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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중직 목회 시대적 요청인가?
요즘 목회의 본직과 더불어 다른 일을 하는 목회자들이 너무도 많다.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이중직 목회, 또는 이중직 목회자라고 부른다.

9. 이중직 목회 시대적 요청인가?
요즘 목회의 본직과 더불어 다른 일을 하는 목회자들이 너무도 많다.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이중직 목회, 또는 이중직 목회자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탈도 많고, 말도 많다. 각 교단에 따라 허락해야 한다, 안 된다고 두 분류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신학자들과 일부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바울도 텐트를 만들면서 사역했는데 시대적 요구에 따라 겸해도 된다는 교단도 있다. 나는 목회자 이중직 또는 이중직이라는 용어를 앞으로는 이중직 목회라고 사용하기로 한다. 이유는 바울이 천막을 만들면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을 21세기 용어로 각색하면 이중직 목회라고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이다.
성경에서는 이중직 목회를 어떻게 말하는지 찾아보자. 사실 성경 어디에도 이중직 목회에 대하여 말하는 데가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의 천막 만드는 일 외에는 마땅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신학자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먼저 루터의 경우를 보자. 루터. “종교 개혁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지만, '이중직 목회자' 또한 루터를 설명하는 단어 중 하나다. 김승호 교수(영남신학대학교)는 목회 윤리 연구소가 개최한 포럼에서 루터를 자비량 목회의 전형으로 언급한 부펠(Olehile Buffel)의 말을 인용, “다양한 일들로 생계를 위한 재정 수입을 얻었다.” 면서 루터 역시 이중직 목회자였고, 이중직 목회는 이제 미래 목회의 한 유형이라고 규정했다.
이중직 목회의 대표적인 사람인 도르(Dorr)는 바울을 “이중직 목회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세상일에서 얻는 수입과 청중들이 제공하는 재정 후원, 그리고 때때로 교회나 부유한 후원자가 보내 준 사랑의 선물 등을 모두 경험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라면서, 바울은 자신과 전임 사역자들의 생계와 관련하여 어느 한 가지 방법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방법을 극단적으로 배척한 것이 아니라, 여건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채택하는 유연성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목회자가 목회 활동과 경제활동을 겸하는 전통은 사도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초대교회 당시 바울은 선교 여정 가운데서 경제적 자립을 위해 천막 만드는 일을 지속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물론 당시의 특수한 상황 에 있든 바울의 사역을 오늘날 목회자의 사역과 같이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김승호 교수(영남신학대학교)는 목회 윤리 연구소가 개최한 포럼 참고)
목회자가 목회 사역과 다른 세속적인 일을 동시에 감당하는 모습도 목회자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사역 유형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미자립 교회의 수는 지속해서 늘어났다. 이것은 곧 많은 수의 목회자들이 생활비를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목회 활동에 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해야 할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목회자는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까?
교회 성장 시대에는 미자립 교회라 하더라도 짧은 기간 내에 자립 교회로 전환되어 경제적 어려움의 상태를 단기간에 전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성도 수가 정체하고 감소하는 시대에는 미자립 교회가 자립 교회로 전환하는 비율이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 내에는 목회자가 목회 활동 이외의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목사는 목회로 부름을 받았지, 돈벌이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만성적인 경제적 미자립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후원 교회로 부터의 재정 지원은 받을지언정 목회자가 경제활동에 종사하면 안 되는 것일까? 여기에 오늘날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의 딜레마가 있다. 특히 이러한 목회자의 “경제활동 불가론”은 목회자가 목회에 전념하면 목회자의 생활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과도 연결되어 있다. 일리 있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교회 성장 시대를 거쳐 온 한국 교회 목회자들 대부분은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한 바 있다. 그들은 옆이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목회에만 전념함으로 맨손으로 기적을 일군 한국 교회 성장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사고 속에는 더더욱 목회자는 목회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만성적인 미자립 상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가족의 경제적 부양의 책임을 지속해서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목회자는 다른 교회나 기관으로부터의 경제적 후원만을 바라는 일 이외에는 다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 과연 목회자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자존감과 긍지를 지켜 줄 수 있는가? 단언컨대 목회자는 목회 활동에 전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목회 활동”이라는 것이 단지 교회 안의 성도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영적 활동이라는 전통적 의미에서 목회 개념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목회자의 경제적 자립이라는 목적 이외에도, 목회자 이중직 목회 금지만을 고수하면서 경제 활동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가오는 사역의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것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날이 갈수록 전도가 힘들어 지는 현실 가운데서 경제활동은 전도의 접촉점 마련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미자립 교회 목회자 중에는 동시에 목회 활동과 경제활동에 종사하면서 사역의 비전을 구체화시켜 나가고 있다. 상황과 여건은 고려하지 않고, 단지 목회자가 경제활동에 종사한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탐닉하는 목회자'라는 낙인을 찍어 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이 시대 바리새인의 모습이 아닐까? 특별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는 목회자에게 경제적 자립의 의지를 높여 주고, 경제활동을 통해 새로운 사역의 비전과 소명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해도, “목회자 이중직 목회 불가론” 을 불변의 진리인 양 고수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목회자 이중직 목회 불가론만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이중직을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지원방법 그리고 하려고 준비하는 사람에 대한 지원(교육)이 필요하다. 이중직이 필요하다 불필요하다 신학적 논쟁은 필요 없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병원에 왔는데 의사가 두고 보자, 검토해 보자는 의사는 세상에 없다.
사랑을 베푸는 것 목회자는 사랑의 마음을 기본으로 갖고 있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목회자의 근본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목회를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성도들의 영혼을 책임지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오랫동안 목회의 경륜을 통해 말해 주듯이 다양한 지식을 소유하여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 까지 사랑하고 섬기면서 가르치는 은사와 더불어 대중성의 가치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열정적으로 자신의 혼을 바쳐서 목회하는 등 다양한 장점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세상에 대하여 단절되었거나, 교회 즉 우물 안에 같은 개구리처럼 종교적인 네트워크는 강할지 몰라도 세상의 모든 것 과는 단절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목사의 이중직이 장밋빛? 인가는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목사의 이중직 목회에 대하여 모두가 긍정적이지 않고 즉 같은 동료, 아내, 성도, 교단, 노회 반신반의와 불신 세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염려, 세속화에 대한 염려 그리고 물질 만능 주의 타협에서 견뎌 낼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중직 목회는 행복한 여건을 만들 수 있고, 이중직 목회는 선교이며, 이중직 목회는 모든 교회를 건강하게 할 수 있고, 이중직 목회는 사회를 건강하게 하며, 이중직 목회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영토 확장을 위해 봉사와 섬김의 역할을 통해 정적이며 동적인 목회를 할 수 있다.