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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16.탁월함의 부재: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하나님 영광을 가린다

'세상 일'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크리스천은 어떤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과 서비스의 탁월함(Excellence)이 곧 세상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주제 16: 탁월함의 부재: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하나님 영광을 가린다

Topic 16: The Absence of Excellence: How the Complacency of 'Good Enough' Dims God's Glory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23)

서론: '평균'에 만족하는 크리스천의 역설
A와 B, 두 명의 크리스천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A 식당의 주인은 매우 신실한 신앙인으로, 가게 곳곳에 성경 구절을 붙여놓고 손님들에게 전도하기를 즐깁니다. 하지만 음식의 맛은 평범하고, 위생 상태는 그저 그렇습니다. 그는 "음식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곳에서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게 중요하지"라고 말합니다. 반면, B 식당의 주인은 겉으로 신앙을 요란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음식의 맛과 품질, 청결도, 그리고 서비스에 있어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함'을 추구합니다. 그의 가게는 지역 최고의 맛집으로 소문이 나 있고, 비신자 손님들은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경영 방식에 감동하며 "당신은 무엇을 믿기에 이렇게 일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과연 어떤 식당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질문 앞에서 A 식당의 손을 들어주려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탁월함'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역설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직업적 평범함이나 나태함을 "나는 세상적인 성공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식의 영적인 겸손으로 포장하곤 합니다.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과 적당주의가, 마치 욕심을 버린 성숙한 신앙의 증거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이 글은 이처럼 우리의 일터에 만연한 '평범함의 바이러스'와 '안일함의 죄'를 정면으로 겨냥하고자 합니다. 육하원칙(六何原則, 5W1H)의 틀을 통해, 우리는 왜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세속적인 야망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신앙 행위인지를 밝힐 것입니다. 나아가,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어떻게 우리가 섬기는 위대하고 탁월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지, 그리고 우리의 일터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가장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와 방향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 여정은 우리를 편안한 안주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로 빚어가는 '거룩한 장인(匠人)'으로 거듭나게 할 것입니다.

1. Who (누가)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에 빠지는가?
직업적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고 적당한 수준에 안주하려는 태도는, 믿음이 약한 사람보다 오히려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교묘한 형태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첫째, '신앙 생활'과 '직장 생활'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신앙인이 이 함정에 빠집니다. 이들은 교회에서의 봉사, 기도, 큐티와 같은 종교 활동만이 '하나님의 일'이며, 회사에서 하는 일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세상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자연스럽게 삶의 우선순위를 왜곡시킵니다. 교회 일에는 최선을 다해 헌신하지만, 회사 업무는 월급 받는 만큼만, 딱 잘리지 않을 만큼만 해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직업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일'에 쓸 시간을 빼앗는 불필요한 행위로 여겨집니다.

둘째, '겸손'을 '자기 비하'나 '소극성'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는 열망이나,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는 것을 '교만'이라고 여깁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회피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겸손은 자신의 실력을 감추거나 발전을 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재능과 성취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태도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우리를 안일함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최대로 연마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거룩한 열망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셋째, '기독교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때로 안일함에 빠집니다. 같은 크리스천 고객들은 웬만한 실수나 부족함은 '은혜'로 이해해주고 넘어가 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비신자들과 경쟁하는 시장에서 요구되는 수준의 치열함과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기독교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는 품질이 떨어진다는 세상의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으며, 스스로를 '그들만의 리그'에 가두어 더 큰 성장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은 신앙과 일을 분리하고, 겸손을 오해하며, 좁은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증상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터라는 광대한 선교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2. What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가? - '안일함', '완벽주의', 그리고 '탁월함'의 차이
탁월함을 추구하라는 말이,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안일함', '완벽주의', 그리고 '탁월함'이라는 세 가지 개념의 본질적인 차이를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1. 안일함 (Complacency / Mediocrity)

기준: "이만하면 됐다", "남들 하는 만큼만 하자"는 '최소한의 기준'에 머뭅니다.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더 이상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동기: '편안함 추구'와 '게으름'이 주된 동기입니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귀찮고 피곤한 일로 여기며, 현재 상태에 안주하려 합니다.

결과: 개인과 조직의 성장을 멈추게 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도태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가장 흔한 모습입니다.

2. 완벽주의 (Perfectionism)

기준: "단 하나의 흠이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는 '비현실적인 기준'을 추구합니다.

동기: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사람들의 비판에 대한 불안', 그리고 자신의 완벽함을 통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주된 동기입니다.

결과: 오히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행동 마비'를 낳거나, 작은 실수에도 쉽게 좌절하고 자신과 타인을 정죄하게 만듭니다. 이는 건강하지 못한,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발현입니다.

3. 탁월함 (Excellence)

기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재능과 자원의 한도 내에서,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최선의 기준'을 추구합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 1% 더 성장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동기: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는,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 가 유일하고 순전한 동기입니다. 나의 일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인식이 그 핵심입니다.

결과: 과정 자체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꾸준한 성장과 발전을 이룹니다. 실패를 배움의 기회로 삼으며,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매일의 과정에 충실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건강하고 신실한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일의 최종 '관객(Audience)'이 누구냐에 있습니다. 안일함과 완벽주의는 모두 그 관객이 '나 자신'이거나 '다른 사람들'입니다. 내가 편안한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지가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탁월함의 유일한 관객은 오직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의 일의 수준은, 그것을 받으시는 분이 얼마나 위대하고 탁월하신 분인지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관점의 전환을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안일함의 게으름과 완벽주의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쁨과 자유함으로 탁월함을 추구하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3. When (언제) '탁월함'을 향한 열정은 쉽게 식어버리는가?
처음에는 뜨거운 열정으로 탁월함을 추구하다가도, 어느 순간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의 늪에 빠지게 되는 위기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첫째, '일이 익숙해지고 일상이 반복될 때' 우리는 초심을 잃어버립니다. 처음 일을 배울 때는 모든 것이 새롭고 도전적이기 때문에 긴장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일이 손에 익고, 매일 비슷한 업무가 반복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더 이상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기계적인 '관성'에 따라 일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일은 더 이상 창조적인 예배가 아니라, 지루하고 의미 없는 '노동'으로 전락하게 되고, 우리의 영혼은 서서히 잠들게 됩니다.

둘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우리의 동기는 약해집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상사나 동료, 고객이 그 수고를 알아주지 않거나, 오히려 나의 탁월함이 다른 사람들의 시기 질투를 유발할 때, 우리는 깊은 회의감에 빠집니다. "어차피 아무도 몰라주는데, 뭐하러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의 동기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인정'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람의 인정은 변덕스럽고 불완전하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관객으로 삼을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셋째, '어느 정도의 성공과 안정에 도달했을 때' 안일함은 가장 교묘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치열하게 노력하여 어느 정도의 성공을 이루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면, 우리는 더 이상 과거처럼 절박하게 노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제 이 정도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더 높은 수준의 탁월함을 향한 도전을 가로막는 '안락한 감옥'이 되어버립니다. 이는 마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졌던 것과 같은 영적인 위험입니다.

이처럼 반복되는 일상,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 그리고 성공 후의 안락함은, 우리의 마음에 있던 탁월함을 향한 거룩한 불꽃을 꺼뜨리는 가장 강력한 세 가지 바람입니다. 이 바람 앞에서 꺼지지 않는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동기를 점검하고,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의식적인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4. Where (어디에서) '적당주의 문화'는 학습되는가?
크리스천들이 탁월함을 추구하기보다 '이만하면 됐다'는 적당주의에 안주하게 되는 문화적, 신앙적 배경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원천은 '결과보다 의도를 중시하는' 일부 신앙 공동체의 분위기입니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 "중심이 중요하지, 결과가 중요한가?"라는 말은 신앙의 순수한 동기를 격려하는 좋은 말이지만, 때로는 실력 없음과 나태함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오용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 행사를 준비하면서 기도만 열심히 할 뿐, 체계적인 기획이나 꼼꼼한 준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해 놓고는, "우리는 최선을 다해 기도했으니,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고 말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문화는 '선한 의도'가 '탁월한 실행'을 대체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고,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터에서도 과정의 성실함과 결과의 탁월함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두 번째 원천은 '은혜'를 '책임의 면제'로 오해하는 값싼 은혜의 신학입니다. "우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위대한 진리를,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최선을 다해 살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 부족하게 일하더라도, 내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덮어주고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안일한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은혜는 우리를 나태함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값없이 받은 그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여, 이전보다 더욱 열심을 내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끄는 '능력'입니다.

세 번째 원천은 '세상적 성공'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금욕주의적 신앙관입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함을 인정받고, 그 결과로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을 마치 세속적인 욕심에 물드는 것처럼 죄악시하는 경향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감추거나, 성공에 대한 건전한 야망을 억누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어(신 28:13),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를 원하십니다. 탁월함을 통해 얻은 성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상에 증거하고 더 많은 것을 나누기 위한 강력한 '플랫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도를 결과보다 중시하는 문화, 은혜를 책임의 면제로 오해하는 신학, 그리고 성공을 죄악시하는 신앙관이 결합하여,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탁월함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외면하고 적당주의라는 편안한 타협에 머무르게 만듭니다.

5. Why (왜) '탁월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고의 방법인가?
우리가 자신의 일터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성공을 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중요하고 실제적인 방법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탁월함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탁월하신 하나님(God of Excellence)'이십니다. 그분이 만드신 광대한 우주의 신비, 정교한 인체의 구조,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흠 없는 계획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완벽한 지혜와 능력, 즉 그분의 탁월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라면, 우리의 일 역시 마땅히 그분의 성품을 반영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탁월함'이 드러날 때,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반면, 우리가 하는 일이 엉성하고 무책임하다면, 세상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 역시 그런 분일 것이라고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곧 하나님의 '명함'입니다.

둘째, 탁월함은 세상과의 '가장 효과적인 다리'를 놓기 때문입니다. 비신자들은 우리가 교회에서 얼마나 뜨겁게 기도하는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동료인지, 우리가 만든 제품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 의사가 다른 의사보다 월등한 실력으로 환자를 살려낼 때, 크리스천 프로그래머가 누구보다 완벽한 코드를 작성하여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때, 세상은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을 버리고 우리의 신앙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실력'이 곧 우리의 '신뢰도'가 되고, 그 신뢰도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튼튼한 다리가 됩니다.

셋째, 탁월함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극대화하는 청지기의 의무' 이기 때문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아 갑절로 남긴 종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들의 칭찬의 기준은 그들이 얼마나 '선한 의도'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주인이 맡긴 자산을 가지고 '얼마나 탁월한 성과'를 냈느냐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재능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재능을 땅에 묻어두고 "이만하면 됐다"고 안주하는 것은 주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의 태도입니다. 반면, 그 재능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 최고의 열매를 맺어 주인께 돌려드리는 것이 바로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세, 즉 탁월함을 추구하는 청지기의 삶입니다.

이처럼, 탁월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거울이며, 세상과 소통하는 다리이고,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는 청지기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가장 실제적이고 강력한 예배 행위입니다.

6. How (어떻게) 안일함을 깨고 '탁월함'을 일상에서 훈련할 것인가? - 방법론과 방향 제시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의 타성을 깨고, 일상 속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과 영적 훈련은 다음과 같습니다.

방법론 1: 일의 '주인'을 바꾸라 - 골로새서 3장 23절의 내면화

모든 변화는 내 일의 최종 결재권자, 즉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재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께 하듯' 일하기: 매일 아침 일을 시작하기 전, 잠시 멈추어 "하나님, 오늘 제가 하는 모든 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상사나 고객이 보지 않는 작은 일 하나까지도, 마치 주님이 바로 앞에서 보고 계신 것처럼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훈련을 합니다.

나만의 '작업 기도문' 만들기: 자신의 직업의 특성에 맞는 기도문을 만들어 책상 앞에 붙여 둡니다. (예: "프로그래머로서, 저는 버그 없는 깨끗한 코드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반영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 "교사로서, 저는 학생 한 명 한 명의 잠재력을 최대로 이끌어내는 사랑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인내와 기대를 보여주는 예배를 드립니다.")

방법론 2: '고정 마인드셋'을 깨고 '성장 마인드셋'을 장착하라

탁월함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려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캐럴 드웩 교수가 말한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정을 즐기라: 결과의 성공이나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 자체를 즐깁니다.

도전을 환영하라: 어려운 과제를 피하지 않고, 나의 능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깁니다.

비판을 선물로 여기라: 다른 사람의 비판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소중한 정보와 선물로 여깁니다.

노력의 가치를 믿으라: 재능은 출발점일 뿐, 꾸준한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방법론 3: '카이젠(改善)'을 영적 훈련으로 삼으라: 매일 1%의 성장

'카이젠'은 '지속적인 개선'을 의미하는 일본의 경영 철학입니다.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좌절하기보다, 매일 아주 작은 개선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탁월함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어제보다 더 낫게' 질문하기: 하루 일을 마칠 때, "오늘 내가 한 일 중에서,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한 것은 무엇인가? 내일은 오늘보다 무엇을 1% 더 개선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기록하는 습관을 갖습니다.

실패를 기록하고 배우라: 성공 경험뿐만 아니라, 실패 경험을 '실패 노트'에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그 원인과 교훈을 분석합니다. 실패는 더 이상 수치가 아니라, 탁월함에 이르기 위한 가장 귀한 데이터가 됩니다.

방향 제시: '평범한 직업'을 '거룩한 소명'으로 만드는 장인(匠人)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은,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해내는 '거룩한 장인'입니다. 장인은 돈이나 명예를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 자체를 사랑하고, 자신의 손을 통해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희열을 느끼며, 그 작품을 통해 세상과 소통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모두 각자의 직업 현장으로 부름받은 '하나님 나라의 장인'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보고서 한 장, 우리가 상담하는 고객 한 명, 우리가 설계하는 건물 하나가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작품입니다.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고,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매일의 일을 '걸작'으로 빚어갈 때, 세상은 우리의 작품을 통해 일하시는 위대하고 탁월하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직업이 거룩한 소명이 되는 기적은, 바로 이 탁월함을 향한 거룩한 몸부림 속에서 시작됩니다.

주제 16: 탁월함의 부재: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하나님 영광을 가린다

Topic 16: The Absence of Excellence: How the Complacency of 'Good Enough' Dims God's Glory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23)

서론: '평균'에 만족하는 크리스천의 역설
A와 B, 두 명의 크리스천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A 식당의 주인은 매우 신실한 신앙인으로, 가게 곳곳에 성경 구절을 붙여놓고 손님들에게 전도하기를 즐깁니다. 하지만 음식의 맛은 평범하고, 위생 상태는 그저 그렇습니다. 그는 "음식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곳에서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게 중요하지"라고 말합니다. 반면, B 식당의 주인은 겉으로 신앙을 요란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음식의 맛과 품질, 청결도, 그리고 서비스에 있어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함'을 추구합니다. 그의 가게는 지역 최고의 맛집으로 소문이 나 있고, 비신자 손님들은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경영 방식에 감동하며 "당신은 무엇을 믿기에 이렇게 일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과연 어떤 식당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질문 앞에서 A 식당의 손을 들어주려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탁월함'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역설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직업적 평범함이나 나태함을 "나는 세상적인 성공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식의 영적인 겸손으로 포장하곤 합니다.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과 적당주의가, 마치 욕심을 버린 성숙한 신앙의 증거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이 글은 이처럼 우리의 일터에 만연한 '평범함의 바이러스'와 '안일함의 죄'를 정면으로 겨냥하고자 합니다. 육하원칙(六何原則, 5W1H)의 틀을 통해, 우리는 왜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세속적인 야망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신앙 행위인지를 밝힐 것입니다. 나아가,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어떻게 우리가 섬기는 위대하고 탁월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지, 그리고 우리의 일터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가장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와 방향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 여정은 우리를 편안한 안주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로 빚어가는 '거룩한 장인(匠人)'으로 거듭나게 할 것입니다.

1. Who (누가)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에 빠지는가?
직업적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고 적당한 수준에 안주하려는 태도는, 믿음이 약한 사람보다 오히려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교묘한 형태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첫째, '신앙 생활'과 '직장 생활'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신앙인이 이 함정에 빠집니다. 이들은 교회에서의 봉사, 기도, 큐티와 같은 종교 활동만이 '하나님의 일'이며, 회사에서 하는 일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세상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자연스럽게 삶의 우선순위를 왜곡시킵니다. 교회 일에는 최선을 다해 헌신하지만, 회사 업무는 월급 받는 만큼만, 딱 잘리지 않을 만큼만 해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직업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일'에 쓸 시간을 빼앗는 불필요한 행위로 여겨집니다.

둘째, '겸손'을 '자기 비하'나 '소극성'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는 열망이나,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는 것을 '교만'이라고 여깁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회피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겸손은 자신의 실력을 감추거나 발전을 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재능과 성취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태도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우리를 안일함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최대로 연마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거룩한 열망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셋째, '기독교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때로 안일함에 빠집니다. 같은 크리스천 고객들은 웬만한 실수나 부족함은 '은혜'로 이해해주고 넘어가 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비신자들과 경쟁하는 시장에서 요구되는 수준의 치열함과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기독교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는 품질이 떨어진다는 세상의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으며, 스스로를 '그들만의 리그'에 가두어 더 큰 성장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은 신앙과 일을 분리하고, 겸손을 오해하며, 좁은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증상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터라는 광대한 선교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2. What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가? - '안일함', '완벽주의', 그리고 '탁월함'의 차이
탁월함을 추구하라는 말이,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안일함', '완벽주의', 그리고 '탁월함'이라는 세 가지 개념의 본질적인 차이를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1. 안일함 (Complacency / Mediocrity)

기준: "이만하면 됐다", "남들 하는 만큼만 하자"는 '최소한의 기준'에 머뭅니다.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더 이상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동기: '편안함 추구'와 '게으름'이 주된 동기입니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귀찮고 피곤한 일로 여기며, 현재 상태에 안주하려 합니다.

결과: 개인과 조직의 성장을 멈추게 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도태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가장 흔한 모습입니다.

2. 완벽주의 (Perfectionism)

기준: "단 하나의 흠이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는 '비현실적인 기준'을 추구합니다.

동기: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사람들의 비판에 대한 불안', 그리고 자신의 완벽함을 통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주된 동기입니다.

결과: 오히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행동 마비'를 낳거나, 작은 실수에도 쉽게 좌절하고 자신과 타인을 정죄하게 만듭니다. 이는 건강하지 못한,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발현입니다.

3. 탁월함 (Excellence)

기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재능과 자원의 한도 내에서,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최선의 기준'을 추구합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 1% 더 성장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동기: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는,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 가 유일하고 순전한 동기입니다. 나의 일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인식이 그 핵심입니다.

결과: 과정 자체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꾸준한 성장과 발전을 이룹니다. 실패를 배움의 기회로 삼으며,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매일의 과정에 충실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건강하고 신실한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일의 최종 '관객(Audience)'이 누구냐에 있습니다. 안일함과 완벽주의는 모두 그 관객이 '나 자신'이거나 '다른 사람들'입니다. 내가 편안한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지가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탁월함의 유일한 관객은 오직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의 일의 수준은, 그것을 받으시는 분이 얼마나 위대하고 탁월하신 분인지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관점의 전환을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안일함의 게으름과 완벽주의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쁨과 자유함으로 탁월함을 추구하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3. When (언제) '탁월함'을 향한 열정은 쉽게 식어버리는가?
처음에는 뜨거운 열정으로 탁월함을 추구하다가도, 어느 순간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의 늪에 빠지게 되는 위기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첫째, '일이 익숙해지고 일상이 반복될 때' 우리는 초심을 잃어버립니다. 처음 일을 배울 때는 모든 것이 새롭고 도전적이기 때문에 긴장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일이 손에 익고, 매일 비슷한 업무가 반복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더 이상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기계적인 '관성'에 따라 일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일은 더 이상 창조적인 예배가 아니라, 지루하고 의미 없는 '노동'으로 전락하게 되고, 우리의 영혼은 서서히 잠들게 됩니다.

둘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우리의 동기는 약해집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상사나 동료, 고객이 그 수고를 알아주지 않거나, 오히려 나의 탁월함이 다른 사람들의 시기 질투를 유발할 때, 우리는 깊은 회의감에 빠집니다. "어차피 아무도 몰라주는데, 뭐하러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의 동기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인정'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람의 인정은 변덕스럽고 불완전하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관객으로 삼을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셋째, '어느 정도의 성공과 안정에 도달했을 때' 안일함은 가장 교묘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치열하게 노력하여 어느 정도의 성공을 이루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면, 우리는 더 이상 과거처럼 절박하게 노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제 이 정도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더 높은 수준의 탁월함을 향한 도전을 가로막는 '안락한 감옥'이 되어버립니다. 이는 마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졌던 것과 같은 영적인 위험입니다.

이처럼 반복되는 일상,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 그리고 성공 후의 안락함은, 우리의 마음에 있던 탁월함을 향한 거룩한 불꽃을 꺼뜨리는 가장 강력한 세 가지 바람입니다. 이 바람 앞에서 꺼지지 않는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동기를 점검하고,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의식적인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4. Where (어디에서) '적당주의 문화'는 학습되는가?
크리스천들이 탁월함을 추구하기보다 '이만하면 됐다'는 적당주의에 안주하게 되는 문화적, 신앙적 배경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원천은 '결과보다 의도를 중시하는' 일부 신앙 공동체의 분위기입니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 "중심이 중요하지, 결과가 중요한가?"라는 말은 신앙의 순수한 동기를 격려하는 좋은 말이지만, 때로는 실력 없음과 나태함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오용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 행사를 준비하면서 기도만 열심히 할 뿐, 체계적인 기획이나 꼼꼼한 준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해 놓고는, "우리는 최선을 다해 기도했으니,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고 말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문화는 '선한 의도'가 '탁월한 실행'을 대체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고,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터에서도 과정의 성실함과 결과의 탁월함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두 번째 원천은 '은혜'를 '책임의 면제'로 오해하는 값싼 은혜의 신학입니다. "우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위대한 진리를,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최선을 다해 살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 부족하게 일하더라도, 내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덮어주고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안일한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은혜는 우리를 나태함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값없이 받은 그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여, 이전보다 더욱 열심을 내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끄는 '능력'입니다.

세 번째 원천은 '세상적 성공'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금욕주의적 신앙관입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함을 인정받고, 그 결과로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을 마치 세속적인 욕심에 물드는 것처럼 죄악시하는 경향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감추거나, 성공에 대한 건전한 야망을 억누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어(신 28:13),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를 원하십니다. 탁월함을 통해 얻은 성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상에 증거하고 더 많은 것을 나누기 위한 강력한 '플랫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도를 결과보다 중시하는 문화, 은혜를 책임의 면제로 오해하는 신학, 그리고 성공을 죄악시하는 신앙관이 결합하여,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탁월함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외면하고 적당주의라는 편안한 타협에 머무르게 만듭니다.

5. Why (왜) '탁월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고의 방법인가?
우리가 자신의 일터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성공을 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중요하고 실제적인 방법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탁월함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탁월하신 하나님(God of Excellence)'이십니다. 그분이 만드신 광대한 우주의 신비, 정교한 인체의 구조,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흠 없는 계획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완벽한 지혜와 능력, 즉 그분의 탁월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라면, 우리의 일 역시 마땅히 그분의 성품을 반영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탁월함'이 드러날 때,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반면, 우리가 하는 일이 엉성하고 무책임하다면, 세상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 역시 그런 분일 것이라고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곧 하나님의 '명함'입니다.

둘째, 탁월함은 세상과의 '가장 효과적인 다리'를 놓기 때문입니다. 비신자들은 우리가 교회에서 얼마나 뜨겁게 기도하는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동료인지, 우리가 만든 제품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 의사가 다른 의사보다 월등한 실력으로 환자를 살려낼 때, 크리스천 프로그래머가 누구보다 완벽한 코드를 작성하여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때, 세상은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을 버리고 우리의 신앙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실력'이 곧 우리의 '신뢰도'가 되고, 그 신뢰도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튼튼한 다리가 됩니다.

셋째, 탁월함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극대화하는 청지기의 의무' 이기 때문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아 갑절로 남긴 종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들의 칭찬의 기준은 그들이 얼마나 '선한 의도'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주인이 맡긴 자산을 가지고 '얼마나 탁월한 성과'를 냈느냐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재능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재능을 땅에 묻어두고 "이만하면 됐다"고 안주하는 것은 주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의 태도입니다. 반면, 그 재능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 최고의 열매를 맺어 주인께 돌려드리는 것이 바로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세, 즉 탁월함을 추구하는 청지기의 삶입니다.

이처럼, 탁월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거울이며, 세상과 소통하는 다리이고,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는 청지기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가장 실제적이고 강력한 예배 행위입니다.

6. How (어떻게) 안일함을 깨고 '탁월함'을 일상에서 훈련할 것인가? - 방법론과 방향 제시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의 타성을 깨고, 일상 속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과 영적 훈련은 다음과 같습니다.

방법론 1: 일의 '주인'을 바꾸라 - 골로새서 3장 23절의 내면화

모든 변화는 내 일의 최종 결재권자, 즉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재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께 하듯' 일하기: 매일 아침 일을 시작하기 전, 잠시 멈추어 "하나님, 오늘 제가 하는 모든 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상사나 고객이 보지 않는 작은 일 하나까지도, 마치 주님이 바로 앞에서 보고 계신 것처럼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훈련을 합니다.

나만의 '작업 기도문' 만들기: 자신의 직업의 특성에 맞는 기도문을 만들어 책상 앞에 붙여 둡니다. (예: "프로그래머로서, 저는 버그 없는 깨끗한 코드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반영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 "교사로서, 저는 학생 한 명 한 명의 잠재력을 최대로 이끌어내는 사랑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인내와 기대를 보여주는 예배를 드립니다.")

방법론 2: '고정 마인드셋'을 깨고 '성장 마인드셋'을 장착하라

탁월함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려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캐럴 드웩 교수가 말한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정을 즐기라: 결과의 성공이나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 자체를 즐깁니다.

도전을 환영하라: 어려운 과제를 피하지 않고, 나의 능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깁니다.

비판을 선물로 여기라: 다른 사람의 비판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소중한 정보와 선물로 여깁니다.

노력의 가치를 믿으라: 재능은 출발점일 뿐, 꾸준한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방법론 3: '카이젠(改善)'을 영적 훈련으로 삼으라: 매일 1%의 성장

'카이젠'은 '지속적인 개선'을 의미하는 일본의 경영 철학입니다.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좌절하기보다, 매일 아주 작은 개선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탁월함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어제보다 더 낫게' 질문하기: 하루 일을 마칠 때, "오늘 내가 한 일 중에서,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한 것은 무엇인가? 내일은 오늘보다 무엇을 1% 더 개선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기록하는 습관을 갖습니다.

실패를 기록하고 배우라: 성공 경험뿐만 아니라, 실패 경험을 '실패 노트'에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그 원인과 교훈을 분석합니다. 실패는 더 이상 수치가 아니라, 탁월함에 이르기 위한 가장 귀한 데이터가 됩니다.

방향 제시: '평범한 직업'을 '거룩한 소명'으로 만드는 장인(匠人)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은,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해내는 '거룩한 장인'입니다. 장인은 돈이나 명예를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 자체를 사랑하고, 자신의 손을 통해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희열을 느끼며, 그 작품을 통해 세상과 소통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모두 각자의 직업 현장으로 부름받은 '하나님 나라의 장인'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보고서 한 장, 우리가 상담하는 고객 한 명, 우리가 설계하는 건물 하나가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작품입니다.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고,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매일의 일을 '걸작'으로 빚어갈 때, 세상은 우리의 작품을 통해 일하시는 위대하고 탁월하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직업이 거룩한 소명이 되는 기적은, 바로 이 탁월함을 향한 거룩한 몸부림 속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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