 사람의 이름과 "주님, 가라", "기다리라"는 문구를 통에 넣고 제비를 뽑아, 그 결과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인간적인 계획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기는 절대적인 신뢰의 표현이었다.
1732년, 첫 선교사들이 서인도제도로 떠난 것을 시작으로,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이후 수십 년간 그린란드, 북미 인디언, 남아프리카, 수리남 등 전 세계의 가장 험난하고 위험한 오지로 향했다. 그들은 평신도 장인이었고, 가는 곳마다 자비량으로 일하며, 현지인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다.
본론 3: 가슴의 종교와 에큐메니컬 운동의 선구자
진젠도르프의 신앙의 핵심에는 '마음의 종교(Religion of the Heart)'가 있었다.
피와 상처의 신학
그는 당시 개신교 정통주의의 차갑고 논쟁적인 교리주의를 비판했다. 그에게 신앙의 본질은 삼위일체나 예정론과 같은 복잡한 교리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시고 상처 입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이고 감성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그는 '신성한 상처', '어린 양의 피'와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깊은 묵상과 감사를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가슴의 신학'은 훗날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교파를 넘어선 연합 운동
진젠도르프는 또한 시대를 앞서간 에큐메니컬(교회 연합)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자신의 '겨자씨 교단'의 꿈을 확장하여, 루터교, 개혁교, 모라비안 등 교파의 벽을 넘어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하나님의 회중(Congregatio Dei in Spiritu)'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비록 그의 시도는 많은 오해와 비판을 받았지만, 교파주의의 높은 벽을 넘어 복음 안에서의 일치를 추구했던 그의 비전은 오늘날 교회 연합 운동의 중요한 선구로 평가받는다.
결론: 하나의 열정, 영원한 유산
1760년, 60세의 나이로 헤른후트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니콜라우스 폰 진젠도르프 백작의 삶은 오직 하나의 열정, 즉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부와 명예, 그리고 생애를 바쳐, 박해받는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피난처를 제공했고, 그들을 100년간 꺼지지 않는 기도의 용사로 세웠으며, 마침내 전 세계를 향한 위대한 선교의 군대로 파송했다.
그의 유산은 실로 거대하다.
그는 개신교 세계 선교 운동의 문을 열었다. 그가 시작한 모라비안 선교 운동은 윌리엄 캐리보다 60년이나 앞선 것으로, 이후 모든 개신교 선교의 모델이자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평신도 선교'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대부분 신학자가 아닌, 평범한 목수, 도공, 재단사와 같은 장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을 통해 자비량으로 사역하며, 모든 성도가 선교사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가슴의 신앙'을 회복시켰다. 그는 차가운 지성주의에 빠져 있던 교회에,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감격이 신앙의 핵심임을 일깨워주었다.
진젠도르프의 삶은 한 사람의 순수한 열정이 어떻게 잠자던 시대를 깨우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이다. 그가 헤른후트에 심은 작은 겨자씨는, 오늘날 전 세계 모든 대륙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거대한 나무로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