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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礎宣教訓練オンライン講義リスト

PART 2: 교회의 본질 회복과 영성 재건

한국 교회의 영성:
고난의 역사를 넘어선 믿음의 유산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이래로, 한국 교회는 그 어떤 민족보다도 역동적이고 뜨거운 신앙의 역사를 써내려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성장은 단순히 숫자의 팽창이나 건물의 웅장함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민족의 가장 깊은 고난과 절망의 순간마다, 오직 믿음으로 그 시대를 관통해 온 한 세기 이상의 영적 투쟁의 결과입니다. 한국 교회의 영성은 고난의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 깊은 고통 속에서 더욱 순도 높게 단련된 믿음의 유산입니다. 이 유산은 단순히 과거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영적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1. 고난의 토양 위에서 피어난 믿음의 꽃
한국 교회의 역사는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시대에 시작되었습니다. 쇄국 정책으로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면서 복음은 이 땅에 들어왔지만, 그것은 환영받는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은 이미 기울어가는 국운 속에 있었고, 서양 종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배척은 복음 전파를 가로막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가족과 마을로부터 쫓겨나고, 재산을 몰수당하며, 때로는 생명까지 위협받는 극심한 박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박해와 고난이 한국 교회의 영성을 형성하는 첫 번째 토양이 되었습니다.
핍박은 믿음을 선택하는 자들을 철저히 걸러냈습니다. 단순히 호기심이나 사회적 이점을 위해 교회에 발을 들였던 사람들은 이내 발길을 돌렸고, 오직 생명을 건 헌신만이 요구되는 상황 속에서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서구의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매 순간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배는 숨어 드리는 은밀한 모임이었고, 성경은 목숨을 걸고 읽어야 하는 금서와도 같았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한국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을 ‘삶의 전부’로 받아들이게 했으며, 순교를 각오하는 견고한 믿음의 정신을 낳았습니다. 이 시기의 신앙은 현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세의 영원한 생명을 향한 순전한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36년은 이러한 영성을 더욱 단련시키는 용광로가 되었습니다. 제국주의의 폭압 속에서 한국인들은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갔지만, 교회는 민족의 구심점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굳건히 감당했습니다. 특히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 교회의 믿음을 시험하는 거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은 신사참배를 종교 행위가 아닌 단순한 국민 의례라고 주장했지만,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이를 우상숭배로 간주하며 죽음을 택했습니다.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 그리고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은 한국 기독교 역사의 가장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순교는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생명을 내어놓을 만큼 순도 높은 믿음은 이후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을 위한 강력한 영적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순교자들의 믿음은 단순히 개인의 구원을 넘어,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고 독립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교회는 독립운동의 비밀 거점이었고, 복음은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로 이 땅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역사의 어둠 속에서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어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2. 전쟁의 폐허 위에서 솟아난 기도 소리
일제강점기의 고난이 끝나자마자, 한국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맞이했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된 절망의 폐허 위에서, 한국인들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삶의 터전은 사라졌으며,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절망 속에서 한국 교회의 영성은 더욱 깊고, 더욱 절박해졌습니다.
전쟁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인 '한(恨)'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 한을 세상적인 분노나 복수로 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그 모든 고통과 슬픔을 기도로 승화시켰습니다. 새벽 미명부터 교회는 성도들의 통성 기도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새벽 예배는 그들의 하루를 시작하는 유일한 힘이었으며, 온갖 고통과 상실을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영적인 몸부림이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건물이 아니라, 절망에 빠진 영혼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피난처였습니다.
이 시기에 한국 교회가 경험한 기도의 영성은 독특한 형태를 띠었습니다. 개인의 안녕만을 비는 기도가 아니라, 민족의 구원과 화해, 그리고 이 땅의 회복을 위한 공동체적 기도였습니다. 성도들은 서로를 위해 눈물로 중보했고, 자신들의 삶을 포기하고 남을 돕는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은 전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교회를 유일한 희망으로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전쟁고아를 돌보고, 난민을 수용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빵과 복음을 함께 나누는 교회의 모습은 단순한 종교적 활동을 넘어선, 살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이러한 깊은 영성은 기도원을 중심으로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전국 곳곳에 세워진 기도원은 도시의 소음과 복잡함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과 독대하기를 원하는 성도들의 영적 오아시스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먹고 마시는 것조차 잊은 채 산에 올라가 기도했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소망을 얻었습니다. 기도원에 흐르는 뜨거운 찬양과 기도 소리는 단순한 종교적 열광이 아니라, 절망의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려는 영적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강력한 기도의 영성은 이렇게 고난과 절망의 역사 속에서 더욱 굳건히 뿌리내렸습니다.

3. 산업화와 부흥의 그늘: 영성 유산의 변질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는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전 세계가 놀랄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이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 교회 역시 양적으로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수십만 명의 성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대형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기독교인들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육박했습니다.
그러나 이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는 영성 유산의 변질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고난 속에서 형성된 순수한 믿음과 헌신은 점차 '성공'과 '물질적 축복'을 추구하는 번영 신학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는 '고난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라'는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믿으면 복 받고 성공한다'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결합되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영혼의 구원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성공을 위한 정보와 네트워크를 얻는 장소로 변모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여러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첫째, 교회의 상업화입니다. 대형 교회는 기업과 같은 거대한 조직으로 변했고, 목회자는 전문 경영인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헌금은 교회의 재정적 성공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었고, 성도들의 헌신은 교회의 외형적 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예배는 영적인 감격과 만남의 장이 아니라, 화려한 조명과 음향 시스템이 갖춰진 하나의 쇼처럼 변질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더 이상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제자'가 아니라, 교회가 제공하는 종교적 서비스를 소비하는 '고객'이 되었습니다.
둘째, 신앙과 삶의 분리 현상입니다. 과거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전인적인 신앙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예배당 안에서와 밖에서 동일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의 한국 교회는 삶의 현장을 신앙과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가치관을 심어주었습니다.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거룩하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직업 현장에서의 정직과 윤리,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의 사랑과 섬김은 희미해졌고, 신앙은 오직 교회 안에서만 유효한 '주말 종교'가 되었습니다.

4. 잃어버린 영성을 찾아서: 미래를 위한 제언
오늘날 한국 교회는 외형적인 규모와 달리, 영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과거의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믿음은 사라졌고, 세상은 교회를 조롱하고 냉소합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금 부흥의 원천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과거의 고난 속에서 형성된 영적 유산을 재발견하고 재정의해야 합니다.
첫째, '번영'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합니다.과거 번영 신학이 핍박과 가난을 이겨내기 위한 방편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진정한 번영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진정한 번영은 개인의 부와 성공을 넘어, 사회적 약자를 섬기고 정의를 실현하며 모든 이웃이 함께 풍요를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더 좋은 직장과 더 넓은 집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는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둘째, '기도'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과거의 기도가 절박한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 우리의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영적 투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만을 구하는 기도를 넘어, 이 땅의 불의와 고통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새벽을 깨우는 기도 소리가 개인의 성공을 위한 간구에서 이웃의 회복을 위한 중보로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셋째,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과거 교회는 고난 속에서 서로를 돌보는 진정한 가족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익명의 군중이 모인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다시 초대 교회와 같은 작은 모임을 통해 서로의 삶을 나누고, 진정한 사랑과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개인'이 아니라, 서로의 짐을 나누고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과거 한국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요새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으로부터 숨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입니다. 우리는 직업 현장, 가정, 그리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일터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질문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언어로 소통하며, 교회가 아닌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선교가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영성은 고난과 희생의 역사 속에서 태어난 가장 소중한 유산입니다. 이 유산을 올바르게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우리가 이 영적 유산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겉으로 보이는 성공과 크기를 내려놓고 다시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한국 교회는 분명 새로운 부흥의 원천을 만들고 이 땅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이 바로 그 소망을 향한 첫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개인 영성 회복:
분주한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한국 교회는 한때 개인의 영성을 뜨거운 열정으로 불태우는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기도 소리, 밤샘 철야 예배의 간절함, 성경 필사를 통해 말씀을 삶으로 새기던 헌신은 그 어떤 민족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기독교만의 독특한 영적 자산이었습니다.기도원마다 울려 퍼지던 통성기도와 산에서 내려오지 않던 믿음의 용사들은 한국 교회가 세계적인 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었습니다.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활기 넘치던 영성이 쇠퇴하고 있음을 목도합니다. '분주함'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파도는 우리의 일상과 영혼을 휩쓸어 버렸고, 하나님과 단둘이 마주하는 고요한 시간은 사치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장은 분주한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개인의 영성을 회복하고,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이 있는 제언을 담고 있습니다.

1. 분주함이라는 현대인의 영적질병의 근원과 증상

우리가 마주한 가장 큰 영적 도전은 '분주함'(Busyness)입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요구하며, 우리는 늘 무언가에 쫓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잠기고,켜져 있는 스마트폰의 알림과 끝없는 소셜 미디어 피드는 우리의 주의력을 빼앗습니다. 직장에서는 성과와 경쟁에 시달리고, 가정에서는 돌봄과 관계의 무게를 감당해야 합니다. 이러한일과 사람, 그리고 각종 관계 속에서 우리는 '나'를 잃어버립니다. "바쁘다"는 말은 어느새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훈장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여유를 즐기는 것은 게으름의 상징처럼 비춰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분주함은 우리의 영혼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영성 훈련가들은 분주함을 '영혼의 가장 큰 적'이라고 경고합니다. 바쁜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심지어 시간을 내더라도 그 시간조차 잡념과 걱정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스마트폰의 알림, 쌓여가는 업무, 해결되지 않은 관계 문제 등 세상의 모든 소음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분주함은 단순히 시간 부족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며,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는 복음의 진리를 잊어버립니다."열심히 일해야 성공하고, 성공해야 행복하다"는 세상의 가치관은 교회마저 깊숙이 침투했습니다. 교회는이러한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끊임없는 프로그램과 활동을 제공하며, 성도들은 그 모든 것을 소화하는 데 지쳐갑니다. 그 결과, 신앙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의 목록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영혼의 갈증을 느끼면서도, 그 갈증을 채우는 법을 잊어버린 채 허무함 속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2. 영성 회복의 첫걸음: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모시기

분주함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다시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영성은 특정한 시간에만 발휘되는 초월적인 힘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스며들어 있는 성령의 숨결과 같습니다. 분주한 삶을 멈추고 거창한 영성 훈련을 시작하기 어렵다면, 우리의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영적인 습관을 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첫째, '대화로서의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기도는 단순히 문제 해결을 위한 요청이나 형식적인 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대화입니다. 우리는 식사 전후, 출근길 운전 중, 혹은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에 누워서도 하나님께 말을 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를 잘 시작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은 "주님,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와 같은 짧은 대화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러한 '일상의 대화'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고, 분주함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바울 사도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한 것은 결코 하루 24시간 내내 무릎 꿇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과의 대화로 채우라는 영적인 권면이었습니다.

둘째, '영혼의 호흡'으로서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우리는 말씀을 단순히 '읽어야 할 책'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는 살아 있는 숨과 같습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 성경을 깊이 있게 통독하기 어렵다면, 단 한 구절이라도 좋습니다. 그 한 구절을 조용히 소리 내어 읽고,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며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휴대폰 배경 화면에 넣어두거나, 포스트잇에 적어 책상에 붙여두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짧은 순간이라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때, 우리의 영혼은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깊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영적인 결단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3. 영적 훈련으로서의 침묵과 고독의 재발견

영성 회복의 핵심은 '침묵'과 '고독'입니다. 현대 사회는 침묵을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음악을 듣고, 팟캐스트를 틀며,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가장 조용한 곳에서 들려옵니다. 성경 속에서 엘리야는 거대한 폭풍과 지진, 그리고 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란이 잠잠해진 후, 세미한 소리 속에서 그는 비로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분주한 삶 속에 강제로 임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침묵의 시간을 만들고, 그분께 귀 기울이기를 기다리십니다.

침묵 훈련은 의도적으로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이는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영적인 작업입니다. 하루에 단 5분이라도 좋으니, 조용한 공간에 앉아 눈을 감고 모든 잡념을 비워내야 합니다. 온전히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 노력할 때,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뒤엉킨 우리의 마음이 정리되고, 영혼의 평화를 되찾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침묵은 우리의 마음을 쟁기질하여 말씀의 씨앗이 뿌려질 수 있는 좋은 밭으로 만드는 영적인 농사입니다.
고독 훈련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관계로부터 벗어나 오직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은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고독 훈련은 이러한 의존적인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예를 들어, 한적한 공원을 걷거나 혼자만의 카페에 앉아 잠시 세상과의 연결을 끊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 집중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디지털 시대의 고독은 '디지털 안식일'을 통해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의도적으로 스마트폰과 멀리 떨어져,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4. 사명으로서의 평범한 삶: 전인적 영성의 완성

영성 회복은 결코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성이 회복될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더욱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평범한 삶을 사명으로 여기는 것'이 진정한 영성 회복의 완성입니다. 우리의 일터, 가정, 그리고 모든 관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 사명의 현장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의 정직한 태도, 동료를 향한 진실한 사랑, 가정에서의 겸손한 섬김은 거창한 선교 활동보다 더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거창한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통로가 되게 합니다.직장 내에서 팀원들과 소통할 때, 경쟁의 논리보다 섬김과 배려의 자세를 먼저 생각하는 것,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성이 삶으로 구현되는 모습입니다.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해야 합니다. 설거지를 할 때도, 빨래를 개면서도, 자녀를 돌보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노력할 때,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예배가 될 것입니다.

결국, 개인 영성의 회복은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치 않는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자신만의 영적 훈련법을 발견하고, 분주한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가장 강력한 회복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우리가 영혼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때, 그분은 우리에게 잃어버렸던 생명력과 소망을 다시 부어주실 것입니다.


기도의 재발견:
단순한 간구를 넘어선 깊은 교제

한국 교회는 한때 '기도의 집'이라 불릴 만큼 기도를 영적 삶의 가장 중요한 축으로 삼아왔습니다. 새벽을 깨우고, 밤샘 철야를 마다하지 않으며, 산과 골짜기마다 부르짖던 한국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단순히 개인의 소원을 아뢰는 것을 넘어, 민족의 아픔과 역사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영적 동력이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부흥의 이면에는, 이 땅의 수많은 성도들이 흘린 눈물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과 질병, 전쟁의 상흔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부르짖었고, 그 기도는 응답되어 한국 교회 부흥의 결정적인 불꽃이 되었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성도는 기도 외에 다른 길로 승리할 수 없다"고 선포하며, 기도를 신앙의 생명줄로 여겼습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은 온 교회가 모여 뜨겁게 기도하는 ‘수요기도회’가 되었고, 방학이 되면 학생들은 기도원으로 모여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기도는 한국 교회의 영성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기도가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형식화되거나, 혹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원 성취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양은 여전할지 모르나, 그 깊이와 순수성은 희미해졌습니다. 분주한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도는 하나의 종교적 의무나 ‘할 일’ 목록이 되었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상실한 채 허무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장은 기도가 단순한 '요구'를 넘어서는 '깊은 교제'임을 재발견하고, 분주한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1. 기도의 본질적 왜곡: 간구와 거래의 기도
현대 한국 교회의 기도는 종종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면, 기도는 그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호흡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험 합격, 취업 성공, 사업 번창, 자녀의 건강 등,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삶의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요청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아뢰는 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지만, 이것이 기도의 전부가 되는 순간, 우리의 영적 삶은 심각하게 왜곡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교회를 휩쓸었던 번영 신학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믿으면 복 받는다"는 메시지는 '복'의 개념을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성공으로 한정지었고, 기도는 이 성공을 얻기 위한 일종의 '영적 거래'처럼 인식되었습니다. 우리는 기도 응답의 여부를 눈에 보이는 결과로 판단하게 되었고,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왜곡된 기도는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실망감을 낳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이 '예' 또는 '아니오'라는 이분법적인 결과로만 판단될 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영적 성장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을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판기’처럼 대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왜곡은 결국 신앙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사업이 실패하고, 질병이 낫지 않고,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떨어지면, 우리는 "하나님은 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가?"라고 절규하며 신앙을 떠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조건적인 ‘거래 관계’에 기반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의 본질을 발견한 욥이나,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으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응답을 받은 사도 바울의 삶은, 기도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건히 하는 영적 투쟁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깊게 하고, 고난 속에서 그분의 선하심과 지혜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2. 기도의 재발견: 단순한 간구를 넘어선 깊은 교제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요청이 응답받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행위 자체'에 담겨 있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추구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분의 마음을 알아가는 사랑의 대화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깊이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기도의 형태를 삶 속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가. 경배와 찬양의 기도: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시선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기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우리의 필요를 아뢰기 전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 그리고 우리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경배와 찬양의 기도는 우리의 시선을 문제와 필요에서 하나님께로 옮겨놓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때, 우리의 문제는 더 이상 거대한 장벽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로 바뀌게 됩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게 합니다. 마치 거대한 산 앞에서 우리의 고민이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는 것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분께 온전히 의지하게 됩니다.

나. 회개와 성찰의 기도: 영혼의 정화와 재정렬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회개와 성찰의 기도가 필수적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지은 죄와 허물을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과 마음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부분이 없는지 스스로를 성찰하는 영적 훈련입니다. 마치 더러워진 옷을 빨래하는 것처럼, 이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던 영적인 장벽이 무너지며, 우리의 영혼은 자유함과 평화를 얻게 됩니다. 회개 없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로 나아갈 수 없는 형식적인 의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할 때, 우리는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더욱 깊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 경청과 침묵의 기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말을 쏟아내느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는 법을 잊었습니다. 경청과 침묵의 기도는 모든 소리를 멈추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침묵은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정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길러줍니다. 성경 속에서 엘리야는 거대한 폭풍과 지진, 그리고 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란이 잠잠해진 후, 세미한 소리 속에서 그는 비로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분주한 삶 속에 강제로 임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침묵의 시간을 만들고, 그분께 귀 기울이기를 기다리십니다. 이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대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기다리는 겸손의 훈련입니다.

라. 중보의 기도: 이웃과 세계를 향한 그리스도의 마음

기도는 결코 나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중보의 기도는 다른 사람, 공동체, 사회, 그리고 세계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중보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나 자신에게서 이웃으로, 그리고 세계로 확장시킵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중보 기도는 영적 전투의 최전선입니다. 우리가 개인의 안녕을 넘어, 어두움의 권세 아래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중보 기도는 이기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가장 강력한 영적 도구입니다.

3. 일상 속에서 기도의 삶을 훈련하기: 삶의 예배화

기도를 다시금 우리의 삶의 중심에 두기 위해서는 거창한 특별 기도회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기도를 습관화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권면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참된 의미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가. '기도 일기'와 '기도 노트' 활용하기

기도는 기억에만 의존하기보다 기록으로 남겨둘 때 더 깊어집니다. 기도 일기를 쓰며 하나님과의 대화를 기록하거나, 기도 노트를 만들어 기도 제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기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기도 노트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돌아볼 수 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생생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 일기는 우리의 영적 성장을 되돌아보는 거울이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셨다는 생생한 증거가 됩니다.

나. 산책 기도와 단상 기도 실천하기

기도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걸으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한적한 공원을 산책하거나, 출퇴근길에 걷는 동안 하나님께 말을 걸어보세요. 또한, '단상 기도'는 일상 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을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하나님,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동료를 보며 "주님, 저 친구를 도와주세요."라고 짧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순간의 기도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하는 거룩한 통로가 됩니다.

다. 디지털 안식일과 영적 리듬 찾기

분주한 삶의 근원인 디지털 기기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디지털 안식일'을 실천하는 것도 강력한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때, 우리는 영혼의 진정한 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정하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 등, 삶 속에 일정한 영적 리듬을 만들어야 합니다.

결국, 기도의 재발견은 기도의 목적을 '무엇을 얻는 것'에서 '누구를 만나는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소망하며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거룩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영성을 회복하는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며, 무너진 믿음을 다시 세우는 강력한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때, 그분은 우리에게 잃어버렸던 생명력과 소망을 다시 부어주실 것입니다.


예배의 새로운 형태:
전통과 혁신이 만나는 자리

한국 교회는 그 성장 과정에서 예배를 신앙 생활의 가장 중요한 중심으로 여겨왔습니다. 주일 아침이면 온 가족이 정성껏 차려입고 예배당으로 향했고, 그 예배는 성도들에게 한 주간의 삶을 살아갈 영적 힘을 공급하는 원천이었습니다. 성경 봉독, 목회자의 설교, 그리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부르는 찬송가는 고난의 시대를 지나온 한국인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었고, 예배당은 삶의 고단함 속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거룩한 안식처였습니다. 이처럼 전통적인 예배는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예배 순서 하나하나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신앙의 지혜와 고백이 담겨 있었고, 이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견고한 믿음의 유산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예배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는 시대의 변화를 외면한 채 낡은 형식만을 고집하며 다음 세대와 멀어지고 있고, 반대로 일부 교회는 본질을 잃은 채 유행을 쫓는 데 급급하여 깊은 영성을 놓치고 있습니다. 예배가 더 이상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의 장이 되지 못하고, 관습적인 의식이나 단순한 행사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 장은 예배의 본질은 지키되, 시대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그 형태를 혁신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제안합니다. 전통이 쌓아 올린 견고함과 혁신이 가져올 새로운 활력이 만날 때, 예배는 비로소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1. 전통 예배의 축적된 가치와 그 한계에 대한 성찰
전통적인 예배는 한국 교회의 가장 소중한 영적 자산입니다. 매주 반복되는 정형화된 순서는 성도들에게 안정감과 일체감을 주었고, 복음의 진리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주기도문, 사도신경, 교독문 등 정해진 순서는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뼈대가 되어주었고, 예배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마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찬송가는 그 자체로 깊은 신학적 고백을 담고 있는 훌륭한 신앙의 유산입니다. 낭독되는 성경 말씀과 강단에서 선포되는 권위 있는 설교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나침반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삶으로 지켜온 거룩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가치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통 자체가 아니라, 그 전통이 '본질'을 잃었을 때 발생합니다. 예배의 형식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예배는 박제된 의식으로 전락합니다. 다음 세대는 왜 이 예배를 드리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 형식을 보며 예배에 대한 흥미와 의미를 잃어갑니다. 다음 세대는 논리적인 설교뿐만 아니라 '진정성 있는 소통'을 원합니다. 또한, 예배가 특정 세대와 문화에만 익숙한 방식으로 진행될 때, 다른 세대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은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일부 전통 예배는 지나치게 목회자 중심적이고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에 치우쳐 있어 성도들이 예배의 주체로서 참여할 기회를 상실하게 합니다. 전통이 담고 있는 가치는 존중하되, 그 틀에 갇혀 예배의 생동감을 잃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2. 예배 혁신이 요구되는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
우리가 예배의 새로운 형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유행을 쫓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를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환경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첫째, 디지털 혁명입니다.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의 삶을 개인화하고, 모든 것을 '온디맨드'(On-Demand) 방식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예배를 '경험'하기를 원하며,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요소에 더욱 민감해졌습니다. 단순한 강연 형식의 설교는 더 이상 효과적인 소통의 방식이 되기 어렵습니다. COVID-19 팬데믹은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했습니다. 교회들은 온라인 예배라는 새로운 형태를 강제로 경험하게 되었고, 예배의 공간적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예배는 교회 건물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온라인을 통해 더 넓은 공동체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되었습니다.
둘째, 세대 간의 소통 부재입니다.기성세대와 다음 세대는 예배에 대한 기대와 경험이 현저하게 다릅니다. 기성세대가 질서와 권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면, 다음 세대는 관계와 진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들은 예배가 자신들의 삶과 무관한 것처럼 느껴질 때 예배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다음 세대는 예배에서 단순한 '참석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설교를 듣는 것을 넘어,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실천하고, 사회적 불의에 맞서 행동하는 신앙을 예배 속에서 발견하고자 합니다.
셋째, 다양한 영적 필요의 증가입니다.현대 사회는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그들이 원하는 영성은 과거와 다릅니다. 이들은 거대한 군중 속에서의 뜨거운 예배뿐만 아니라, 고요하고 사색적인 예배를 통해 내면의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기존의 획일적인 예배 형태는 이러한 다양한 영적 필요를 모두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모든 성도에게 영적으로 회복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찬양과 율동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만, 어떤 이들은 침묵과 고요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교회는 이 다양한 영적 갈망에 응답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3. 전통과 혁신이 만나는 지점: 본질을 담는 새로운 그릇
예배의 새로운 형태는 결코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 담고 있는 본질을 이 시대의 언어와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목표를 위해 우리는 전통이 가진 가치를 계승하면서도, 아래와 같은 혁신적인 시도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 기술을 활용한 예배의 확장:
온라인 예배는 더 이상 팬데믹 시대의 임시방편이 아닙니다. 이제 교회는 온오프라인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예배 모델을 통해 공간적 제약을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모든 순서를 시각화하여 메시지의 이해도를 높이거나, SNS를 통해 예배 중 실시간으로 기도 제목을 나누는 등, 기술을 예배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도구로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또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여 지난 설교와 찬양을 언제든 다시 듣고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성도들의 신앙 훈련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나. 창의적이고 감각적인 예배:
예배는 오감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총체적인 행위입니다. 설교와 찬양뿐만 아니라, 시각 예술, 영상, 퍼포먼스, 시와 낭독 등 다양한 예술적 요소를 예배에 통합하여 복음의 메시지를 더욱 풍성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의 고통을 담은 짧은 영상 클립을 통해 회개의 기도로 나아가거나, 아름다운 시와 이미지를 활용한 묵상 순서를 통해 깊은 내면의 성찰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이는 특히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을 더 창의적이고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다. 참여와 교제를 강화하는 예배:
예배는 단순히 목회자가 주도하는 일방적인 순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순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배 중 성도들의 간증을 나누거나, 서로를 축복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거나, 예배 후에도 교제를 이어갈 수 있는 소그룹 모임을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함께 드리는' 거룩한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또한 지역 사회와 연결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의 한 순서로 지역 사회의 필요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거나, 봉사활동을 예배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것은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중요한 방식이 될 것입니다.
라. 다양한 형태의 예배 공간:
모든 예배가 대형 본당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소규모의 공간에서 진행되는 가정 예배나, 조용히 묵상하는 '묵상 예배', 혹은 산이나 들에서 드리는 '자연 예배'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예배를 통해 성도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획일적인 공간을 넘어, 삶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게 할 것입니다.
예배의 새로운 형태는 단순히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통이 담고 있는 '영원한 진리'를 이 시대의 언어와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라는 본질을 회복하는 영적 투쟁입니다.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기에, 우리는 이 만남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이 만남을 풍성하게 하는 모든 시도들을 기꺼이 포용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 도전 속에서 전통과 혁신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예배를 만들어갈 때, 예배는 다시금 메마른 영혼들을 치유하고, 다음 세대를 일으키며,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위한 강력한 원천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다양한 제언들이 바로 그 소중한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도 개인의 삶 속에서 말씀 실천하기: '일터 선교사'로서의 삶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신성(神聖)'과 '속성(俗性)'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공간인 교회는 거룩하고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고, 나머지 엿새의 삶을 살아가는 일터와 가정, 학교는 세속적이고 속된 공간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단순히 신학적인 오류를 넘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분열시키고 교회의 영적 무력함을 초래하는 위험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주일에는 ‘성도’로 살아가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이중적인 삶이 만연했고, 이는 결국 한국 교회의 공적인 신뢰 상실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세상은 교회의 ‘말’이 아닌 성도들의 ‘삶’을 통해 복음의 진정성을 판단하기 시작했고, 삶이 없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장은 이러한 위험한 유산을 극복하고,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터 선교사’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해야 함을 제안합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우리의 존재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터는 더 이상 생계를 위한 수단이나 단순한 직업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가장 중요한 선교의 현장입니다. 우리의 직업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거룩한 소명(Calling)이며, 일터는 그 소명을 실천하는 예배의 장소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삶의 영역이 곧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아래 있음을 선포하며, 삶을 통해 살아있는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1. 신성(神聖)과 속성(俗性)의 이분법, 그 위험한 유산의 깊은 뿌리
신성한 영역과 속된 영역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한국 교회가 겪었던 독특한 역사적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고난 속에서 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관을 넘어, 생명을 지키고 민족의 영혼을 보듬는 유일한 피난처이자 영적 요새였습니다. 밖의 세상은 억압과 고난, 불의가 난무하는 곳이었고, 교회 공동체만이 유일하게 거룩하고 안전한 공간으로 여겨지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외부 세계는 단절의 대상이었고, 신앙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성경적 진리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창세기 1장), 그분의 통치가 세상의 모든 영역에 미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분 안에서 하나이며, 삶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고 선포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행위, 즉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직장에서 일하고, 가정을 돌보는 모든 순간이 영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경작하고 지키는'(창세기 2:15) 거룩한 창조 사명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이러한 복음의 총체적 진리를 잊게 만들었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분법적 신앙이 낳은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위선입니다. 주일에는 이웃 사랑을 외치고 기도하던 성도가 월요일 아침 직장에서는 비윤리적인 경쟁에 몰두하거나, 동료에게 무관심한 모습을 보입니다. 거짓말과 불의를 서슴지 않으면서도, 주일 헌금을 빠뜨리지 않고 봉사 활동에 참여하면 스스로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러한 위선적인 삶은 교회를 향한 세상의 조롱과 불신을 증폭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 복음을 판단합니다. 말과 삶이 분리된 신앙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허무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교회의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을 보며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 ‘일터 선교사’로서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과 실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한국 교회가 다시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면, 모든 성도가 ‘일터 선교사’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직장에서 전도 활동을 하라는 것을 넘어, 우리의 직업과 삶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믿는 자가 제사장이라고 선포합니다(베드로전서 2:9). 이는 목회자에게만 거룩한 사명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제사장적 사명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일터 선교사’는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지로 인식하는 사람입니다.우리의 일터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가장 중요한 선교의 현장입니다. 가정은 복음을 실천하는 가장 작은 교회이며, 학교와 지역 사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할 선교지입니다. 세상은 이제 더 이상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와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나아간 성도들의 삶을 통해 복음의 향기를 맡으려 합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일터 선교사’로서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단순히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을 넘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영역에서 탁월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가. 정직과 탁월함으로 일하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노동

직장에서의 정직과 성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증거입니다. 거짓말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며,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행위입니다. 이는 단순히 윤리적인 행동을 넘어, 세상이 감지하지 못하는 영적인 힘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일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최고 수준의 품질과 전문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대충 만든 작품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에 탁월함을 추구할 때, 그것은 곧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됩니다. 한 명의 그리스도인 엔지니어가 만든 안전한 시스템, 한 명의 그리스도인 교사가 쓴 정직한 평가서, 한 명의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만든 윤리적인 기업 문화는 그 자체로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강력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나. 사랑과 섬김으로 관계를 맺는 그리스도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삶

우리는 우리의 일터에서 동료, 상사, 고객, 그리고 경쟁자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친절한 말 한마디를 넘어, 그들의 아픔에 진정으로 공감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조건 없이 섬기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사랑은 비윤리적인 경쟁과 이기적인 이익 추구로 점철된 세상의 논리를 거스르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일터 선교사’는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음의 메시지를 가장 강력하게 전달할 것입니다.

다. 창의성과 혁신으로 세상을 섬기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창조 사명에 동참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의 형상을 닮은 우리 또한 창조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업적 기술과 재능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한 명의 그리스도인 기술자가 만든 환경을 보호하는 기술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한 명의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만든 작품이 사람들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복음의 원리를 바탕으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혁신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직업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창조적 통로입니다.

3. 말씀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훈련과 공동체의 역할

‘일터 선교사’로서의 삶은 막연한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구체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훈련은 개인적인 노력을 넘어, 교회 공동체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더욱 강력하게 실현될 수 있습니다.
가. 매일의 삶을 예배로 연결하기: 삶의 모든 순간을 예배의 제단으로

주일 예배가 끝났다고 신앙 생활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삶을 주일 예배의 연장선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의 계획을 하나님께 아뢰고, 출근길에 동료와 상사를 위해 기도하며, 점심시간에 말씀을 묵상하는 작은 습관들이 우리의 영혼을 깨웁니다. ‘단상 기도’(pop-up prayer)를 통해 일상 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감사와 간구를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하는 거룩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나. 일터와 관련된 성경적 가치관 정립하기: 소명으로서의 직업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직업 생활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성경은 노동이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창세기 2장)임을 가르칩니다. 또한, 정직한 상거래, 공정한 임금, 약자를 배려하는 태도 등 직업 윤리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교회는 강단에서 이러한 ‘일터 신학’을 적극적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소명으로 인식하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다. 공동체적 지원 시스템 구축: 교회가 일터 선교사들의 베이스캠프가 될 때

성도 개인의 힘만으로는 이러한 삶을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일터 선교사’들을 훈련하고 지원하는 공동체적 지원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소그룹 모임을 통해 각자의 일터에서 겪는 어려움과 승리를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같은 직업군에 속한 성도들이 모여 성경적 직업 윤리를 토론하고,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함께 찾는 모임을 활성화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강단에서 ‘일터 신학’을 선포하고,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구체적인 비전과 훈련을 제공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파송하는 ‘선교 본부’이자, 지쳐 돌아온 그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베이스캠프’가 되어야 합니다.

라. 관계 중심의 전도: 삶이 복음이 되는 증인들의 공동체

‘일터 선교사’는 결코 억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 자체가 복음이 됩니다. 정직하고, 사랑이 넘치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복음은 가장 강력하게 증거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고, 그 삶에 호기심을 갖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는 거대한 예배당이나 수많은 프로그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도 개인의 삶이 복음이 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잃어버렸던 ‘일터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말씀에 순종할 때, 교회는 다시 한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직업, 가정, 그리고 모든 관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제단이 될 때, 교회는 물리적인 건물을 넘어 이 땅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제언들은 바로 그 소중한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성도가 세상의 한복판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어,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진정한 부흥을 이끌어내기를 기대합니다.


영적 리더십의 재정의:
섬김과 사랑으로 이끄는 목회

한국 교회의 놀라운 부흥 이면에는 강력한 영적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위기 속에서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이끌며, 복음의 지경을 넓혔던 수많은 목회자들의 헌신과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은 한국 교회의 중요한 자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는 선장처럼, 때로는 강력한 권위로, 때로는 열정적인 카리스마로 성도들을 이끌며 오늘날의 거대한 교회를 일구어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었던 '권위 중심의 리더십'은 이제 교회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리더십의 권위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보다 한 개인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교회의 공적 신뢰는 무너졌으며, 성도들은 영적인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장은 한국 교회의 미래가 건물의 크기나 프로그램의 수에 있지 않고, 바로 '영적 리더십의 재정의'에 달려 있음을 역설합니다. 우리는 이제 힘과 권위의 자리가 아니라, 섬김과 사랑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새로운 리더십의 패러다임을 확립해야 합니다. 이 글은 전통적인 리더십의 한계를 성찰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진정한 영적 리더십의 본질을 재발견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위한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권위의 리더십, 그 빛과 그림자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리더십은 '목회자 중심의 권위적 리더십'이라는 특징을 가졌습니다. 이는 빠르게 교회를 세우고 확장해야 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습니다. 한 명의 강력한 리더가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성도들이 그 리더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때, 교회는 눈에 띄는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리더십은 분명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강력한 추진력은 교회 건축과 선교 사역을 가능하게 했고, 교회의 정체성을 굳건하게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수많은 평신도들은 영적 지도자의 카리스마에 감화되어 헌신했고, 이는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권위 중심의 리더십은 그 그림자 또한 짙게 드리웠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의 출현입니다. 리더십에 대한 건강한 존경은 점차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권위주의로 변질되었습니다. 목회자의 결정은 곧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졌고,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은 불순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러한 수직적 구조는 성도들의 자유로운 영적 성장을 가로막았고, 교회 내에서 건강한 소통과 토론이 실종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리더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구조 속에서 성도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리더의 지시에 따르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더 나아가, 권위주의는 개인 숭배(cult of personality)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목회자의 인격과 능력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성도들의 시선은 하나님이 아닌 한 개인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종교 지도자가 우상이 된 것처럼, 목회자의 말 한마디가 곧 교회의 법이 되었고, 이는 결국 목회 세습, 재정적 불투명성, 그리고 윤리적 타락이라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졌습니다. 리더가 도덕적으로 무너졌을 때, 그 리더를 따르던 수많은 성도들의 믿음은 한순간에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복음의 순수성은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2. 섬김의 리더십으로의 전환
한국 교회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금 세상의 신뢰를 얻으려면, 리더십에 대한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섬김의 리더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10:45).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겨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섬김이 곧 가장 높은 권위임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에게 리더십은 '위에 군림하는' 힘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섬김의 리더십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원칙을 포함합니다.
가. 낮아짐과 겸손의 리더십: 섬김을 받는 이들을 향한 시선

섬김의 리더십은 리더가 자신의 위치와 권위를 내려놓을 때 시작됩니다. 이는 리더가 겸손한 자세로 성도들의 필요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을 의미합니다. 리더는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목자가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양 무리 속에서 걷는 동반자여야 합니다. 이러한 리더십은 성도들에게 안정감과 신뢰를 주며, 교회를 더욱 따뜻하고 친밀한 공동체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나. 돌봄과 공감의 리더십: 영적 성장을 위한 목회

섬김의 리더십은 교회의 외형적인 성과(교인 수, 헌금액 등)에 집착하는 대신, 성도 개개인의 영적 성장과 전인적인 치유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는 목회가 거대한 양 떼를 관리하는 경영이 아니라, 한 영혼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고 돌보는 영적 목양임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리더는 성도들의 영적 갈망을 살피고,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돌봄과 공감의 리더십은 교회를 거대한 조직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나누고 아픔을 치유하는 진정한 공동체로 세울 것입니다.

다. 위임과 동역의 리더십: 모든 성도를 선교사로 세우기

섬김의 리더십은 리더가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세우는 '위임과 동역'을 추구합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에게 다양한 은사가 주어졌다고 말씀합니다(고린도전서 12장). 영적 리더는 성도들이 가진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성도들을 단순히 '도와주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교회를 세워가는 '동역자'로 존중하고 신뢰할 때, 교회는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일터가 될 것입니다.

3. 사랑으로 이끄는 목회: 관계적 리더십으로의 전환

섬김의 리더십은 결국 사랑이라는 궁극적인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단순히 낮아짐의 행위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깊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는 이 사랑을 회복하고, 리더와 성도 간의 진정한 관계를 바탕으로 목회를 재건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가. 소통과 투명성: 신뢰를 쌓는 관계의 기초

사랑의 리더십은 소통과 투명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리더는 교회의 중요한 결정과 재정 상황을 성도들과 투명하게 공유함으로써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리더가 성도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질문에 진정성 있게 답할 때, 교회는 일방적인 지시가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투명성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을 향한 존중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나. 영적 자녀 양육: 목회는 곧 제자 훈련

리더십은 더 이상 '교회를 성장시키는' 경영 기술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양육하는 영적 양육입니다. 리더는 성도들의 삶에 깊이 들어가 그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 멘토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삶으로 모범을 보이며 함께 기도하고, 때로는 아파하며,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돕는 관계 중심의 사역입니다.

다. 함께 걷는 순례자: 리더십의 본질적 겸손

진정한 영적 리더는 자신을 '완성된 신앙인'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걷는 연약한 한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그들의 고백과 삶 속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구하는 겸손함이 묻어나야 합니다. 리더가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모습을 보일 때, 성도들은 리더를 존경하는 것을 넘어 함께 영적 성장의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는 새로운 건물을 짓거나 더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영적 리더십을 회복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힘과 권위의 유혹을 내려놓고, 섬김과 사랑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화와 소망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제언들은 바로 그러한 영적 리더십의 재정의를 향한 소중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이 길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살아있는 교회 공동체를 다시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소그룹 사역의 부흥:
진정한 공동체를 향한 길

한국 교회는 지난 세기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소그룹'사역을 중요한 축으로 삼아왔습니다. 구역 모임, 셀 모임, 목장 모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이 소그룹들은 대형 교회의 익명성을 보완하고, 성도들이 서로의 삶을 나누며 깊이 교제하는 장이 되어주었습니다. 소그룹을 통해 신앙의 동반자를 만났고, 함께 기도하며 영적으로 성장했으며, 어려움이 닥쳤을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가족을 경험했습니다. 한때 소그룹은 한국 교회의 영적 부흥을 이끌었던 강력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마치 큰 강물이 수많은 작은 시냇물이 모여 이루어지듯, 한국 교회의 부흥은 이처럼 작은 단위의 공동체들이 영적으로 살아 움직였기에 가능했습니다. 소그룹은 단순히 교회의 행정적 조직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이 복음과 만나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생명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의 소그룹들은 그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깊은 삶의 나눔과 진정한 '코이노니아'(Koinonia)가 사라진 소그룹은 성도들에게 또 하나의 의무적인 모임이 되었고, 영적 갈증을 채워주기보다 오히려 무력감과 피로감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 장은 한국 교회의 소그룹 사역이 직면한 위기를 진단하고,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돌아가 진정한 공동체를 향한 길을 다시금 모색하고자 합니다. 소그룹이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회' 그 자체가 될 때, 한국 교회의 미래는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 소그룹 사역의 위기: 형식적 공동체의 그림자
한국 교회 소그룹 사역의 위기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단순히 참여율이 저조한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본질이 훼손된 더 깊은 영적 문제입니다.
첫째, 형식적인 만남이 만연합니다. 소그룹 모임은 종종 한 주간의 안부를 묻고, 간단한 식사나 다과를 나눈 뒤 미리 정해진 성경 공부 교재나 주일 설교 복습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모임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고민이나 내면의 고통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는 '가면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죄의 문제를 나누기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신앙 생활의 성공만을 보여주려 합니다. "이번 주에는 이렇게 은혜를 받았습니다"라는 피상적인 나눔은 영혼의 진정한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고, 오히려 소외감과 고립감을 심화시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함께 모여 있지만, 실제로는 지독한 영적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형식주의는 성도들에게 소그룹이 더 이상 영혼의 안식처가 아니라,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의무나 사회적 관계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심어줍니다.
둘째, 리더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존재합니다. 많은 경우 소그룹 리더는 마치 '미니 목회자'처럼 모든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영웅이자, 모든 질문에 답을 주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됩니다. 이로 인해 리더는 성도 개개인의 모든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과도한 부담감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영적 소진(burnout)을 경험하기 쉽습니다. 반면, 소그룹 구성원들은 스스로의 삶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려는 주체적인 노력을 게을리하게 됩니다. 그들은 영적 성장을 위해 리더에게 의존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리더에게만 의지하려 합니다. 이러한 수직적 구조는 소그룹 공동체 전체의 역동성과 성장을 가로막고, 공동체의 힘을 한 사람의 카리스마와 역량에만 의존하게 만듭니다. 이는 리더십이 무너졌을 때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처하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셋째, 사역의 본질이 '수단화'되었습니다. 일부 교회에서 소그룹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유기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교인 수 관리나 재정 모금, 봉사 인력 충원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소그룹 모임의 목표가 성도 개개인의 신앙 여정이 아니라 교회의 외적 성과를 달성하는 것이 되면서, 소그룹의 본질적인 목적은 상실되고 공동체의 순수성은 훼손되었습니다. "이번 달에 우리 소그룹에 새신자를 몇 명 초대했는가?"라는 질문이나 "이번 행사에는 우리 소그룹에서 몇 명이 봉사하는가?"라는 압박은 소그룹을 '숫자'와 '실적'의 게임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수단화는 성도들에게 소그룹 참여가 의무이자 짐으로 인식되게 만들었고, 결국 소그룹 사역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진정한 관계와 사랑은 싹트기 어렵습니다.

2. 초대 교회 공동체: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재발견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소그룹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초대 교회의 공동체적 삶을 기록한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다시금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사도행전 2:42). 이 말씀에는 진정한 소그룹 공동체를 이루는 네 가지 핵심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코이노니아'의 청사진입니다.
가. 사도의 가르침:
이는 단순히 성경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삶에 적용하려는 열망을 의미합니다. 소그룹 모임은 성경 강의 시간이 아닙니다. 함께 말씀을 읽고, 각자의 삶 속에서 깨달은 바를 나누며,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가?'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나눔을 통해 성도들은 말씀이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능력이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 서로 교제(코이노니아): ‘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교제'를 넘어, 삶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깊은 나눔'을 의미합니다. 이는 물질과 재물을 서로 나누고(사도행전 2:44),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고, 기쁨을 같이하는 총체적인 삶의 공유를 포함합니다. 현대 사회의 소그룹에서 코이노니아는 자신의 시간과 재능, 감정적인 지지까지도 기꺼이 서로에게 내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이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함께 밤새 기도해 주고, 자녀의 문제로 고민할 때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관계, 이것이 바로 코이노니아가 가진 힘입니다. 이러한 깊은 관계 속에서 성도들은 비로소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며,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몸'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 떡을 떼는 것:
이는 성찬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며, 한 몸 된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이는 또한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식탁 교제는 관계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고 음식을 나누었듯이, 오늘날 소그룹 또한 식탁을 중심으로 더 친밀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라. 기도:
함께 부르짖는 기도는 공동체의 영적 호흡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고, 그 결과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소그룹 기도 모임은 개인의 필요를 위한 기도를 넘어, 공동체의 비전과 사명을 위해, 그리고 지역 사회와 세상의 회복을 위해 함께 부르짖는 자리여야 합니다. 이러한 연합된 기도는 소그룹을 영적으로 살아 숨 쉬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도구로 세울 것입니다.

3. 소그룹 부흥을 위한 실천적 제언
잃어버린 '코이노니아'를 회복하고 소그룹 사역을 부흥시키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소그룹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들입니다.
가. 리더를 '목양자'가 아닌 '촉진자'(Facilitator)로 훈련하라:
소그룹 리더는 모든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영웅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임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모든 구성원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나눌 수 있도록 돕는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리더에게 '가르치는 기술'이 아닌 '듣는 기술'과 '공감하는 기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개개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질문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 멘토링 기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를 통해 소그룹 구성원들은 리더에게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주체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나. 삶을 나누는 유기적인 모임을 지향하라:
소그룹 모임은 정해진 교재를 진도 나가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삶을 나누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 설교 말씀이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나누고, 기도 제목을 솔직하게 공유하며,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경험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과 분리된 지식 전달은 영혼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모임의 형식은 다양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함께 음식을 만들고 나누거나, 근처 공원을 함께 산책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영화를 보고 그 속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토론하는 등,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교제를 풍성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 투명성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상호 돌봄'을 실천하라:
소그룹은 서로를 향해 영적인 책임을 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죄를 지었을 때 감추지 않고 서로에게 고백하며, 영적으로 방황할 때 서로를 권면하고 기도해주는 상호 돌봄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번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꾸준한 만남과 신뢰를 통해 서서히 쌓아가야 합니다. 상호 돌봄의 실천은 소그룹 모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픈 지체를 위해 병원을 함께 방문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위로가 필요한 이웃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보내는 등, 일상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집니다.
라. 선교적 소그룹으로 확장하라:
소그룹은 단순히 자신들만의 영적 만족을 추구하는 폐쇄적인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지역 사회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함께 봉사하며, 복음을 모르는 이웃들을 초대하는 '선교적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소그룹이 함께 모여 지역의 결손 가정을 돕거나, 복지 시설을 방문하는 등 구체적인 섬김을 실천할 때, 그들의 공동체는 더욱 강력해지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소그룹이 '안전지대'를 넘어 '선교지'로 인식될 때 가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인 일터, 학교, 가정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하며, 소그룹은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영적 훈련장이자 지원 센터가 되어야 합니다.
소그룹은 교회의 심장이다
소그룹은 대형 교회의 외곽 조직이 아니라, 교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명력을 만들어내는 심장과 같습니다. 소그룹이 살아있을 때 교회는 건강하며, 소그룹이 병들면 교회 전체가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는 거대한 예배당을 채우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이 서로의 삶을 나누고, 함께 울고 웃으며, 말씀 안에서 성장하는 소그룹 공동체가 회복될 때, 우리는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형식의 도입을 넘어, 교회의 본질인 '코이노니아'를 회복하는 영적 투쟁입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제언들이 소그룹 사역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한국 교회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로 거듭나는 데 기여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 내 갈등과 치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 만들기

교회는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로서 사랑과 연합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은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이자 사명입니다.이는 단순히 감정적인 호의를 넘어, 우리의 모든 삶과 관계를 엮어내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교회는 내부 갈등과 분열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예배당의 크기나 교인 수와 상관없이, 수많은 교회가 리더십 간의 불화, 성도들 간의 반목, 재정 문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이는 교회의 복음적 증거 능력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되기는커녕,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 또 다른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가 오히려 가장 첨예한 갈등의 현장이 되고 있는 이 역설적인 상황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영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장은 교회 내 갈등을 더 이상 외면하거나 덮어두는 대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를 직면하고 사랑과 용서로 극복해야 할 영적 과제임을 강조합니다. 갈등은 건강한 방식으로 다루어질 때 오히려 공동체를 더 성숙하게 하고, 진정한 연합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갈등의 근원을 깊이 성찰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치유의 리더십을 따라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재건해야 합니다.
1. 갈등의 원인과 그 파괴적영향에 대한 심층적 분석

교회 내 갈등은 단순히 의견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에는 더 깊은 영적이고 인격적인 문제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갈등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면 먼저 그 근본적인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합니다.
첫째,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된 '영적 교만'입니다.

많은 갈등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확신에서 시작됩니다.이 확신은 종종 개인의 신학적 해석이나 경험, 심지어는 고집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룩한 명분으로 둔갑하는 과정에서 생겨납니다.자신의 의견을 객관적인 진리로 둔갑시키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믿음이 부족하거나 영적으로 미성숙한 존재로 쉽게 판단합니다. 이러한 영적 교만은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정당화하며, 상대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독을 뿜어냅니다. 이는교회 건축 방향, 예배 형식, 재정 운영 등 사소한 문제부터 교단의 정체성 같은 거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갈등의 불씨가 됩니다.예수님께서 가장 경계하셨던 바리새인의 위선과 다르지 않습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립보서 2:3)는 말씀은 모든 공동체 갈등의 해결책이 결국 '겸손'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나 또한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한 태도를 가질 때, 비로소 대화의 문은 열리고 치유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둘째, '거룩한 가면' 뒤에 숨겨진 상처와 욕망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상처 입고 연약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교회 안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고 '좋은 신앙인'의 가면을 쓰려고 합니다.이 가면은 영적 과시와 도덕적 우월감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이기도 합니다.이렇게 숨겨진 상처와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사소한 의견 충돌이나 오해 속에서 폭발적으로 표출됩니다. 목회자가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성도들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성도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하는 모습은 모두 갈등의 씨앗이 됩니다.예를 들어, 어릴 적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상처를 가진 성도가 교회에서 리더의 자리에서 인정받고 싶어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과거에 받은 영적 상처로 인해 모든 목회자를 불신하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여기에 속합니다.갈등의 치유는 먼저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의 상처와 연약함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셋째, 권위와 권력의 오용입니다.

전통적인 한국 교회의 수직적 리더십 구조는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목회자가 교회의 모든 결정권을 독점하고, 평신도의 의견을 무시할 때 성도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불만을 품게 됩니다.이러한 구조는 '목회자 왕국'이라는 비판을 낳았고, 성도들을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시켰습니다.또한, 교회 내에서 물질적,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이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때 갈등은 더욱 복잡해집니다.이들은 헌금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혹은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이유로 교회의 중요한 결정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합니다.권력의 오용은 교회의 민주적인 절차와 투명성을 훼손하고, 결국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인간의 왕국'으로 변질시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곳이며, 모든 리더십은 오직 섬김과 사랑을 위해 존재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갈등은 교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영적인 활력을 잃게 만들고, 성도들을 지치게 하며, 세상에 대한 복음의 증거 능력을 상실하게 합니다.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기보다 서로를 비난하는 데 에너지를 소모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특히 다음 세대들은 이러한 교회의 민낯을 보며 신앙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기독교 자체를 위선적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교회는 그 존재 의미를 잃고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2. 사랑으로 하나 되는 치유의 공동체를 향하여

교회 내 갈등의 진정한 치유는 단순히 표면적인 화해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에 기반한 근본적인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고통스러운 치유의 과정을 함께 걸어갈 때 가능합니다.
가. '용서'를 넘어선 '치유'를 지향하라:

용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단이지만, 진정한 치유는 공동체적 과정입니다. 상처 입은 이들의 아픔을 듣고 공감하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회복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교회는 용서의 메시지만을 외치는 것을 넘어,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는 안전한 장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예를 들어, 전문 상담사를 초빙하여 교회 공동체 내의 갈등을 중재하거나, 소그룹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솔직한 나눔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치유의 과정은 쉽지 않지만, 이 과정을 통해 공동체는 더욱 깊은 연합과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 경청과 공감의 훈련을 실천하라:

갈등의 해결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고,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상처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네가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네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공감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소그룹 모임이나 상담 프로그램을 활성화해야 합니다. 경청은 단순히 귀를 여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열어 상대방을 존중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이는 또한 "네가 진정으로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나는 네 눈을 통해 보고 있다"고 말하는 영적인 행위입니다. 경청과 공감은 관계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싹트게 합니다.

다. 투명성과 공정성의 시스템을 구축하라:

건강한 공동체는 명확한 규칙과 공정한 절차를 통해 신뢰를 쌓아갑니다. 교회는 재정 운영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을 성도들에게 공유해야 합니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는 공정한 중재 위원회를 구성하거나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등, 투명하고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스템적 개선은 갈등의 소지를 사전에 차단하고,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데 필수적입니다.또한, 리더십 승계 과정이나 교회의 중요한 정책 결정에 있어 성도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함께 고민하는 민주적인 절차를 마련해야 합니다.

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유일한 지표로 삼으라:

모든 갈등 해결의 궁극적인 원리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사랑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먼저 물어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4-7)는 말씀은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이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힘임을 가르쳐줍니다. 사랑은 때로 우리의 주장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양보하는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희생적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복음입니다.이는 '복수'나 '응징'이 아닌 '용서'와 '화해'를 택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갈등을 넘어, 치유와 화해의 공동체로

교회 내의 갈등은 단순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듭나기 위한 영적 성장통입니다. 우리는 갈등을 회피하거나 덮어두는 대신, 겸손과 사랑으로 직면하고 치유의 과정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상처 입은 죄인들이 모여 서로를 용서하고 치유하는 영적인 병원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치유의 과정을 통해 교회는 더욱 성숙해지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사랑과 연합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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