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대각성 운동, 윌리엄 캐리와 현대 선교 시작, 내지/외지 선교
선교 역사 및 전략

근대 선교 운동사
부흥의 불길에서 땅끝까지: 대각성 운동과 현대 선교의 여명
서론: 잠자던 거인을 깨우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신학을 성경의 권위 위에 바로 세웠지만, 역설적으로 그 직접적인 열매가 세계 선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을 비롯한 개혁가들은 사도 시대의 종언과 함께 지상대위임명령의 의무도 끝났다고 보았고, 중세 후기 로마 가톨릭의 선교가 종종 정치적, 군사적 정복과 결부되었던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해, 개신교회는 거의 2세기 동안 선교라는 거대한 과업 앞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교회는 안으로의 개혁과 교리적 정립에 힘을 쏟았지만, 밖으로의 확장을 위한 동력은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18세기, 대서양 양편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영적 부흥의 불길, 즉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은 이 잠자던 거인을 깨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운동은 단순히 교회의 양적 성장을 가져온 것을 넘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개인적 회심'과 '뜨거운 체험'으로 재정의함으로써, 모든 신자가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느끼게 하는 폭발적인 내적 동력을 창출했다. 이 영적 대지진은 이후 19세기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열어젖힐 신학적, 인적, 조직적 토양을 마련했다.
본 강의안은 바로 이 부흥의 불길이 어떻게 세계 선교라는 거대한 강물로 이어졌는지를 추적하는 역사적, 신학적 탐구이다.
첫째, 18세기와 19세기의 대각성 운동이 어떻게 개인의 회심 경험을 강조하고, 구원의 긴급성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켰으며, 자발적인 신앙 결사체들을 탄생시켜 현대 선교 운동의 영적, 조직적 엔진이 되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삶, 그리고 '건초더미 기도회'와 같은 사건들이 어떻게 선교적 열망에 불을 지폈는지 살펴본다.
둘째,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가 어떻게 대각성 운동의 신학적 유산 위에서 지상대위임명령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자발적 선교회'라는 혁신적인 구조를 통해 개신교 선교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는지를 심층적으로 고찰한다. 그의 유명한 저서 『이교도들의 회심을 위해 기독교인들이 사용할 의무에 관한 연구』와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그의 외침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탐구한다.
셋째, 19세기 선교 현장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전략적 논쟁, 즉 **해안 중심의 '외지(外地) 선교'와 내륙 중심의 '내지(內地) 선교'**의 차이를 분석한다. 전통적인 선교부들이 안전한 해안 거점에 머물며 '문명화'와 복음 전파를 병행했던 방식의 공헌과 한계를 살펴보고,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와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가 어떻게 '믿음 선교'와 철저한 '상황화' 전략을 통해 내륙 깊숙이 복음을 전파하며 선교의 지평을 혁명적으로 확장시켰는지를 조명할 것이다.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현대 선교가 몇몇 영웅적인 개인들의 돌출 행동이 아니라, 시대의 영적 부흥과 치열한 신학적 성찰, 그리고 담대한 전략적 혁신이 맞물려 이루어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적 과업을 감당하는 데 있어,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귀중한 지혜와 도전을 제공할 것이다.
제1부 대각성 운동: 현대 선교의 영적 발전소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영국과 북미 식민지를 휩쓴 대각성 운동은 차갑게 식어버린 정통주의와 형식적인 신앙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이었다. 이 부흥 운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교리적 동의나 교회 출석 여부가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개인의 극적인 회심 체험, 즉 '거듭남'(New Birth)에 두었다. 이러한 신학적 강조점의 변화는 세계 선교를 위한 강력한 내적 동력을 창출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1. 제1차 대각성 운동 (c. 1730-1760): 개인적 회심과 선교적 열정의 씨앗
제1차 대각성 운동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그리고 존 웨슬리(John Wesley)와 같은 위대한 설교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의 설교는 지적인 동의를 구하는 대신, 듣는 이들의 감정과 의지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며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구원의 감격을 체험하게 했다.
개인적 회심 경험의 강조: 에드워즈의 유명한 설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은 지옥의 실재와 하나님의 진노를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한 실존적 긴급성을 느끼게 했다. 이처럼 '거듭남'이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강조되면서, 신자들은 자신의 가족과 이웃, 나아가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이교도들의 영혼 상태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원은 더 이상 교회 회원이라는 신분으로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복음을 듣고 회심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교적 삶의 모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대각성 운동이 낳은 선교적 열정의 가장 강력한 상징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위한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의 삶이었다. 그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하기까지, 혹독한 환경 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과 영적 외로움을 견디며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의 사역 자체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조나단 에드워즈가 편집하여 출간한 그의 일기는 이후 150년간 개신교 선교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중 하나가 되었다. 윌리엄 캐리, 헨리 마틴, 짐 엘리엇 등 수많은 후대의 선교사들이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고, 그의 불타는 영혼 사랑과 자기희생적 헌신에 감동하여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의 삶은 대각성 운동의 경건이 어떻게 개인의 내면을 넘어 타자를 향한 선교적 열정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였다.
모라비안 교도의 선구적 역할: 대각성 운동과 동시대에,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모라비안 공동체는 이미 놀라운 선교적 헌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젠도르프(Zinzendorf) 백작의 지도 아래, 이 작은 공동체는 1732년부터 서인도 제도의 흑인 노예들을 시작으로 그린란드, 북미, 아프리카 등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들은 "어린 양이 그의 고난의 보상을 받으시게 하자"는 구호 아래, 어떤 고난도 감수하며 복음을 전했다. 18세기 말까지 그들은 3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이는 당시 개신교 전체가 파송한 선교사보다 많은 수였다. 그들의 선구적인 활동은 이후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은 영국과 미국의 교회들에게 세계 선교가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사명임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모델이 되었다.
1.2. 제2차 대각성 운동 (c. 1790-1840): 조직화된 선교 운동의 탄생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제2차 대각성 운동은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신학적 유산을 이어받으면서도, 그것을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과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켰다는 특징을 가진다. 찰스 피니(Charles Finney)와 같은 부흥사들은 부흥이 단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도와 노력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적극적인 전도 활동을 독려했다.
자발적 결사체(Voluntary Societies)의 부상: 이 시기에는 특정 교파에 얽매이지 않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자발적 결사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성경 보급을 위한 성서공회, 문서 전도를 위한 전도지 협회, 노예제 폐지 운동, 금주 운동 등이 모두 이러한 형태로 조직되었다. 바로 이 '자발적 결사체' 모델이 세계 선교를 위한 조직적인 구조를 제공하는 결정적인 돌파구가 되었다. 이제 선교는 더 이상 개별 교회의 역량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신자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하고, 재정과 인력을 모아 선교사를 훈련하고 파송하는 '선교회'(Missionary Society)를 통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건초더미 기도회'와 미국 선교의 시작: 미국 해외 선교의 역사는 1806년 매사추세츠 주 윌리엄스 대학의 작은 기도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사무엘 밀스(Samuel J. Mills)를 비롯한 다섯 명의 대학생이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하던 중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피해 건초더미 아래로 피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우리가 원하면 할 수 있다"(We can do this if we will)는 결의를 다지며,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들을 헌신하기로 서약했다. 이 작은 기도 모임은 이후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회인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ABCFM, 1810년 설립)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아도니람 저드슨과 같은 초기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는 대각성 운동이 낳은 청년들의 뜨거운 선교적 열정이 어떻게 구체적인 선교 단체의 설립으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후천년설적 낙관주의: 제2차 대각성 운동은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이라는 종말론적 낙관주의에 의해 강력한 추동력을 얻었다. 이는 교회가 복음 전파와 사회 개혁을 통해 이 땅에 점진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천년왕국과 같은 이상적인 시대를 이룬 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신학이다. 이러한 믿음은 신자들에게 자신들의 선교적 노력이 인류의 역사를 진보시키고, 지상을 천국으로 만들어가는 위대한 과업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다. 그들은 선교를 통해 이교도의 '어둠'을 몰아내고 기독교 문명의 '빛'을 전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18세기와 19세기의 대각성 운동은 현대 선교 운동이 태동할 수 있는 영적, 신학적, 조직적 생태계를 완벽하게 조성했다. 개인의 회심을 통한 구원의 확신은 선교의 '인적 자원'을, 자발적 결사체 모델은 선교의 '조직적 구조'를, 그리고 후천년설적 낙관주의는 선교의 '이데올로기적 동력'을 제공했다. 이제 이 모든 에너지를 하나의 명확한 방향으로 집결시키고, 개신교 전체를 향해 세계 선교의 의무를 일깨울 한 명의 선구자가 필요했다. 그가 바로 영국의 가난한 구두 수선공 출신, 윌리엄 캐리였다.
제2부 윌리엄 캐리: 현대 선교의 문을 열다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가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최초의 선교사였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모라비안 교도들이 그보다 앞서 놀라운 선교적 헌신을 보여주었다. 캐리가 위대한 점은, 그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던 선교적 열정을 개신교 전체가 감당해야 할 '의무'이자 '구조화된 사역'으로 끌어올린 신학적, 전략적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닫혀 있던 개신교 선교의 문을 신학의 망치로 부수고, 그 문을 통해 다음 세대가 나아갈 길을 열었다.
2.1. 시대의 장벽: 극단적 칼뱅주의와 선교에 대한 무관심
캐리가 활동하던 18세기 후반 영국 침례교회는 '극단적 칼뱅주의'(Hyper-Calvinism)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론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거의 무시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구원하실 것이므로, 인간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학적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786년, 젊은 목사였던 캐리가 노샘프턴 목회자 모임에서 이교도 세계에 복음을 전할 의무에 대해 토론할 것을 제안하자, 좌장이었던 존 라일랜드(John Ryland)는 "젊은이, 앉으시게!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회심시키고자 하신다면, 자네나 나의 도움 없이도 하실 걸세!"라고 면박을 주었다. 이는 당시 개신교회가 지상대위임명령을 사도 시대에 국한된 것으로 해석하고, 세계 선교를 교회의 현재적 과업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시대적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2.2. 신학적 돌파구: 『연구』(An Enquiry)와 지상명령의 재발견
이러한 신학적 냉담함에 맞서, 캐리는 수년간의 독학과 연구 끝에 1792년, 현대 선교의 '마그나 카르타'로 불리는 작은 책자를 출간했다. 그 제목은 『이교도들의 회심을 위해 기독교인들이 사용할 의무에 관한 연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이다.
이 87페이지 분량의 소책자는 세계 선교를 위한 최초의 체계적이고 성경적인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지상명령의 영속성 주장: 캐리는 책의 첫 부분에서, 마태복음 28장의 지상대위임명령이 단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일시적인 명령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교회가 순종해야 할 영속적인 명령임을 강력하게 논증했다. 그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이 여전히 유효하며, 따라서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세계 현황에 대한 통계적 분석: 캐리는 단순히 신학적 주장만 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알려진 세계의 모든 나라에 대한 인구, 지리, 종교 현황을 표로 정리하여 제시했다. 이는 세계의 영적 필요가 얼마나 거대한지를 구체적인 데이터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선교의 시급성을 일깨우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상태임을 통계적으로 입증했다.
선교 장애물에 대한 반박: 그는 이교도 선교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여러 가지 반론들(거리의 문제, 야만적인 생활 방식, 언어의 장벽, 생명의 위험 등)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이미 상인들이 이익을 위해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를 누비고 있는데, 하물며 영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그 위험을 감수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구체적인 방법론 제시: 자발적 선교회: 캐리의 가장 독창적이고 실천적인 공헌은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수단'(Means)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개인의 힘으로는 이 거대한 과업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상인들이 무역 회사를 설립하듯, 뜻을 같이하는 신자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자발적 선교회'(Voluntary Society)를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선교회는 재정을 모으고, 선교사를 선발하고 훈련하며, 현지 사역을 지원하는 역할을 체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이후 수많은 개신교 선교 단체 설립의 모델이 되었다.
2.3.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캐리의 삶과 유산
캐리는 이론가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비전을 삶으로 실천한 행동가였다. 1792년 5월 31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는 유명한 설교를 통해 동료 목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설교는 같은 해 10월, 세계 최초의 개신교 선교회인 '특정 침례교 선교회'(Particular Baptist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Amongst the Heathen, 훗날 침례교선교회 BMS로 불림)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793년, 캐리 자신은 이 선교회의 제1호 선교사가 되어 가족과 함께 인도로 향했다. 인도에서의 그의 40년 사역은 현대 선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교과서와도 같았다.
성경 번역의 선구자: 그는 놀라운 언어적 재능을 바탕으로,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한 인도의 6개 언어로 성경 전서를 번역했고, 29개의 다른 언어로 신약성경이나 일부를 번역했다. 그는 "성경을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그들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 선교의 가장 기본이라고 믿었다.
교육과 사회 개혁: 그는 복음 전파와 더불어, 인도의 사회악을 개혁하는 데에도 힘썼다. 특히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함께 화장시키는 '사티'(Sati)라는 힌두교의 비인간적인 악습을 폐지시키기 위해 25년간 끈질기게 캠페인을 벌여, 마침내 1829년 영국 정부가 이를 법으로 금지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는 인도의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람포르 대학(Serampore College)을 설립하여, 서구 학문과 기독교 신학을 가르쳤다.
총체적 선교의 모델: 캐리의 사역은 영혼 구원, 성경 번역, 교육, 사회 개혁, 심지어 농업 기술 보급과 식물학 연구까지 아우르는 '총체적'인 것이었다. 그는 복음이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과 문화 전체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믿고 실천했다.
윌리엄 캐리는 한 시대의 신학적 장벽을 허물고, 개신교회로 하여금 지상대위임명령을 다시금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한 전환기적 인물이었다. 그의 비전과 헌신은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고, 그가 제시한 '자발적 선교회' 모델은 이후 수많은 선교사들이 전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었다.
제3부 19세기 선교 전략의 진화: 외지(外地)에서 내지(內地)로
윌리엄 캐리가 문을 연 19세기는 그야말로 개신교 선교의 폭발적인 확장기였다. 유럽과 북미에서 수많은 선교회가 조직되었고, 수천 명의 선교사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이전에 복음이 닿지 않았던 땅으로 향했다. 이 '위대한 세기'의 선교 활동은 크게 두 가지의 다른 전략적 모델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해안의 거점 도시에 머물며 서구 문명을 전파하는 '외지 선교' 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내륙 깊숙이 들어가 현지 문화에 동화되려 했던 '내지 선교' 모델이다.
3.1. 외지 선교(Coastal Mission): 문명화와 복음화의 결합
19세기 전반과 중반의 선교를 주도했던 대부분의 교파 소속 선교회들은 '외지 선교' 전략을 따랐다. 이는 주로 접근이 용이하고 비교적 안전한 해안가의 항구 도시나 식민 행정 중심지에 '선교 기지'(Mission Station)를 건설하는 방식이었다.
선교 기지(Mission Station) 모델: 선교사들은 보통 서구식 주택, 교회, 학교, 병원 등으로 구성된 '선교사촌'(Mission Compound)을 형성하여 거주하며 사역했다. 이 선교 기지는 이교도 문화의 '어둠' 속에 세워진 기독교 문명의 '빛의 전초기지'로 여겨졌다. 선교사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예배와 전도 활동을 펼치는 동시에, 서구식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 당시 서구 선교사들은 기독교 복음과 서구 문명을 거의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교도의 '미개한' 문화를 '문명화'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학교를 세워 서구식 교육을 하고, 병원을 세워 서구 의술을 베푸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가 아니라, 그 자체로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는 중요한 선교 활동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교육 및 의료 선교는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고, 각 나라의 근대화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공헌과 한계: 외지 선교 모델은 안정적인 거점을 바탕으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사역을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병원은 각 나라의 엘리트들을 양성하고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오늘날까지도 명문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모델은 몇 가지 심각한 한계를 드러냈다. 첫째, 복음이 내륙 깊숙이까지 전파되는 것을 더디게 만들었다. 둘째, 선교사촌이라는 고립된 공간은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의 삶과 문화로부터 분리되게 만들었다. 셋째,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전제했기 때문에, 현지 문화를 존중하기보다는 파괴하거나 무시하는 문화적 제국주의의 형태를 띠기 쉬웠다. 넷째, 물질적 혜택을 위해 개종하는 이른바 '쌀 신자'(Rice Christians)를 양산할 위험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선교 활동이 종종 서구 식민 세력의 확장과 맞물려 진행되면서,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3.2. 내지 선교(Inland Mission): 허드슨 테일러의 혁명
19세기 후반, 이러한 외지 선교 모델의 한계를 절감하고 선교 전략에 혁명적인 전환을 가져온 인물이 바로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였다. 그는 중국 인구의 대부분이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채 내륙에 살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해안에만 머물러 있는 기존의 선교 방식에 도전했다.
1865년, 그는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CIM)를 창설하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선교 원칙들을 제시했다.
목표: 중국의 내륙 복음화: CIM의 목표는 명확했다. 해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한번도 전해지지 않은 중국의 모든 내륙 지방(Inland)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선교사들이 특정 거점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미전도 지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황화(Contextualization) 원칙: 허드슨 테일러의 가장 혁신적인 전략은 '상황화'였다. 그는 선교사가 서구인의 정체성을 고집해서는 안 되며,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현지인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스스로 중국식으로 머리를 깎고 변발을 했으며, 중국 전통 의상을 입었다. 이는 당시 서구 선교사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그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그는 선교사가 현지 언어와 문화를 깊이 배우고, 그들의 삶의 방식에 동화되어야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믿음 선교'(Faith Mission) 원칙: 기존의 교파 선교회들은 선교사의 생활비와 사역비를 본국에서 보증하고 송금해 주었다. 그러나 CIM은 이러한 방식을 거부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회의 재정적 필요를 사람들에게 호소하지 않고, 오직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만 구해야 한다는 '믿음 선교' 원칙을 세웠다. 이는 선교의 주체가 인간 조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이 원칙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첫째, 가난하지만 헌신된 수많은 평신도들에게 선교의 문을 열어주었다. 둘째, 선교사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깊은 영성을 갖게 했다.
초교파주의: CIM은 특정 교파에 소속되지 않고, 복음주의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교단의 신자들에게 문을 열었다. 이는 선교의 목표가 특정 교파의 확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한 초교파적 성격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헌신된 인재들을 모으는 데 큰 장점이 되었다.
3.3. 내지 선교의 영향과 유산
허드슨 테일러와 CIM이 시도한 내지 선교 모델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CIM은 허드슨 테일러 사망 당시 800명이 넘는 선교사를 거느린 세계 최대의 선교 단체로 성장했으며, 수많은 중국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더 중요한 것은 CIM이 제시한 '믿음 선교'와 '상황화'의 원칙이 이후 수많은 초교파적 '믿음 선교 단체'(Faith Missions)들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이다. 아프리카내지선교회(AIM), 수단내지선교회(SIM) 등 수많은 선교 단체들이 CIM의 영향을 받아 설립되었고, 이들을 통해 복음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의 내륙 깊숙한 곳까지 전파될 수 있었다.
물론 내지 선교 모델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지나친 영성주의로 인해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 그리고 급진적인 상황화가 복음의 본질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위험성에 대한 지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드슨 테일러가 보여준 '미전도 종족을 향한 열정', '현지 문화에 대한 존중',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은 오늘날의 선교에도 여전히 강력한 도전과 영감을 주고 있다.
결론: 과거의 유산, 미래의 길
종교개혁 이후 거의 2세기 동안 침묵했던 개신교 선교는 18세기 대각성 운동이라는 영적 부흥을 자양분으로 삼아 마침내 긴 잠에서 깨어났다. 개인의 회심과 영혼 구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윌리엄 캐리라는 선구자를 통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지상명령에 대한 새로운 순종으로 구체화되었다. 그가 제시한 '자발적 선교회'라는 틀은 19세기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이끌어갈 조직적 동력이 되었다.
19세기의 선교사들은 캐리가 열어놓은 길을 따라 전 세계로 나아갔다. 초기 '외지 선교' 모델은 해안 거점을 중심으로 서구 문명과 복음을 함께 전파하며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지대한 공헌을 남겼지만, 문화적 제국주의와 내륙 복음화의 지체라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허드슨 테일러의 '내지 선교' 모델은 철저한 상황화와 믿음의 원칙을 통해 선교의 최전선을 미전도 지역 깊숙이까지 확장시키는 혁명적인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처럼 대각성 운동의 영성, 윌리엄 캐리의 신학, 그리고 허드슨 테일러의 전략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현대 개신교 선교의 DNA를 형성했다. 이 역사는 우리에게 선교가 단순히 뜨거운 열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그것은 시대의 신학적 장벽을 넘어서는 성경적 통찰(캐리)과, 현장의 한계를 극복하는 창의적이고 담대한 전략(테일러)이 함께할 때 비로소 열매 맺을 수 있다.
오늘날 21세기 선교는 포스트모더니즘, 종교 다원주의, 급격한 도시화, 디지털 혁명 등 19세기와는 전혀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선교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대각성 운동이 일깨웠던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사랑이며, 캐리가 재확인했던 지상대위임명령에 대한 순종이고, 테일러가 보여주었던 세상 끝을 향한 믿음의 발걸음이다. 과거 선교의 거인들이 남긴 유산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할 때,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내지'를 향해 담대하게 나아갈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