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PART3 시대적 과제와 사회적 책임

교회와 사회 정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다.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빛과 소금'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마태복음 5:13-16)을 신앙의 중요한 지표로 삼아왔습니다. 이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부패를 막는 도덕적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통해 사회 각 분야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는 초기 한국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높이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6.25 전쟁 이후 절대적 빈곤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교회는 단순히 영적인 위로를 넘어,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운영하며 이웃의 삶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자선 활동은 기독교 신앙을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게 한 중요한 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개인의 윤리적 삶에 한정하는 경향이 있었고, 사회 구조적인 불의와 부패에는 침묵하는 한계를 노출했습니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양극화와 불평등, 권력 남용과 부패 등 굵직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교회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복음의 능력이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머무르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고, 세상으로부터 '자기들만의 울타리에 갇힌 집단', '위선적인 집단'이라는 비판을 받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장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빛과 소금'의 본질적인 의미를 재해석하며, 개인의 윤리적 삶을 넘어 사회적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교회의 공적 사명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 공동체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싸우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임을 다시금 깨달아야 합니다.
1. '빛과 소금'에 대한 오해와 그 위험한 결과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종종 개인적인 경건과 도덕적 삶을 강조하는 데 국한되어 해석되었습니다. '소금'은 개인의 부패하지 않는 깨끗한 삶, '빛'은 개인의 선행과 증거로만 이해되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위험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첫째, 복음의 영역을 축소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총체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빛과 소금'을 개인적 윤리에만 한정함으로써, 우리는 복음의 능력이 사회의 불의와 구조적 문제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억압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고, 불평등과 부정의를 외면하며, 부당한 권력에 침묵할 때, 세상은 복음을 무력하고 비현실적인 가르침으로 여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의 CEO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면서도 비윤리적인 노동 착취를 일삼을 때, 세상은 그가 섬기는 하나님과 복음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의 영적인 삶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문화 등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선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복음을 예배당의 경계 안에 스스로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둘째, '영적 이분법'을 심화시켰습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교회 안에서는 정의를 외치고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세상의 불의한 시스템에 순응하는 이중적인 삶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믿음'과 '삶'의 괴리를 심화시켰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위선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며 복음의 신뢰도를 떨어뜨렸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말'하는 교회가 아니라, '행동'하는 교회를 원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침묵할수록 세상은 교회를 세상과 단절된 '이해집단'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는 교회가 겪는 신뢰성 위기의 핵심 원인이자,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셋째,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상실하게 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개인의 죄를 지적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불의한 시스템과 권력의 부패를 향해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외치며 이스라엘 사회의 구조적 불의를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영적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으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을 꺼리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는 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예언자적 사명을 방기한 결과이며, 결과적으로 교회는 세속 권력과 타협하거나 그들의 불의에 침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교회가 예언자의 역할을 포기할 때, 세상은 더 이상 교회로부터 희망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게 됩니다.
2. 왜 교회는 사회 정의를 위해 행동해야 하는가?
사회 정의는 복음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이는 교회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소명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회 정의를 위해 행동해야 할 분명한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반복해서 가난한 자와 고아, 과부 등 사회적 약자를 돌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빚을 탕감하며, 모든 사람이 자유로워지는 희년(禧年) 제도를 통해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강물처럼 흘리라고 외쳤던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성품이 곧 정의임을 보여줍니다. 정의는 단순한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통치 원리입니다. 공의롭지 못한 사회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의 결과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곧 정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병든 자를 고치는 행위를 통해 육체적 치유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받았던 고통까지 함께 치유하셨습니다. 또한, 당시 종교 권력의 위선과 불의를 향해 담대하게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성전에서 돈을 바꾸는 자들을 내쫓으신 사건은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성전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상실하고 탐욕의 소굴이 된 현실을 향한 예언자적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의 불의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가장 강력한 행위였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삶을 본받아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고 불의와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사회 정의는 곧 선교입니다.
선교는 단순히 영혼을 구원하여 교회로 데려오는 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선교는 복음이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회복하며, 더 나아가 세상의 불의를 바로잡는 총체적인 행위입니다.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는 영혼 구원과 사회적 구원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행동할 때, 세상은 말로만 듣던 복음의 진정한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고,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을 변호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강력한 복음이 됩니다.
3. 교회의 새로운 사회적 사명: '예언자적 선포'와 '제사장적 섬김'
교회가 사회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예언자적 선포'와 '제사장적 섬김'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균형 있게 수행해야 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복음의 양면입니다.
가. 예언자적 선포:
교회는 불의와 죄악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외치는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는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방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용감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불평등, 생명 윤리, 환경 문제, 인권 문제, 그리고 권력의 부패에 대해 성경적 관점에서 명확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영역에 미쳐야 함을 선포하는 '예언자적 행동'입니다. 설교단은 단순한 위로의 메시지를 넘어, 성경적 진리를 통해 사회의 잘못된 가치관을 비판하고 성찰하게 하는 예언자적 기능을 회복해야 합니다.
나. 제사장적 섬김:
교회는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일회성 자선 활동을 넘어, 그들의 필요를 지속적으로 채워주고 삶의 근본적인 회복을 돕는 것입니다. 빈곤, 질병, 소외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물질적, 정서적, 영적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복음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지역 사회의 복지 단체와 협력하고, 전문성을 갖춘 봉사 사역팀을 운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청년들이 가진 IT 기술을 활용해 지역 사회의 소외 계층에게 디지털 교육을 제공하거나, 법률 전문가들이 저소득층에게 무료 법률 상담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4. 실질적인 사회 참여를 위한 구체적 제언
첫째, 자선(Charity)을 넘어 정의(Justice)로 나아가라:
빈곤한 이웃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자선은 훌륭한 일이지만, 그들이 왜 빈곤한지에 대한 구조적 원인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의로운 행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선'이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라면, '정의'는 그가 다시는 배고프지 않도록 빵을 빼앗는 불의한 구조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돕는 교회'를 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정의로운 교회'가 되라:
교회가 외부 세계에 정의를 외치기 전에, 먼저 교회 내부가 정의로워야 합니다. 재정 운영의 투명성, 민주적이고 공정한 리더십, 성도 간의 차별 없는 평등한 관계 등 교회 자체의 공동체적 삶이 세상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위선적인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교회 내부의 불의에 눈감으면서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공정한 재정 보고, 투명한 의사 결정 과정,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 존중받는 문화를 통해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지역사회와 연대하라: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지역 사회의 필요를 파악하고, 비영리 단체나 사회적 기업, 다른 종교 기관과 연대하여 더 큰 영향력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길입니다. 지역 사회의 복지관, 학교, 문화 센터 등과 협력하여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지역의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의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결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공동체로
한국 교회의 미래는 오직 예배당 안에서의 영적 성장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으로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어떻게 감당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은 정의 없이는 무력하고, 정의는 사랑 없이는 공허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이 사랑과 정의의 총체적인 실천임을 믿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 두 가지 가치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균형 있게 실천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세상의 희망이 되고, 메말랐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는 진정한 공동체로 재탄생할 것입니다.
기후 변화와 생태 영성:
창조 세계를 보전하는 사명
한국 교회가 지난 세기 동안 오직 영혼 구원과 해외 선교에 집중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며, 영혼의 문제만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물리적 세계와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종종 부차적인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경향은 마치 건물의 아름다운 내부를 꾸미는 데만 열중하고, 정작 건물을 지탱하는 기초와 외부 환경에는 무관심한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전 지구적인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이라는 심각한 위기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고, 극심한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찾아오며, 수많은 생물종이 멸종 위기에 처한 현실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 역시 여름철 기록적인 폭염과 폭우, 거대해지는 태풍, 그리고 만성화된 미세먼지 문제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는 단순히 과학적,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창조 세계에 대한 신학적이고 영적인 책임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세상을 우리가 얼마나 망가뜨렸는지에 대한 준엄한 질책입니다.
이 장은 한국 교회가 '구원'의 영역을 영혼에만 국한했던 신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창조 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해야 함을 제안합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하늘만을 소망하며 이 땅을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을 돌보고 보전하는 사명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생태 영성'을 재발견하고 창조 세계를 보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때, 교회는 세상의 메마른 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부흥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영적인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훼손한 피조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 창조 세계에 대한 신학적 오해와 그 파괴적 결과
한국 교회는 창조 세계에 대한 몇 가지 신학적 오해 속에서 환경 문제를 등한시해 왔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다음과 같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첫째, '정복과 지배'에 대한 오해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은 종종 인간이 자연을 마음껏 이용하고 착취해도 된다는 무제한적인 '정복의 허가'로 오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다스림'(dominion)은 폭력적인 지배가 아니라, 선한 청지기로서 피조세계를 사랑으로 돌보고 관리하라는 책임 있는 위임입니다. 히브리어 '라다'(radah)는 왕이 백성을 억압적으로 다스리는 의미보다는, 선한 목자가 양을 돌보고 보호하는 것처럼 책임과 사랑이 담긴 통치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창세기 2:15)고 하셨는데, 여기서 '지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마르'(shamar)는 '보호하다', '주의 깊게 돌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창조 세계를 가꾸고 보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소유'하거나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관리'하고 '가꾸는' 존재입니다.
둘째, 이원론적 신앙관의 영향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은 죄로 인해 타락했고, 결국 마지막 때에 멸망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신앙에만 몰두했습니다. 이들에게 육체와 물질세계는 영혼 구원과 비교할 때 부차적인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는 성도들로 하여금 환경 문제에 대한 책임 의식을 상실하게 했고, "이 세상은 어차피 끝날 세상인데 굳이 보전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무책임한 태도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이 약속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를 왜곡합니다. 성경의 종말론은 이 세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곳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창조 세계가 죄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회복되고 재창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은 물질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의지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회복 사역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셋째, 복음의 범위를 영혼 구원에만 한정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의 죄를 사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훼손된 창조 세계 전체를 회복하고 재창조하는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로마서 8장 22절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하며, 인간의 죄로 인해 모든 피조물이 고통받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피조물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때 함께 해방될 것이라는 소망을 제시합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구원의 영역이 영혼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확장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복음의 '총체성'(holism)을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은 한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사회 시스템의 치유, 그리고 신음하는 피조세계의 회복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메시지입니다.
2. '생태 영성'의 재발견: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우리가 직면한 환경 위기는 단순히 윤리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영성을 근본적으로 재점검할 것을 요구합니다.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완성됩니다. 우리는 '생태 영성'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가. 창조의 경이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성경은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말합니다(시편 19편). 우리는 숲을 걷고, 별을 바라보며, 작은 꽃 한 송이 속에서 하나님의 섬세한 솜씨와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외심을 가지고 자연을 관찰할 때 우리는 단순히 과학적 지식을 얻는 것을 넘어,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임재와 섭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창조 세계를 향한 경외심과 감사함은 우리의 영혼을 깨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할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밖으로 나가는 활동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려는 내면의 태도 변화입니다. 많은 기독교 신비주의자들과 영성가들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경험했으며, 이는 성경적 영성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나. '청지기'로서의 책임감 회복하기:
창세기 2장 15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인간이 창조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책임 있게 돌보는 '청지기'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우리의 일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에 대한 영적 보고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그리고 고통받는 이웃들이 오염되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자원과 삶의 방식을 책임감 있게 관리해야 합니다. 이는 개인의 편의를 넘어, 공동의 유익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희생을 포함합니다. 우리의 소비 습관, 에너지 사용 방식, 쓰레기 배출량 등 모든 것이 청지기로서의 우리의 영적 태도를 반영합니다.
다. 하나님의 회복 사명에 동참하기:
기독교의 희망은 이 세상이 멸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며(이사야 65장, 요한계시록 21장),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완전히 회복하실 것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환경 보전에 힘쓰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행동을 넘어, 하나님의 회복 사명에 동참하는 거룩한 선교적 행위입니다. '그린 선교'는 환경 문제를 겪는 지역 주민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과 함께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색하며, 하나님의 치유 사역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3. 교회의 새로운 사명: 창조 세계 보전을 위한 실천
생태 영성은 관념적인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창조 세계 보전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가. '생태 교육'을 교회의 필수 과제로 삼으라:
교회는 성도들에게 환경 문제에 대한 성경적 관점과 심각성을 교육해야 합니다. 설교와 성경 공부, 소그룹 모임 등을 통해 창조의 신학과 청지기 정신을 가르치고, 개인의 행동 변화를 촉구해야 합니다. 특히 다음 세대에게는 기후 위기가 그들의 미래와 직결된 문제임을 가르치고, 창조 세계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주일학교 교육 과정에 창조 과학과 환경 보전 활동을 포함시키고, 생태 관련 서적을 추천하거나 토론회를 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나. 친환경적인 교회 공동체로 변화하라:
교회는 먼저 스스로가 친환경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당과 시설에서 에너지와 물을 절약하고,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며, 재활용 시스템을 철저히 구축해야 합니다.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거나, 빗물을 재활용하고, 공동 텃밭을 가꾸는 등의 구체적인 실천은 성도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이 될 것입니다. 교회가 운영하는 모든 시설과 활동은 환경 보호를 우선순위로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 식당에서 플라스틱 식기 대신 다회용기를 사용하고, 헌금 봉투를 재활용하는 등 작은 변화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 '녹색 기도'와 '자연 예배'를 활성화하라:
예배의 형태를 확장하여 창조 세계를 향한 기도를 포함해야 합니다. 매주 주일 예배에 환경을 위한 기도 순서를 넣거나, 1년에 한두 번은 야외에서 드리는 '자연 예배'를 통해 성도들이 자연의 경이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또한, 환경 문제로 고통받는 이웃과 피조물을 위한 중보 기도를 정기적으로 포함시켜야 합니다. 예배 중 영상이나 예술 작품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파괴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성도들의 영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도 있습니다.
라. 환경 정의를 위한 행동에 나서라: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의 가장 큰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가난한 이웃과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은 오염된 물과 공기, 자연재해에 가장 먼저 노출됩니다. 교회는 단순히 개인의 노력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환경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오염 시설이 빈곤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워지는 문제나,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 사회의 환경 단체와 연대하여 더 큰 영향력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는 교회가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방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는 길입니다.
기후 변화와 환경 위기는 우리 시대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영적 시험대입니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창조 세계를 귀하게 여기는지를 증명할 기회입니다. 한국 교회가 '영혼 구원'과 '창조 세계 보전'을 분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총체적 복음을 삶으로 실천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제언들을 통해 한국 교회가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치유와 화해의 교회:
사회적 갈등을 넘어선 그리스도의 사랑
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는 갈등과 분열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대 간의 단절, 정치적 이념의 양극화, 극심한 빈부 격차로 인한 사회적 긴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처럼 우리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갈등은 단순히 세상의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분열의 양상이 교회 공동체 안으로 그대로 유입되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찢고 분열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고 깨어진 관계를 화해시키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상의 갈등을 답습하며 불신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도 정치적 성향에 따라 편을 가르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서로에게 날 선 비판을 쏟아내며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좌파 목사'니 '수구 보수'니 하는 혐오적 언어가 공공연히 사용되고, 교회 내에서도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이들은 배척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는 대신, 스스로 병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증거입니다.
이 장은 한국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라는 본질적인 정체성을 회복하고, 나아가 사회적 갈등을 넘어선 치유와 화해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함을 제안합니다. 이는 단순히 갈등을 회피하거나, 갈등의 원인을 덮어두고 억누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치유와 화해는 갈등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면하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여준 화해의 사랑을 실천하며,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적극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교회는 갈등이 아예 없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라, 갈등 속에서 사랑과 은혜로 치유와 화해를 끊임없이 이루어가는 살아있는 공동체입니다.
1. 교회 내외의 갈등,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심층적 분석
교회는 세상과 동떨어진 순결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공동체이기에,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갈등 자체가 아니라, 그 갈등을 건강하게 다루지 못하는 우리의 영적 미성숙함에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직면한 갈등은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들은 상호 영향을 미치며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 내부의 고질적인 갈등입니다.
교단 간의 신학적, 역사적 분열은 물론, 한 교회 내에서도 목회자의 권위주의적 리더십, 재정 운영의 불투명성, 그리고 다음 세대와의 소통 방식 등 다양한 문제로 인해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특히, 세대 간의 가치관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교회의 미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입니다. 기성세대는 전통적인 예배 방식과 헌신을 중시하는 반면, 다음 세대는 현대적인 찬양과 감각적인 예배,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참여에 더 큰 의미를 둡니다. 이는 단순히 예배 스타일의 차이를 넘어, 교회가 존재하는 방식과 사역의 우선순위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리더십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구조와 성도들의 민주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현대적 가치관 사이의 충돌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심각한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내부 갈등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고, 교회를 떠나 '가나안 성도'가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둘째, 사회적 갈등의 교회 유입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치적 진보와 보수, 페미니즘과 반(反)페미니즘, 세대 갈등 등 첨예한 대립 속에 있습니다. 성도들 또한 이러한 사회의 구성원이기에, 세상의 가치관과 갈등의 방식이 그대로 교회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를 외쳐야 할 교회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성도들이 날 선 비판과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고, 특정 이념을 가진 이들은 배척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예: 동성애 문제, 생명 윤리 문제 등)가 정치적 프레임과 결합될 때, 교회는 신학적 논쟁을 넘어선 감정적이고 소모적인 전쟁터로 변모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분열을 답습하고 증폭시키는 '세상 속의 작은 세상'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이념적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서서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대신, 모든 갈등의 주체들을 품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2. 성경적 화해와 치유의 신학적 기초에 대한 재정립
교회가 이러한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방법론을 넘어, 성경적 진리에 기반한 ‘화해의 신학’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성경은 갈등과 분열의 해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첫째, 십자가는 궁극적인 화해의 상징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의 거대한 죄의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이 화해는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낮추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겪으신 '케노시스(비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갈등의 해결이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에 있지 않고, '나의 권리를 내려놓고 먼저 섬기는 것'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에베소서 2장 14-16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음을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갈라놓았던 죄와 분열의 근원을 치유하고 화목하게 하신 유일한 방법입니다.
둘째, 교회는 화해의 직분을 위임받은 공동체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20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교회가 단지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거룩한 사명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화목한 관계를 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화목하게 하는 자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중재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포함합니다.
셋째, 사랑은 화해의 유일한 원동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본질을 '오래 참음', '온유함', '시기하지 않음', '성내지 않음' 등으로 정의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갈등 상황에서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인 분노와 비난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힘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성도와 대화할 때, 사랑은 상대방의 주장을 즉각적으로 반박하거나 정죄하는 대신,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묻고 경청하게 합니다. 사랑은 '옳고 그름'을 넘어 '이해와 공감'으로 나아가게 하는 영적 훈련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회복할 때, 우리는 서로의 의견 차이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아픔에 공감하며,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3. 치유와 화해의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 제언과 실천
교회가 갈등을 넘어 화해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말만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합니다.
가. 소통의 통로를 복원하고 안전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라: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소통의 부재입니다.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울 때 갈등은 증폭됩니다. 교회는 열린 토론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전문가(목회자, 상담가 등)가 참여하는 갈등 해결 워크숍을 운영하여 갈등 당사자들이 서로의 입장을 경청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때, '정죄와 비난의 언어' 대신 '긍휼과 존중의 언어'를 사용하는 훈련이 중요합니다. 또한, '내가 받은 상처'를 솔직하게 나누고 '내가 입힌 상처'를 용서받는 '화해의 고백'시간을 마련하여, 공동체의 영적 치유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나. 리더십의 역할 재정립과 영적 성숙을 위한 훈련:
목회자와 리더들은 갈등의 중재자이자 화해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특정 성향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성도들을 사랑으로 품으며, 갈등 당사자들을 경청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리더십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아니라,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의 영적 성숙을 요구합니다. 리더가 먼저 용서와 섬김의 본을 보일 때,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화해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교회는 리더들이 이러한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있도록 감정 코칭, 갈등 상담, 영적 멘토링 프로그램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합니다.
다. 공동체적 훈련과 교육을 통한 화해 문화 구축:
화해는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길러지는 영적 근육입니다. 교회는 성경 공부나 영성 수련회를 통해 화해의 신학을 가르치고, 갈등 해결 워크숍이나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성도들이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도록 도와야 합니다. 또한, 주기적인 '화해 기념 주일'을 지정하여, 공동체가 함께 화해의 의미를 되새기고 서로를 용서하며 치유를 선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은 교회를 갈등을 덮는 공동체가 아니라, 갈등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는 공동체로 만들 것입니다.
라. 연합과 섬김의 사역을 통한 하나됨의 경험:
서로 다른 의견과 배경을 가진 성도들이 함께 연합하여 이웃을 섬기는 사역은 갈등을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정치적 성향이나 신학적 견해가 다르더라도,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 일(예: 지역사회 봉사, 노숙인 급식, 재난 구호 등)에 함께할 때, 서로에 대한 편견이 무너지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공통의 목표를 향한 협력은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희망의 등대가 될 교회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교회가 겪는 아픔은 어쩌면 세상에 하나님의 화해를 보여주라는 소명에 대한 아픈 예고편일지 모릅니다. 교회가 세상의 갈등을 해결하기 전에, 먼저 교회 내부의 갈등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고 화해를 이루어낼 때, 세상은 교회를 희망의 등대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치유와 화해의 교회는 갈등 없는 완벽한 교회가 아니라, 갈등 속에서 더욱 빛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으로 증명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책이 한국 교회가 그 소명을 깨닫고,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는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나는 데 작은 불씨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도시 선교의 새로운 모델:
이웃과 함께 숨 쉬는 공동체
한국 교회의 역사를되짚어보면, 도시는 복음의 역동적인 심장이자 부흥의 현장이었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지방에서 상경한 청년들과 새로운 삶을 꿈꾸던 이들에게 도시의 교회는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곳을 넘어,영적 안식처이자 사회적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어주었습니다.'교회는 우리의 밥줄을 책임져주지 못하지만, 우리의 영혼과 공동체적 삶을 책임져준다'는 깊은 신뢰가 있었습니다. 교회당을 중심으로 수많은 집회와 부흥회에 모여들었고, 이 뜨거운 열기는 폭발적인 양적 성장을 이루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거대해진 도시 교회는 예기치 않은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익명성과 파편화된 삶 속에서 사람들은 교회를 '개인의 필요를 채우는 종교적 서비스 기관'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졌고, 교회는 지역 사회와의 접점을 잃은 채 '섬처럼 고립된 공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거대한 교회 건물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그 안에서는 주일 예배만을 위한 화려한 프로그램이 반복되지만,정작 그 담장 밖 이웃들과는 소통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세상은 더 이상 교회에 찾아오지 않고, 교회는 세상의 메마른 땅에 어떻게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할지 길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 장은 이러한 도시 교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교회가 다시 한번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며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숨 쉬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함을 제안합니다. 이는 '교회로 오라'고 외치는 전통적인 전도 방식에서 벗어나, 먼저 이웃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필요를 공감하고 섬기는 '관계 지향적 선교'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도시 선교는 거대한 프로그램을 통해 영혼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삶에 깊이 뿌리내려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으로 증명하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건물이 아니라, 도시의 고통과 기쁨에 함께 숨 쉬는 유기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1. 도시 선교의 고정관념과 그 한계에 대한 심층적 진단
오랫동안 한국 교회의 도시 선교는 '건물 중심', '행사 중심'의 모델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러한고정관념은 복음의 능력을 제약하고 다음과 같은 심각한문제들을 낳았습니다.
첫째, 교회 건물의 요새화입니다.
많은 도시 교회들은 복음 전파의효율성과 교회의 위용을명분으로 대형 예배당과 부속 시설을 건축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건물은 오히려 이웃들에게 '높은 문턱'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지역 사회와 분리된 채 자체적인 프로그램만 운영하는 교회는 이웃들에게 닫힌 공동체로 비춰지기 쉽습니다.주중에 텅 비어 있는 거대한 예배당은 마치 성벽처럼 보였고,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려면 특별한 자격이나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거액의 건축비와 유지비는 교회의 재정적 부담이 되었고, 이는 곧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자기 배만 불리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교회 건물이 복음의 통로가 되기보다, 교인들만의 안전한 '요새'로 전락하면서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는 점점 단절되었습니다.
둘째, 전도의 목적이 '교회 성장'에만 치우쳤습니다.
전통적인 도시 선교의 목표는 새로운 영혼을 교회로 이끌어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은 교회가 마련한 전도 집회나 행사에 이웃을 초청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이웃들은 교회의 초대를 부담스러워하거나, 자신들이 '교회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고 느낄 때 거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복음은 상대방의 필요를 먼저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우리가 만나는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들을 '교회 등록'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실적 중심의 전도'는 성도들에게는 극심한 심리적 부담과 소진을 가져왔고, 교회에 대한 세상의 불신을 심화시켰습니다.
셋째, 도시를'선교지'가 아니라 '시장'으로 인식하는 경향입니다.
도시는다양하고 복잡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인 만큼, 전통적인 선교 모델은 도시를 '잠재적 교인'이 넘쳐나는 종교적 시장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는 경쟁적인 전도와 배타적인 신앙관을 낳았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 경쟁하는 '종교 기업'처럼 비춰지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교회가 신자들을 '고객'으로, 목회자를 'CEO'로 인식하는 순간, 복음의 순수성은 희석되고, 신앙 공동체는 영적 관계가 아닌 이해관계로 얽힌 조직으로 변질됩니다. 이러한 시장 논리는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보다,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마케팅과 프로그램 개발에만 몰두하게 만들었습니다.
2. 패러다임 전환: 이웃과 함께 숨 쉬는 공동체로
도시 교회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다시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핵심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합니다.이는 단순히 전도 방법의 변화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작업입니다.
첫째, '위에서 아래로'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의 선교입니다.
예수님은 높은 보좌를 버리고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이 땅에오셨습니다. 진정한 도시 선교는 교회가 높은 곳에서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 그들과 함께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교회가 가진 지식과 자원을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웃의 필요와 아픔을 경청하고 그들의 삶을 배우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이는'상처 입은 치유자'로서의 자세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아파할 때, 세상은 교회의 진정성을 느끼고 마음의 문을 열 것입니다. 이는'지식의 전달자'에서 '사랑의 동역자'로의 정체성 전환을 의미합니다.
둘째, '건물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선교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소수의 교인들만 드나드는 텅 빈 거대한 예배당보다, 이웃의 필요를 위해 언제나 열려 있는 작고 친밀한 공동체가 더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배당을 중심으로 사역을 계획하기보다, 이웃들이 모이는 공원, 카페, 동네 도서관 등 삶의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야 합니다. 사람을 '건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진정한 도시 선교의 시작입니다.이는 곧 '예수님은 교회가 아닌 삶의 한복판으로 오셨다'는 복음의 핵심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제 '교회 건물'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성도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구현하는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프로그램 중심'이 아닌 '관계 중심'의 선교입니다.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잘 짜인 프로그램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프로그램이 아닌 '진정한 관계' 속에서 복음을 만납니다. 이는 단기적인 전도 행사보다, 이웃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그들과 식사를 나누며, 진정한 친구가 되는 장기적인 관계 맺음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열리는 무료 급식소나 공부방, 쉼터 등이 단순히 '봉사'를 넘어 '관계'를 위한 통로가 될 때, 그곳에서 진정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관계 중심의 선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눈에 보이는 성과가 미미할 수 있지만, 복음의 씨앗을 삶의 뿌리에 깊이 내리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3. 실질적인 실천 모델: '이웃과 함께 숨 쉬는 공동체’
'이웃과 함께 숨 쉬는 공동체'는 막연한 구호가 아닙니다. 이는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도시 속에서 복음을 구현하는 살아있는 모델입니다. 아래에 몇 가지 실질적인 제언을 제시합니다.
가. '모여서'가 아니라 '흩어져서' 사역하라:
성도들은 주일 예배 후 각자의 삶의 자리, 즉 일터와 가정, 학교로 흩어져야 합니다. 그곳에서 성도는'일터 선교사'로서의정체성을 가지고 정직과 성실로 이웃의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이는 단기적인 전도 활동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을 예배로 드리는 총체적인 신앙을 의미합니다.예를 들어, 한 명의 그리스도인 교사는 교실에서 정의와 사랑을 가르치고, 한 명의 그리스도인 예술가는 창조의 영감을 담은 작품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가장 중요한 선교지임을 깨달을 때, 모든 성도는 살아있는 복음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나. 교회의 유휴 공간을 이웃에게 개방하라:
교회의 건물은 더 이상 교인들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일의 빈 공간을 지역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 학습 공간, 쉼터, 문화 강좌 등으로 개방해야 합니다.예를 들어, 교회의 카페를 이웃에게 개방하고,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하며, 어머니들을 위한 '맘 카페'를 운영할 수 있습니다. 주중에 비어 있는 교육관을 방과 후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이나, 어르신들을 위한 쉼터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교회가 이웃들에게 '필요와 유익'을 주는 공간이 될 때, 그곳은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파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다. '이웃의 전문가'와 협력하라:
교회는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웃의 필요를 파악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의사, 변호사, 상담가, 교육 전문가 등)와 협력하여 지역 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는 교회의 전문성과 사회적 신뢰도를 높이고, 이웃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는 교회가 되게 할 것입니다.교회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자선 활동에 머물지 않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더 전문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법률 상담 서비스는 단순히 법률 조언을 넘어,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주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라. '공동체적 고난'에 동참하라:
도시는 수많은 고난을 품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실업 문제, 노인들의 고독사, 빈부 격차로 인한 교육불평등, 그리고 젠더 갈등등 사회적 아픔에 대해 교회가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고난의 현장으로 찾아가,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을 위로하는'상처 입은 치유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노숙인들에게 단순히 따뜻한 한 끼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다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일자리 훈련 프로그램을 지원하거나, 청년들의 정신 건강 문제를 위한 상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고난의 현장에서 이웃과 함께 울 때, 세상은 교회의 진정성에 감동하고,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재건되는 도시의 심장
도시 선교는 거대한 건물을 짓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웃의 심장에 사랑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과 단절된 섬이 아니라, 이웃의 삶과 함께 숨 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의 필요를 먼저 구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때, 세상은 말로만 듣던 복음의 진정성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새로운 도시 선교의 모델이 메말랐던 도시의 영혼들을 깨우고, 사랑으로 재건되는 도시의 심장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문화 시대의 교회: 다양성을 포용하는 믿음의 공동체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 속에서 견고한 공동체를 이루어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성장한 한국 교회 역시 문화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끈끈한 공동체를 형성해왔습니다. 성도들은 비슷한 문화적 배경과 가치관을 공유하며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꼈고, 이는 교회의 부흥을 이끄는 중요한 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이미 250만 명을 넘어섰으며, 국제결혼 이주민과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 등 그 구성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습니다.이웃의 얼굴은 우리가 익숙했던 모습과는 다른 다양한 색깔과 문화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급변하는 사회적 지형은 한국교회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과연 교회는 '우리'만의 울타리를 넘어,인종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선 진정한'믿음의 공동체'로 거듭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장은 교회가 다문화 시대라는 새로운 도전에 어떻게 응답하고,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복음의 본질에 따라 다양성을 포용하는진정한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을지 제언하고자 합니다.
1. 단일문화적 교회 전통의한계와 그 치명적 결과
한국 교회가 단일민족 문화 속에서 쌓아온 전통과 유산은 분명 소중한 가치입니다. 특유의 뜨거운 영성과강력한공동체 의식은 세계 교회가 주목할 만한 한국 교회의 강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은 동시에 다문화 시대에 극복해야 할치명적인한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배타성입니다.
단일 문화에익숙하고 편안한 공동체는 때로 낯선 이들을 향한 배타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이는 단순히 의도적인 차별을 넘어, 무의식적인 편견과 문화적 차이에 대한 무지로 인해 발생합니다.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외국인들을 예배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으로 받아들이지못하거나, 그들을 위한 사역을 단순히 '시혜적인 봉사'로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 예배 후의 친교 시간은 여전히 한국어와 한국인들만의 대화로 채워지고, 이주민들은 물리적으로는 함께하지만 심정적으로는 고립된 '손님'으로 머무르게 됩니다. 이러한'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태도는 복음의 보편적인 메시지를 축소시키고, 교회 공동체의 확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입술로 '모든 민족'을 외쳐도, 마음속에 '우리'만을 위한 공간을 남겨둔다면, 복음은 결코 우리만의 울타리를 넘어갈 수 없습니다.
둘째, 무의식적인 문화적 우월감입니다.
한국 교회는130년이 넘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복음을 받은 자'에서 '주는 자'로 빠르게 전환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큰 자부심을 주었지만, 동시에무의식적으로 한국 문화가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데 가장우월하고 효율적인 도구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선교지에서 한국의 예배 방식과 교회 문화를일방적으로 주입하거나, 한국에 온 이주민들에게 한국적 방식의 신앙생활(예: 새벽 기도, 통성 기도, 철야 예배)을강요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어떤 특정 문화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문화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초문화적'(trans-cultural) 진리이며, 오히려 각 문화의 고유한 아름다움 속에서 더욱 풍성하게 빛납니다.
셋째, 복음의 총체성 상실입니다.
단일문화적 교회는 주로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사회적, 문화적 문제에는 소극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다문화 사회의 이주민들은 단순히 영적 문제뿐만 아니라, 언어의 장벽,인종 차별, 열악한 노동 환경, 불확실한 체류 신분, 자녀 교육 문제등 복합적인 문제에 직면합니다. 교회가 이들의 삶의 문제를 외면하고 단순히 '복음'만을 외칠 때, 그들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공허한 메시지로 전락하게 됩니다.성경적 복음은 영혼 구원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이사야 61:1),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하며(마태복음 9:35), 정의롭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는 총체적인 메시지입니다.
2. 다양성을 포용하는 믿음의 신학적 기초와 그 의미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은 단순히시대적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가장 본질적인 명령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다양성 속의 통일성(Unity in Diversity)이라는아름다운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창조 세계의 다양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종과 언어, 문화의 다양성을 계획하셨습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동시에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획일적인 공동체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그분의 아름다움과 창조의 신비를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모든 인간은 피부색과 언어, 문화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은 곧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둘째,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바벨탑 사건의 완벽한 해답을 보여줍니다. 성령 강림을 통해 각기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언어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듣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성령 안에서 모든 문화와 언어가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의 교회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놀라운 연합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교회가 획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성령님은 '어떤 특정 문화의 언어'가 아닌, 모든 문화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본질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교회를 몸에 비유하며, 몸의 각 지체가 모두 다르지만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눈, 귀, 손, 발이 각각 다른 역할을 하지만,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교회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각 문화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독특한 은사와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함께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은 온전해집니다.외국인 성도는 단순히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한국 교회가 갖지 못한 새로운 영적 열정과 문화적 통찰을 가져오는 '귀한 지체'입니다.
3. 다양성을 포용하는 공동체를 위한 실질적인 제언
다문화 시대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외국인들을 환영하는 것을 넘어, 공동체 전체가 다양성을 품는 유기체로 변화해야 합니다. 이는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첫째, '이주민을 위한 사역'에서 '이주민과 함께하는 사역'으로 전환하라.
기존의 이주민 사역은 종종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라는 수직적인 관계로 고착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주민들을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의 동역자'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가진 신앙적 열정과 문화적 강점을 존중하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외국인 성도들이 자신의 언어로 성경을 가르치거나, 자신의 문화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는 것입니다.이는 그들에게 정체성과 소속감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사역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둘째, 예배의 언어와 형식을 확장하라.
주일 예배는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단일 언어로만 진행되는 예배는 외국인 성도들에게 소외감을 줄 수 있습니다. 주요 설교 내용을 자국어로 통역하거나, 자막을 제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외국인 성도들의 언어와 문화를 담은 찬양을 함께 부르고,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예배 순서를 도입해야 합니다.예를 들어, 한국적 찬양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다양한 문화권의 찬양을 배우고 함께 부르는 것입니다.이는 획일적인 예배를 넘어, 다양성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셋째, 공동체 내 소그룹을 다양화하고 교류를 촉진하라.
소그룹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세포입니다. 같은 언어와 문화권 성도들로 이루어진 소그룹은 이들이 교회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소그룹들이 각자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도록, 다양한 문화권의 성도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다문화 교류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운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한 번은 서로의 음식을 나누고 문화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거나, 다문화 가정을 위한 특별한 행사들을 기획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교류는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진정한 가족 공동체로 성장하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넷째, '이주민'이 아닌 '새로운 이웃'으로 인식하라.
한국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입니다. 이주민들은 더 이상 잠시 머물다 떠나는 손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갈 새로운 이웃입니다. 교회는 이들을 돕는 것을 넘어, 그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고 정착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한국어 교육, 법률 상담, 취업 정보제공, 의료 지원등)을 제공하는 지역 사회의 허브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의 필요에 응답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교회가 운영하는 다문화 센터, 무료 급식소 등은 단순히 자선 활동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깊이 개입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복음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희망의 무지개가 될 교회
다문화 시대는 한국 교회에 위기가 아니라, 복음의보편성과 하나님의 풍성함을다시금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피부색과 언어를 가진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신 이유는, 그분의 영광이 한 문화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을 통해 드러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더 이상 단일문화적 울타리 안에 갇힌 배타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희망의 무지개'가 되어야 합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제언들을 통해 한국 교회가 획일성을 넘어 다양성을 포용하고, 세상의 갈등을 치유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하나됨을 이루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공공 영역에서의 기독교 윤리: 정직과 투명성으로 신뢰를 쌓기
한국 교회는 한때 이 사회의 도덕적 양심이자 희망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극한의 고난 속에서도 교회가 보여준 정직한 삶과 헌신적인 봉사는 세상에 깊은 감동을 주었고, 이는 한국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정직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들’로 여겼고, 교회는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그 어떤 사회 집단보다 심각한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뉴스나 미디어에서 들려오는 교회 관련 소식은 주로 목회자의 비윤리적 행동, 교회의 세습 문제, 불투명한 재정 사용,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타성 등 부정적인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한때 세상의 소금과 빛이었던 교회가 이제는 ‘소금 맛을 잃은’ 존재로, ‘어둠 속에 숨어버린’ 집단으로 비판받는 비참한 현실에 우리는 직면해 있습니다.
이 장은 한국 교회가 왜 이러한 신뢰의 위기를 겪게 되었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진단하고,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공공 영역에서 정직과 투명성을 회복하는 것이 왜 복음의 본질적 사명인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주일 예배당 안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영역, 특히 권력과 재정이 오고 가는 공공 영역에서 그 진가를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가 다시금 세상의 신뢰를 얻고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온전한 윤리적 모범을 보이는 데 있습니다.
1. ‘믿음’과 ‘행동’의 이분법적 신앙, 그 위험한 유산
한국 교회가 공공 영역에서 신뢰를 상실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믿음'과 '행동'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신앙관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와 영혼의 구원만을 신앙의 전부로 여겼고, 나머지 세상의 영역은 종종 '속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신앙관은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첫째, 신앙의 무력화입니다.
믿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님의 사랑을 외치지만, 교회 밖의 일터나 사회생활에서는 세상의 가치관과 경쟁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이중적인 삶이 만연해졌습니다. 직장에서 비윤리적인 거래를 하거나, 공동체의 공금을 사적으로 유용하면서도, 주일에는 기도와 헌금 생활을 빠뜨리지 않는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삶은 믿음이 우리의 존재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종교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둘째, 도덕적 해이와 사회적 위선입니다.
교회의 이분법적 신앙은 특히 윤리적 판단이 요구되는 공공 영역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재정 문제에 대한 투명성을 확보하지 않고, 불법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거나 개인의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막대한 실망을 안겨주었고, 교회 전체를 향한 사회적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세상은 교회가 가진 '윤리적 위선'을 꿰뚫어 보았고, '성경적 가르침'과 '실제 삶'의 괴리 속에서 복음의 신뢰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선은 단순히 교인들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의 도덕적 해이를 가져오는 구조적인 병폐가 되었습니다.
셋째,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 상실입니다.교회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는 사회의 불의와 부패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예언자적 역할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사회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때로는 불의한 권력과 결탁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교회가 사회적 비수(匕首)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부패한 구조에 편입되면서, 세상은 더 이상 교회에서 희망과 정의의 메시지를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예언자적 사명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대사'가 아닌 '세상의 대변인'으로 전락하는 위험에 빠졌습니다.
2. 정직과 투명성: 복음의 본질적 증거
우리가 이분법적 신앙의 유산을 극복하고 신뢰를 회복하려면, 정직과 투명성이 복음의 본질적인 증거임을 다시금 깨달아야 합니다. 정직과 투명성은 단순히 도덕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윤리적 기준입니다.
첫째, 정직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며, 그분에게는 거짓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역시 정직한 마음과 태도로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 이에서 더하는 것은 악에서 나는 것이니라"(마태복음 5: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말과 행동에 일말의 거짓도 없어야 함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거룩한 백성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둘째, 투명성은 '어둠'을 미워하는 복음의 태도입니다.
복음은 어둠 속의 비밀을 드러내고 빛 가운데로 나아오게 합니다. "자신이 행한 일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3:21)라는 말씀처럼, 진실한 신앙은 숨기거나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운영, 특히 재정은 빛 가운데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가 불투명한 방식으로 재정을 운영할 때, 이는 세상에 '교회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심을 심어줍니다. 반대로, 투명한 재정 운영은 성도들의 헌신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셋째, 윤리는 곧 선교입니다.
전도는 단순히 복음을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복음을 판단합니다. 우리가 공공 영역에서 정직과 투명성을 보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거하게 됩니다. 윤리적 삶은 전도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이자,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선포가 될 것입니다.
3. 교회의 공적 사명 회복을 위한 실질적 제언
한국 교회가 다시금 세상의 신뢰를 얻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첫째, 재정 투명성을 강화하고 윤리적 책임성을 높여라:
교회는 헌금과 재정 사용에 대한 명확하고 상세한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공개해야 합니다. 교회 홈페이지나 주보를 통해 모든 재정 지출 내역을 투명하게 밝히고, 회계 감사를 외부 전문가에게 맡겨 공정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재정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지도자들의 사적 유용을 막기 위한 명확한 규정을 마련해야 합니다. 재정의 투명성은 성도들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이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을 보이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둘째, 정치적 중립성과 예언자적 역할을 동시에 감당하라:
교회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적 이념에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모든 정치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선포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는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침묵이 아니라, 불의한 권력을 향해 담대하게 외치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정치적 편향성에서 벗어나 사회의 공적 선(善)을 추구할 때, 세상은 교회를 진정한 예언자 공동체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교회 리더십의 윤리적 모범을 재정립하라:
교회 지도자는 누구보다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받아야 합니다. 말씀의 권위를 내세워 성도들을 통제하는 군림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섬김과 사랑으로 봉사하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따라야 합니다. 재정적, 성적, 권력적인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영적, 윤리적 삶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리더의 삶이 곧 교회의 얼굴입니다.
넷째, 성도들의 공적 영역에서의 윤리적 훈련을 강화하라:
교회는 주일 예배와 신앙 훈련을 넘어, 성도들이 각자의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직면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일터 신학'을 교육하고, 직업별 소그룹 모임을 통해 각자의 직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을 토론해야 합니다. 정직한 상거래, 공정한 경쟁, 이웃을 배려하는 태도 등 복음적 가치를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회복되는 신뢰
한국 교회의 미래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과 '행동'을 통합하는 새로운 신앙관을 확립하고, 공공 영역에서 정직과 투명성이라는 복음의 본질적 가치를 실천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교회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윤리적 공동체로 거듭날 때, 세상은 다시 한번 교회를 주목할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삶과 투명한 행동을 통해 세상은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며, 교회는 다시금 희망의 상징이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제언들은 바로 그 소중한 첫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자살 문제에 대한 교회의 역할: 고통받는 영혼을 안아주기
오늘날 한국 사회는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영적, 정서적 고통이 드리워져 있습니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 수년째 최상위권을 기록하는 자살률과 급증하는 우울증 환자 수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내면의 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람들은끝없는 경쟁과 피로 속에서 번아웃과 무력감을 호소하며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으며, 영혼의 외로움과 고립감은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아픔에 대해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문제를 겪는 이들을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으며 고통을 외면해왔습니다. '기도하면 낫는다',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식의무책임한메시지는 오히려 고통받는 이들에게 더 큰 죄책감과 절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장은 자살과 우울증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영적 문제로 치부하는 잘못된 시각을 극복하고, 성경적 진리에 기반한 '치유와 공감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제언하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가 병들고 소외된 이들을 치유하고 안아주는 것이었음을 기억하며, 한국 교회가 이 시대의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한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1. 자살과 우울증에 대한 교회의 오해와 그 차가운 결과
우울증은 단순히 마음이 약해서 생기는 병이 아닙니다. 이는 뇌의 신경화학적 불균형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질병이며,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없는 의학적 영역의 문제입니다.그러나 많은 교회는 이러한 의학적, 과학적 사실을 무시한 채 우울증을 '영적 문제'로만 치부해왔습니다.
첫째, '믿음의 부족'이라는 낙인입니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성도에게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식의 충고는 그들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무지한 태도입니다. 이는 마치 암 환자에게 "믿음이 부족해서 암에 걸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낙인은 고통받는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에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게 만들고, 홀로 고립되게 합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조차위선적으로 행복한 척해야 하는 외로움에 갇히게 됩니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공동체가 오히려 그들의 상처를 덧나게 만드는 차가운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도들은 자신의 고통을 숨기고 가면을 쓴 채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 '영적 전투'라는 이름의 압박입니다.
우울증을 사탄의 공격이나 영적 무지의 결과로만 설명할 때, 성도들은 질병 자체에 대한 치료보다는 '영적 전투'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무한한 책임감에 시달리고, 결국 영적 피로와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복음이 주는 해방과 자유를 경험하기는커녕, 또 다른 층위의 억압을 겪게 만드는 위험한 접근 방식입니다.이러한 접근은 때때로 성도들이 정신과 치료를 거부하거나 약물 복용을 중단하게 만들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영적 전투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인간의 고통을 모두 영적인 원인으로만 설명하려는 것은 복음의 총체성을 부정하는 위험한 시각입니다.
셋째, '완전한 치유'만을 강조하는 승리주의 신앙입니다.
많은 교회는 고난과 아픔이 궁극적으로 극복되고 치유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가르칩니다.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이 사라진다는 승리주의적 메시지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성도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줍니다.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연약함과 고통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평생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승리'만을 강조하며 고통의 시간을 무시할 때, 고난 속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경험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고통받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네가 믿으면 낫는다'는 공허한 약속이 아니라, '네가 아파하는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신다'는 따뜻한 위로와 공감입니다.
이러한 오해들은 결국 교회를 '아픈 사람이 숨어야 하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이 교회에서 외면받고 상처받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고, 세상의 아픔에 무감각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 고통의 신학과 공감의 영성: 하나님의 마음 회복하기
교회가 자살과 우울증 문제에 제대로 응답하려면, 먼저 고통과 슬픔에 대한 신학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 '애통'의 영성을 회복하라:
시편에는 수많은 애통의 시들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을 비롯한 시편 기자들은 자신의 절망과 고통, 하나님을 향한 원망까지도 숨김없이 아뢰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솔직한 고백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자신의 아픔을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하며,그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종교적인 수사로 여기지 않고, 고통받는 이들을 끌어안는 교회의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애통의 영성은 고통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고통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용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겉으로만 평화로운 공동체가 아니라,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진정한 '슬픔의 동반자'가 되는 첫걸음입니다.
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을 본받으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병든 자, 소외된 자, 고통받는 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셨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단순히 육체적인 병을 고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영혼을 회복시키고 사회적 소외로부터 해방시키는 총체적인 구원의 행위였습니다.그분은 나병 환자를 만지셨고,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셨습니다.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고통받는 이들의 필요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치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이는 단순히 병원비나 생활비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외로운 마음을 보듬고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총체적인 돌봄을 의미합니다.
다. 하나님의 '고통받으심'을 기억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하고 고통받지 않는 존재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겪는 고통을 함께 느끼고 아파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과 고통을 친히 경험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 속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울고 그들의 곁을 지킬 힘을 얻게 됩니다.기독교 신앙의 가장 강력한 희망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3. 고통받는 영혼을 위한 교회의 실질적 역할
자살과 우울증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첫째, '안전한 대화 공간'을 마련하라:
교회는 먼저 성도들이 자신의 아픔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대화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정죄와 비판이 아닌, 오직 공감과 경청으로 채워진 소그룹 모임이나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합니다.목회자와리더들은 성도들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경청의 훈련을 받아야하며, 비밀 보장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공동의 아픔'을 공유하는 소그룹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나만 이런 것이 아니구나'라는 동질감을 주고, 깊은 위로와 소속감을 제공할 것입니다.
둘째, '전문가와의 협력'을 강화하라:
우울증은 전문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질병입니다. 교회는 성경적 가르침과 함께 전문적인 심리 상담과 정신과 치료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권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상담 전문가를 두거나, 외부 전문 기관과 협력하여 성도들이 부담 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영적 문제를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전문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영적 안내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목회자의 기도뿐만 아니라 의학적인 도움을 통해서도 임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성숙한 태도입니다.
셋째, '치유를 위한 예배'와 '회복 공동체'를 세우라:
일반적인 주일 예배와 별개로,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특별한 예배를 기획할 수 있습니다. '치유와 회복'을 주제로 한 예배는 고통의 시간을 함께 통과하는 공동체의 연대감을 강화할 것입니다. 또한, 우울증이나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한 특화된 '회복 공동체'(recovery community)를 만들어 전문적인 프로그램과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야 합니다.익명의 원칙을 지키는 모임을 통해 솔직한 고백을 이끌어내고,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를 단순한 종교 기관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방주로 만들 것입니다.
넷째, 생명 존중을 위한 '예방 사역'을 강화하라:
자살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막아야 할 사회적 재앙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삶의 위기 신호를 감지하고, 주변의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생명 지킴이'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 '생명'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 공동체로서, 우리는 생명 존중의 문화를 사회에 확산시키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이는 주일학교 교육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하고, 친구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도움이 필요할 때 요청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곁에 서는 교회
한국 교회의 미래는 거대한 건물이나 수많은 교인 수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작은 자, 병든 자, 고통받는 자들의 곁에 서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것처럼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사랑으로 안아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영적, 정서적 고통에 진정으로 응답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세상의 희망이 되고, 메마른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는 진정한 치유 공동체로 거듭날 것입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제언들은 바로 그 소중한 첫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빈부 격차와 교회의 역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
한국 사회는 눈부신 경제 성장으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극심한 빈부 격차는 가난을 개인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는 사회적 편견을 낳았고, 양극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 교회는 과연 어떤 위치에 서 있을까요? 한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피난처였던 교회는, 이제 성장주의와 번영 신학의 그늘 속에서 빈곤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가난을 믿음이 부족한 결과로 치부하는 잘못된 시각에 빠져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복음은 본래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되었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아픔에 무감각해졌다는 뼈아픈 성찰이 요구됩니다.
이 장은 빈부 격차라는 우리 시대의 중대한 도전 앞에서 교회가 침묵하지 않고, 성경적 진리에 기반한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함을 제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함"이었음을 기억하며, 한국 교회가 가난한 자들의 영적, 물질적 필요를 총체적으로 채우는 사명을 회복할 때 비로소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 빈곤에 대한 교회의 오해와 '번영 신학'의 그늘
한국 교회가 빈곤 문제에 대해 무력해진 가장 큰 원인은 성경적 가르침에 대한 오해와 '번영 신학'의 확산에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시각은 다음과 같은 위험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첫째, '물질적 축복'을 신앙 성숙의 척도로 삼았습니다.
번영 신학은 신앙이 곧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으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이 관점은 가난을 '믿음이 부족한 결과'로, 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신학은 교인들에게 끊임없이 더 큰 물질적 성공을 추구하도록 부추겼고, 가난한 이웃에 대한 공감보다는 그들의 상태를 믿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사회의 소외된 이들을 끌어안는 '복음 공동체'가 아니라, 성공한 자들만의 '엘리트 공동체'로 변질되는 위험에 빠졌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위축되고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고, 복음의 문턱은 그들에게 더 높아졌습니다.
둘째, '영혼 구원'에만 집중하며 삶의 총체성을 외면했습니다.
많은 교회는 복음을 오직 영혼 구원과 내세의 문제에만 국한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필요와 삶의 모든 영역을 회복시키는 총체적인 구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빈곤과 불평등을 외면할 때, 우리는 복음의 절반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 가난을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빈곤은 단순히 개인의 게으름이나 노력 부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회 구조적 문제입니다. 불평등한 교육 기회, 불안정한 노동 시장, 의료 접근성 부족 등 수많은 사회적 요인들이 가난을 대물림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고, 가난을 개인적인 '윤리적' 문제로만 치부하며 기도와 헌금으로만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는 '원인'은 그대로 둔 채 '결과'만을 해결하려는 근시안적인 접근 방식입니다.
2. 성경적 빈곤 신학의 회복: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선 하나님
우리가 빈곤 문제에 제대로 응답하려면, 성경이 가난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근본적으로 재점검해야 합니다. 성경 전체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첫째, 구약의 정의로운 하나님:
구약의 율법은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나그네를 특별히 보호하라고 명령합니다. 십일조의 일부를 그들을 위해 사용하고(신명기 14:28-29), 희년(禧年) 제도를 통해 빈부 격차를 해소하려는 사회 시스템을 마련했습니다(레위기 25장). 아모스와 이사야 등 선지자들은 부자들의 불의와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강물처럼 흐를 것을 외쳤습니다. 이는 정의가 하나님의 성품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 사역:
예수님의 첫 사역 선포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자신을 보내셨다는 것이었습니다(누가복음 4:18-19). 예수님은 부자들에게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요구하셨지만(마가복음 10:21), 가난한 자들에게는 아무런 조건 없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소외된 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고, 그들의 인간성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가난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셋째, 사도 시대 교회의 실천:
사도행전 2장과 4장은 초대 교회가 모든 것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이는 공산주의적인 강제적 재분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발적인 나눔을 실천한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초대 교회가 사회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모이는 공동체였음을 생각할 때, 이들의 나눔은 단순히 '자선'을 넘어 '생존'을 위한 강력한 연대였습니다.
3. 교회의 새로운 사명: '사랑의 디아코니아'와 '정의의 프로테스탄트'
한국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회복하려면, 단순히 물질적 지원에 그치지 않고 사랑의 '디아코니아'(봉사)와 정의의 '프로테스탄트'(저항)라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감당해야 합니다.
가. 사랑의 디아코니아: 빈곤의 상처를 치유하는 섬김:
교회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질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구제금을 주는 행위를 넘어, 그들의 필요를 총체적으로 채우는 섬김을 의미합니다. 빈곤은 단순히 물질의 부족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 자존감 상실, 영적 절망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문제입니다. 교회는 다음과 같은 사역을 통해 이들을 섬겨야 합니다.
생활 지원:결식 아동, 독거노인, 쪽방촌 거주민 등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생필품을 지원하는 등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교육과 자립 지원: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는 방과 후 학습을 지원하고, 성인들에게는 직업 훈련과 재취업을 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합니다.
영적·정서적 치유:가난으로 인해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전하고,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소그룹 모임이나 상담을 통해 그들의 영적, 정서적 필요를 채워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나. 정의의 프로테스탄트:
구조적 불의에 맞서는 예언자적 목소리:교회는 단순히 가난한 자를 돕는 자선 활동에 머물지 않고, 가난을 초래하는 불의한 사회 구조에 맞서 싸우는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는 특정 정치 세력에 편승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선포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불평등한 노동 환경, 약탈적 자본주의, 불공정한 세금 제도 등 사회적 불의에 대해 성경적 관점에서 명확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4.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실천을 위한 구체적 제언
첫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외치는 교회로 변화하라:
교회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고, 이를 신학적, 목회적, 재정적으로 최우선 과제로 두어야 합니다. 교회의 예산 편성과 사역의 방향이 가난한 자들을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합니다.
둘째, '나눔의 경제'를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라:
교회는 단순히 헌금을 모으는 것을 넘어, 자발적인 나눔과 공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경제'를 구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고, 공동의 자원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사용하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셋째, '연대와 협력'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라:
교회는 혼자서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역 사회의 복지 단체, 사회적 기업, 다른 종교 기관과 적극적으로 연대하여 더 큰 시너지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는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넷째, '가난한 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하라: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주체'가 아니라,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정의가 만나는 곳,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빈부 격차라는 우리 시대의 영적, 사회적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한국 교회가 번영 신학의 유혹을 벗어던지고,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실천하며,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끌어안는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땅 위에 실현될 것입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제언들은 바로 그 소중한 첫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